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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환장 통수 선협전-449화 (449/4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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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호문살에 어른거리는 애달픈 그림자 >

연꽃 문양이 아름답게 새겨져 있는 현판에 적혀 있는, ‘사랑을 기다린다’는 말이 어쩌면 이리도 애간장을 끊어지게 하는지. 건우는 그 글귀에서 유정정을 느꼈다.

그것은 현판에 맺혀 있는 정화 법칙의 기운이 아니어도 상관없는 것이었다.

그저 현판 글씨에 드러나는 유정정의 서체만으로도 충분했다.

“정정, 그대가……"

건우는 홀린 듯이 걸음을 옮겨 대문의 대들보를 쓰다듬었다.

이곳은 연화궁에서도 심처, 유정정이 머물던 거처였을 것이다.

이곳에서 그녀는 건우의 소식이 들려오기를 얼마나 오래도록 기다렸던 것일까.

건우는 연화궁이 번창했다는 십만 년의 시간을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유희 선인을 보았다.

“선인."

“무엇이냐?"

건우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유희는 건우의 부름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등선자가 보통 얼마나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습니까."

“응?"

“등선 후에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지 못하는 선인들이 많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십만 년의 시간을 온전히 버텨내는 선인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건우는 유정정이 겪었을 십만 년의 기다림을 감히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일반적인 등선자들의 사례를 들어 유정정이 십만 년의 기다림에 지쳤을 가능성을 알아보고자 했다.

“뭐라 답을 하기가 어렵구나. 나를 보자면 이미 세월이란 것이 의미가 없을 정도지만 어떤 등선자들은 고작 몇만 년에 정신이 허물어지기도 하지."

“어찌 그렇습니까. 따져 보자면 역천의 길에 들어선 이후로 수사 하나가 등선자가 되기까지 수십만 년의 시일이 걸리는 경우도 허다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고작 몇만 년에 정신이 허물어져?

그건 참으로 이상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너도 등선자가 되었으니 알게 아니……. 아니구나. 너는 아직 모르겠구나."

“네? 그, 무슨 말씀이신지?"

“등선자는 오랜 세월 절치부심하며 원했던 꿈을 결국 이루어낸 이들이다. 영생불사 말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럼 그들에게 무엇이 더 남겠느냐?"

“네?"

“미련하게 굴 것이냐? 간단한 이치가 아니냐. 금선, 옥선, 대라선, 그것을 넘어 도조까지. 진선의 앞에는 그런 길이 놓여있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다더냐. 너에게 묻자, 너는 그 길을 갈 생각이 있느냐?"

“으음."

유희의 물음에 건우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몇 번을 생각해 본 일이지만 건우는 진선 이상의 지위를 가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사실 금선이니 옥선이니 하는 지위는, 따져보자면 천지 법칙의 순조로운 흐름을 위해서 ‘일’을 하는 자리가 아닌가.

그리고 그런 일 처리를 위해서 될 수 있으면 개인적인 사감은 배제하고 객관적인, 어찌 보면 기계적인 대응이 요구되는 자리다.

그래서 큰 깨달음으로 아(我)를 버리고 법(法)을 따르는 존재가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하지 않았던가.

건우는 그런 것을 원하지 않았다.

“보아라. 너와 같은 생각을 하는 이들이 어디 한둘이겠냐. 하지만 그런 선택을 하는 순간 너는 삶의 목표가 사라진 것이나 다름이 없다. 지금은 네 반려를 찾기 위해서 동동거리고 있다만 그 역시 어느 때고 끝이 날 터."

“그렇습니다."

“하지만 네 짝을 찾거나 혹은 찾을 가능성이 아주 없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는 어떨 것 같으냐? 짝을 찾아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고 해도 결국은 한계에 이르고 말 것이니라. 사랑과 행복도 마냥 새롭고 신선 한 것은 아니지. 게다가 짝을 완전히 잃게 되면 또 어떠할까? 스스로 삶을 놓지 않겠느냐?"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결국 어느 것이든 목표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군요. 삶을 지탱해 줄.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이 무의미해질 것이란 말씀이지요?"

“그래, 그런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 등선자들이 무너지는 전형적인 모습이니라."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등선자가 되기 전까지는 목표가 확실하여 수십만 년의 시간도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목표가 없는 삶이라면 고작 십만 년의 시간도 버티기 어려울 수가 있다는 말씀이군요."

“그러하다."

