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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깔끔하게 죽거나 구질구질하게 살거나 >
사세연합과의 협상은 어렵지 않게 마무리가 되었다.
길우몽이 자미혈궁과 충림을 이미 멸계 본계로 돌려보낸 이력이 있었다.
그러니 사세연합이 길우몽을 믿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사세연합이 멸계로 돌아가는 것은 수미 세계의 입장에서도 멸계전의 승리를 굳힐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니 끝까지 싸워 굳이 피를 볼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귀환진을 발동시킬 수 있는 길우몽에겐 엄청난 수련자원을 대가로 주기로 했으니 길우몽이 계약을 깰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실제론 그렇게 하지 않으실 거잖아요."
높은 허공에서 대상총으로 들어오는 사세연합 수사들의 모습을 살피는 중에 유정정이 연꽃을 타고 건우 옆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그녀는 건우가 사세연합을 그대로 멸계로 돌려보내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굳이 대상총과 진대상총에 그토록 고심어린 진법을 설치할 이유가 없었을 테니까.
"음, 솔직히 그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기는 하오."
건우가 어두운 표정으로 발 밑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사세연합의 수많은 수사들이 대상총이 있는 분지를 가득 채워가는 중이었다.
각각의 세력과 경지에 따라서 적당히 자리를 잡고 때를 기다리며 명상을 하거나 가까운 수사들과 담론을 펼치고 있었다.
"상공께서 원하시면 저들 모두를 멸계로 보낼 수도 있지 않나요? 한 번에는 어렵다고 하더라도 몇 번 나누어 보내면 될 터인데요."
유정정은 건우가 사세연합을 몰살시키는 것을 탐탁지 않아 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렇게 물었다.
싫은 일이라면 하지 않으면 될 일이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일이 간단치 않소."
그런 유정정을 보며 건우가 말했다.
"문제가 있는 것이군요? 무슨 문제여요?"
유정정이 물었다.
"이번 멸계전이 끝나게 되면 수미 세계는 선계로 편입되게 될 것이오."
"그야 당연하지요. 모두 그걸 위해서 애쓰고 있는 것이 아니어요?"
"하지만 따지고 보면 수미의 수많은 수사들이 이번 멸계전에서 무슨 일을 했단 말이오?"
대상총이 위치한 분지에 진법이 발동하며 은빛 안개가 분지에 가득 찼다.
그런 분지를 포위하고 수미 세계의 영기 수련 수사들이 새까맣게 몰려들었다.
"모두 공격하라! 멸계의 졸자들을 쳐 죽여라!"
"저들을 멸하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음이다."
"물러나지 마라!"
"죽여라! 몸을 아껴 동도를 위태롭게 하는 놈은 내가 직접 때려 죽이겠다!"
"뭣들 하느냐! 이곳에선 멸계 놈들이 제 힘을 절반도 쓰지 못한다. 이런 때에 공을 세우지 못하면 언제 세울 것이냐!"
"태령기 수사들은 뭣들 하느냐? 죽음을 각오하지 못할까!"
실로 엄청난 숫자의 수사들이 몰려들어 대상총 분지로 뛰어드는데, 화신기 밑의 경지는 보이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사세연합 멸계 수사들 전체의 숫자보다 몇 배는 많은 숫자였다.
"이, 이게 어찌 된 것이냐! 왜 귀환진이 발동하지 않은 것이야!"
"크크크 보면 모르겠느냐? 우리는 완전히 속은 것이다. 길우몽 그 놈이 귀환진을 발동하지 않고 도리어 극멸기를 억제하는 진법을 펼쳤다."
"하하하하. 실로 담대한 함정입니다. 어찌 우리 사세연합 전체를 함정으로 끌어들일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보량현천주, 길우몽 그 놈은 생각만 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성공하기까지 했지요. 보십시오. 이곳이 우리들의 묫자리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상인문주는 어차피 수의를 입고 있으니 그대로 관으로 들어가면 되겠군. 그래서 그리 담담한 것이냐?"
"흑송림주, 말을 가려 해라. 우리끼리 싸워서 무얼한다는 것이냐?"
"사명당주!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이 나오느냐? 어차피 다 죽을 마당에?"
분지의 중앙, 사세연합의 네 수좌가 모여 있는 곳에서 작은 말다툼이 벌어졌다.
