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4)
< 녹색영과(綠色靈果) 안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
백양오죽에게 녹색 과일을 넘겨준 장우는 이후 다시 영체를 의념공간으로 회수하고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았다.
이제는 뒷일은 백양오죽에게 달려 있었다.
녹색 과일, 장우는 그것이 구룡승룡단(九龍乘龍丹) 선계의 지고한 보물임은 알지 못했지만 큰 비밀을 담고 있음은 알고 있었다.
이제 백양오죽이 그것을 품었으니 어떤 변화든 변화가 일어나리라.
그 동안에 자신은 융생오금과 영찬의 융화 작업이나 계속할 요량이었다.
그렇게 다시 시간이 흘렀다.
★ ★ ★
백양오죽에 깃든 건우의 분혼은 백양목령족과 오죽목령족의 봉인에 갇혀 오랜 세월을 보냈다.
만약 백양오죽에 깃든 영혼이 건우의 분혼이 아니고 윤회를 거친 일반적인 영혼이거나 천지 영기가 우연히 응결되어 탄생한 영성체였다면 봉인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산산이 흩어지고 말았을 것이 다.
원래 백양오죽을 가두고 있는 봉인이 그렇게 영성을 파훼하기 위한 용도로 특별하게 만들어진 것이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하필 백양오죽에 건우의 분혼이 깃든 것이 문제였다.
자그마치 태령기 완경의 경지에 이른 건우의 분혼이었다.
혼의 강대함이 어찌 평범한 영혼이나 갓 태어난 영성체와 같을 수가 있을까.
백양목령족과 오죽목령족이 그것도 모르고 일반적인 영성체 소멸 봉인을 펼쳤으니 당연히 그 뜻을 이루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분혼이 라고 상황이 좋은 것은 아니 었다.
백양오죽에 깃든 분혼은 봉인 때문에 외부와의 소통이 거의 막혀 버린 상태로 오랜 시간을 버텨야 했던 것이다.
마치 아무것도 없는 백색 공간에 갇혀버린 환자와 비슷한 처지가 되었다고 할까.
하지만 태령기 완경의 기억과 경험이 어디 만만한 것인가.
분혼은 그 기억과 경험을 바탕으로 끝까지 무너지지 않고 꿋꿋하게 버텼다.
아니, 오히려 그런 상황을 수련의 발판으로 삼아 깊은 명상 속에서 깨달음을 추구했다.
그러던 중에 찾아온 기회.
어쩐 일인지 본혼이 자신이 있는 곳에 도착한 것이다.
그 또한 가능성의 하나로 열어두긴 했지만 기대하진 않고 있었던 일이었다.
정말로 본혼이 먼저 자신을 찾아올 거라곤 기대하기 어렵다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본체의 기억을 모두 지니고 있는 분혼과 달리 본혼은 윤회를 거치며 모든 기억을 잃지 않았던가.
그나마 무한공과 유혼결을 의념 공간에 남긴 것도 천운이 닿아서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러니 거의 아무것도 없는 무(無)에서 시작하는 본혼보다는 분혼인 자신이 유리한 입장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자신이 성장한 후 본혼을 찾는 것이 빠를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본혼이 예상을 깨고 자신에게 온 것이다.
‘성령기의 경지로 백양목령족과 오죽목령족을 상대로 나를 구해 내긴 어렵다.’
하지만 분혼은 상황을 냉정하게 바라봤다.
본혼이 도착한 것은 반길 일이지만 자신을 구해 낼 방법이 마땅치 않음을 알았던 것이다.
잠시 부풀었던 흥분이 그렇게 가라앉는가 했다.
그런데 거기서 또 다른 변수가 나왔다.
엄청난 목생기(木生氣)를 지닌 보물을 본혼이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분혼도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나무의 기운과 생기를 넘치도록 가지고 있는 보물이니 그 힘을 백양오죽인 자신이 흡수하면 빠르게 경지를 끌어올릴 수 있을 듯 했다.
그래서 본혼에게 그것을 내어달라 부탁했다.
그렇게 상황의 돌파구를 찾아보려 한 것이다.
‘윤회를 거치며 기억을 잃은 본혼이 나와 자신이 하나이며 둘이 아니란 이치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물론 이와 같은 우려가 없지는 않았는데 본혼은 거침없이 자신에게 그 보물을 건네주었다.
분혼은 곧바로 보물을 자신의 영체로 끌어왔다.
그리고 분혼은 그것의 외형이 과일 모양을 하고 있지만 실상은 엄청난 기운을 품고 있는 영단임을 알아봤다.
건우가 태령기 완경에 이르도록 쌓았던 모든 기억과 지식과 경험을 가진 분혼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견문이 짧은 장우에 비해서는 조금 더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그런 분혼 조차도 그 녹색영과의 정확한 정체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설마 연단로 안에서 제련되던 아홉 개의 영단 중에 하나임을 그가 어찌 알 수 있을까.
