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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두족의 회심의 한 수가 홍률상을 깨우다 >
"허억! 허억! 대단하군. 그 끝없는 영기의 크기에는 진정 감탄할 수밖에 없겠구나."
= 그러는 네 놈의 의념도 지긋지긋할 정도로 강력하고 광대하구나. 어찌 그럴 수가 있지?
"네 놈이 할 소리는, 허억 아닌 듯 한데? 실로 태고부터 존재했던 종족신의 의념이란 무섭구나."
건우는 홍률상의 머리에서 백여 리 떨어진 허공에 몸을 세우고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런 건우의 앞에 있는 홍률상의 모습은 참혹하다 할 정도였다.
멋지게 뻗었던 세 쌍의 상아 중에 다섯 개가 부러지고, 온전한 것은 하나뿐이었다.
게다가 넓은 양쪽 귀도 절반 이상이 찢기고 잘려서 흉측했다.
그 외에 홍률상의 거대한 몸통이나 다리, 긴 코도 여기저기가 깊게 파여 정상이 아니었다.
그동안 건우와 싸우며 생긴 상처들이었다.
물론 홍률상의 몸은 생체가 아닌 흙과 돌로 이루어진 것이라 피는 흐르지 않았다.
홍률상의 시조가 상두족이 만든 흙인형이었던 뿌리가 드러나는 모습이라 할 것이다.
= 헤아릴 수 없이 긴 시간, 수많은 상두족의 기원과 염원, 믿음과 신앙을 받아먹으며 커온 나다. 그런 내 의념을 네가 버티는 것이 도리어 이상한 일이지. 하지만 이제 그것도 끝이다.
건우는 겉으로 아무 상처도 보이지 않는데, 홍률상은 온 몸에 전투의 흔적이 가득하다.
홍률상은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팽팽하게 겨루던 의념 대결의 저울추가 서서히 홍률상에게로 기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번에 쓸 수 있는 의념이나 기운에는 한계가 있지만 끌어 낼 수 있는 총량은 거의 한계가 없는 홍률상.
때문에 3년 동안 이어진 싸움에서 결국 건우가 패색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의외였지. 쌓아 놓은 영기의 양이야 짐작을 했지만, 네 놈의 의념 역시 상두족들로부터 보충을 받을 수 있을 줄은 몰랐다."
= 크하하하. 그것이 바로 나, 대홍률상의 위엄이 아니겠느냐. 상두족들이 있는 한, 영계에서 나를 어쩔 수 있는 존재는 절대 없다!
"그래, 그건 싸워본 나로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구나."
건우는 결국 대상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건우는 여유를 잃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 너는 궁지에 몰려서도 그런 것 같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구나.
홍률상이 그런 건우를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지금 이 순간에도 건우가 부리는 일천 개의 성광검과 홍률상의 술법들이 곳곳에서 충돌을 일으키고 있었다.
3년을 끌어 온 싸움이었다.
홍률상은 적어도 보름 정도는 지나야 건우를 완전히 제압할 수 있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쨌건 패배는 결정된 상황인데 건우의 태도가 너무 여유로웠다.
"하하하. 네가 나를 이길 수 있는 이유는, 내가 내 의념으로 너의 의념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기 때문일 뿐, 내 의념은 양이 부족할 뿐 너보다 강력하다."
= 강하기로 치자면 그렇겠지. 하지만 나는 끝없이 샘솟는 의념을 지녔기에 질보다 양으로 너를 상대할 만 하다.
"그래, 그것이 네가 나를 이기는 이유가 되었지. 하지만 이러면 어떨까?"
건우가 그렇게 말을 하며 한쪽 허공을 향해 오른손 손바닥을 내밀었다.
홍률상은 건우가 무슨 짓을 하든 그것을 막고 싶었지만 아직은 건우에게 직접 힘을 을 상황은 되지 못했다.
건우의 몸을 휘감고 있는 황금색의 광채.
즉 태령기 완경에 이른 금강패갑공을 뚫을 수 있는 방법이 홍률상에겐 없었기 때문이다.
홍률상이 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술법은 쇠사슬 열두 개를 한꺼번에 사용하는 것인데, 그조차도 건우의 금강패갑공은 뚫지 못했다.
도리어 그런 강력한 공격을 하면 그 공격을 흡수해서 반격하는 것을 몇 번이나 경험한 홍률상이었다.
"호호호. 상공, 부르셨어요?"
홍률상이 건우의 행동을 말리지 못하고 눈만 멀뚱거리는 사이에 건우의 손바닥 위에 활짝 핀 연꽃에 앉은 유정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 어? 어찌?
그 모습에 홍률상이 기겁을 하며 놀랐다.
진대상총은 자신의 상아가 없으면 들어올 수 없는 곳이다.
진대상총으로 들어오는 관문에 담긴 권능은 무척 강력한 것으로 상두족의 기원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홍률상이 사용할 수 있는 일반적인 힘과는 차별될 정도로 강력한 권능이 담겨 있는데, 그것을 속이고 들어왔다니.
홍률상으로선 도저히 믿기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이다.
"정정, 어서 오시오."
