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1)
< 의념 공간의 영물들이 선보에 깃들다 >
'왜 저 녀석들이?'
건우는 영찬황후선보가 있는 곳에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세 영물의 모습에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곧이어 더 믿기 어려운 일이 일어났다.
영물들이 영찬황후선보의 영찬들을 향해 달려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서로 몸싸움을 벌이듯이 밀고 당기기를 하더니 어느 순간 영찬후 하나씩을 차지하고 스며들었다.
불꽃을 머금은 소망이는 적색의 영찬후를 차지했고, 흡기토성유근(吸氣土性留根)의 구근은 황색 영찬후로 들어갔다. 그리고 살짝 뒤처졌던 백양오죽, 백죽은 금빛의 영찬후를 택했다.
아니 왜 쟤들이 여길 들어가요?
그 모습에 몽이가 화들짝 놀라 영찬황후선보의 주변을 맴돌며 부산을 떨었다.
"어? 선보의 위력이 한층 강해졌다."
다음 순간 건우는 선보에서 일어난 엄청난 변화를 체감할 수 있었다. 영찬황후선보로부터 전해지던 의식의 힘이 몇 배나 더 강해지며 법칙 사용의 부담이 확 줄어든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아이들이 영찬후에 들어가서 건우 님께 의식의 힘을 보태주고 있는 거예요?
몽이도 상황을 알아차린 듯이 눈을 커다랗게 뜨며 놀란 모습을 보였다.
우우우우웅! 우우우웅!
그런데 영찬황후선보를 둘러싼 이변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영찬황후선보가 있는 의념 공간에 강렬한 파동이 일어나며 녹색의 영과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전 장우가 분혼에게 건넨 이후로 분혼의 영혼과 하나가 되어 의념 공간에 녹아들었던 영과가 제멋대로 의념 공간에 현현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모습을 드러낸 녹색 영과는 곧바로 영찬황후선보의 중심에 있는 영찬황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파지지직! 푸화화확! 화르르르!
하지만 백죽과 구근, 소망이 들어 있던 영찬후에서 세 영물의 기운이 일제히 일어나며 녹색 영과가 영찬황에 깃드는 것을 막아섰다.
이에 녹색 영과도 기운을 크게 일으키며 세 영물의 기운에 맞섰다.
'내가 못 가지는 건 너에게도 못 준다는 거냐? 근데, 이것들이 지금 어디서 싸움질을?!'
그 모습에 건우가 발끈하며 의념의 날카롭게 벼렸다.
쿠우우우우웅!
의념 공간의 주인인 건우가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내자 세 영물과 녹색 영과의 태도가 급변했다.
곧바로 세 영물이 자신들의 기운을 영찬후 안으로 갈무리했고, 이어서 녹색 영과도 이리저리 영찬황후선보를 맴돌며 눈치를 보더니 슬그머니 영찬황을 향해 다가갔다.
그래도 영찬황의 자리를 포기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당연히 소망이 등이 들어간 영찬후에서 불만스러운 기운이 꿈틀거렸지만 건우의 화가 무서운 듯이 밖으로 뻗어 나오진 못했다.
그렇게 녹색 영과가 영찬황을 차지하는가 싶었다.
쩌저저저적! 꽈르르르릉!
하지만 그런 녹색 영과의 시도는 또다시 새로운 존재가 나타나면서 막혀 버렸다.
'뭐야? 이것들이 왜 여기서 나와?'
이번에 새로 나타난 것은 건우도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음양통천수의 알이었다.
건우가 과거에 이런저런 수작으로 다섯 쌍의 알을 얻어 의념 공간에 넣어두었었다.
언젠가 영물들에게 흡수시킬 것이라 했던 것인데 그 동안 기회를 얻지 못해서 미뤄 뒀던 음양통천수의 알들이 뜻밖에도 영찬황후선보를 노리고 나타난 것이다.
샤르르르르르! 샤르륵!
"어엇?"
게다가 그 다섯 쌍의 음양통천수의 알이 영찬황후선보 위에 나타나더니 곧바로 저들끼리 뭉치기 시작했다.
음양의 기운을 지닌 알들이 같은 기운을 가진 것들끼리 모여서 하나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 어? 건우님. 저거 막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에 몽이가 깜짝 놀라 건우를 향해 물었지만 건우는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파스스스스스스! 파지지지직!
결국 잠깐 사이에 음양통천수의 알들은 변화를 끝마쳤다.
다섯 쌍의 알이 조금 크기가 커진 한 쌍의 알로 변해 버린 것이다.
그 이후, 음양통천수의 알은 영찬황을 노리고 있던 녹색 영과를 향해 밀고 내려갔다.
파지지직! 파지지지지!
푸후후후훅!
