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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령기를 이루고 행륜관 삼천삼백삼십삼 계단을 바라보다 >
보라색 구름과 그 구름에서 쏟아지는 샛노란 뇌전다발.
천겁뇌가 내리치고 천지 영기가 뒤틀리기를 수백 번.
갑자기 보라색의 구름이 갈라지며 영롱한 칠채 서기가 하늘로 치솟았다.
그 서기는 보는 이로 하여금 경건한 마음이 들게 하며 경지가 높은 수사라 하더라도 쉽게 가까이 갈 수 없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쿠르르르르르릉!
그 서기의 발원지가 된 곳은 소세야(燒世野)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큰 화산.
정확히는 그 화산의 분화구에서 서기가 치솟고 있었다.
“으으음.”
서기를 따라 분화구 밑으로 내려가면 사방이 온통 폐허가 된 바닥이 드러나는데, 그 중앙에 가부좌를 한 장우가 있었다.
장우는 마침 성령기의 승경을 이루고 눈을 뜨는 참이었다.
이전 염화궁에서 수사들과 부대낄 때에는 고작 화신기 극경에 불과했던 장우가 지금은 성령기의 경지에 오른 것이다.
- 축하드려요! 정말 정말 축하드려요. 저는 또 장우님이 역법반서복원대법(逆法反臟復元大法)으로 부활이라도 하시는 줄 알았다고요.
‘녀석, 승경 시험에 실패하여 천겁뢰에 휩쓸렸다간 부활도 못할 가능성이 높다는 걸 몰라서 하는 소리냐?’
- 그래도 장우님은 운이 좋으시니까 부활은 하셨겠죠.
‘이 녀석 ! 부활이 아니라 승경에 성공하라고 기원을 했어야지!’
- 물론이죠. 제가 분명히 그렇게 빌고 또 빌었다고요. 그런데 어느 순간 마지막 결계 진법까지 박살이 나고, 엄청난 굵기의 천겁뢰가 파바바박 떨어지는데… 우와, 저 완전히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 잖아요.
‘네가 심장은 있고?!’
- 아, 그만큼 놀랐다는 거잖아요!
‘녀석, 이제 좀 진정이 된 거 같구나. 그리 대드는 걸 보니.’
- 체, 제가 또 언제 대들었다고 그러세요? 저는 항상 장우님 편이라고요.
‘그래, 그래. 나야 항상 네게 고맙지. 아무렴.’
- 뭐, 알아주시면 고맙고요. 아무튼 다시 한 번 감축(感祝)드려요. 성령기에 오르신 거요.
‘그것도 그거지만 잔결독공을 털어 버린 것도 작은 일은 아니지.’
- 아, 덕분에 이제는 마음 놓고 지낼 수 있겠네요. 잔결독공 때문에 선천지기가 고갈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잔결독공은 수련 성취로는 어떤 공법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공법이었다.
하지만 선천지기를 소모시켜서 경지를 끌어 올리는 것이라 말하자면 경지 하나를 끌어 올려 목적을 달성하고 죽는, 그런 공법이었다.
그것이 역법반서복원대법(逆法反臟復元大法)을 익히고 있는 장우의 손에 들어와 원래와는 다른 형태로 쓰였다.
장우는 역법반서복원대법의 재생력 덕분에 잔결독공의 극악한 단점인 선천지기 고갈을 어떻게든 견뎌내며 화신기 극경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물론 아홉 개의 영단을 단련하던 연단로에서 훔쳐 온 녹색 과일이 없었다면 장우는 절대 그와 같은 길을 걸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장우는 염화궁에 들기 전부터 녹색 과일을 녹여 낸 덕분에 잔결독공을 입령기 수준까지 익힐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막상 염화궁의 장보각에서 보물을 취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염화궁에서 얻은 수련 공법이 매우 강력한 화기를 품고 있었는데 그 화기를 이용하면 몸을 불태워 새로 태어나는 효과를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매번 경지가 오를 때마다 화기를 이용하여 몸을 불태우고 새로 만들어내는 염화궁의 공법.
그것은 실상 선계에서도 견줄 존재가 몇 없다고 하는 주작신수의 능력을 본뜬 것이었다.
‘해파리 공법보다 훨씬 강력한 부활이지. 하지만 매번 경지가 상승할 때에만 적용이 될 뿐, 역법반서복원대법처럼 쓸 수는 없다는 게 아쉽지.’
- 와, 욕심도 욕심도. 잔결독공으로 화천독망질 두 마리를 흡수해서 입령기에 쉽게 오른 후에, 염화궁의 극화공(極火功)을 익혀 잔결독공을 태우고 성령기에 올랐으면 된 거죠. 그리고 어차피 해파 리 공법은 아직 남아 있잖아요. 그런데 무슨 욕심을 그렇게 부리세요?
아쉬워하는 장우를 몽이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바라보았다.
이에 장우도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극화공을 익혀 잔결독공의 부작용을 완전히 벗어 던진 것만도 큰 이득인데, 극화공의 공법이 부활의 효과가 없다고 투덜거리다니. 자신이 생각해도 좀 과했다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젠 어쩌시게요? 곧바로 성륜역으로 향하실 거예요?