"오랜만에 직접 상공을 뵈오니 이리 좋을 수가 없습니다."
정정이 연꽃 방석에서 일어나 몇걸음 걸어 건우의 엄지손가락에 머리를 기대며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삼두육비의 건우를 바라봤다. 그 모습에 홍률상의 눈에 번개가 튀었다.
= 감히! 이것들이 부끄러움을 모르는구나!
"흥! 금수를 앞에 두고 무슨 부끄러움을 찾아야 한다는 거지? 네가 부부의 정을 알기나 하느냐?"
= 뭐? 뭐라?
홍률상이 고함을 질렀지만 되돌아온 유정정의 반격에 몸만 부들부들 떨었다.
그 때문에 애꿎은 삼백육십 쇠사슬만 차르르르르 잘게 요동을 쳤다.
"자, 이제 정정 수사도 왔으니 끝을 보자꾸나."
건우가 그런 홍률상을 보며 세 개의 얼굴 모두에 미소를 띄우고 말했다.
= 어찌 한 것이냐? 이미 입구를 틀어막아 열쇠 상아가 있더라도 들어오지 못하는데, 저 년이 어찌 들어왔지?
"뭐, 뭐라고! 저 년?! 상공, 저 덩치만 큰 코끼리 놈이 명을 재촉하네요. 어서 목을 쳐 버리지요."
홍률상의 말에 유정정이 발끈했다.
그러자 건우도 여섯 개의 눈을 부릅뜨며 일천 성광검을 불러들여 하나로 모으고 홍률상의 이마를 겨누었다.
지금껏 일천 개의 성광검을 하나로 모은 공격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홍률상은 이전과 다른 위기감을 느꼈다.
그것은 건우의 손바닥 위에서 팔짱을 끼고 자신을 노려보는 유정정 때문이었다.
이미 유정정의 의념이 건우의 의념과 더해져 홍률상의 의념을 짓누르는 중이었다.
상두족 덕분에 끝없이 샘솟는 의념을 지닌 홍률상이지만 한 번에 펼칠 수 있는 양에는 한계가 있었다.
질로 따지자면 건우의 압승, 거기에 유정정의 의념까지 더해지니 홍률상이 버티기 어려웠다.
= 년놈들! 너희가 쌍수수련을 하였구나. 그래서 의념을 뒤섞어도 더욱 강력해지는 것이었어!
잠시 후, 홍률상이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소리를 질렀다.
"이제 알아차린 모양이구나. 하지만 이미 늦었다! 호호홋."
유정정이 그런 홍률상을 비웃었다.
그리고 건우가 유정정과 눈빛을 교환하더니 일천 개의 검을 모두 모은 일천성광검을 홍률상의 머리로 날려 보냈다.
= 이런다고 나를 어찌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나는 이미 불사의 존재이니라!
그런 건우의 공격에 홍률상이 고함을 질렀다.
홍률상의 머리 중앙에 기묘한 붉은 문양이 떠오른 것은 그 때였다.
"삼목(三目)!"
순간 유정정이 비명같은 고함을 질렀다.
홍률상의 이마에 새로운 눈이 하나 생겨난 것이다.
그 눈은 붉은 색의 신묘한 기운을 머금었는데, 건우는 그 눈을 보는 순간 어지러움을 느꼈다.
태령기 완경, 게다가 누구보다 강력한 의념을 지닌 건우의 정신을 위태롭게 만드는 힘이 그 눈에 담겨 있었던 것이다.
"요사스럽구나! 흥, 감히 어디서 수작을 부리느냐!"
그 때, 유정정의 몸에서 한 송이 연꽃 허상이 크게 부풀어 오르더니 건우와 유정정을 꽂송이 안에 담았다.
건우는 유정정이 펼친 정화 법칙의 힘으로 혼란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힘이 약해졌던 일천성광검을 추슬러 홍률상의 이마를 찔렀다.
건우의 일천성광검은 정확하게 홍률상의 세 번째 눈을 찌른 것이다.
= 크아아아! 이 노옴!
홍률상이 건우의 공격에 이전과는 달리 무척 고통스러운 듯 흥분하여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그 순간 건우와 유정정이 동시에 활짝 웃음을 지었다.
홍률상은 그 웃음에서 뭔가 크게 잘못된 것을 느끼고 불길한 마음이 들었다.
= 무, 무슨?
그 순간이었다.
쿠궁
아주 짧은 폭발이 홍률상의 내부에서 일어났다.
건우와 유정정도 그 폭발을 미약하게만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폭발 이후 홍률상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홍률상을 묶고 있던 삼백육십 개의 쇠사슬들에서 일제히 붉은 기운이 걷히며 원래 쇳덩이의 색으로 돌아갔다.
"성공한 모양이군."
"그런 거 같네요."
건우와 유정정이 대화를 나누었다.
지금 이 순간 홍률상의 내부에 있던 상두족 수사들이 홍률상의 환상 세계를 분리시키는 것과 동시에 의념 폭발을 일으킨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폭발시킨 의념은 일반적인 수사의 의념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들이 폭발시킨 것은 상두족이 홍률상에게 보내던 기원과 믿음과 신앙, 염원 등의 특별한 의념이었다.
