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7)
< 공간 법칙을 익힌 선인을 만나다 >
아쉽게도 정강 선인이 준 선계 정보에도 수미 세계에 대한 것은 정확히 나와 있지 않았다.
그저 지나가듯 수미 세계가 영계에서 선계로 올라왔다는 이야기가 진선들 사이에서 잠시 이야깃거리가 되었다는 정도일 뿐.
그 조차도 수미 세계가 선계의 어디에 있는지는 정강도 알지 못했다.
결국 수미 세계에 대해선 제대로 된 정보를 얻으려면 진선들이 많이 모이는 곳으로 가서 교류를 해 봐야 답이 나올 듯 했다.
그러니 건우의 다음 행보는 당연히 등선자들이 모이는곳이 될 수밖에 없는데.
‘그게 문제란 거지. 그렇게 등선자들이 모이는 곳은 곧 금선 이상의 선인들이 있는 곳이니까.'
건우는 결정을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 정강 선인이 알고 있는 곳이 서너 곳 되지만 거기는 또 갈협도 알고 있을 거란 말이죠. 자칫하면 갈협이 있는 곳으로 찾아 드는 꼴이 될 수도.
‘그러니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는 거잖아. 어쩔 수 없이 갈협이나 정강 등도 알지 못하는 곳까지 가 봐야 하나? ’
- 그러는 게 좋지 않을까요? 수미 세계를 너무 급하게 찾으려 할 필요는 없잖아요. 이제 불로영생할 수 있는 등선자인데요.
‘그래, 그렇긴 하지. 하지만 내 시간이 길어졌다고 다른 이들의 시간도 그렇게 된 것은 아니지. 그리고 그건 기억이나 기록, 역사도 마찬가지다. 수사나 선인이 망각을 하지 않는다고들 하지만 실제론쓸모없 는 기억을 일부러 지우기도 하잖아. 그래서 오래된 일들은 아는 이가 점점 줄어드는 것이고.'
그러니까 시간이 흐를수록 수미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기억하는 이들이 없어질 거란 말씀이죠? 그래서 수미 세계를 찾는 것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수미 세계만 걱정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수미 세계를 찾았을 때, 정정을 찾지 못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 정정이 수미 세계에 계속 머물고 있을 수도 있지만 혹여 어디론가 떠났다면? 그도 아니고 정정에게 뭔가 일이 있었다면? ’
알았어요. 건우 님의 마음이 그렇다면 하고 싶은 대로 하셔야죠.
몽이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지만, 어차피 둘의 대화는 건우의 내적 갈등일 뿐이었다.
‘언제까지 갈협의 수작을 두려워만 하고 있을 수는 없겠지. 일단 적당한 곳을 찾아가자꾸나. 여기 정강의 기록에 의하면 흐름(流)의 법칙을 익힌 금선의 거처가 있다는군. 거기로 가 보자.'
진선은 해변의 모래알처럼 많지만 익히고 있는 법칙의 종류마다 금선은 각 천 명씩밖에 없고, 옥선은 백 명, 대라는 열 명이 고작이다.
선계 전체에서 생기 법칙을 익히고 있는 진선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겠지만 생기 법칙의 금선은 고작 천 명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다.
그런 상황이니 진선과 금선은 고작 한 등급이라도 그 위상이 하늘과 땅의 차이처럼 클 수밖에 없다. 그래서 금선이 있는 곳에는 항상 수많은 진선들이 오가며 지역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건우는 정강 선인의 기록을 따라서 흐름 법칙의 금선이 있는 곳에 대한 정보를 세심하게 확인했다.
그 선인은 위정수(滑整水)라는 이름의 선인이었는데 흐름 법칙으로 금선이 되어 일대를 장악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거대한 폭포를 거처로 삼았는데, 폭이 천 리에 이르는 강이 중간에 높이 삼백 리의 단차로 폭포를 이루는 곳이었다.
선인들은 그곳을 위금선대폭(滑金仙치)이라 부르고 있었다.
위정수 금선이 머무는 곳이라 그의 성을 따서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미 언제부터 위정수 금선이 그곳에 자리를 잡았는지 아는 이가 없을 정도로 오래되었으니 지명이 그리 된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건우는 그 위금선대폭의 기록을 살핀 후, 그곳과 조금 떨어진 곳으로 공간 통로를 열기로 했다.