‘아무러하면 어떤가. 당장 경지를 끌어 올려 백양과 오죽 일족의 봉인을 풀어낼 수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좋은 일이지., 건우의 분혼은 그렇게 생각하며 조용히 영단의 기운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그는 백양오죽이라는 돌연변이 목령족이 된 분혼이었다.
그러니 영단에 담겨 있는 목기(木氣)를 흡수하기에는 속성이 너무 잘 맞았다.
게다가 원래 목기(木氣)와 궁합이 잘 맞는 생기(生氣)이니 그 또한 어렵지 않게 흡수할 수 있었다.
쿠르르르르르릉!
‘허엇! 이게 무슨?’
하지 만 모든 일이 항상 순조롭게만 풀릴 수는 없는 법 .
분혼이 녹색 영과의 목기와 생기를 한참 흡수하고 있을 때, 갑자기 녹색 영과의 안쪽에서 심상찮은 포효가 들려왔다.
상당히 심기 불편함을 드러내는 으르렁거림.
분혼은 그 순간 깜짝 놀라며 의념을 끌어 올려 녹색 영과를 살폈다.
‘뭐지?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 것일까?’
분명히 뭔가 있었다.
하지만 그 뿐, 분혼이 아무리 의념을 집중해 보아도 녹색영과의 안쪽을 살필 수는 없었다.
다만 그 동안 목기와 생기를 다수 흡수한 덕분에 녹색영과의 꺼풀 한 겹이 거의 녹아 없어졌는데 그 밑으로 금색의 신묘한 문양이 드러나고 있었다.
‘이걸 지금까지 몰랐다니!’
분혼은 스스로를 자책하며 그 문양을 살피기 시작했다.
‘마치 운무(雲露)가 바람에 흩날리는 듯, 쉬지 않고 문양이 변하고 있구나. 진정 그 안에 담긴 변화가 무궁하다 하겠어.’
지금은 비록 화신기 중기의 목령족에 불과하다지만 본래 태령기 완경의 경지였던 과거가 힘이 되었다.
비록 금빛 문양을 완전히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수박의 겉은 핥아 낸 것이다.
이에 자신을 얻은 분혼은 끝없이 변화를 거듭하는 금빛 문양에 집중했다.
그리고 그 뜻을 조금씩 헤아릴 때마다 녹색영과에서 목기와 생기가 흘러나와 백양오죽에게 흡수 되었다.
크르르릉 크르르르릉!
그러자 녹색 영과 안쪽에서 뭔가 마땅치 않아 하는 울음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하지만 이전보다는 많이 부드럽고 소리도 낮았는데, 언짢은 가운데 호기심 같은 것이 묻어나고 있었다.
분혼은 그 정체 모를 존재가 꺼림칙했지만 당장은 목기와 생기를 흡수하여 경지를 끌어 올리는 것이 급했다.
그래서 더욱 녹색영과의 표면에 흐르는 금빛 문양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 장우님 장우님 몽이가 다급하게 장우를 불렀다.
장우는 명상 삼매경(三味境)에 빠져 있다가몽이의 부름에 정신이 깨어났다.
그리고 그 즉시 벌떡 일어나 다급하게 소매를 휘저었다.
그러자 백양오죽을 중심으로 훤히 트인 삼백 장 넓이의 공터 전체에서 은색의 진법 문양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진법 문양은 곧바로 거대한 백양오죽 전체를 감싸기 시작했다.
우르르르르르릉!
그 때, 머리 위에서 은은한 뇌성이 들려왔다.
장우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그의 눈에 보이는 보라색 구름.
백양오죽의 머리 위에 짙은 겁운(幼雲)이 드리워 있었다.
천겁의 기운을 담은 보라색 구름과 그 안에서 꿈틀거리는 노란 천겁뢰.
“드디어 입령기인가?”
장우가 그 모습에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백양오죽, 즉 분혼이 드디어 화신기 완경을 갈무리하고 입령기 승경에 도전하는 것이다.
하지 만 장우는 그 모습에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이미 이전에도 백양오죽이 화신기 중기에서 후기로 오르는데 도움을 준 경험이 있었다.
미리 준비를 해 두었다가 내리치는 승경 시험의 천겁뢰를 대신 막아 준 것이다.
물론 천겁뢰만 막아주었을 뿐, 백양오죽의 승경 자체에 영향을 줄 수는 없었다.
경지에 오르고 못 오르고는 오직 개개의 역량에 달린 것.
승경을 방해하는 천겁뢰를 대신 막아주는 것까지는 해 줄 수 있지만 경지에 오르는 것은 도움을 줄 수 없었다.
그것은 이번에도 마찬가지.
‘입령기 승경이라 천겁뢰가 만만치 않겠지만 나는 이미 성령기 승경까지 거친 몸. 입령기 승경의 천겁뢰 따위가 두려울 것은 없지.’
장우는 그런 생각을 하며 백양오죽을 감싸고 있는 진법을 살폈다.
융생오금(融生鳥金)으로 영찬을 제련하는 동안에 틈틈이 준비한 방어 진법이었다.