‘그래. 경지 안정만 시키면 곧바로 가야지.’
사실 지금이라도 당장 행륜관 삼천삼백삼십삼 계단을 뛰어 오르고 싶은 장우였다.
하지만 승경 후에는 반드시 일정 시간 동안 공을 들여 경지를 안정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연히 경지상의 손해를 입기 마련이니 마음이 급하더라도 지금은 자중할 때였다.
- 그래도 이 근처에 성령기 수준의 수사는 거의 없을 테니 마음 놓고 수련을 해도 되겠네요. 그리고……."
‘그리고?’
- 혹시 모르잖아요. 이번에 의념 공간이 늘어나면 뭔가 또 새로운 것이 나올지도……."
‘글쎄다, 화신기, 입령기를 지나는 동안에도 새로운 것이 나오지 않았는데, 뭔가 있을 거 같지는 않다만.’
- 솔직히 그게 좀 이상하긴 하죠. 왜 없을까요?
‘그걸 내가 알겠냐? 분혼이 알고 있겠지.’
- 헤에, 그건 그러네요.
‘객쩍은 소리는 그만하고 일단 주변 정리를 좀 하자꾸나. 승경 시험 때문에 난리가 났으니.’
장우는 그렇게 말하고는 허공으로 몸을 솟구쳐 분화구 위로 올라섰다.
그가 수련을 하던 분화구는 이전 염화궁이 있는 곳이 아니었다.
다른 수사들이 염화궁을 찾을 것을 귀찮게 여긴 장우가 그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곳에 자리를 잡았었다.
‘흐음.’
- 그냥두시게요?
장우가 화산 분화구 위에 떠서 주변을 살피는데 몽이가 물어왔다. 까마득히 먼 곳에 몇몇 수사들의 기척이 잡힌 것이다.
모두가 장우의 승경 과정에서 일어난 천지 법칙의 움직임을 느끼고 모였던 수사들이었다.
‘딱히 해가 되지도 않았고, 가까이 다가와 욕심을 부리지도 않았는데 굳이 죽여 없앨 것이 뭐가 있단 말이냐?’
- 그래도 염화궁의 일이 있고 벌써 2천 년이 흘렀는데요? 그 사이에 세상이 어찌 변했는지 알아볼 필요는 있지 않을까요?
‘그건 경지를 안정시키고 행륜관 근처로 간 후에 알아보면 될 일이다. 어차피 부로성으로 갈 것인데 뭐가 급하단 말이냐?’
- 하긴요.
‘일단 보호 결계와 금제 몇 개를 복원하고 내려가자꾸나.’
- 네네.
★ ★ ★
스홧!
선홍색의 둔광과 함께 나타난 장우.
그가 몇 걸음 앞으로 내딛자 곧바로 엄청난 숫자의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성륜역(星輪域)으로 다가가면 어디서든 반드시 모습을 드러내는 관문 행륜관의 삼천삼백삼십삼 계단이었다.
장우는 이전에 화신기 초기에 이 계단에 발을 디딘 적이 있었다.
도대체 행륜관의 계단이 얼마나 강력하기에 성령기가 아니면 통과하지 못하는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사실 이 성륜역 행륜관 계단은 많은 수사들이 자신의 수준을 평가하기 위해서 오르기도 하는 곳이었다.
올라서는 계단의 수가 많을수록 더 강력한 금제가 발동하며, 그 금제의 종류도 매번 다르다.
어떤 때에는 강력한 압력이 수사를 내리 누르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엄청난 혹한의 기운이 뿌려지기도 한다.
때론 그 금제가 워낙 강력하여 빠져 나오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수사가 나오기도 한다.
이는 한 번에 여러 개의 계단이 뭉쳐서 금제를 발동시키는 탓인데, 강력한 시험을 극복할수록 이후에 많은 계단을 시험 없이 오를 수 있게 된다. 장우도 이미 한 번 그것을 맛본 적이 있기에 마음의 각오를 마치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장우의 걸음마다 밟고 선 계단이 기묘한 소리를 냈다.
어찌 들으면 흥겨운 음악과도 같고 어찌 들으면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 같기도 하다.
그런데 그 소리는 장우가 천 번째의 계단을 넘어선 이후로 들리지 않게 되었다가 천오백 개의 계단을 지나는 순간.
삐이이이이이이익 !
귀를 찢을 것 같은 소리가 들리더니 그 소리가 곧바로 굳어지며 날카로운 칼날이 되었다.
그리고 장우의 몸을 노리고 날아드는 칼날들.
장우는 위 기를 느낀 즉시 극화공을 끌어 올려 몸의 상태를 불꽃으로 바꾸었다.
극화공으로 성령기에 오르며 새로 태어난 장우의 몸은 사실상 불꽃 그 자체라 할 수 있었다.
원하면 언제든 몸의 상태를 불꽃, 혹은 화기(火氣)로 바꿀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물리적인 성질을 버린 장우의 몸에 칼날은 별다른 위협이 될 수 없었다.
게다가 장우는 시험이 만들어 낸 칼날들이 몸에 닿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푸화화화화홧!