음양통천수의 알 한 쌍에서 뿜어져 나온 음양의 기운이 상생과 상극을 일으키며 새하얀 뇌전을 뿌려 녹색 영과를 위협하고, 녹색 영과는 생기가 가득한 녹색의 안개를 뿜어내어 그 뇌전을 흡수했다.
하지만 겉보기에도 음양통천수의 알들이 승기를 잡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이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녹색 영과가 슬그머니 물러나 영찬황후선보의 녹색 영찬후로 스며들었다.
드디어 최종 승리자가 된 음양통천수의 알 한 쌍은 곧바로 영찬황을 기웃거렸지만 음과 양의 기운을 지닌 알들이 서로 양보하지 않아서 영찬황에 깃들 수가 없었다.
결국 한 쌍의 알은 각각 백색의 영찬후와 흑색의 영찬후에 자리를 잡았다.
이전에 소망이가 적색(赤色)의 영찬후에, 구근이 황색(黃色)의 영찬후에, 백죽이가 금색(金色) 영찬후에 자리를 잡았기에 이제 무색의 영찬후와 중앙의 영찬황만 주인 없이 비어 있게 되었을 뿐 다른 여섯 영찬후에 주인이 생겼다.
'뭐 이런 일이?'
건우는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일어난 그러한 변화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 모두가 건우의 의념공간에서 벌어진 일.
의념 공간에서 그 의념의 주인은 곧 절대자와 같은 것을 생각하면 실상, 이와 같은 일은 건우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막고자 했다면 절대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일이 이렇게 진행된 것은 건우가 그것이 이롭다고 생각하여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던 까닭이었다.
크게 보자면 건우의 허락 안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봐야 할 것이란 뜻이었다.
그래도 음양통천수의 알은 완전히 예상 밖이었죠? 깜짝 놀랐잖아요.
'그렇기는 하지. 이전부터 조금씩 합일될 기미가 보이긴 했지만 갑자기 한쌍으로 변해버리다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죠.
'응? 그건 왜?'
원래, 선계에서도 음양통천수의 수를 극도로 제한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음양통천수의 수를 늘리는 것 자체가 크게 천지 법칙의 흐름을 거스르는 거라고 했죠. 그 때문에 호되게 당하기도 했고요.
'그렇긴 하지.'
대답하는 건우의 어조가 씁쓸하기 짝이 없었다.
음양통천수의 알을 부화 가능하게 만들어 준 일로 천지 법칙의 벌을 받았던 때를 떠올린 것이다.
그러니까요. 아마도 음양통천수는 원래 개체수가 얼마 없어야 되는 모양이죠. 그런데 건우 님의 의념 공간에 다섯 쌍이나 있었다고요. 그건 좀 많이 과했죠.
'그래 봐야 부화도 되지 않는 녀석들인데?'
부화가 되진 않았지만 언제 부화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였잖아요.
'그러니까 스스로 알아서 숫자 조절을 했다는 거네?'
짐작일 뿐이지만 지금으로선 이게 제일 가능성이 높은 추론이 아닐까 싶어요. 헷.
'그래, 그런 거 같다. 그런데……'
네에, 다섯 쌍이 하나로 뭉쳤으니 나중에 어떻게 될지 그게 걱정이긴 하네요.
'뭐, 어차피 영찬후에 나누어 자리를 잡아서 정체가 쉽게 드러나진 않을 테니 당분간은두고 봐야지.'
그래도 영찬황후선보를 현실에 구현할 때에 저 녀석들이 들어 있으면 곤란하지 않을까요?
'음, 최대한 밖으로 꺼내는 일은 없도록 해야지. 자칫하면 천지 법칙으로부터 소멸의 재앙을 받을지도 모르는데.'
건우는 본능적으로 음양통천수와 녹색영과에 대한 비밀을 숨겨야 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들을 의념 공간 밖으로 꺼내는 것은 무척 위험한 일이라고 등선자의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그리고 건우는 절대 그런 경고를 무시할 생각이 없었다.
'자, 이제 그만하고 좀 쉬어야겠다.' 건우는 의념공간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지켜보느라 멈췄던 격리 공간 생성을 취소했다.
이미 영찬황후선보의 위력은 그 끝을 시험해 보기에는 너무 커져 있었다.
시험을 계속하다가는 환상대시에 피해를 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시험은 환상대시를 벗어난 후에나 해야 할 것 같았다.
어라? 이 녀석들 다시 나왔는데요?
그런데 건우가 영찬황후선보의 사용을 멈추자 영찬후에 깃들어 있던 여섯 영물들이 밖으로 빠져나와 의념 공간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본명법보를 쓸 때에만 영찬후에 깃들어 도움을 준다는 거군.'
건우는 영물들의 행동에 담긴 뜻을 곧바로 이해했다.
