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4)
< 등선(登仙) 시험을 치르다 >
태령기 완경에서 단지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지만 진선경은 이전의 경지와 확연히 달랐다.
건우는 그 과정을 겪으면서 한 가지 사실을 명확하게 인지했다.
승경, 즉 경지가 오르는 것은 모두 천지 법칙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 것이다.
물론 애초에 승경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경지를 높일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던 일이었다.
하지만 진선경의 승경처럼 천지 법칙의 승경 시험 의지가 명확하게 드러난 적은 없었다.
건우가 진선경 경지에 도전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깨달음을 궁구하기 시작한 후, 어느 순간부터 천지 법칙이 건우에게 그 자격을 물어왔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자격이라는 것이 바로 법칙에 대한 깨달음이었다는 것이다.
대천 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법칙들 중에 하나라도 깨달았는지를 묻고, 그 깨달음이 얼마나 온전한 것인지를 묻는 과정.
그것이 바로 진선경 승경 시험의 핵심이었다.
그러니 건우가 진선경 승경에 실패할 일은 없을 수밖에.
번쩍! 번!쩍! 콰르르르르릉! 콰르르르릉!
흉흉하기 짝이 없는 천겁뢰가 건우의 정수리 위로 내리꽂혔다.
장정 몇이 둘러도 모자랄 굵기의 샛노란 뇌전.
그 어마어마한 거력이 정수리에 떨어졌으니 아무리 태령기 완경의 수사라 하더라도 무사하긴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이미 법칙의 힘으로 스스로를 보호하고 있는 건우에게 천겁뢰는 더 이상 위협이 되지 못했다.
‘천겁뢰는 인계와 영계 수준에서나 두려울 뿐, 법칙의 힘을 깨우친 선인들에겐 조금 성가신 기운에 지나지 않는다.’
당장 자신의 정수리를 때린 엄청난 천겁뢰가 아무 영향도 주지 못하고 흩어지고 말지 않았나.
건우는 저도 모르게 피식 미소를 짓고 말았다.
천겁뢰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한 가지 만으로도 자신의 위치가 이전과 확연히 달라진 것을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천겁이나 대천겁이 없는 것이 아니야. 생로병사의 순리를 어기는 선인들에겐 여전히 천겁과 대천겁이 내린다. 하지만 선인들에게 그것이 위협이 되지 않으니 없는 것과 같은 것일 뿐.’
건우는 새삼 선인과 천겁에 대한 깨우침을 얻었다.
하지만 그것은 건우가 천지 법칙의 진의에 다가가는 중에 자연스럽게 알게 된 것일 뿐.
지금은 흐름의 진체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어야 할 때였다.
‘이번에는 특별히 수련공법상의 성취로 승경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그 동안에 얻은 법칙의 힘에 대한 깨달음으로 승경을 이루는 것이지. 그렇다면 저 천지 법칙의 흐름에서 나는 무엇을얻어야 하는가.’
사실 일반적인 태령기 완경의 수사라면 법칙에 대한 깨달음을 얻으면서 이곳에 도착하여 그 깨달음을 더욱 완전하게 다듬는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하지만 건우는 그런 단계는 이미 넘어서 있는 상태.
그러니 이미 가지고 있는 생기 법칙이나 조율 법칙을 더욱 깊이 있게 해 줄 무언가를 찾아야 하는 것일까?
건우가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문득 그의 내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솟아올랐다.
‘으음?’
건우는 그것이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다가 나타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것을 궁금하게 여길 때가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떠오른 공간 법칙에 대한 깨달음을 받아들이고 수습하는 것만도 벅찬 일이었기 때문이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하지만 건우는 고작 내면에 숨어 있다가 떠오른 공간 법칙의 깨달음만으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지금이라면 새로 떠오르는 공간 법칙을 천지 법칙의 흐름에서도 중심이 되는 그 본의에 닿게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된다면 자신의 공간 법칙은 훨씬 강력해질 것이다.
‘과한 욕심으로 화를 입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런 기회는 쉽게 오는 것이 아니다. 생기 법칙, 조율 법칙, 공간 법칙 중에서 지금은 공간 법칙에 대한 깨달음이 훨씬 명료한 상태. 그러니 공간 법칙 에 투자를 하는 것이 옳다.’
건우는 그렇게 결심하고 천지 법칙의 흐름 더욱 깊은 곳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그러자 그 안쪽에서 건우의 의지에 반응하여 몇 개의 문자가 빠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중에 하나라도 취할 수 있다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이 있는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그 깨달음은 공간 법칙에 대한 것일 터.
건우는 의념을 극한으로 끌어 올려 하나의 문자라도 취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다.
다가오는 문자가 여럿이라도 그것을 모두 취할 수 없음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서넛, 혹은 대여섯, 그도 아니면 한 둘?
