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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짓이 아니었다>
고성(古城), 또는 포성(拘城)이라 부르는 성은 수중 세계의 중앙에 있는 대성(大城)이다.
오래 전, 수중 세계가 암해로 가라앉았을 때, 유일하게 공기방울이 그 성을 중심으로 땅에 붙어 있었다.
이후 그 공기방울이 점차 커지면서 지금의 수중 세계를 만들었다.
장우는 바로 그 고성에 도착해서 멀리서 성벽을 살피고 있었다.
과거에는 매우 강력한 금제와 결계들이 쳐져 있었을 성벽이 지금은 퇴락하여 그 흔적만 간직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수중 세계는 암해에 가라앉은 이후로 지금까지 외부의 침략을 거의 받은 적이 없었다.
그러니 방어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결과가 대성의 성벽보다 개개의 수도 명문 담벼락이 더 단단한 방어 태세를 갖추게 된 것이다.
‘평씨 가문은 고성의 동부를 장악한 가문이라지.’
평씨 가문에 화신기 수사가 두 명이 있다는데 어쩌시려고요?
장우가 허공에 높이 뜬 상태로 고성 동쪽 지역에서 평씨 가문의 장원을 찾으며 중얼거리자 몽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봐야 화신기 초기와 중기에 불과할 뿐. 그 정도라면 내가 한꺼번에 상대하는 것도 불가능할 것은 없겠지.’
하지만 장우는 자신의 의념이라면 화신기 수사 둘이라도 상대할 만 하다고 생각했다.
전에 삼안 수사를 생각하세요. 그도 고작 화신기 중기에 불과했지만 권능을 가지고 있었다고요.
몽이는 그런 장우의 자신감에도 걱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 때는 내가 화신기 초기에 불과했지. 그런데도 어쨌거나 이겨내기도 했고.’
그거야 운이 좋았던 거죠. 제가 그 권능을 깨트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잖아요. 하지만 다른 경우였다면 장우님이 크게 낭패를 봤을 수도 있다고요.
‘그거야 그 삼안 수사 놈이 특별한 본명법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지. 그 놈이 익힌 공법이 마침 그 본명법보와 딱 들어맞아서 권능의 흉내를 낼 수 있었던 건데, 그런 경우는 흔치 않겠지.’
하지만 그래도 조심해야죠. 요즘 장우 님은 조금 막무가내가 되신 거 같아요.
‘괜찮다니까. 평부령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이곳 수중 세계에는 수련 공법이 그리 다양하지 못하다고 했다. 그런 까닭에 화신기 후기가 되어도 권능은 알지도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했고. 게다가 그 평부령 조차도 권능 따위는 알지도 못했는데, 그 후손이 청출어람을 했을 것 같으냐?’
으음. 그건 아니겠네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라. 그리고 나도 당장 고성으로 쳐들어가서 소란을 일으킬 생각은 없다.’
그럼 어쩌시게요?
‘어쩌긴 평씨 가문의 화신기 수사들을 불러내야지.’
장우는 그렇게 말을 하고는 곧바로 고성에서 십여 리 떨어진 작은 돌산의 봉우리로 날아가 앉았다.
그리고 고성의 평씨 가문 장원으로 의념을 투사하기 시작했다.
이미 의념을 집중하여 평씨 가문의 화신기 수사들의 위치를 파악한후였다.
장우의 강력한 의념으로 위치를 아는 수사에게 심언을 보내는 것은 어려울 것이 없었다.
* * *
커다란 향로가 피어 있는 수련실에 홀로 가부좌를 하고 있던 늙은이가 번쩍 눈을 떴다.
그리고 자리에서 한쪽 허공을 보며 두 손을 모아 인사를 올렸다.
“오셨습니까?”
그러자 허공에서 청백의 학사복을 입은 노인이 머리에 관을 쓰고 나타났다.
“너도 들었느냐?”
그 노인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늙은이에게 물었다.
“네.조부님.”
수련실에 앉아 있던 늙은이가 더 나이가 많아 보이는 외모였지만 실제론 학사복의 노인이 수십 대 위의 조상이었다.
게다가 경지도 한 단계 더 높으니 조부라 부르며 공경하는 것이다.
“그럼 함께 가자꾸나.”
화신기 중기 수사 평만래가 후손인 화신기 초기 수사 평종윤에게 눈짓을 하고는 옅은 청색의 둔광과 함께 모습을 감추었다. 그러자 수련실의 주인이었던 늙은이 평종윤도 곧바로 둔술을 펼쳐 그 뒤를 따랐다.
“왔군!”
장우가 평씨 가문의 두 수사가 이십여 장 거리를 두고 모습을 나타내자 감았던 눈을 떴다.