길우몽이 귀환진을 발동하기로 약속한 날짜가 되었지만 돌아온 것은 극멸기를 억제하는 진법이었다.
분지를 가득 채운 은색의 안개는 영기가 응결된 것으로 극멸기와는 상극이었다.
지금 분지에서 사세연합의 수사들이 극멸기를 사용할 때마다 그 은색의 안개에 위력의 절반 가까이가 줄어들고 있었다.
그러니 같은 경지의 영기 수련 수사를 상대로도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게다가 애초에 대상총 분지로 몰려든 영기 수련 수사들의 수도 멸계 수사들의 서너배는 넘었다.
원래 수미 세계의 수사들이 대상총의 분지로 몰려드는 것은 사세연합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분지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금제와 결계를 다수 설치했다.
그나마 지금 사세연합이 조금이라도 버틸 수 있는 것은 그렇게 만든 금제와 결계들 때문에 수미 세계의 수사들이 분지로 한꺼번에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봐야 약간의 시간을 벌 수 있을 뿐, 몰살이라는 미래를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교묘하군. 언젠가부터 사오리 소계에서 보충되는 전력이 줄어든다 싶더니, 자미혈궁과 충림이 고란사원을 쳐서 세력을 크게 줄였지. 그 후에는 자미혈궁과 충림이 각기 우리들을 회유하려 했었고."
"그 회유의 이유가 불순한 것 같아서 알아보니 그들이 우리를 도모하려 했었지."
"그래서 도리어 우리들이 그들을 이곳으로 몰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 둘은 그대로 멸계로 돌아가 버렸고, 우리만 이득도 없이 수미 세계에 남게 되었지요. 그 결과가 지금 이 상황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고 말입니다."
"알 수 없는 일이군. 길우몽 그 자는 어찌 하여 우리를 모두 죽이려 했을까? 우리를 그냥 멸계로 보내는 것이 더 이익이었을 텐데? 아니지, 클클클. 어쩌면 길우몽 그 놈이 세상을 더 크게 보았을 수도 있겠어."
이야기를 나누던 사세연합의 수장들 중에 흑송림의 림주였던 수사가 뭔가 깨달은 듯이 낮은 웃음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다른 세 수뇌들이 그에게 시선을 모았다.
허공을 가득 채우고 있는 영기만 아니라면 이곳이 멸계가 아닐까 의심했을 상황이었다.
"길게 설명할 시간도 없고,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다. 우리가 너희에게 제안을 할 것이 있으니 너희는 그것을 잘 듣고, 가부를 결정하면 그뿐이다."
그 때, 혹선풍이 네 명의 사세연합 수좌를 보며 감정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안?"
"무엇을 제안하겠다는 거지?"
"어쩐지 그 제안을 거부할 수는 없을 것 같군요."
"거부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군요. 그만한 위기에서 우리를 이곳으로 부른 것을 보면."
혹선풍의 말에 네 수좌들이 연달아 떠들었다.
그리고 단지 한 마디씩 했을 뿐인데, 보량현천주와 상인문주에 이르러서는 길매와 흑선풍이 제안할 내용에 대한 가치 매김이 끝났다.
목숨을 잃는 것보다는 덜하겠지만 그에 준할 정도의 제안을 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 것이 뭐가 있을까?'
네 수좌들의 생각을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길매의 말은 충분히 네 수좌의 목숨과 가치를 따질 법한 내용이었다.
그냥 죽음을 받아들이거나 제안을 받아들여 죽은 것만큼 험한 미래를 살 것이냐.
"네 분께선 아실지 모르지만 저희에겐 쓸만한 수하들이 많지 않습니다. 게다가 괜찮은 놈들이 있다 하더라도 거느리기가 쉽지 않지요."
길매는 그렇게 말을 하고는 천천히 사세연합의 네 수좌와 한 번씩 눈빛을 마주쳤다.
"우리 권속이 되어 멸계로 돌아가거나 혹은 이곳에 남아 명예롭게 최후를 맞이하거나! 내용은 간단하지요? 그러니 빨리 결정하길 바라요. 모두 넷이니, 저에게 두 분, 충림주께 두 분으로 나누면 되겠네요. 호호호호."
그 말에 네 수좌가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이 놀라는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떴다가 잠시 후 모두 눈을 질끈 감았다.
< 깔끔하게 죽거나 구질구질하게 살거나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