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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정을뒤쫓다>
고성의 평씨 가문의 화신기 수사 둘이 누군가와 크게 싸워 고성 가까운 곳의 산과 계곡이 무너지고 갈라졌다는 이야기가 퍼졌다.
그리고 그 싸움을 일으킨 화신기 수사가 평씨 가문의 두 수사, 평만래와 평종윤에게 밀려서 도망쳤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놈이 어디로 갔느냐?”
“허! 해미정, 뻔뻔하기도 하구나. 네가 감히 다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다니!”
평씨 가문의 최고 고수인 화신기 중기의 평만래가 장원 상공에 떠 있는 해미정을 보며 노여움에 수염을 떨었다.
그의 곁에는 평종윤이 서 있었고, 그 외에도 평씨 가문의 많은 수사들이 나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화신기 후기의 해미정에겐 눈에 차지 않을 저계 수사들이지만 오랜 세월을 간직한 명문 수도 가문의 결계와 금제, 진법 따위와 묶이면 간단치 않은 위력을 보일 것이 분명했다. 이 때문에 해미정도 평만래를 함부로 할 상황이 되지 못했다.
“조부님, 저 해 수사가 우리를 속이고 시조님의 유산을 훔쳐 갔으니 마땅히 죄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중에 평종윤이 평만래를 보며 해미정을 징치할 것을 주장했다.
그와 함께 평씨 가문의 장원 곳곳에서 영기가 치솟으며 갖가지 색의 문양과 법술 문자가 떠올랐다.
해미정은 그 모습에 어금니를 깨물었다.
“정말 나와 끝장을 보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이쯤에서 멈춰야 할 것이다.”
그리고 평만래를 보며 협박하듯 말했다.
여차하면 평씨 가문 전체와 일전을 겨룰 생각도 있다고 위협하는 것이었다.
“해 선자. 네가 이미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넜는데, 여기서 무슨 대화를 한단 말이냐? 오냐, 어디 오늘 우리 평씨 일족이 멸족을 걸고 너를 죽이고 말겠다.”
그러자 평만래가 결국 결단을 내렸다는 듯이 그렇게 말을 하고는 품속에서 소라고둥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전 평부령이 사용하던 것과 비슷한 법보였다.
이에 그 후손인 평종윤 역시 법보를 꺼냈는데 양쪽 귀가 높이 서 있고, 그 귀에 둥근 고리가 달린 특이한 모양의 황토색의 술잔이었다.
평종윤은 그 술잔에 영기를 불어넣어 하늘색의 액체를 응결해 냈다.
그와 함께 평씨 가문의 장원 전체에 삼엄한 살기(殺氣)가 감돌았다.
“이, 이런!”
해미정은 정말로 평씨 가문의 수사들이 목숨을 걸고 싸울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는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자, 잠깐 기다려라!”
그녀는 급히 고함을 지르며 의념을 펼쳐, 평씨 가문의 장원 전체를 가두려는 결계가 닫히지 못하게 구멍을 만들었다.
“시끄럽다! 우리가 다시 너의 그 간교한 혀를 믿을 것 같으냐!”
하지만 평만래는 해미정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다는 듯이 소라고둥의 끝을 입에 물려고 했다.
“이것을 받아라! 괴뢰가 가지고 있던 지식 옥간이다!”
그러자 해미정은 다급하게 소매에서 옥간 하나를 꺼내어 평만래에게 날려 보냈다.
이에 평종윤이 앞으로 나서서 그 옥간을 한 손으로 받았는데, 뜻밖에도 다른 수작은 들어 있지 않았다.
옥간에 암수를 숨겨 공격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조부님, 여기 있습니다.”
평종윤이 평만래에게 옥간을 넘겼고, 평만래는 소라고둥을 부는 것을 잠시 미루고 옥간의 내용을 살폈다.
그러자 시조인 평부령이 익혔던 공법이나 수련 지식이 그 안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평만래는 그 옥간의 내용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옥간에 실린 내용은 고작해야 영체기나 화신기 초기까지만 도움이 될 내용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평만래는 물론이고 후손인 평종윤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 수준이었다.
“고작 이런 것을 던져 주다니! 해 수사, 네가 정말 우리를 얼마나 같잖게 보는지 알겠구나! 크하하하하.”
평만래가 옥간의 내용을 확인하고는 도리어 화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해미정에게 분노를 터트렸다.
그러자 해미정이 두 손을 내저었다.
“아니다. 절대 그런 뜻이 아니다. 내가 그것을 내어 준 이유는 나 역시 그 일로 얻은 것이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평 수사, 네가 확인해 보면 알겠지만 그 옥간은 분명 괴뢰의 머릿속에 있던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하고 싶은 말이 뭐냐?”