선명한 빛을 내며 장우의 몸에서 터져 나온 붉은 기운.
그것이 십여 장의 공간을 장악하자, 그 안에 들어온 모든 것이 녹아내렸다.
심지어 장우가 밟고 있던 계단조차도 그대로 녹아 용암처럼 흘러 내렸는데, 장우는 그 상태로 허공에 떠서 계속 계단을 걸어 올랐다.
- 확실히 이 정도 시험은 문제도 아니네요.
‘하지만 앞으론 또 어떨지 모르지.’
장우는 자신의 극화기에 녹아버린 칼날과 계단들은 문제도 아니란 듯이 말하곤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말처럼 이후로도 시험은 계속 되었다.
하지만 그 어떤 시험도 장우의 걸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애초에 성령기를 기준으로 만들어진 시험인데, 장우는 일반적인 성령기 수사에 비해서 의념이 워낙 강력했다.
그러니 성령기 기준에 맞춰진 행륜관의 시험은 장우의 걸음을 막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여기가 행륜관의 마지막관문입니까?”
장우가 삼천삼백삼십 개의 계단을 오른 후, 맞이한 것은 세 개의 계단 위에 있는 성문이었다.
돌로 만든 세 개의 기단 위 양쪽으로 둘레가 큰 아름드리 기둥 두 개씩이 있고, 그 위에 기와지붕을 올린 성문엔 문짝이 없었다.
다만 그 훤한 성문통로 중앙에 수사 하나가 길을 막고 서 있을 뿐이었다.
그 수사는 소의 귀에 사슴의 뿔을 달고 있었는데 눈동자가 세로로 갈라져 있었다.
장우는 그의 뿔과 귀, 눈동자를 보고 그의 정체가 용족의 피를 이은 수사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수사께선 그저 눈앞에 보이는 세 개의 계단만 올라서면 행륜관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성문을 막아선 용인족의 수사는 장우의 물음에 그렇게 대답했다.
“그럼 수사께선 내가 성륜역에 드는 것을 막을 뜻이 없다는 말입 니까?”
장우는 그가 문의 통로 중앙을 막고 선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일단 마지막 시험을 통과한 후에 이야기를 하지요.”
하지만 그는 장우가 아직 자격이 되지 않는 다는 듯이 그렇게 말하며 탑의 기단처럼 성문을 받친 세 개의 계단을 눈짓했다. 장우는 어차피 지나야 할 관문이라 생각했지만 눈앞에 만만찮은 용인족 수사를 두고 시험을 치르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수사께서 내 시험에 관여를 하실 생각입니까?”
장우가 확인하듯 수사에게 물었다.
“본 성륜역에서는 외인에겐 어떤 간섭도 하지 않습니다.”
“외인?”
“성륜역에 속하지 않은 수사를 그리 부르지요.”
“아무튼, 수도계 놈들은 하나같이 음흉하단 말이지. 내가 하나만 물어보겠소 용인족 수사.”
장우는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 리고는 용인족 수사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런 장우의 태도에 용인족 수사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물어보시지요. 답할수 있는 것이면 답을 드릴 테니.”
“내가 남은 세 계단을 오른 후에도 나는 여전히 외인이오?”
장우의 물음에 용인족 수사는 잠시 장우를 노려봤지만 곧바로 대답을 해 주었다.
“행륜관의 시험을 통과했다면 그는 더 이상 외인이라 할 수 없겠지요.”
“그러니까 내가 마지막 시험을 통과하면 외인이 아니니까 용인족 수사께선 내게 간섭을 할 수도 있겠구려?”
“아니라 하진 않겠습니다. 그것을 위해 내가 이 자리에 온 것이니.”
“그래서 시험을 통과하면 수사께선 나를 어찌 할 요량으로 그곳에 그리 서 있는 것이오?”
“그리 경계할 것은 없습니다. 행륜관을 통과한 수사에게 성륜역에 대해서 안내하려는 것 뿐이니.”
“안내라……."
그걸 꼭 받아야 하는 거요? 그리고 내가 수사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야 하는 거요?”
“의심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안내를 받는 것이 싫으시다면 물러나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그리되면 후에 곤란한 일이 많을 것입니다.”
"으음."
장우는 용인족 수사의 말에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여기서 용인족을 내치는 것이 옳을지, 아니면 이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지.
- 다른 수사는 보이지 않으니 일단 시험을 통과한 후에 저 자를 상대해도 되지 않겠어요? 어차피 저 수사도 성령기 경지인데요.
그 때, 몽이가 슬쩍 모습을 드러내고 용인족을 살피며 말했다.
‘뭐 그것도 나쁘진 않겠네. 여차하면 시험을 포기하고 물러나는 것도 방법이고.’
- 물러나요?
‘행륜관 도전에 횟수가 정해져 있단 소리는 못 들었거든.’
- 아, 그건 그러네요.
‘그래, 그러니까 편한 마음으로 도전을 해 보자고.’
장우는 그렇게 생각하고 곧바로 걸음을 옮겨 남은 세 개의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용인족 수사는 그런 장우를 물끄러 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 성령기를 이루고 행륜관 삼천삼백삼십삼 계단을 바라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