“그럼 정정 역시 그러했겠습니다. 기다림이란 것은 유독 사람을 지치게 하는 것이기도 하니, 십만 년 연화궁의 멸문이 외부의 탓이 아니라 자멸일 수도……

건우는 그렇게 말을 하며 다시 한 번 [등대애정(等待愛情)] 현판을 떠받치는 기둥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정정의 사무치는 그리움이 전해지는 듯 하여 가슴이 아려왔다.

“이만하고 들어가 보자꾸나."

유희가 그런 건우에게 안으로 들 것을 재촉했다.

건우는 고개를 들어 대문 안쪽을 바라보았다.

두 개의 기둥 너머는 흐릿한 안개에 가려서 보이는 것이 없었다.

그것은 두 번째 결계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건우에게 두 번째 결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우웅 우우웅 우우웅!

의념공간에서 영찬황후선보가 강렬한 울림과 함께 빛을 뿌렸다.

건우가 끌어내는 법칙의 힘을 보조하기 위해서였다.

쩌저저정!

단 한 수에 두 번째 결계에 깃들어 있던 법칙의 힘이 박살 났다.

이번 결계엔 단절 법칙의 힘이 섞여 있었지만 건우가 뿌린 공간 법칙의 힘을 감당하지 못했던 것이다.

호로로로로로롱!

결계가 깨어지자 기둥 너머로 잘 정돈된 정원의 모습이 드러났다.

크기가 다른 판석을 이리저리 맞춰서 길을 내었는데 그 길이 정원을 가로질러 반대편의 전각으로 뻗어 있었다.

그 판석으로 된 길 양쪽으로는 온갗 꽃과 나무, 바위 따위가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었다.

“기이한 일이다. 결계 안에서 어찌 저것들이 저리 멀쩡할 수가 있었을꼬? 마치 누가 계속해서 관리를 하고 있었던 것처럼?"

그 모습에 유희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다는 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건우는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중요한 것은 정원에 깃든 기풍이 유정정의 것이란 사실 뿐이었다.

"흐으음."

걸음을 옮겨 정원 안으로 들어온 건우는 마치 유정정이 곁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 정원은 유정정이 이전에 가꾸었던 정원과 무척 닮아 있었다.

건우와 유정정은 그 정원에서 얼마나 많은 사랑을 속삭였던가.

수많은 아름다운 순간들이 건우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정원에서 느끼는 행복감은 그리 길지 않았다.

얼마쯤 포도(鋪道)를 걷다 보니 새로운 결계가 앞을 막아선 것이다.

이번에 나타난 결계는 전각으로 오르는 계단에 걸려 있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전각의 모습은 여전히 흐릿하여 알아볼 수 없는 상태였다.

“고만고만한 결계를 잘도 늘어놓았구나. 어쩌겠느냐? 도와주랴?"

뒤따라오던 유희가 건우에게 물었다.

하지 만 건우는 고개를 저었다.

이곳이 유정정의 거처라면 다른 사람의 손을 타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다시 세 번째 결계를 향해 조심스럽게 법칙의 힘을 쓰기 시작했다.

“으음. 결계에 담긴 법칙의 힘이 이전보다 강한듯 보입니다."

하지만 결계가 이전과 달랐다.

아마도 유희도 그것을 알아차리고 도와주겠다고 했던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유희에게 도움을 받을 생각은 없었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의념공간에서 영찬황후선보가 요란하게 울어 댔다.

그리고 강렬한 빛을 뿜으며 건우의 공간 법칙을 보조하기 시작했다.

영찬황후선보의 힘은 법칙의 힘을 사용할 때 필요한 의념을 강화시켜 주는 것이다.

지금 영찬황후선보는 의념 공간에서 낼 수 있는 최대의 힘으로 건우를 보조하기 시작했다.

그것만으로 능히 평범한 금선 정도는 가볍게 눌러버릴 수 있으리라.

콰지지지직! 콰지지지직! 부우욱 부우욱!

하지만 일은 뜻대로만 흘러가는 것은 아니었다.

“오호라. 복원의 힘이 깃들어 있구나. 호호호. 결계에 복원 법칙을 심어서 부서지는 것을 막다니, 재미있는 수작이다."

유희가 뭔가를 알아보고 짤랑거리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면서 건우를 바라보는 눈빛이 언제든 청하기만 하면 도와주겠다는 뜻이 가득했다.

그 또한 흥미로울 것이라 여기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건우는 홀로 해결하겠다는 고집을 버리지 않았다.

푸화화화확!

그리고 그 뜻을 읽었는지 의념 공간 어느 곳에서 놀고 있던 소망이가 입에서 불을 뿜으며 영찬황후선보의 공간에 나타나 적색의 영찬후에 깃들었다.

