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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고지기 장 선인의 시험 >
장우가 일하게 된 지조각(紙造閣)은 말 그대로 종이를 만드는 곳이었다.
하지만 종이라 해서 범인들이 사용하는 것과 같은 종이를 만드는 것은 아니었다.
그곳에서 만드는 종이는 모두 수사들이 사용하는 것으로 영기를 품게 만들어지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몽이 네가 깨어난 것이 영기 때문이라고?"
- 맞아요. 하지만 지금 있는 곳은 너무 비좁아요. 좀 넓었으면 좋겠어요.
"응? 어디 있는데?"
-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너는 지금 여기 나와 있잖아. 그런데 비좁은 곳에 있다니? 여기가 비좁다는 말은 아니지?"
- 당연히 그건 아니죠. 저는 여기서 장우 님과 대화를 하고 있는 거예요.
"내 눈앞에 있는 너는 뭔데?"
장우가 몽을 손가락으로 콕 누르며 물었다.
그런데 장우의 손가락이 몽의 몸을 거침없이 통과해 버렸다.
"어? 괜찮아?"
장우가 깜짝 놀라 손을 빼며 물었다.
- 네,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 그래? 그럼 다행이네."
장우는 괜찮다는 몽의 말에 안심하면서도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뭔가 몽에게 크게 잘못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오늘도 시간 맞춰 왔구나."
그 때, 장우가 지조각의 부속 건물 중 한 곳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던 연신기 수사가 장우를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영고 선인님."
장우가 그녀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영고라 불린 수사는 삼십대 후반의 여성 수사로 지조각의 여러 일들 중에서 완성된 종이를 규격에 맞게 잘라서 묶는 일을 관장하는 수사였다.
장우는 영고 밑에서 그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장우 이외에도 십여 명이 더 있었는데, 그 중에는 입문 제자도 있고, 장우처럼 입문을 기다리는 예비 제자도 있었다.
하지만 모두의 공통점은 아직 영기 운용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영기 운용을 시작하면 연신기 1단공이라 하여 수사의 지위를 얻게 되는 것인데, 입문 제자라 하더라도 자질에 따라서 1단공에 이르는 기간이 달랐다.
때론 재능이 부족한 경우에는 십여 년이 지나야 겨우 1단공에 드는 제자도 있다고 했다.
"가서 일을 시작하거라."
영고는 출입문을 열어 장우를 들여보내며 명령을 내렸다.
장우는 자신의 자리로 가서 탁자에 쌓인 종이를 분류하여 묶기 시작했다.
- 그거요. 그거 흠이 있어요.
"응? 흠? 어디?"
- 반대쪽 면에요, 네, 거기 오른쪽 귀퉁이에서 약간 아래쪽.
"아, 여기 있구나."
장우는 오늘도 몽의 도움을 받아서 실수 없이 작업을 이어갔다.
재미있는 것은 몽이 제 멋대로 돌아다녀도 누구 하나 몽의 존재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몽이 제멋대로 다른 수사들 앞에서도 나타났다 사라졌다 했기 때문에 알게 된 일이었다.
그래서 그 후로는 마음 놓고 몽과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또 혼잣말을 하는구나. 그것은 그리 좋은 습관이 아니라 했거늘!"
그런 장우의 모습에 영고가 야단을 졌지만 그렇다고 억지로 금지하거나 하지도 않았다.
소곤소곤 떠드는 말소리일 뿐이라 종이를 펄럭이며 나누고 묶는 소리에 비하면 거슬릴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장우가 잘못 만들어진 종이를 찾아내는 재주가 뛰어나서 혼잣말 정도는 너그럽게 봐 줄 수 있었다.
영고는 장우가 특별히 영기에 대한 감각이 뛰어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장우가 종이에서 찾아내는 홈이라는 것은 일반적인 흠집이 아니었다.
그것은 대부분 영기가 잘못 입혀진 것들이라 범인처럼 눈으로만 봐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중에 크게 될 아이다. 이제 입문식을 거치고 수련 공법을 얻게 되면 나보다 훨씬 빨리 성취를 얻을지도 몰라. 그러니 괜히 밉보일 일은 하지 말아야지.' 영고는 또 이런 생각도 하고 있었기에 장우의 지조각 생활은 나름 순조로운 편이었다.
"영고 선인님, 일이 끝났는데 돌아가도 될까요?"
그 때, 장우가 종이 분류와 묶음을 끝내고 영고에게 물었다.
