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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정정의 이야기를 듣다 >
"이리 치하해 주시니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이제는 저에 대해 아는 이들이 드물다 하셨습니까?"
"어쩌겠습니까? 그것이 세월을 힘인 것을요."
"그렇지요. 안타까운 일이나 강건우 선인에 대한 이야기는 전설이 되었다가 서서히 잊혀서 등선자들이나 알 일이 되긴 했습니다. 그래서 저 구이형 선인도 알지 못한 것이지요."
포반자가 구이형을 눈짓하며 말했다.
그러자 구이형이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건우를 보았다.
"사실 저는 이곳 수미 태생이 아닙니다. 이리저리 선계를 떠돌다가 태령기 초기에 수미에 오게 되었고, 천운이 닿아서 등선을 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그 과정에서 강 선인에 대한 이야기는듣지 못했습니다."
"그렇군요."
건우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말입니다. 선인께서 스스로 그 강 모라 하시는데, 그것이 사실임은 어찌 증명하시겠습니까?"
그런데 그 순간 구이형이 건우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보며 물었다.
이에 조오망과 포반자가 조금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건우와 구이형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제가 그 강 모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실상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 당시에 저를 알던 수사들 중에 등선에 성공한 이들이 몇은 있지 않겠습니까? 그들을 만나는 것만으로 진위가 가려질 일인데 제 가 그런 얄팍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저 역시 강 선인이 그런 거짓말을 했을 거라곤 생각지 않습니다."
"나도 조오망 선인과 마찬가지입니다. 실상 무슨 이유로 그런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얻는 것은 약간의 호의 정도일 뿐이지만, 거짓이 탄로 났을 때에 받을 응징은 감당키 어려울 정도일 텐데요."
조오망과 포반자는 건우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며 구이형을 설득했다.
실제로 건우가 과거의 그 인물이라고 한들, 조오망과 포반자가 크게 이익을 양보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저 앞서 했던 감사와 고마움의 표현 정도와 호의가 건우에게 줄 수 있는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끄응, 생각해보니 그도 그렇습니다. 강 선인이 과거 수미를 구했다 하더라도 조 노파나 포 선인이 손해를 감수할 일은 없겠군요."
"끄응, 구 선인이 그리 말을 하시니 조금 민망스럽습니다."
"호호, 마치 우리가 은혜도 저버리는 몰염치한 사람이 되는 것 같지 않습니까?"
"딱히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 다만."
구이형의 말에 조오망과 포반자가 살짝 기분이 상한 모습을 보였고, 구이형은 이에 대해 곧바로 사과를 했다.
건우는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며 수미에서의 자신의 처지를 가늠하고 있었다.
구이형이 수미에서 태령기를 거쳐 등선자가 될 정도로 시간을 보냈는데도 자신에 대해서 모른다는 것은 그만큼 수미에서 자신의 이름이 지워졌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물론 그것이 순리라 생각하니 그리 섭섭할 일도 아니다 싶긴 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불안한 마음이 있었는데, 자신이 익혔다면 정정 수사에 대한 이야기도 아는 이가 없을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자취가 얼마나 남았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유정정에 대한 일을 아는 것이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혹여 저와 연이 있었던 유정정 수사에 대해서 아시는 바가 있습니까?"
그래서 건우는 더는 망설이지 않고 조오망과 포반자를 번갈아 쳐다보며 그 일에 대해서 물었다.
"유정정 수사라면 강 선인과 쌍수의 인연을 맺었던 이가 아닙니까?"
"제가 조금 아는 것이 있습니다."
건우의 물음에 포반자와 조오망이 다행이 유정정에 대해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건우가 눈빛으로 그들에게 이야기를 재촉했다.
"과거 수미가 선계에 속하게 된 이후로 유정정 수사가 등선에 성공하여 진선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조 노파의 말이 맞습니다. 그렇게 진선이 된 이후로도 수미산 남쪽에 터를 잡고 연화궁(蓮花宮)을 세워 한동안 크게 번성을 했다지요."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연화궁이 일순간에 몰락하고 유정정 선인 역시 종적을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맞습니다. 저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정정이 사라졌다고요? 종적을 알 수 없단 말입니까?"
두 선인의 말을 듣던 건우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함치듯 물었다.
그러자 조오망과 포반자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유정정 선인이 사라진 이후로 어떤 소식도 전해진 바가 없습니다. 그것이 벌써 십만 년도 더 된 오래전의 일이지요."
