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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환장 통수 선협전-434화 (434/4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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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상대시(幻像大市) >

"이것이 금역을 유지하는 근원이란 말입니까?"

건우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원기소를 돌아보았다.

"보면 모르느냐? 저기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 바로 구(舊) 생기 법칙이 아니냐."

"하지만......"

원기소의 확인에도 불구하고 건우는 여전히 의혹을 감추지 못했다.

건우와 원기소는 금역을 무너뜨리며 이곳까지 왔다.

금역의 중심, 금역을 유지하는 법칙의 힘이 뿜어져 나오는 곳.

이곳에서 금역의 근원을 파괴하면 그것으로 금역을 없애려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목적지에 도착해 보니 원뿔처럼 생긴 탑과 그 탑에 풍경처럼 매달린 돌로 된 심장이 있을 뿐이었다.

제일 아래층에 열여덟 개의 돌심장이 있고, 한 층을 올라갈 때마다 하나씩 줄어서 가장 위에는 하나의 심장이 있는 원뿔형 탑. 그런데 그곳에 있는 돌심장들이 바로이 금역의 근원이라니.

"그저 법칙의 힘만뿜어 낼 뿐, 아무런 의지가 없는 것이 아닙니까."

"왜? 허탈하고 아쉬우냐?"

건우의 말에 원기소가 짓궂은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이것은 그저 하나의 기물이라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금역의 주인이라 하기에……"

"무슨 대화라도 해 볼 생각이었더냐?"

원기소가 건우가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는지 짐작한다는 듯이 물었다.

건우는 아니라 하지 못하고 물끄러미 원기소를 바라보다가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다.

"어르신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습니까?"

어쩐지 그런 것 같았다.

"하하하. 너는 재미있는 아해다. 어떤 때에는 영민하기 짝이 없는데, 또 어떤 때에는 미욱하니 말이다."

"알고 계셨다는 말씀이군요?"

"너는 내가 금역에 들어온 후로 마음껏 법칙의 힘을 쓰는 것을 보지 않았느냐?"

"그것이 무슨……"

"그러니 미욱하다는 것이지. 내가 처서중이나 너에게 특별한 공간을 만들어 달라고 한 이유가 무엇이었더냐?"

"그야……". 아, 그러고 보면 굳이 특별한 공간을 만들어 달라고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군요. 금역에 들어오면 얼마든 어르신의 법칙을 연구하고 수련할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이번엔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구나. 옳다. 그러하다."

원기소는 건우의 추측을 순순히 긍정했다.

"아니 그럼 어째서 그런……"

"별 것 아니다. 너도 지내보면 알겠지만 우리들 등선자들의 가장 큰 적은 다름 아닌 익숙함이다."

"익숙함이라니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다르게 말하자면 어느 순간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는 것이다. 자극이 없어지는 것이지."

"그러니까 처서중을 괴롭힌 것이나 저를 이곳으로 데리고 온 것이 자극을 위한 것이었단 말입니까?"

"너는 아직 실감하지 못하겠지만 불로영생을 이룩한 우리들에겐 중요한 문제지."

"그럼 이제 어찌하실 것입니까? 어르신께서는 이곳 금역에서 법칙을 연구하고 수련하실 생각이시라면, 저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무얼 걱정하는 것이냐? 내가 너를 해치기라도 할 것 같으냐?"

"해치지 않더라도 이곳에 붙잡아 둘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크허허허. 내가 너를 곁에 잡아 둬서 어디에 쓴다는 것이냐? 너는 네가 나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느냐?"

"...... ."

원기소가 히죽 웃으며 묻는 그 말에 건우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거 봐라. 너는 나에게 그리 큰 의미가 되지 못하느니라. 그러니 걱정할 필요가 없지. 나는 너를 이쯤에서 놓아줄 생각이니까."

"정말이십니까?"

"쯧, 이 놈아. 다시 말하지만 내가 너를 데리고 무엇을 더 한단 말이냐? 여기이 석심(石心)들은 법칙의 힘이 아주 강력하여 내 힘으로는 자르거나 나누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니 수련 대상으로는 딱 맞지 않겠느냐?"

"어르신의 능력으로도 저것들을 어쩌지 못한다는 말입니까?"

원기소의 말에 건우는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십팔 층 탑을 바라보았다.

"저것을 없애는 것이 쉬웠으면 금역이 어찌 지금까지 남아 있겠느냐? 없어져도 오래전에 없어졌겠지."

"그것도 그렇긴 합니다만……"

건우도 원기소의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선계에 얼마나 많은 금역이 있는지 모르지만 오랜 세월 그 금역을 드나든 선인들이 한 둘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껏 금역으로 남아 있다면 그들이 금역을 없애지 못한 이유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이곳은 내가 수련하기 좋은 곳이다. 그래서 내가 자주 찾는 곳이지."

"처음이 아니란 말씀이군요?"