웅웅웅웅! 웅웅웅웅!

쩌저저저저저저저적!

그러자 이번에는 결계에 깃들어 있던 복원의 힘이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공간 법칙의 파괴가 결계를 뒤흔들었다.

건우가 공간 법칙을 이전보다 훨씬 강력하게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자 이내 복원 법칙의 힘을 지닌 결계가 박살이 나고 말았다.

“아니 어찌 된 것이냐? 어떻게 갑자기 그리 강력한 법칙의 힘을 썼어?"

그 모습에 유희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하지만 건우는 영찬황후선보까지는 몰라도 거기에 깃들어 있는 영물들까지 하나하나 고해바칠 생각이 없어 입을 꾹 닫았다.

“아하, 오호라. 그런 것이구나? 이전에 내가 네 본명법보를 보면서 생각했던 가능성을 진짜로 실현시킨 것이렷다? 그렇지?"

그런 건우의 반응에 유희는 제 홀로 뭔가를 짐작했다는 듯이 그렇게 떠들었다.

“무슨 말씀입니까? 가능성이라니요?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지 명확히 해 주셔야지요. 그리 두루뭉술하시면……"

“헹! 되었다. 그게 뭐 그리 대단한 비밀이라고. 분명 영찬황의 자리에 어떤 것을 더했겠지. 그럴 것 같았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지."

건우가 슬쩍 발‘챔을 하며 되묻자 유희가 토라진 듯이 고개를 돌렸다.

건우는 잠시 그런 유희의 모습이 걱정되기는 했지만 지금은 그녀의 기분을 맞춰 주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새로운 결계가 풀리며 그 안에 있던 전각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건우는 전각의 현판을 찾았으나 이번에는 아무런 것도 붙어 있지 않았다.

그저 단아한 기풍의 일 층짜리 전각이 모습을 드러냈을 뿐이다.

정원에서 다섯 개의 계단을 올라가면 그 전각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었다.

그 문은 아름다운 문살에 창호지가 더해진 것이었는데, 건우의 시선은 그 문살창호에 아른거리는 그림자에 꽂혀 있었다.

창호문살에 전각 안에 있는 여인의 그림자가 아른아른 비치고 있는 것이다.

“정정?"

건우가 그림자를 향해 그렇게 불렀다.

그는 당장이라도 문을 열고 달려들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충동을 억누르며 전각의 지붕을 쳐다보았다.

거기에 전각 전체를 감싸고 있는 또 다른 결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외로 건우는 이번 결계에 깃들어 있는 법칙을 알아보지 못했다.

“유희 선인께서는 저기에 서려 있는 법칙의 힘을 알아보시겠습니까?"

건우가 어쩔 수 없이 유희를 돌아보며 물었다.

“아아?! 그래. 뭔지 알겠다. 그래서 이곳 정원의 모습이 이랬던 것이지. 저 법칙의 힘이 결계 전체에 두루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

유희는 제 홀로 떠들었다.

“네?"

“결계가 깨어질 때마다 물러나긴 했지만 저 지붕 결계에 깃든 법칙의 힘은 첫 결계부터 모든 곳에 포함되어 있었단 말이다."

“아니 도대체 무슨 법칙이기에 그러시는 것입니까?’

“흥, 시간 법칙이다."

“네? 시간 법칙이요?"

“그리 고명한 수준은 아니지만 분명히 시간 법칙의 힘이 이곳 결계 전체에 펴져 있었다. 시간을 멈추어 두는 힘이었던 것이지. 그래서 그 오랜 세월 동안 이곳 정원의 모습이 전혀 변하지 않고 있었던 게야."

그렇게 설명하는 유희의 눈빛은 건우가 지금껏 보았던 중에서 가장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만큼 시간 법칙이란 것이 보기 드문 법칙으로 유희의 호기심을 건드린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건우는 유희로부터 그것이 시간 법칙임을 듣고도 그 법칙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인지하지 못하는 것은 상대하지도 못한다.’

건우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그 자리에 그대로 가부좌를 하고 앉았다.

아무래도 지붕 결계를 깨는 것이 쉽지는 않을 듯 했다.

건우의 눈에는 자꾸만 창호문살의 여인네 그림자가 밟히어 마음을 성급히 재촉했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함을 잘 알고 있는 건우였다.

‘조금만 기다리시오. 내 금방 당신에게 닿으리다.’

건우가 입술을 깨물며 전각 지붕의 결계를 천착(穿鑿 : 깊이 연구함)하기 시작했다.

< 창호문살에 어른거리는 애달픈 그림자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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