진선의 비행으로도 수백 년은 가야 할 곳이지만 공간 법칙을 이용하면 순식간에 갈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물론 다른 선인들도 비행 이외에 갖가지 방법으로 공간과 시간을 넘나들겠지만 그래도 먼 거리를 이동하는데는 공간 법칙만한 것이 없었다. 건우는 정신을 집중하여 위금선대폭이 있는 방향과 거리를 가늠하여 공간 법칙을 펼치기 시작했다.
원래 공간 법칙은 그 활용이 무궁무진하고 또 강력한 바가 있기에 천지 법칙의 흐름을 거역하기 쉽다.
하지만 이렇게 고작 먼 거리를 이동하는 정도는 천지 법칙의 흐름을 거스를 일이 거의 없다.
그래서 건우가 공간 법칙을 사용하려 하는데도 천지 법칙의 압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우우우우우웅! 후우웅!
건우가 의식을 집중하여 가 본 적도 없는 먼 곳으로 넘어갈 길을 떠올리며 공간 법칙을 펼치자 허공에 일렁거리는 법칙 파동이 일어났다.
- 와 신기해요. 이 얇은 아지랑이로 엄청난 공간을 뚫었군요. 신기해요.
아지랑이 같은 일렁임은 고작해야 지름이 1장(丈)도 되지 않았지만 크기 따위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 일렁임 너머에 건우가 가려고 하는 곳이 있다는 사실, 그것이 중요할 뿐.
건우는 성큼 걸음을 내디뎌 아지랑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건우가 아지랑이 너머로 건너가서 소매를 휘두르자 곧바로 공간 법칙의 힘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때에 건우는 이미 원래 있던 곳에서 아득히 머나먼 곳, 낯선 밀림 위에 서 있었다.
- 끝도 없는 밀림이네요.
몽이의 첫 마디도 그러했다.
진선의 감각으로도 동서남북 어디를 봐도 숲으로만 이루어진 곳인데, 실상 위금선대폭을 이루는 거대한 강의 서쪽에 있는 밀림의 일부일 뿐이었다.
폭이 천 리에 이르는 그 강은 수억 만 리의 숲을 관통하는 것이고, 그 거대한 숲은 곳곳마다 식생이며 환경이 달랐다.
지금 건우가 있는 열대 우림의 모습도 그런 숲의 일부인 것이다.
‘여기서 동족으로 가다 보면 위금선대폭을 만날 수 있을 거다.'
건우는 그렇게 말을 하고는 그대로 둔술을 펼쳐 이동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건우가 있는 곳으로 한 명의 선인이 다가오는 느낌이 있어 둔술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허! 누가 예의 없이 남의 집 앞마당을 이렇게 멋대로 드나든단 말입니까?"
건우가 뒷짐을 지고 꼿꼿하게 허리를 펴는 순간 선인 하나가 건우의 잘못을 질책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왼쪽 어깨에 구층으로 된 두 척 크기의 철탑을 올리고 있었는데 건우는 보자마자 그 철탑이 범상치 않음을 알아봤다.
“나는 건우라 하는데, 선인은 나에게 무슨 가르침이 있습니까?"
건우는 나타난 선인을 보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물었다.
그러자 구층 철탑의 수사는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기이하게도 늙은 농부의 외모와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건우는 그 모습이 진체가 아님을 알아보고 있었다.
지금 건우 앞에 나타난 선인의 진체는 구층 철탑 안에 있었고, 그 철탑을 짊어진 노인은 허상에 가까운 몸이었다.
“난데없이 남의 영역으로 공간 법칙의 통로를 열었으면 마땅히 영역의 주인에게 양해를 구함이 옳지 않겠습니까? 그걸 모른단 말입니까?"
건우의 말에 노인 모습의 허상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건우는 그런 선인을 향해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이미 이곳으로 오기 전에 주변을 확인한 바, 이곳은 누구의 영역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나 자신의 영역이라니! 나에게 시비를 걸고 싶은 것입니까?"
건우는 노인이 아니라 구층 철탑을 노려보았다.
그 철탑 안에 선인의 진체가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라? 이동 전에 이미 주변을 살폈다고요? 나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건우의 말에 늙은 농부 모습의 허상이 어울리지 않는 어투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장난이 심하면 결례가 되는 법입니다. 내가 이곳이 초행이라 선인에게 양보를 하고 있지만 그것이 계속 이어지리라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그런 철탑 선인을 보며 건우가 이전보다 한층 진지한 표정으로 경고를 던졌다.
그러나 늙은 농부 모습의 허상이 어깨 위의 구층 철탑을 손으로 잡아 지상을 향해 내던졌다.
그러자 철탑이 엄청난 크기로 부풀어 오르더니 마치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처럼 변해 버렸다.