"이곳에서 수련을 하다가 무료함이 느껴지면 곧바로 밖으로 나가서 선계를 떠돌지. 그렇지 않으면 정신이 무너지고 말 테니까."

"그렇군요. 그렇게 나오셨다가 처서중을 만나셨고, 이후에 저를 또……"

"놈! 그리 섭섭한 얼굴 할 필요는 없느니라. 수미세계, 그곳으로 갈 수 있도록 해 줄 것인 즉."

"네? 그게 정말이십니까?"

"어차피 네 놈이 혼자서 선계를 떠돌아 봐야 그곳을 찾아가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멸계전에서 승리하고 선계로 올라왔다는 것은 그곳이 선계의 변방 중에서도 변방에 해당한다는 이야기니까."

"그렇게 되는 것입니까?"

"그럼, 뜬금없이 땅과 하늘에 구멍을 내고 영계 하나를 끼워 넣겠느냐? 뭐 그런 경우가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수미는 그에 해당하지 않지."

"어느 곳이든 선계의 끄트머리에 있다는 말씀이군요."

"그러니 여기서 그곳까지 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 하지만 환상대시(幻像大市)를 통하면 이야기가 다르지."

"환상대시? 그것이 무엇입니까?"

건우는 들어본 적이 없는 명칭에 눈빛을 반짝이며 물었다.

"네가 전에 위금선대폭(渭金仙大瀑)으로 가려 했었지?"

그런데 원기소가 건우의 질문에 도리어 엉뚱한 물음을 던졌다.

"그렇습니다."

"그곳에 많은 선인들이 모이기 때문이었고?"

"네. 맞습니다."

"하지만 고작해야 금선 따위의 위세를 보고 몰리는 놈들이 그리 대수로울 것이 없음은 너도 알겠지?"

"하하하. 그래도 등선자들인데 그리 말씀을 하시니 참으로 제가 지금껏 했던 수련이 허망하게 느껴집니다."

고생 끝에 오른 등선자의 경지가 아닌가.

비록 진선경에 불과하더라도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런데 원기소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이야기하니 건우로선 기가 막힐 일이었다.

"옥선 따위도 눈 아래로 보는 나에게 진선들이야 오죽할까. 내가 아무리 반편이 도조라도."

원기소가 너무 무시하지 말라는 듯이 불퉁하게 쏘아붙였다.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위금선대폭 따위는 댈 것도 아닌 곳이 환상대시란 말씀이 아닙니까. 그만큼 많은 선인들이 모인다는 것이지요?"

건우는 원기소의 심기가 불편한 것을 알아차리고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

"클클, 그래. 바로 그런 이야기지. 그곳은 위정수 따위의 금선이 아니라 자그마치 대라선의 유희로 만들어진 곳이니까."

"대라선의 유희라니요?"

건우도 대라선이라는 말에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내가 앞서 이르지 않았느냐. 불로영생을 제대로 누리려면 정신을 온전히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래서 등선자들은 누구나 스스로의 정신을 지키는 방법을 가지고 있지."

"그러니까 환상대시가 대라선 중에 누군가가 정신을 지키기 위해서 만든 수단이란 말씀입니까?"

"옳다. 환상대시는 꿈(夢)의 법칙과 희(喜)의 법칙으로 대라선에 이른 몽유희 선인이 만든 곳이다. 그 환상대시를 통해서 수많은 선인들을 살피며 자극을 얻는 것이 몽유희(夢遊戱) 대라선의 유희지."

"그럼 선인들은 무슨 이유로 환상대시를 찾아가는 것입니까? 아무 이유 없이 환상대시를 찾지는 않을 것이 아닙니까."

"너는 그곳의 이름을 보고도 이유를 모르겠느냐?"

"시장이라는 것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고작 그런 이유로 애써서 찾아간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환상대시에는 없는 것이 없다."

건우의 말에 원기소가 진지한 표정으로 짧게 말했다.

하지만 건우는 없는 것이 없다는 말에 담긴 의미가 심상치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 없는 것이 없다면……"

그렇다면 어려움을 무릅쓰더라도 애써서 찾아갈 가치는 충분할 것 같았다.

"클클클. 그뿐이 아니다. 네겐 시장보다 더 중요한 것이 환상대시에 있느니라."

"네? 시장보다 더 중요한 것이요?"

"환상대시는 선계의 여러 곳에 있느니라. 정확히 말하자면 환상대시의 입구가 선계 곳곳에서 무작위로 열린다는 것이지."

"그게 저하고 무슨 상관입 니까?"

"미련한 놈, 입구가 여럿인데 그것이 선계 곳곳에서 열린다는 소리는 때에 따라서 수미세계와 가까운 곳에 입구가 열릴 수도 있다는 말이 아니냐."

"아! 그러니까 환상대시에 머물고 있다가 수미세계와 가까운 곳에 입구가 열리면 그곳으로 나가면 된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지. 어떻게 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환상대시를 이용한 공간 이동은 천지 법칙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대라선이라도 엄청난 특혜인 것은 분명하지."