건우는 주변을 부유하는 문자들을 보면서도 그것의 수조차도 명확히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눈앞에 있음에도 인지하지 못하는 것.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도 그 의미를 알지 못하는 것.
그 알고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그 혼란 속에서 건우는 법열의 시간이 끝나가고 있음을 느꼈다.
당연히 조바심이 날 수밖에 없는 상황.
하지만 그럼에도 건우는 끝까지 침착함을 유지하며 닿을 듯, 닿지 않는 깨달음에 매달렸다.
샤르르르르르 샤하하하하!
그러자 어느 순간 주변을 떠돌던 문자들이 일제히 법칙의 흐름 깊은 곳으로 도망치듯 사라져갔다.
‘아아!’
안타까움에 손을 내미는 건우.
이렇게 기회를 놓치는가 싶은 순간, 건우가 내민 손으로 문자 하나가 환상처럼 스며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건우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대오각성(치苦覺盤).
번쩍!
건우가 감았던 눈을 떴을 때, 그는 이미 자신의 수련동부에 있는 수련실 포단 위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가볍게 의념을 펼쳐 본 것만으로 건우는 자신이 진선경의 깨달음을 얻고 법열에 들어가 백여 년을 보냈음을 깨달았다.
아니, 실상은 법열에서 문자 하나를 얻어 깨달음을 얻은 후, 그것을 수습하는데 백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는 말이 옳았다.
부지불식간에 승경 과정을 모두 끝내고 의식이 본래의 자리로 돌아와 백여 년을 명상 삼매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축하! 축하! 정말 축하 드려요. 드디어 진선경에 오르셨어요오!
때마침 잠들어 있던 몽이가 깨어나 건우에게 축하 인사를 했다.
일념으로 수련하는 동안에는 건우의 의식 일부인 몽이까지 잠들고 만다.
그래야 모든 의식을 하나로 모아서 일로정진하는 효과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몽이는 때로 수련중의 잡념이 될 수도 있으니까.
‘의념의 이전보다 몇 배는 더 커지고 또 강해셨구나. 하지만 그 외에는 그리 달라진 것은 없다고 할까?’
법칙의 힘, 그게 중요한 거죠.
‘물론 경지가 오르기 전보다는 훨씬 수월하게 쓸 수 있게 되긴 했지. 게다가 이번에 공간 법칙까지 회복을 했고., 윤회 전에 깨달았던 공간 법칙을 분혼을 흡수할 때에 돌려받지 못했던 것은 아무래도 경지 차이 대문이었을까요?
‘유독 공간 법칙에 대한 것만 지금껏 봉인되어 있었던 것을 보면, 천지 법칙의 간섭이 있었다고 봐야겠지.’
그래도 경지가 오르면서 깨달음을 돌려받은 것은 다행이죠. 아니 그 과정에서 공간 법칙이 훨씬 강해진 것을 생각하면 전화위복이라고 할까요?
‘음,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아무래도 지금 내가 얻은 공간 법칙의 힘은 진선의 경지는 훌쩍 뛰어넘은 것이 아닌가 싶거든.’
하긴, 생기 법칙이나 조율 법칙도 이미 평범치 않은 수준이라고 할 텐데, 공간 법칙의 기연은 정말 어마어마했죠.
몽이는 넘치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는 모양인지 웃음으로 얼굴이 터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건우도 그 모습에 자신의 기쁨을 감추지 않고 환한 표정을 지었다.
건우는 그렇게 진선경 승경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건우의 여유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으음?"
문득 건우의 감각에 불청객들이 그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는 것이 느껴진 것이다.
태령기 완경일 때에 비해서 훨씬 강력해진 건우의 능력은 다가오는 이들이 진선급의 선인들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건우는 그들이 거침없이 자신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는 것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리고 곧바로 과거 승경 시험을 치르기 전에 수련동부를 중심으로 펼쳐 두었던 결계 금제를 의식으로 훑어봤다.
대부분이 승경 시험 과정에서 허물어지고 파괴되었지만 아직 전체적인 틀은 무너지지 않은 상태였다.
“감히! 나를 무시하다니!”
건우는 불쾌한 감정을 의념에 실어 넓게 펼쳐내는 동시에, 남아 있는 금제 결계에 조율 법칙의 힘을 흘렸다.
그러자 다가오던 선인들이 곧바로 그 변화를 알아차리고 부랴부랴 오던 길로 되돌아갔다.
그러면서 건우를 향해 심언을 보냈다.
어허! 건우 선인! 이게 무슨 짓인가? 승경을 축하하고 후배의 앞길을 열어주기 위한 손님을 이리 대하다니!
제일 먼저 도착한 것은 건우의 기억에도 있는 목소리였다.
“정강 선인. 축하를 위한 손님인지 뭔지는 알 수 없지만, 통보 없이 이렇게 남의 거처를 찾는 것은 예가 아닌 줄 압니다만? 아니 그렇습니까?”