저 정도면 머리 위에서 세를 불리는 천겁뢰라 하더라도 백양오죽을 방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백양오죽은 오로지 입령기 경지의 깨달음을 잘 수습하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백양오죽과 내가 서로 한 몸이라 그런지 이렇게 천지 법칙의 시험을 방해해도 그 반서가 거의 없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지.’
장우는 다시 한 번 희미하게 웃으며 원래 가부좌를 하고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전처럼 백양오죽에 등을 기대고 앉아 눈을 감았다.
‘이제 입령기라……." 어서 성령기가 되어야 할 텐데.’
장우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백양오죽의 성장이 무척 빠르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다.
자신이 넘겨준 녹색 과일을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고작 수백 년 만에 화신기 중기에서 입령기에 오르다니. 그만하면 충분히 만족스러운 성장이었다.
번쩍 ! 쿠르르르릉! 콰과과과광!
그 때, 하늘을 가득채운 보라색 겁운(封雲)에서 사나운 천겁뢰가 떨어졌다.
하지만 그 천겁뢰는 장우가 세운 결계의 표면을 타고 흘러 땅으로 흩어질 뿐, 백양오죽에겐 한 올의 영향도 주지 못했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장우도 그런 사실을 훤히 보고 있었다.
‘걱정할 것은 없겠어. 그나저나 백양오죽이 설마 입령기 승경에 실패하거나 하지는 않겠지?’
- 에이, 설마요. 분혼의 원래 경지가 장우님 보다 높았을 거 같은데요? 그런데 고작 입령기에서 실패를 하겠어요?
‘하긴 그도 그렇지.’
장우는 몽이의 말에 한결 표정이 풀어졌다.
그리고 그로부터 꼬박 한 달 후, 드디어 백양오죽이 입령기 경지에 올랐다.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할까.
입령기에 올랐음에도 여전히 봉인에 갇혀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백양오죽.
그리고 그런 백양오죽의 성장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백양목령족과 오죽목령족.
결국 다시 몇 달의 시간이 흘렀을 때, 백양오죽을 둘러싼 울타리를 넘어 두 명의 목령족 수사가 찾아왔다.
그 중에 하나는 장우가 백양태삼림에 들기 전에 잠시 만나 허락을 구했던 바로 그 백양목령족의 수사였고, 다른 하나는 초면의 오죽목령족 수사였다.
“다시 뵙게 되었습니다.”
장우가 명상에서 깨어나 백양오죽을 등지고 앉은 상태로 백양목령족 수사에게 아는 척을 했다.
그리고 낯선 오죽목령족 수사에게도 시선을 주었다.
“나는 오죽의 격허 (格墟)라 합니다.”
오죽목령족 수사는 장우의 시선을 받자 곧바로 자신을 소개했다.
이에 장우가 소매를 휘둘러 앞쪽에 흙으로 된 의자를 만들고 손짓으로 자리를 권하며 말했다.
“나는 장우라 합니다. 격허 수사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어서 장우는 백양목령족 수사를 쳐다보았다.
그 수사는 과거에도 자신의 이름을 알리지 않고 떠났던 이력이 있는 이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모두 통성명을 하는데 자신만 빠질 수는 없었던지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백양의 포승이라 하오.”
“자자, 누추하지만 일단좀 앉으십시오. 하실 말이 있어 찾아오셨을 터인데.”
장우는 포승의 자기소개를 들은 후, 다시 한 번 두 수사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러자 포승과 격허는 못이기는 척하며 장우가 만든 의자에 앉았다.
“그래, 어쩐 일로 백양과 오죽의 수사들께서 저를 찾으셨습니까?”
그들이 자리에 앉자 장우가 곧바로 용건을 물었다.
듣지 않아도 백양오죽에 관한 것임을 짐작했지만 어떤 말이 나올지는 예상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내심 장우는 속으로 적잖게 긴장을 한 상태였다.
“휴우, 선연(善緣)이 있는 영혼을 찾는다 하여 태삼림에 드는 것을 허락했는데, 그 대상이 백양오죽일 줄은 몰랐습니다. 참으로 난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장우를 향해 포승이 낮은 한숨소리를 내며 말했다.
“난처하기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깊은 인연이 있는 영혼인데 이리 봉인을 당하여 제대로 이야기 한 번 못하고 있으니 속이 많이 상합니다.”
포승의 말에 장우가 이렇게 대답한 순간 세 수사의 사이에는 냉랭한 기운이 흐르기 시작했다.
백양오죽을 봉인한 것이 백양목령족과 오죽목령족이 니 장우가 그 둘을 상대로 속상하다 하는 것이 아닌가.
설마 장우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던지 두 수사가 살짝 당황한 듯 보였다.
“난처하고 속이 상하다……." 그리 말씀을 하신 게지요?”
오죽목령족 격허가 변명할 기회를 주겠다는 듯이 장우를 보며 그렇게 물었다. 그 순간 장우가 눈빛에 불을 머금고 격허를 바라보았다.
< 녹색영과(綠色靈果) 안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