의념공간에 속해 있으면서 건우에게 종속된 녀석들이라 건우가 의식의 힘이 크게 필요한 것을 알고 도움을 주려 한 것이 분명했다.
기특한 녀석들이네요.
'영찬황을 두고 다툰 것을 보면 단순히 그런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결과는 나쁘지 않네. 이제 선보를 이용하면 법칙의 힘을 평소보다 열 배 가까이 증가시킬 수 있을 것 같으니.'
우와, 이젠 정말 옥선 한테도 비벼볼 수 있지 않을까요?
'굳이? 그래 봐야 일거리만 늘어날 텐데? 유희 선인이 하는 말을 못 들었어?'
몽이가 호들갑을 떨었지만 건우는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해야 할 일이 많아 보이는 금선이니 옥선이니 하는 자리가 그리 탐나지 않았던 것이다.
하긴, 그런 건 건우 님과 맞지 않죠. 네! 그럼요.
'자, 그럼 이제 진짜로 좀 쉬자. 이제 수미가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건우는 그렇게 말을 하고는 조용히 눈을 감고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 * *
"왜 그렇게 보는것이냐?"
유희가 건우의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이 눈을 흘기며 물었다.
"길잡이를 한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그 모습은……"
유희가 이십 대 중반 정도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 것이 마음에 걸리는 건우였다.
"흥, 지금껏 남아 있던 홍의선자 모두가 하나가 되었을뿐이다. 그러니 이런 모습이 된 것이지."
"환상대시의 홍의선자가 모두 사라진다는 말씀입니까?"
"그렇다. 이젠 그닥 특별할 것도 없어서 식상했던 참인데 이리 정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알겠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나를 부를 때에는 막내란 말을 빼고 홍의선자 유희라 불러라."
"네,알겠습니다. 홍의선자님."
"그래, 그럼 이제 떠나보자꾸나."
"그, 그러지요."
막상 수미가 손에 잡힐 듯이 가까이 오자 건우는 떨리는 마음을 억누르기 어려웠다.
그는 앞서서 정남향의 성문으로 걸어 나가는 유희의 뒷모습을 보며 크게 심호흡을 하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환상대시를 나갈 때에는 성문을 통과하는 순간, 곧바로 먼 거리를 이동하여 출구 밖에 닿게 된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성문의 기준선을 통과하는 것과 동시에 건우의 발이 수미 세계를 밟게 되는 것이다.
휘이 이이이이잉! 쿠르르르릉!
번쩍! 번쩍! 콰과과과광!
"호호홋, 나오자마자 이리 거친 태풍이라니!"
"바람과 뇌전의 기운이 심상치 않습니다."
"천겁의 기운이 약간 깃들어 있기는 하다만, 그것이 선인인 우리에게 무슨 영향을 주겠느냐. 어서 비행 선기나 꺼내 보거라."
건우의 말에 유희가 피식 웃으며 건우에게 명을 내렸다.
이에 건우는 곧바로 거룡 비행 선기를 꺼냈다.
환상 대시에 머무는 동안에 틈을 내어 조금씩 개조를 거친 끝에 드디어 선기로 바뀐 거룡이었다.
여전히 이마에 4층탑을 올리고 있었지만 이전보다 훨씬 위엄 있는 용의 풍모(風貌)를 지니게 된 거룡이 태풍 속에 모습을 드러내고 기운을 뿜어 비바람과 뇌전을 막았다. 그렇게 거룡이 나타나자 유희가 곧바로 탑의 3층으로 날아들었다.
"나는 이곳에 거하겠다."
"알겠습니다. 선자님. 그리 하시지요."
건우는 그렇게 말을 하고는 의념을 넓게 펼쳐 이곳이 어디인지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이어 이곳이 수미의 구산팔해(九山八海) 중에서 세 번째 바다인 첨목해임을 알아냈다.
"그렇다면 수미산은 저 쪽이겠군."
건우가 곧바로 방향을 확인하고 거용을 움직였다.
그리고 이 때에 수미 세계의 많은 수사들은 천지의 기운이 요동치며 급격히 뒤흔들리는 것을 느끼고 불안해하고 있었다.
유희가 예정에 없이 환상대시와 수미를 연결했고, 곧이어 거룡 비행 선기가 나왔다.
건우나 유희야 기운을 갈무리해서 문제가 없었지만 거룡 비행 선기의 기운은 수미 세계 전체에 퍼질 정도로 강력했던 것이다.
이에 수미를 영역으로 삼은 선인들도 새로운 선기의 등장을 알아차리고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손님이 왔으니 주인으로서 맞이하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거용이 수미해에 닿을 무렵에 선인 셋이 허공에 모습을 드러냈다.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인사를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수미의 진선들입니다."
그 셋 중에 가운데 선 선인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건우에게 만남을 청했다.
< 의념 공간의 영물들이 선보에 깃들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