그 물음에 영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기 할 일을 마쳤으면 당연히 먼저 돌아가도 된다. 여기 있는 누구나 마찬가지다. 제 할 일을 제대로 하기만 한다면 문제될 것이 없지."
영고는 장우뿐만이 아니라 같은 일을 하는 모두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장우처럼 확실하게 일을 할 수 있는 아이들이 없었으니 그건 그저 말 뿐이었다.
종이를 잘못 분류하게 되면 크게 경을 치기 때문에 해가 저물기 전까지 몇 번이나 살피고 또 살핀 후에 분류를 마치는 것이 아이들의 일이었던 것이다.
영고는 그 과정이 영기에 대한 감각을 키우는 훈련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굳이 아이들에게 알려주지는 않았다.
영고 자신도 연신기 1단공에 들기 전에 비슷한 일을 했지만 그 때도 누구 하나 그런 것을 일러준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 내일 또 뵙겠습니다."
영고가 잠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장우가 다가와 인사를 하고는 건물 밖으로 나갔다.
영고는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자신의 일을 시작했다.
아이들이 분류해서 묶은 종이를 감수하는 것이 그녀의 일이었다.
그녀가 손바닥을 뒤집어 당기는 시늉을 하자 장우가 있던 탁자에서 다섯 종류로 구분된 종이 묶음들이 열을 지어 날아왔다.
영고는 그 종이들을 세심하게 살피며 혹시 장우가 실수한 것은 없는지 찾았다.
하지만 오늘도 장우는 어떤 실수도 없이 깔끔한 결과를 만들어 놓았다.
영고는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장우가 분류한 종이들을 등급 별로 쌓여 있는 다른 종이들에 올려 놓았다.
그 모습을 힐끗 거리던 아이들은 부러운 눈빛으로 장우가 나간 문을 보다가 다시 제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 때, 장우는 지조각에서 나와서 삼선문의 여기저기를 구경하고 있었다.
물론 장우가 갈 수 있는 곳은 극히 제한되어 있어서, 입선각 아이들이 일하고 있는 곳들을 찾아다니는 것이 고작이었다.
"누구냐?"
"안녕하세요. 저는 입선각에 있는 장우라 합니다."
"어? 입선각? 그런 아이가 이 시간에 왜 혼자 돌아가니고 있지?"
"저는 지조각의 영고 선인님 밑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할 일을 마치면 자유롭게 놀 수 있는 시간을 주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동기들이 일하는 곳을 구경다니고 있습니다."
"음? 영고? 그녀가 그러 넉넉한 이가 아닐 텐데?"
장우의 말에 조향청(調香廳)의 수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영고가 그럴 사람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고 밑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이렇게 여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면 뭔가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자 자연스럽에 얼굴 표정을 부드럽게 하게 되었다.
"그래? 재주가 아주 뛰어난 모양이구나? 그런데 너는 여기가 무엇을 하는 곳인진 알고 왔느냐?"
"적혀 있는 현판을 보니 향을 만드는 곳인 듯 싶습니다."
장우는 수사의 물음에 그렇게 대답했다.
조향청이라 적혀 있으니 당연히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옳다. 옳기는 옳은데 이곳에서 만드는 향이란 것은 네가 알고 있는 범인들의 것과는 또 많이 다르다. 너는 그것에 대해서 들어보겠느냐?"
"네? 가르침을 주시겠다고요? 그럼 당연히 감사하며 배울 일이지요. 정말 감사합니다."
장우가 활짝 웃으며 몇 번이나 그 수사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장우는 그런 식으로 매번 지조각의 일을 빨리 마치고 삼선문의 외문 곳곳을 다니며 여러 일들을 배워 나갔다.
***
시간이 흘러 장우가 입선각에 들고 열 달이 흘렀다.
그리고 오늘도 장우는 영고가 준 일을 빠르게 끝내고 어디론가 바삐 달려가는 중이었다.
"장 선인님, 장 선인님. 계시지요?"
그리고 급하게 뛰어간 장우가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허름한 창고였다.
창고 문은 닫혀 있었지만 장우가 양쪽 문고리를 한꺼번에 잡고 당기자 거친 소리를 내며 빼꼼하게 열렸다.
장우는 그 틈으로 몸을 구겨 넣어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항상 그랬던 것처럼 창고 문은 안으로 들어온 장우의 엉덩이를 칠 듯이 빠르게 닫혀 버렸다.
쿠궁!
"이크!"
장우는 등 뒤에서 들리는 문 닫히는 소리에 움찔 놀랐지만 벌써 몇 번 경험한 일이라 처음처럼 놀라진 않았다.