그것이 크게 폭발하여 외부로 뻗어나가며 순간적으로 홍률상과의 연결이 끊어졌다.
아울러서 그와 때를 같이해서 홍률상의 내부에 있던 환상 세계마저 분리되어 버린 상황.
원래 그렇게 환상 세계가 분리되어도 그 안에 홍률상에 대한 믿음을 가진 이들이 있었다면 홍률상의 존재가 완전히 지워질 수는 없었다.
그런데 상두족의 대두두 등이 따로 분리한 환상 세계에는 홍률상에 대한 믿음을 가진 이들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철저한 검증을 거쳐서 홍률상을 신으로 모시는 이들을 걸러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환상 세계의 분리와 동시에 그렇게 걸러진 이들의 의념을 하나로 모아 폭발시킨 것이다.
스스슷! 스화화홧!
일이 성공했음을 직감했지만 그래도 긴장을 풀지 못하고 있는 건우와 유정정 앞에 상두족 수사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황금빛 상아의 대두두를 필두로 하여 태령기 완경의 수사들이 나타나고, 뒤를 이어서 경지 순으로 상두족이 나타났다.
그 숫자가 진대상총에 가득 찰 정도로 많았는데, 그들은 건우와 유정정에게 허리를 숙여 공수를 하고는 어디론가 다시 모습을 감추었다. 각 부족별로 고계 수사들이 따로 준비한 공간으로 옮겨간 것이다.
결국 이번에 구원받은 모든 상두족 수사들이 인사를 하고 사라지자 남은 것은 대두두와 경보를 비롯한 태령기 완경의 수사 여덟이었다.
"실로 고맙고 감사한 일입니다. 종족 전체를 대표하여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대두두가 그렇게 말하며 손을 모아 고개를 숙이자 다른 일곱 수사들도 똑 같이 손을 모아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
건우는 그들의 인사에 몸을 슬쩍 틀며 멋쩍은 표정을 지었고, 그런 건우를 보며 유정정의 얼굴에 웃음이 만개했다.
= 일이 그렇게 된 것이로군. 나 역시 두 수사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바이다.
그리고 바로 그 때, 어두워졌던 홍률상의 눈동자에 다시 빛이 솟구치며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두두, 저 홍률상의 말을 믿어도 되겠습니까?"
건우는 쉽게 방심하지 않고 대두두에게 확인하듯 물었다.
계획대로 되었다면 지금의 홍률상은 이전과 달라야 했다.
온전히 상두족의 기원과 염원만을 품은 존재여야 하는 것이다.
"지금도 저 홍률상의 속내를 모두 알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지요. 저 홍률상이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 하더라도, 어차피 이전의 홍률상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저 안에 과거의 홍률상과 같이 불순한 씨앗을 품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키우려면 긴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으음. 그렇다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괜잖습니다. 멸계전에서 승리하고 선계로 승격하게 되면 또 상황이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하긴 선계로 올라가 진선이 된다 해도 다른 고계 수사들이 많으니 함부로 상두족을 어쩔 생각을 못하겠군요. 오히려 자신을 위해서라도 상두족의 번영을 이끌어야겠지요."
"바로 그렇습니다. 그것이 뱃속에 우리 종족을 집어 삼키고 홀로 독존하는 것보다 훨씬 나은 방법임을 알 것입니다."
건우와 대두두는 그렇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홍률상 역시 그 이야기를 모두 듣고 있었다.
= 걱정할 필요 없다. 나는 상두족을 위한 존재이니.
홍률상은 그렇게 자신이 상두족의 종족신임을 천명했다.
하지만 건우는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종군요. 그럼 이제 마땅히 이번 일에 대한 대가를 받았으면 합니다만 그 사이에 생각이 바뀌거나 하지는 않았겠지요?"
건우의 관심은 상두족을 구해주고 받기로 했던 대가에 가 있었다.
"물론입니다. 가지고 가실 수 있다면 얼마든 가지고 가십시오."
그리고 대가를 요구하는 건우의 말에 대두두는 슬쩍 웃는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건우는 대두두의 웃음에 담긴 의미를 짐작했다.
'그 웃음이 얼마나 가는지 한 번 봅시다. 하하하. '
그리고 건우는 도리어 그런 대두두의 속내를 크게 비웃었다.
이어서 건우의 시선이 홍률상에게로 향했다.
"약속대로 홍률상, 네가 지금껏 쌓은 기운을 내가 거두어 가려 한다. 이는 상두족 대부분이 허락한 것이니 불만은 없으리라 믿는다."
= 가지고 갈 수 있는 만큼 가지고 가라. 상두족의 뜻이 그러하니 막진 않겠다.
건우의 말에 홍률상은 그렇게 말을 하고는 눈을 감아버 렸다.
말과는 달리 기운을 빼앗기는 것이 못마땅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건우가 아니었다.
건우는 곧바로 홍률상을 상대로 준비했던 술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잘 먹겠습니다!'
< 상두족의 회심의 한 수가 홍률상을 깨우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