"수미가 선계에 속하게 된 것이 대략 이십만 년이 되지 않았으니 연화궁의 번성이 고작 몇 만 년에 그쳤다는 말입니까?"
건우는 유정정이 세웠다는 연화궁이 고작 몇 만 년 만에 무너졌다는 사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쨌거나 유정정이 진선이 되었다는데, 진선이 궁주로 있는 수도 문파가 어찌 멸망을 한단 말인가.
게다가 멸망의 과정이나 이유조차 알려지지 않았다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후로 연화궁의 멸궁에 대해서 여러 추측이 나왔지만 어느 것도 확실한 것은 없었습니다."
"강 선인께서 예까지 찾아오신 것이 그 유 선인을 찾기 위해서라면 앞으로 일이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포반자와 조오망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건우를 보았다.
건우는 잠시 눈을 감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런데 그런 건우를 향해 구이형이 문득 떠올랐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강 선인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지만 연화궁의 유정정 선인에 대해서는 기억나는 것이 있습니다."
번쩍!
구이형의 말에 건우가 섬광 같은 눈빛을 터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연화궁이 멸궁하고 유정정 선인이 사라진 직후에, 연화주(蓮花珠)라는 기물에 대한 소문이 있었습니다."
"연화주라면 연꽃 구슬이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강 선인. 그것이 어찌 만들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강력한 정화 법칙을 품고 있어서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마음을 진정시키는 효능이 있다고 했지요."
"마음을 진정시킨다 했습니까?"
"그게 얼마나 큰 보물인지는 강 선인도 잘 아시겠지요? 영생불사의 등선자들이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선보인 것입니다."
"그것이 연화궁의 멸궁과 무슨 연관이 있다는 것입니까?"
건우가 어느 정도 상황을 짐작하면서도 확인을 하겠다는 듯이 구이형을 보며 물었다.
"연화궁 멸궁 이후, 유정정 선인이 실종되었는데, 마침 그 시기에 연화주라는 보물이 수미에서 등장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겠습니까?"
"으으음."
건우는 구이형의 말에 짧은 신음을 내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서 과거 자신이 유정정을 만났을 때의 상황을 떠올렸다.
그 때에도 유정정은 스스로 연꽃 안에 자신을 봉인하여 천겁을 피하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을 생각하면 진선이 되었던 유정정이 어떤 계기로 스스로를 봉인하여 연화주를 만들었을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물론 그 계기란 것이 스스로 원한 것인지 외부의 억압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실마리가 아주 없는 것보다는 좋은 상황이지 않나? 왜 그리 암담한 표정이지?"
그 때, 유희가 힘내라는 듯이 웃는 표정으로 건우를 보며 말했다.
건우가 그런 그녀를 바라보자.
"네가 수미를 떠나고 대략 십여 만 년이 지난 후의 일인 듯한데, 그나마 연화주라는 실마리라도 있는 것이 어디냐? 안 그러냐?"
"하아, 그것도 그렇긴 합니다만, 저는 수미에 도착하면 그녀를 곧바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적잖게 낙담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 원하는 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서 실망스럽긴 하겠지. 하지만 여기서 멈출 것도 아니지 않느냐. 그러니 힘을 내거라."
유희는 나름 건우의 기운을 북돋워 주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그리 실망만 할 것은 아닙니다. 사실 제가 그 연화주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이후에 그것을 얻을 방법이 없을까 백방으로 알아본 바가 있습니다."
그 때, 구이형이 건우의 귀를 솔깃하게 만드는 말을 했다.
당연히 건우의 고개가 빠르게 그를 향해 돌아갔다.
"그래서요? 뭔가 알아낸 것이 있습니까?"
건우가 물었다.
"없다면 말을 꺼내지도 않았겠지요. 하지만 어렵게 알아낸 것을 공으로 강 선인에게 내어줄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구이형은 뭔가 알고 있지만 쉽게 그것을 알려줄 수 없다는 듯이 뜸을 들였다.
그에 건우는 마음이 조급해지는 것을 느꼈지만 구이형을 설득하는 것이 우선임을 알았기에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가진 것을 드러내고 조건을 말해 보십시오. 약간의 손해를 보더라도 거래에 응할 생각이 있습니다."
건우는 적당히 양보할 뜻이 있음을 밝히며 구이형의 마음을 사려 애썼다.
"음, 사실 제가 아는 것은 과거 연화궁이 멸망한 터에 은밀하게 감춰져 있는 유적에 대한 것입니다."