“그대가 우리를 불렀소?”
평씨 가문의 두 수사 중에 화신기 중기인 평만래가 한 걸음 나서 장우를 보며 물었다.
그는 장우를 보는 순간 자신과 같은 경지임을 알아봤던 것이다.
“부르지 않았으면 당신들이 여길 올 이유가 없었겠지.”
장우는 그렇게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로 조부님과 나를 부른 것입니까?”
이번에는 평종윤이 날카로운 눈빛을 뿌리며 장우에게 물었다.
그는 장우가 심언을 보내어 둘을 불러낸 것을 못마땅해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당신들에게 별로 좋은 뜻을 가지고 온 것은 아니다.”
장우는 자신도 상황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용무가 있기는 하지만 좋지는 않은 것이란 말이군. 그래 무슨 가르침이 있어서 우리를 불렀나?”
이에 학사복 수사 평만래가 슬쩍 영기를 끌어 올리며 물었다.
그러자 덩달아 후손인 평종윤도 싸울 준비를 하듯 영기를 팽창시키기 시작했다.
“으음. 내가 이미 몇 곳에서 알아본 것이지만 확인 차 물어보겠다.”
그런 둘을 보면서도 장우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태연한 기색으로 말했다.
“확인이라? 도대체 우리에게 무얼 확인하겠다는 것인지 모르……. 설마 시조 어르신의 괴뢰를 만든 것이 너였더냐?”
장우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짓던 평만래가 문득 깨닫는 바가 있었던지 크게 놀란 표정으로 고함을 질렀다.
“제법 눈치가 빠르구나. 바로 그렇다. 그 평부령 괴뢰는 내가 만들어 제자에게 줬던 것이다. 그런데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오니 괴뢰는 박살나고, 제자는 행적을 알 수 없더구나. 그런데 그 일을 너희 평씨 가문이 했다지?”
"으음."
“아니, 그건……"
장우의 말에 평씨 가문의 두 수사, 평만래와 평종윤은 난처한 표정으로 제대로 대꾸를 하지 못했다.
그런 모습에 도리어 당황한 것은 장우었다.
‘뭐지?’ 그러게요? 꼭 자신들이 한 일이 아니란 표정인데요?
‘억울해 하는 거 같기도 하고?’
그러니까요. 이거 또 뭐 다른 일이 얽혀 있는 거 아닐까요?
“커엄. 솔직히 이렇게 말해 봐야 변명밖에 되지 않을 줄은 알지만 그래도 할 말이 있다.”
장우와 몽이가 대화를 나누는데 평만래가 말했다.
장우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 할 기회를 주었다.
“우리가 시조 어르신의 괴뢰를 찾아 간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어찌 선조의 모습을 한 괴뢰를 파괴할 수 있었겠느냐.”
“아니라고?”
“그렇다. 우리가 한 일이 아니었다. 우리는 그저 시조님의 모습을 한 괴뢰가 있다는 소리에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찾아갔을 뿐이다.”
“음, 그래서? 찾아가서 어찌 되었다는 것이냐?”
“우리가 갔을 때에는 이미 일이 끝난 다음이었다.”
“뭐라고? 그런 거짓말을 하다니! 그 일을 알고 있는 모든 이들이 평씨 가문의 행사라고 증언하고 있는데, 그들이 모두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냐?”
“그건 변명의 여지가 없이 꼬여버린 일이라 입을 다물고 있었을 뿐이다.”
“맞다. 조부님 말씀처럼 우리가 한 일이 아님에도 변명할 길이 없었다.”
“음, 판단은 내가 할 테니 상황을 말해 봐라.”
“오해를 풀기 위해 대답을 해 주는 것이지 네가 두려워 말을 하는 것이 아님은 알아둬라.”
평종윤은 어떻게든 자존심을 세우고 싶었던지 그렇게 말꼬리를 달았다.
하지 만 장우로선 아무래도 좋은 일이 었다.
일단 이야기를 들어보고 상황에 맞춰서 판단하고 그에 따라 행동을 하면 그만이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체면을 세우고 싶다면 마음대로 해라. 내게 중요한 것은 진실뿐이니까.”
“끄응, 좋다. 일단 이야기를 먼저……"
평만래는 면목이 없다는 듯이 뒷짐을 지고 먼 산을 바라보는 동안에 후손인 평종윤이 설명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의 말에 따르면 문제의 발단은 장우라는 모양이었다.
어느 날, 고성의 평씨 가문에 화신기 후기의 여성 수사 하나가 찾아왔다고 했다.
그녀의 정체는 다름 아닌 해미정(核美靜).
