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환장 통수 선협전-373화 (373/499)

(373)

< 한 방에 묻혔다>

평씨 가문의 공법은 물을 다루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그리고 거기에 바람의 속성을 더하는 것이 평씨 가문의 일반적인 수련 공법이다.

그래서 평만래나 평종윤 모두 수기(水氣)를 이용한 공격을 했다.

이에 해미정 역시 의념을 이용한 영기 술법을 사용하여 대항했다.

하지만 해미정의 공법은 의외로 공격과 방어에 강한 힘을 보이지 못했다.

그녀가 익힌 공법은 자신의 일을 대신해 줄 누군가를 불러 오는 것.

즉 소환이나 강림에 해당하는 공법을 익히고 있었다.

“이미 너의 약점은 모두 드러났다. 너는 제물을 바쳐 힘을 빌려 쓰는 자가 아니냐. 하지만 그러려면 그만한 제물과 그에 합당한 의식(儀式)이 필요하지. 그런데 그 동안 네가 준비했던 제물이나 의식은 그 대가를 모두 받아 버렸지.”

장우는 해미정의 사정을 모두 알고 있다는 듯이 서두르지 않았다.

그의 단검은 이미 몇 번이나 해미정의 몸에 상처를 입혔고, 평씨 가문의 두 수사들 역시 해미정에게 상당한 피해를 주었다.

해미정은 세 수사에게 포위된 상태로 점차 의념이 약해지고 영기가 고갈되는 중이었다.

“장우, 너는 정말로 제자를 이대로 버리겠다는 것이냐? 내가 아니면 네 제자는 절대 금제를 벗어날 수 없을 텐데!”

해미정이 독기 때문에 입에서 죽은 피를 흘리며 다급하게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장우는 해미정을 향해 찌르던 단검을 촌각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푸욱!

“아악!”

“구차하다! 이미 네게도 아미를 되돌릴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무슨 흰소리를 그리 늘어 놓느냐?!”

장우의 단검이 결국 해미정의 아랫배를 깊게 찌르고 들어갔다.

그 순간 모두가 싸움이 끝났음을 직감했다.

더 이상 해미정이 버틸 힘이 없다는 것을 평만래나 평종윤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

“이대로! 이대로 끝이 날 성 싶으…… 아악!”

후우우우웅우우웅!

하지만 해미정은 끝까지 저항을 멈추지 않았고, 마지막이라 생각한 순간에 스스로를 불태웠다.

장우도 해미정이 뭔가 하려는 것을 느끼고 단검을 통해 독기를 폭발시켰다.

해미정은 그 즉시 온 몸에 잔결독공의 독기가 펴져 손발부터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때에 팔뚝 크기의 해미정 영체가 나타나 그녀의 정수리에 두 손을 대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영체가 읊는 주문은 장우도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었지만 그것을 막아야 한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장우가 급히 단검을 위로 그어 올려 해미정의 영체를 반으로 갈라 버렸다.

= 호호호. 이 미 늦었다. 늦었어!

하지만 반으로 갈라진 해미정의 영체는 끝까지 소멸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깔깔대고 웃었다.

쿠르르르르르르릉!

“어엇, 장 수사!”

“장 수사, 뭔가 이상합니다!”

그런데 해미정의 영체가 그렇게 웃고 있을 때, 해미정의 몸은 완전히 녹아서 땅바닥에 쏟아졌는데, 장우는 그것이 독기 때문만은 아님을 알아차렸다.

해미정은 스스로의 몸뚱이를 제물로 바쳐 뭔가를 불러내려 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 해미정의 수작이 통하여 공동의 땅바닥이 울리며 뭔가가 솟구쳐 오르고 있는 것이다.

“어? 이건?”

그 때, 장우는 솟아오른 대지가 뭉치며 만들어내는 사람의 형상에서 뭔가 익숙한 기운을 느꼈다.

‘분명, 내가 알고 있는……. 허억! 지하세계의 주인?!’

장우는 해미정이 불러낸 존재에게서 익숙한 느낌을 받고 의아해 하다가 결국 그 느낌을 언제 받았는지 알아차리고 깜짝 놀랐다.

과거 혼천괴의 일로 지하 세계에 대홍수가 났을 때, 크게 노하여 지상으로 올라갔던 이가 있었다.

그가 혼천괴가 빠지면서 생긴 구멍으로 이동할 때에 장우는 스치듯 그의 눈빛을 받았고, 그것만으로 정신을 잃고 말았었다.

그런데 지금 땅에서 솟구쳐 인간의 형상을 만든 흙덩이에서 바로 그 존재의 기운이 느껴진 것이다.

= 호호호. 감히 너희가 대항할 수 있겠느냐? 이 분은 진실로 대도에 이르신 신선이시다. 내가 스스로를 버려 신선 어르신을 뫼셨으니 이제 너희에게 남은 것은 죽음뿐이다.