“그 장우란 놈이 교활하게도 괴뢰의 머릿속에 고작 그 정도의 정보만 담아 두었다는 이야기다. 그 보다 뛰어난 내용은 그 놈이 독차지 했다는 소리임을 모르겠느냐?”
“으음?”
“조부님, 해 수사의 말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어차피 그 장우란놈은 오래지 않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그 때에 마땅히 벌을 주면 될 일입니다.”
“그럼 종윤이 너는 어찌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냐?”
“어찌하긴 무엇을 어찌하겠습니까. 이참에 저 해 수사에게 수도계의 엄정함을 보이자는 것이지요.”
“물론 가능한 이야기겠지만 우리 가문의 피해도 적지 않을 텐데?”
“그렇다고 이대로 해 수사를 놓아주면 우리 평씨 가문이 어찌 수도계에서 얼굴을 들고 다니겠습니까. 아울러 이후 후손들의 자긍심이 무너질 것이니 그 후환이 두려울 따름입니다.”
“옳다. 네 말이 진정 옳구나. 이미 많은 후손들이 지금의 상황을 보고 들었는데 여기서 해 수사를 용서할 수는 없겠지.”
평종윤의 말에 평만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나각(轉角) 법보를 들어 올려 입에 물었다.
뿌우우우우우!
“모두 조부님을 도와라!”
그러자 평종윤 역시 황토색 술잔에 담긴 하늘색 액체를 허공에 뿌리며 고함을 질렀다.
이에 평씨 가문의 모든 수사들이 일제히 영기를 운용하기 시작했다.
“이런!”
순간 해미정은 짧게 상황을 판단하고는 곧바로 둔술을 펼쳐 자신이 만들어 놓은 구멍을 통해 평씨 장원을 벗어났다.
평만래와 평종윤은 해미정이 장원의 결계 밖으로 도망가는 것을 보고는 짧게 혀를 차고 영기를 거두어들였다.
“이제 어찌 되겠느냐? 그 장우란 놈의 말처럼 될까?”
“지금까지는 그 자의 예상과 같았으니 이후로도 그럴 가능성이 높지 않겠습니까? 어서 가시지요.”
“그래, 이만하면 후손들도 자부심을 가질 만 하지. 고작 화신기 중기와 초기인 우리가 화신기 후기의 수사와 싸워 이긴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까.”
“그렇습니다. 조부님.”
“하지만 해미정을 이대로 놓칠 수는 없지. 받아야 할 빚이 아직 남았으니까. 어서 가 보자꾸나!”
평만래는 살짝 굳은 표정으로 그렇게 말을 하고는 짙은 물색의 둔광을 남기고 모습이 사라졌다.
그리고 평종윤 역시 거의 동시에 같은 색의 둔광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
* * *
“결국 여기까지 쫓아왔구나!”
해미정이 자신을 품(品)자 형태로 포위한 장우와 평만래, 평종윤을 노려보며 소리를 질렀다.
해미정이 고성의 평씨 가문에서 도망친 날로부터 13년.
어쩐 일인지 해미정이 세 명의 수사에게 포위된 모습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내게서 도망칠 수 있을 거로 생각했습니까?”
장우가 얼굴에 차갑고 서늘한 웃음을 머금고 해미정을 보며 말했다.
과거 고성의 평씨 장원을 벗어나 도망쳤던 해미정은 이후 몇 번의 우연이 겹쳐 장우의 행적을 찾아냈다.
당연히 그녀는 곧바로 장우가 은신하고 있다는 숲으로 찾아갔고, 그곳에서 장우와 한바탕 싸움을 벌였다.
하지만 큰 부상을 입었다던 장우는 멀쩡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평만래와 평종윤까지 합세해서 해미정을 공격했다.
당연히 해미정이 셋을 모두 상대하긴 어려웠다.
그래서 이때부터 해미정은 도망치고, 평만래, 평종윤, 장우가 그녀를 뒤쫓는 추격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13년 만에 해미정이 그녀의 은신처에서 이렇게 세 수사에게 포위되고 만 것이다.
“이것이었더냐? 나를 여기까지 몰고 오기 위해서 일부러 여지를 두었던 것이냐?”
세 수사에게 포위된 해미정이 장우를 보며 물었다.
그녀의 말은 장우와 평만래 등이 그녀를 이미 잡을 수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고 틈을 주었다는 이야기였다.
“아미, 그 아이는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지금껏 수사를 궁지로 몰다가도 결딴을 내지는 않았지요.”
장우가 그녀의 말이 틀리지 않았으므로 말해 주었다.
그런 장우의 목소리는 여전히 냉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그래, 그래서 결국 성공했구나. 이곳까지 오게 되었으니.”