이에 구이형은 잠시 망설이는 듯 하다가 결국 선심을 쓴다는 듯이 털어놓았다.
"유적이 있단 말입니까? 내가 알기로는 무너진 돌무더기가 전부였는데요?"
"그런 것을 숨기고 계셨단 말입니까? 그런데 지금 그런 이야기를 풀어 놓는 것도 다 뜻이 있어서겠지요?"
그 때, 조오망과 포반자가 구이형을 보고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차피 때가 되면 이야기를 하려 했습니다. 다만 지금껏 감추고 있었던 것은 우리들 셋으로는 그 유적을 취하기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유적을 감추고 있는 결계의 힘이 강력하지요."
"구이형 선인의 부패 법칙으로도 감당이 되지 않았다는 말입니까?"
구이형의 말에 포반자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결계에 담긴 법칙의 힘이 강력한데, 하필이면 그것이 정화의 법칙인 것도 문제지요. 내가 익힌 부패의 법칙과는 상극이랄 수 있으니까요."
"일이 그렇게 된 것이로군요?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겠지요? 그 정도라면 나와 포반자 선인이 더해지면 뚫지 못할 것은 아니니 말입니다."
이번에는 조오망이 구이형에게 감추고 있는 것을 더 드러내라는 듯이 그렇게 물었다.
"당연하지요. 정화 법칙 때문에 제가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곳은 결계의 초입일 뿐입니다. 그 이후로 더욱 강력한 결계들이 겹겹으로 쌓여 있지요."
"그렇다면 나와유희 선인까지 여기 다섯이 함께 가서 유적을 취하자는 뜻입니까?"
듣고 있던 건우가 구이형의 의도를 짐작하고 그렇게 물었다.
"사실 여기서 강 선인이나 유희 선인에게 뭔가 대가를 요구하려 했지만, 유적의 존재를 알리는 것만으로 뭔가 거창한 것을 요구하기 보다는, 그냥 함께 유적의 결계를 뚫고 이득을 취해 보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을 한 것입니다."
"좋습니다. 나는 구이형 선인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유희 선인께선……"
"나는 당연히 너를 따라 갈 것이다. 그러니 거론할 필요가 없다."
"알겠습니다. 유희 선인."
건우가 그렇게 말하며 유희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전할 때, 조오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훌훌, 망설일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저 역시 참가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포반자도 탁자에 기대 놓았던 대나무 지팡이를 들어 바닥을 찍으며 일어섰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출발을 하지요. 예서 머뭇거릴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는 당장이라도 은류도를 다시 펼칠 듯이 서두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 때, 건우가 손을 들어 그를 말리며 말했다.
"마음이 급하기는 나보다 더한 분이 여기 누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일은 서두르다 보면 탈이 나기 쉽습니다. 그러니 날짜를 정해서 수미산 남쪽의 연화궁 옛 터에서 만나기로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말하자면 포반자를 어찌 믿고 다시 은류도에 오르겠느냔 뜻이다.
이야기가 이리 진행되기는 했지만 아직 포반자 일행인 세 선인을 믿을 정도는 아니니 약속 장소와 시간을 정해 따로 움직이자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뜻을 세 선인들도 알아차렸는지 살짝 표정이 안 좋아졌지만 이내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확실히 그런 면이 있지요. 인정합니다."
"아직 의혹이 풀린 것이 아니니 강 선인의 말씀이 일리가 있습니다."
"그럼 강 선인의 뜻대로 합시다. 다만 기한을 너무 넉넉하게 줄 수는 없습니다. 약속을 어기고 강 선인과 유희 선인이 앞서서 유적을 도모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포반자와 조오망은 건우의 뜻에 따르기로 했고, 구이형도 동의했지만 대신 약속을 촉박하게 잡자는 제안을 했다.
이는 건우에게도 나쁘지 않은 이야기라 건우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야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일입니다. 그러니 뜻대로 하십시오. 그럼 어느 정도의 여유를 가지면 되겠습니까?"
"이곳 지축해에서 수미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리니 한 달 후에 만나기로 하면 어떻겠습니까?"
건우의 말에 구이형이 그렇게 제안을 했고, 모두가 동의하여 약속 날짜가 정해졌다.
그 뒤, 세 선인은 건우와 유희에게 선계에 대한 이야기를 사흘에 걸쳐 듣고는 연화궁 폐허의 만남을 기약하며 떠나갔다.
< 유정정의 이야기를 듣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