"어쨌거나 환상대시를 통하면 수미세계를 찾아가는 것이 훨씬 빠를 수 있다는 말씀이 아닙 니까."

"바로 그렇다. 그래, 이제는 조금 기분이 나아졌느냐?"

"아…! 가, 감사합니다. 어르신."

"커엄. 그래 고마워해야지. 아무렴. 클클클"

건우의 인사에 원기소가 뒷짐을 지고 등을 젖히며 거드름을 피웠다.

하지만 건우는 그런 원기소가 밉지 않았다.

어쨌거나 자신이 그리 피해를 본 일은 없고, 도리어 수미세계로 빠르게 가는 길을 열어줬으니 고마운 일이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네?"

"이건 비밀이다만, 이곳에 환상대시로 가는 입구가 있느니라."

"네? 그게 정말입니까?"

"내가 너를 데리고 농을 하겠느냐? 정확히는 금역의 힘을 이용하면 환상대시로 갈 수 있는 것이니라."

"금역의 힘을 이용해서 입구를 열다니요?"

"아마도 과거 몽유희 대라선이 이곳 금역을 자주 오갔던 것이 아닐까 싶은데,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그저 그런 진법이 이곳에 있다는 것만 알 뿐이지."

"그럼 그것을 제가 쓸 수 있는 것입니까?"

"그야 네 재주에 달린 것이겠지."

"그, 그것은……"

"일단 네 재주로 해 보거라. 애를 써봐도 안 된다면 그 때는 나와 다시 의논을 하면 되겠지. 아마 그렇게 된다면 너는 꽤나 오래 나의 말동무가 되어 줘야 할 게다."

"알겠습니다. 제 힘으로 해 보겠습니다."

"클클. 그래, 그래야지."

이를 악문 건우의 대답과 달리 원기소의 얼굴에는 재밌다는 표정이 역력하게 떠올라 있었다.

야트막한 원형의 담장을 두른 환상대시.

건우가 그곳을 봤을 때에 느낀 것은 소인국이었다.

고작해야 지름이 십 리도 되지 않는 작은 규모인데, 담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너무도 작았던 것이다.

그 때문에 건우는 환상대시의 성벽 밖에서 한동안 안쪽을 바라보며 구경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건우와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삼삼오오 모인 여러 무리의 선인들이 있었다.

환상대시를 처음 찾는 이들은 대부분 이렇게 높은 곳에서 아래에 있는 환상대시를 내려다보는 과정을 겪고 있었다.

"신기하군. 환상대시는 말로만 들었는데 정말로 모든 것을 작게 만들어 버리는군."

"환상대시가 괜히 환상대시겠나? 실제로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작게 보이는 것일 뿐이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몽유희 대라선께서 환상 법칙의 대라선이심을 잊지 말게. 알량한 재주로 그 분의 능력을 의심하다간 경을 칠 것이니."

"아니, 누가 의심한다고 했나? 그저 놀라고 경탄하는 것일 뿐인데……"

"어쨌거나 이쯤하고 들어가세. 밖에서 보는 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뿐이라니."

"하긴, 여기서도 안개가 낀 듯이 명확히 보이지 않는 곳이 여럿 있기는 하군."

"어서 가세!"

건우가 조용히 환상대시를 살피는 중에 옆에서 네 명의 선인들이 그렇게 떠들더니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환상대시의 성문에 가까이 갈수록 그들의 체구가 급격히 줄어들며 결국 성문을 지날 때에는 모래알보다 작게 보일 정도가 되었다.

'그럼 들어가 볼까?"

- 네, 건우 님. 어서 가요. 참, 절대로 원기소 법칙은 아는 척도 하지 마세요.

'별 걱정을 다 한다.'

진짜로 조심해야 한다고요. 자칫 건우 님이 원기소 법칙을 쓰다가는 그대로 원기소 법칙의 도조가 되실 수도 있다고요.

'하긴 원기소에 대한 이해로 따지자면 도조인 그 원숭이 늙은이보다는 내가 나을 수도 있지. 그리고 그걸 가지고 겨룬다면 이길 수도 있겠고.'

그러니 조심해야 한다는 거죠. 그 늙은이처럼 천지 법칙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고 싶지는 않을 거 아니에요?

'하하하. 그래 알았다. 걱정하지 말라는 데도 그러는구나.'

건우는 그렇게 몽이와 투닥거리며 환상대시의 성문을 향해 날아 내렸다.

당연히 뒤에서 지켜보던 이들의 눈에는 그런 건우의 모습이 한순간에 개미보다 작게 줄어드는 것으로 보였는데, 의외로 건우가 뒤를 돌아봤을 때에는 모두가 평범한 모습으로 허공에 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것 참 어찌 된 영문인지……'

건우는 고개를 저으며 환상대시의 성문을 통과했다.

< 환상대시(幻像大市)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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