과거 장우가 구수신귀와 얽힌 의뢰에서 만났던 바로 그 수사였다.
그녀는 어떻게 알았는지 평부령이 죽은 것도 알고 있었고, 그런 평부령의 유산을 장우가 모두 챙긴 것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평씨 가문을 찾아와서 그들의 시조인 평부령이 죽었고, 그 유산을 누군가 가지고 있다고 알렸다.
그 와 함께 수중 세계 어딘가에 그가 있다는 이야기도 해 주었다.
당연히 평씨 가문에서는 난리가 날 수밖에 없었고, 그 말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수중 세계를 살펴볼 수밖에 없었다.
“휴우, 그것이 바로그 선자의 노림수였던 것이지.”
평종운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평만래가 결국 답답하다는 듯이 깊은 한숨을 쉬며 끼어들었다.
“해미정(咳美滯) 수사가 찾으려 했던 것은 평부령 괴뢰가 아니라 나였던 거 같은데?”
장우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그렇게 중얼 거렸다.
“그렇지. 우리 역시 그것을 기대하고 눈과 귀를 풀었던 것이지.”
“그러다가 운이 좋게도 평부령의 괴뢰를 발견했다는 거군?”
“그렇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곧바로 내가 달려갔었지. 하지만……"
“뭐지?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거냐?”
“안 믿겠지만 내가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괴뢰가 박살난 뒤였다.”
“음? 그럼 그 짓을 한 것이 해미정임도 짐작했을 텐데?”
“그렇다.”
“그런데 왜 가만히 둔 거지. 내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 당시의 일에 대해시 이리저리 알아봤지만 그 어디에도 해미정에 대한 이야기는 없던데?”
“평씨 가문이 다른 수사에게 크게 속았다는 이야기를 어찌 한단 말이냐? 게다가 상대는 화신기 후기의 수사, 그것도 역량이 출중한 외부 세계의 수사인데
“허어, 겁을 먹은 거였어? 그래서 그냥 당하고도 입을 쳐 닫고 있었다는 거야?”
평만래의 기가 막힌 말에 장우의 목소리가 커지며 험한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 무슨 망발이냐? 따지자면 우리가 너에게 무슨 잘못을 했다는 말이냐?”
장우의 말에 평만래는 민망한 듯 시선을 내리며 대꾸를 하지 못했다.
하지만 후손인 평종윤은 그런 조상의 모습에 도리어 장우에게 삿대질을 하며 화를 냈다.
“너희 평씨 가문이 조용히 지내고 있는 내 제자를 찾아서 그 해미정에게 들어 바친 것이 아니냐. 그런데 잘못이 없다고?”
“돌아가신 시조를 찾는 것이 어찌 잘못이란 말이냐. 우리는 단지 시조님을……"
“평부령의 유산을 탐낸 것이겠지. 해미정은 그것을 이유로 너희를 꾀었을 것이고.”
장우는 변명을 하려는 평종윤에게 그렇게 일침을 가하고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입을 닫았다.
그러다가 잠시 후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평만래를 향해 물었다.
“좋다. 이왕 지난 일이니 다른 것은묻지 않겠다. 다만, 내 제자는 어찌 되었느냐?”
“그것은 우리도 알지 못한다. 우리 역시 해 수사에게 속은 것을 알고 그녀를 찾으려 했지만 이후로 종적을 찾지 못했다.”
“그렇다. 우리라고 당하고만 있고 싶었겠느냐? 감히 우리를 농락한 대가를 받으려 했으나……"
“해미정이 화신기 후기인데, 너희가 감히 그녀를 어찌 해 보려 했다고? 그 말을 믿으란 것이냐?”
두 수사가 장우에게 항변했지만 장우는 뻔히 짐작이 된다는 듯이 그렇게 일축했다.
이에 두 수사는 낯빛을 붉히고 제대로 눈을 맞추지 못했다.
하여간, 이쪽 수중 세계의 수사들은 뻔뻔하지를 못한 거 같아요. 순둥순둥한 면이 있다고 할까요?
그 모습에 몽이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외부와 교류가 많지 않아 그런 것도 있겠고,범인과 많이 어울려 살다보니 독해지지 못한 것도 있겠지. 이곳에서 큰 혈사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하긴, 범인들을 도구처럼 부리거나 제물로 삼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하긴 했죠. 좀 순한 맛이긴 해요.
‘그나저나 해미정, 그 녀가 그냥 떠나진 않았겠지?’
그럼요. 아마 장우 님의 소식이 퍼지면 반드시 모습을 드러낼 게 분명해요.
‘그렇겠지. 으음.’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해미정의 행보에 장우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우리의 짓이 아니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