“해수사, 나는 무척 화가 나 있습니다. 진정 영체로 잡혀 윤회도 하지 못하고 수만 년을 고통 받고 싶은 것입니까? 그러다가 영혼까지 소멸시켜 드리리까?”
빈정거리는 해미정의 말에 장우가 평소와 달리 칼날이 담긴 서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
“호호, 이미 제자의 모습을 확인한 모양이구나. 어떠하더냐? 나름 애를 써 놓았다만.”
해미정은 장우가 그런 모습을 보이는 이유를 짐작했다는 듯이 웃으며 물었다.
“해 수사는 진정 두려움이 없는 모양입니다. 아니면 지금 이 자리에서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장우는 그런 해미정을 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장우가 판단하기에, 해미정은 지금의 위기 상황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
사실 평만래나 평종윤이 없다고 해도 혼자서도 해미정을 상대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장우였다.
그동안 해미정과 싸우며 그녀의 모든 것을 파악한 후였다.
지금 해미정이 만들어낼 수 있는 변수는 존재하지 않았다.
“장우 수사, 나라고 어찌 두려움이 없겠느냐. 하지만두려워한다고 상황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그러니 가진 것을 최대한 활용해 보아야지. 그러다 되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해 수사. 당신이 말하는 가진 것이 아미, 그 아이를 말하는 것이오?”
뿌드드드득!
장우는 그렇게 물으며 어금니를 깨물어 갈았다.
아미를 생각하면 절로 분노를 감추기 어려웠던 것이다.
지금껏 장우가 해미정을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대한 것도 다 아미 때문이었다.
“내가 가진 것이야 여럿 있지만. 그 중에 장우 수사에게 쓸모 있는 것이야 아미란 아이 밖에 더 있을까. 그렇다. 너도 알겠지만 그 아이는 내가 아니면 살아날 수가 없지.”
“역시 그 아이에게 금제를 건 것이 바로 너였구나?”
“금제? 네 견문이 그리 짧을 줄은 몰랐구나. 그것은 보통의 금제가 아니다. 평범한 금제라면 어떻게든 풀 수 있겠지만 그 아이에게 걸린 것은 네 재주가 아무리 뛰어나도 걷어낼 방법이 없을 것이다.”
“으음. 역시.”
장우는 해미정의 말에 낮은 신음을 뱉고 말았다.
- 봐요. 내가 그랬잖아요. 아미에게 걸려 있는 건 평범하지 않다고요.
장우가 신음과 함께 안색이 어두워지자 몽이가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나타나 말했다.
아미에게 걸려 있는 금제가 특별하다는 것을 발견해 낸 것이 다름 아닌 몽이였던 것이다.
“그러니 너는 나를 해쳐서는 안 된다. 도리어 저들 평씨 놈들로부터 나를 지켜야 할 것이다.”
해미정이 장우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기운을 얻었는지 몽이처럼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큰소리를 쳤다.
그러자 평씨 수사 둘이 장우의 눈치를 살폈다.
이번 일의 수장 역할을 장우가 하고 있으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혹시라도 장우가 태도를 바꿔서 평씨 수사들을 적대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런 우려는 이어진 장우의 말과 행동에 깔끔하게 씻겨 나갔다.
“감히, 제자를 잡아다가 제물로 삼아 놓고 그딴 소리를 해?! 그리고 그걸로 나를 협박하기까지? 진정 죽기보다 괴로운 꼴을 당해 봐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그 때, 장우가 결국 크게 화를 내며 한 손에 녹색 빛을 머금은 독기의 단검을 소환했다.
그것은 이전에 삼안 수사에게 빼앗은 단검 비행 법보였다.
그동안 장우는 그 비행 법보를 잔결독공의 독기로 연화해 냈다.
심지어 그 비행 법보에 담긴 공간 전체에 잔결독공의 독기를 채워 넣었다.
그 덕분이 단검 비행 법보는 다시없는 흉기로 변해 있었다.
“설마 나를 죽이려는 것이냐? 그렇게 되면 네 제자는……"
“시끄럽다! 내가 작은 희망을 가지고 너를 존중해 주었더니 그것조차 후회가 되는구나. 좋다. 이제는 너를 대우해 줄 이유가 없다. 너는 이제부터 스스로 죽기를 바라게 될 것이다.”
장우는 으스스한 말을 던지며 녹색 단검을 해미정에게 겨누었다.
그러자 단검이 길게 늘어나며 해미정의 가슴을 찔러갔다.
“우리도 돕겠소.”
“함께 힘을 모읍시다.”
그 모습에 잠시 눈치를 살폈던 평만래와 평종윤 역시 기다렸다는 듯이 나각과 술잔 법보를 들고 싸움에 끼어들었다.
<해미정을뒤쫓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