건우가 보기에 하늘로 치솟은 탑의 끝이 의념에 잡히지 않을 정도였다.
결과적으로 지금 건우는 구층 탑의 기단 위, 1 층의 출입문 앞에 서 있게 된 꼴이었다.
“잠시 들러 가시겠습니까? 오랜만에 같은 법칙을 익힌 동도를 만난 것이 반가워 장난을 좀 쳐 봤습니다."
건우가 무슨 일인가 싶어 경계심을 끌어 올리는데, 노인 형상의 허상이 한 손을 배에 붙이고 다른 손으로 탑의 1층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동작에 따라서 철로 된 탑의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하지만 열린 문의 안쪽은 검은 먹물을 채워 놓은 듯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공간 법칙으로 만든 보물이군."
건우는 그 순간 그 구층 석탑의 정체를 알아보고 놀란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석탑의 주인은 건우와 같이 공간 법칙을 깨우친 선인이었던 것이다.
-들어가실 거예요?
‘보아하니 나와 같은 진선인 모양인데 겁낼 이유가 없지.'
- 그래도 혹시 함정이라도 있으면 어쩌게요?
‘그래 봐야 내 공헌도를 이길 수는 없지. 설마 내가 저항도 하지 못하고 잡히기야 하겠느냐? ’
- 그러면서 은근슬쩍 공간 법칙으로 몸을 보호하는 건 뭔데요?
‘그럼 설마 아무 준비도 없이 여길 뛰어들 줄 알았더냐? ’
건우는 그렇게 몽이와 심어로 대화를 나누며 늙은 노인 모습의 허상을 지나쳐 철탑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른 것은 몰라도 같은 공간 법칙을 익힌 선인이라는 점에서 건우 역시 호기심을 느꼈던 것이다.
그런데 건우가 탑 안으로 들어서서 마주한 모습은 뜻밖이었다.
그곳은 거룡 비행 령보의 4층탑 안에 있는 공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산과 계곡, 강과 숲이 있고, 선초를 기르는 밭과 온갚 영물, 영초가 가득한 공간.
그 안에 가득한 법칙의 힘만 아니라면 어딘가 이름 모를 역(域)에 들어온 것이 아닌가 착각할 정도였다.
“객이 왔는데 주인은 나서지 않은 것입니까?"
건우는 의념을 펼쳐 탑 내부의 공간을 어느 정도 살핀 후에도 주인이 나타나지 않자 그렇게 말했다.
“지금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느라 그런 것이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이제 곧 나갈 것입니다."
이에 건우를 따라 들어온 늙은 노인 모습의 허상이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건우는 뒷짐을 지고 먼 곳을 바라보며 그 허상을 무시했다.
파지지지직! 파지지직!
그리고 그와 동시에 건우의 몸 주변에서 법칙의 힘이 가볍게 충돌을 일으키며 정전기가 일어나듯 작은 공간 균열이 생겨났다.
“자,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그리 성급해서야!”
그러자 건우의 앞에 잘생긴 청년 선인이 모습을 나타내며 고함을 질렀다.
그와 동시에 늙은 농부 모습의 허상은 땅으로 꺼지듯 사라져 버렸다.
“법칙의 힘을 그리 충돌시키면 곤란하지요. 특이 공간 법칙의 경우에는 작은 공간 균열이라도 의도치 않은 문제를 만들기 쉽습니다."
그 청년 선인은 멋들어진 푸른색 경장을 입었는데 당황한 듯이 손짓을 하며 정전기처럼 만들어진 공간 균열을 없애느라 분주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계속 건우를 향해 떠들기를 멈추지 않았다.
“이 작은 균열 하나가 어딘가로 날아가서 언젠가 커다란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음을 모릅니까? 그리 되면 언젠가 이 작은 균열 때문에 천지 법칙의 형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설마 그리 되기야 하겠습니까? 이곳을 감싸고 있는 공간 법칙이 얼마나 촘촘한데 그런 작은 균열이 밖으로 나간단 말입니까? 아직도 장난을 치고 싶은 것입니까?"
그런 청년 선인을 향해 건우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소매를 휘둘렀다.
그러자 조금 전에 나타난 작은 공간 균열들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건우의 손짓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호오? 법칙에 대한 깨달음이 뛰어나시군요. 놀랍습니다."
그 모습에 청년 모습의 선인이 부산했던 움직임을 딱 멈추고 건우를 직시하며 말했다.
그의 분위기는 이전과 달리 매우 진중해져 있었다.
< 공간 법칙을 익힌 선인을 만나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