"장 선인님! 장선……”
"시끄럽다 이 놈아. 귀청 떨어지겠네!"
장우가 다시 누군가를 부르자 창고의 어둠 속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장우는 활짝 웃으며 그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달려갔다.
창고 안에는 길게 만들어진 보관대가 네 개나 놓여 있어서 입구에서 다섯 갈래의 통로를 만드는데, 자칫 아무곳이나 들어갔다가는 큰 낭패를 본다.
장우가 처음 이 창고에 들어왔을 때에는 그것도 모르고 중앙 통로로 걸어 들어갔다가 엄청난 고생을 했다.
그리고 그 고생이 이후 장씨 성을 가진 선인과 묘한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되었었다.
"클클, 오늘은 좀 더 빠르구나?"
장우가 목소리를 따라서 제일 오른쪽의 통로로 들어가자 몇 걸음 걷지 않아 장 선인을 만날 수 있었다.
장 선인은 성만 가르쳐 주고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는데, 얼굴에 흰 수염이 가득하면서도 피부가 어린아이 피부 같이 부드럽고 생기가 넘치는 노인이었다.
"오늘은 맞출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러니까 빨리 해요."
장 선인이 뭐라고 하건 상관없다는 듯이 장우가 뭔가를 재촉했다.
그러자 장 선인이라 불린 수사는 개구진 웃음을 지으며 소매에서 뭔가를 꺼내 허공에 차례로 늘어놓았다.
그런데 그것들은 창고의 선반에 버려져 있을 것 같은 낡은 물건들이었다.
털 빠진 붓, 이빨이 나간 참빗, 색이 빠진 노리개, 검은 곰팡이가 낀 표주박, 금간 옥반지, 장 선인은 그것들을 장우 앞에 띄워 놓은 것이다.
"자, 어떤 것이냐?"
그리고 장우를 보며 그렇게 물었다.
장우는 장 선인의 말은 듣지도 못했다는 듯이 오직 다섯 가지 물건에만 정신을 집중했다.
- 이거요, 이 노리개가 제일 좋아요.
그리고 그런 장우의 눈앞에는 장 선인도 알아보지 못하는 몽이가 열심히 노리개를 손으로 두드리고 있었다.
하지만 장우는 몽의 말에 흔들리지 않았다.
'두 번이나 저 녀석 말이 틀렸단 말이지.'
이번이 세 번째 기회였고, 또 마지막 기회였다.
장 선인은 장우가 자신의 시험을 통과하면 좋은 것을 가르쳐 주겠다고 했는데, 이번이 그 마지막 기회였다.
처음 창고에 들어왔을 때, 금제에 빠졌는데도 그 금제에서 제 힘으로 빠져나온 장우를 보고 장 선인이 생각해낸 시험이자 보상이었다.
당시에 금제에서 빠져 나오는데 몽이 큰 도움을 줬는데, 장 선인의 시험에선 두 번이나 몽이 때문에 실패를 하고 말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장우 자신의 실력으로 문제를 풀겠다고 벼르고 온 참이었다.
"으음."
하지만 아무리 봐도 자신의 결론도 몽의 그것과 같았다.
그리고 이전 두 번의 시험에서도 그랬다.
몽이 먼저 선택을 했지만 장우 역시 몽이와 같은 결론을 내리고 답을 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두 번이나 모두 틀렸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아직 찾지 못했느냐?"
그 때, 장 선인이 장우를 놀리듯 웃으며 물었다.
장우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가 눈을 크게 뜨고는 색깔이 빠져서 회색으로 보이는 노리개를 잡았다.
"이거요."
"오호? 정말이냐?"
"네."
"너도 알겠지만 네가 잦은 것은 전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물건은 달라도 본질은 이전의 것과 같지."
"하아, 그래요? 그럼 또 틀린 거네요?"
장우는 선인의 말에 깊은 한숨을 쉬고 말았다.
"글쎄다, 그렇기도 하고, 또 아니기도 하지."
그런데 장우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대답이 장 선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건 또 뭐예요?"
장우가 물었다.
"네가 세 번 모두 본질이 같은 물건을 골랐다는 것은 뭔가 있다는 것이겠지."
장 선인은 그렇게 말을 하고는 소매를 휘저었다.
그러자 장우 앞에 띄워 놓았던 물건들의 모습이 확 바뀌었다.
거기에는 이전과 달리 영기를 품어 희미한 빛을 내는 물건 다섯 개가 나타나 있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장우가 놀라 장 선인을 보며 물었다.
< 창고지기 장 선인의 시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