장우가 깜짝 놀라 두려움에 눈을 크게 뜰 때에 반으로 갈라졌던 해미정의 영체는 다시 원래대로 몸을 붙이려 애쓰며 기고만장하게 떠들고 있었다.

= 네가 나를 불렀느냐?

그 때, 솟아오른 흙이 뭉친 인형이 해미정을 보며 물었다.

흙인형의 모습은 학창의를 입은 젊은 남자였고, 이마엔 둥근 보석이 박힌 영웅건을 두르고 있었다.

다만 흙으로 된 인형이라 색이 구별되지는 않았다.

= 그렇습니다. 신선 어르신.

= 나를 불러 저것들을 처리해 달라고 한 것이고?

= 네.어르신.

= 고작 이런 것으로?

해미정의 영체는 고분고분 태도로 대답했지만 흙인형은 지금 상황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했다.

따지듯 내민 흙인형의 손 위에는 살구씨 크기의 반투명한 구슬 하나가 있었다.

생명력은 물론이고 영기와 독기까지 뭉쳐 있는 구슬은, 그것이 곧 방금 녹아내린 해미정의 육신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 아닙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곳에는 신선 어르신을 위해 준비한 또 다른 제물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 때, 흙인형의 불쾌함을 읽었는지 해미정의 영체가 다급하게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 흐음?

흙인형은 그런 해미정의 말에 호기심이 생긴 표정을 싯더니 한쪽 손을 들어 허공을 향해 뭔가를 잡아 당겼다.

그러자 허공이 갈라지며 한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아미야!”

순간 장우가 깜짝 놀라며 고함을 질렀다.

갈라진 허공에서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평아미, 즉 장우의 제자였던 것이다.

= 이제 겨우 성단기를 밟았을 뿐이구나. 그것도 자연스럽지가 않아.

흙인형은 평아미의 경지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이룩된 것이 아님을 알아봤다.

해미정이 제물로서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평아미를 억지로 성단기까지 끌어 올려놓았던 것이다.

= 하지만 아주 쓸모가 없는 것은 아니겠군. 이대로 데리고 가서 경지를 고정시키고 잡일을 시키면 되겠어.

흙인형은 장우가 떠들건 말건 관심도 없다는 듯이 정신을 잃고 있는 평아미를 허공에 띄우고 이리저리 살피며 그렇게 말했다. 장우는 그 모습에 귀에서 연기가 뿜어질 정도로 분노했다.

“고작 토우(土偶) 따위가!”

카가가가가가강!

장우의 녹색 단검이 길게 늘어나며 흙인형 수사의 몸을 두드렸다.

어차피 흙으로 된 몸이라 독은 거의 통하지 않았지만 의념으로 강화되고 독기가 가득 담긴 단검의 물리력도 만만치 않았다.

흙인형 앞에 떠 있는 아미는 어찌되든 상관없다는 듯 가차없는 공격이 날아갔다.

삽시간에 흙인형의 팔다리에 깊은 상처가 생기고, 얼굴에서 코와 귀가 잘려 나갔다.

= 미천한 것이 감히!

이에 흙인형도 분노를 터트리며 소매를 휘저었다.

그러자 곧바로 엄청난 기운이 장우를 향해 쏟아졌다.

장우가 허공에서 급히 몸을 뒤집으며 기운을 피해냈다.

‘음? 이거?!’

별 거 아니에요! 죽여 버려요!

장우가 다급하게 흙인형의 기운을 피해 냈는데, 그 순간 묘하게도 흙인형의 공격이 버텨볼 만 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동시에 몽이도 흙인형을 얕잡아 보는 소리를 하며 장우를 응원했다.

“고작 허깨비 따위가!”

장우가 깜빡 속은 것에 크게 분통을 터트리며 다시 장검으로 변한 비행 법보를 휘둘렀다.

그러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평만래와 평종윤 역시 장우를 도와 흙인형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 무슨 짓이냐! 감히 신선 어르신을 공격하다니! 너희가 죽고 싶은 것이냐!

이에 해미정이 깜짝 놀라 다급하게 외쳤다.

그리고 공격을 당하는 흙인형도 셋의 합공은 예상치 못했는지 두 팔로 얼굴만 가린 상태로 이리저리 비틀거렸다.

이미 아미는 한쪽으로 밀려나 공동의 구석에 처박힌 상태였다.

하지만 여전히 그 누구도 아미에게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됐어요. 이제 아미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거예요.

물론 장우와 몽이는 아미를 예의주시하고 있었으면서도 도리어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애쓴 것뿐이었고, 덕분에 아미는 한동안 수사들의 이목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콰직! 콰드득!

파가가각! 콰르르르르!

그런 중에 흙인형의 몸뚱이는 세 수사의 공격에 이리저리 부서지며 흙먼지와 함께 허물어지고 있었다.

= 이놈들! 내가누군줄 알고!