허어! 후배가 선배를 대하는 태도가 그래서야 쓰나? 건우 선인! 마땅히 예물을 올려 사과를 할 일이네.
지욕계 선인, 무에 그리 험한 말을 한단 말이냐? 후배가 아직 선계 선인들의 법도를 몰라서 실수를 한 것 뿐인데.
아무리 그렇더라도 잘못은 초장부터 바로 잡아야 하는 것이지. 위락 선인은 괜한 생색을 내지 마라.
건우의 말에 돌아온 심언은 정강의 것이 아니라 건우가 만난 적이 없는 선인들의 것이었다.
그래도 심언을 통해서 정강과 지욕계, 위락이란 이름의 선인들이 찾아온 것은 알 수 있었다.
“되도 않는 소리를 하는군. 내가 선계 선인들의 법도를 알지 못해도 수도계의 기본 법도는 잘 알고 있다. 남의 거처를 방문할 때에 마땅히 밖에서 기척을 내고 방문 목적을 알리는 것은 기본이지. 너희처럼 이렇게 멋대로 담을 넘는 것이 어찌 선계 선인들의 법도에 있을까. 나는 그것을 믿을 수 없다.”
건우는 지욕계와 위락의 심언을 듣고는 더 이상 그들에게 존대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허어, 이것 참. 건우 선인, 나는 선인과 좋은 연을 맺고 싶은데 어찌 이렇게 일이 꼬이는지 모르겠군. 이번 일 역시 우리가 실수를 한 것이 분명하니 내 사과를 하지.
정강 선인의 사과가 들려온 것은 건우의 말이 끝난 직후였다.
하지만 그런 정강의 태도가 위락이나 지욕계는 기분이 상한 듯 했다.
아니, 지금 뭐 하는 짓이냐? 정강, 고작 이제 겨우 등선한 후배 놈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주지는 못할망정! 도리어 사과라니!
그러게 도대체 무슨 짓이냐? 혹여 저 건우란 놈과 과거의 인연이라도 있었더냐?
음, 이전에 갈협 선인과 정강 선인이 태령기 완경의 누군가를 두고 다퉜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혹시 그 놈이 저 건우란 놈인가?
그 일로 갈협 놈이 먼 곳으로 떠나 종적을 감췄는데 그게 저 건우란 놈과 연관이 있다고?
위락과 지욕계가 정강을 질타하고 나섰는데, 그런 중에 위락이 건우와 갈협, 정강이 얽혔던 일에 대해 말을 꺼냈다.
그런데 이어진 지욕계의 말에 의하면 건우와의 일 이후에 갈협이 어디론가 사라진 모양이었다.
내가 건우 선인을 어찌 대하든 위락 선인과 지욕계 선인이 관여할 일은 아닐 텐데? 어차피 우리는 등선자의 탄생을 축하하고 천지 법칙과 등선자의 관계를 설명하는 의무를 다하기만 하면 될 뿐 이지.
아니, 애초에 이런 일에는 당연히 후배가 선배를 대접하는 관례란 것이 있는 법인데, 정강 선인이 그런 관례를 무시하려 하고 있잖아!
그렇다. 앞길을 인도하는 선배에게 크게 대접하는 것은 등선자들의 기본 예의인 것을.
너희가 그런 대접을 원하면 마땅히 요구를 해서 받으면 될 일이 아니냐. 내가 건우 수사와 좋은 관계를 만들기 위해 그런 잘못된 관례 따위는 무시하기로 한 것은 내 마음일 뿐이다.
정강 선인! 정말 이리 나올 것이냐!
등선자를 이끄는 중요한 행사를 이리 방해하다니!
쯧, 방해는 무슨. 나는 그저 내 일을 하려 할 뿐이다.
정강! 네가 그리 나서면 우리가 어찌 선물을 요구할 수가 있단 말이냐.
가르침의 대가로 선물을 받는 것인데, 네가 대가 없이 모든 것을 가르쳐 준다면 건우란 놈이 우리를 아쉬워 할 이유가 없지 않으냐!
위락과 지욕계가 강하게 반발했지만 정강은 자신의 생각을 바꿀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위락과 지욕계는 그런 정강을 말릴 방법이 없는지 거칠어진 기운만 뿜어내고 있었다.
“들어보니 승경에 성공하면 선배 선인들이 후배 선인을 찾아서 뭔가 알려주는 것이 관례인 모양이군? 하지만 지금 보아하니 정강 선인만 있어도 될 듯 한데? 정강 선인은 내 동부로 들어오시오.”
그 때, 이야기를 듣고 있던 건우가 정강 선인만 동부 안으로 초대를 했다.
이는 다른 두 선인은 만날 생각이 없다는 뜻과 같았다.
그렇게 되자 위락과 지욕계는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가 없었다.
< 등선(登仙) 시험을 치르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