“누구긴, 허깨비 토우(士偶)지.”

흙인형이 고함을 질렀지만 돌아가는 것은 토우라는 조롱뿐이었다.

= 뭐라?

“어떤 어르신의 탈을 썼는지 모르지만 그래봐야 입령기 수준도 되지 못한다면 지금의 너를 누가 무서워한단 말이냐?”

장우가 팔다리가 부서져 간신히 몸통과 머리만 남아 허공에 떠 있는 흙인형을 보며 그렇게 놀렸다.

그리고 조금 전과 달리 처연한 표정이 된 해미정의 영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아직까지 몸을 제대로 붙이지 못한 해미정의 영체가 장우의 손아귀로 끌려가 목이 잡혔다.

= 아아악!

순간 해미정의 영체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그도 그럴 것이 장우가 영체를 붙잡는 순간 그 영체에 독기를 가득 주입했기 때문이다.

장우의 잔결독공은 원래 영체까지도 중독시킬 수 있는 특별한 독기를 지녔다.

당연히 해미정의 영체라 하더라도 장우의 독기를 버틸 수는 없었다.

“너는 내 허락이 없이는 절대 죽지 못할 것이다.”

장우는 해미정의 영체를 보며 그렇게 으르렁 거리고는 소매에서 옥병 하나를 꺼내 영체를 구겨 넣었다.

그리고 그 옥병 안에도 독기를 밀어 넣어 해미정의 영체를 괴롭게 만들었다.

“다시 부를 때까지 기다려라.”

= 자,잠시만, 장 수사! 장 수…….

해미정의 영체가 다급하게 장우를 불렀지만 장우는 곧바로 옥병을 밀봉하여 소매에 넣어 버렸다.

그리고 머리와 몸통만 남아 있는 흙인형을 노려봤다.

“끝까지 해 볼 테냐? 아니면 이쯤에서 물러나겠느냐?”

“장우 수사 그게 무슨 말인가? 어찌 저런 것을 놓아 줄 생각을 해?”

“그렇지. 조부님 말씀대로 저런 것에게 여지를 줘서는 절대 안 되는 것이네.”

평 만래와 평종윤이 깜짝 놀라며 반대하고 나섰다.

장우가 그 두 수사를 고요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정말 저 토우를 박살내기를 원한다면 그리 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렇게 되면 본체가 그것을 알게 될 텐데, 그것을 바라는 건가?”

“음? 본체라고?”

“장 수사, 본체라면 정말로 저 토우가 진선의 화신체라는 말인가?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장우의 말에 평씨 수사 둘이 깜짝 놀라며 주춤 뒤로 물러섰다.

특히 평종윤은 안색까지 창백해지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해미정이 그리 말했으니 그렇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다. 저 토우는 그저 해미정이 급히 불러낸 그림자에 불과할 테니까.”

“강신이건 소환이건, 어쨌건 해미정 그 년이 수작을 부려서 저 토우를 불러냈지만 온전한 것은 아니란 뜻이군.”

“그렇다. 저 토우는 해미정이 이곳 공동에 있던 모종의 기운을 증폭하여 만들어낸 모조품일 따름이다. 아마도 이곳이 다리 대륙의 생성이나 단절과 연관된 신선들 중에 누군가 다녀갔던 모양이지.”

“그래서 우리가 저 토우를 해치게 되면 그 신선 어르신께서 그 사실을 알아차릴 수도 있다는 건가?”

“그래. 내가 걱정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니 저 토우는 스스로 사라질 때까지 그냥 두는 것이 최선이지.”

“하지만 이전에 분명히 저 토우가 장 수사의 제자를 일꾼으로 쓰겠다느니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그거야 주제에 맞지 않는 신선의 사념을 담았으니 헛소리를 한 것에 지나지 않지. 딱 봐도 입령기도 되지 못한 실력인데 그런 것이 가당키나 한가? 그저 격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헛소리를 한 것에 불과하겠지.”

장우는 그렇게 말을 하고는 조금씩 몸을 회복하고 있는 흙인형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흙인형은 이쯤에서 물러나는 것이 어떻겠느냔 장우의 말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장우와 평씨 수사들의 대화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어찌 할 테냐? 끝내 구차할 꼴을 당할 테냐? 아니 면 스스로 물러 날 테냐.”

장우가 다시 그 토우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그 때였다.

파스스스스스스!

= 감히!

꽈르르르르릉!

“커억!”

“켁!”

“아악!”

흙인형이 갑자기 모래처럼 바스러져 흘러내리며 한 마디 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한 마디에 장우와 평씨 수사 둘이 동시에 피를 토하며 고꾸라졌다.

콰르르르륵 콰직 콰르르릉!

이어서 그들이 있던 공동 전체가 허물어졌고 바닥이 갈라져 암해의 바닷물이 솟구쳐 올랐다.

< 한 방에 묻혔다>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