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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상(大象)의 뱃속 회충(회회蟲), 경보(硬步) >
'누구십니까?'
경보는 따로 의념을 보내거나 혹은 술법을 사용할 수 없었기에 그냥 생각만으로 물었다.
오호? 내게 뭐라고 한 것이냐? 하지만 아직은 내가 너와 의식 연결을 할 수가 없구나. 대상(大象)의 눈을 피하기 쉽지 않음이다.
경보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목소리가 말한 대상(大象)은 홍률상(弘律象)을 말하는 것이리라.
자칫 자신과 이 낯선 여성 수사의 만남이 그 놈에게 들키기라도 하는 날이면 이 실낱같은 희망도 사라지고 말 것이다.
기다려 보거라. 우리 상공과 의논해서 방법을 찾아보고 다시 올 것이니.
말과 함께 의식으로 파고들던 희미한 기척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짧고도 짧은 만남.
경보는 자신이 꿈을 꾼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그러다가 혹시 이 낯선 여성 수사의 등장이 홍률상의 새로운 계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해 보았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홍률상이 얻을 것이 별로 없어 보였다.
고작해야 자신의 정신을 흔들어 조금 빠르게 무너뜨리는 이득 이외엔 홍률상이 얻을 것이 없다.
그리고 그런 정도라면 까짓 경보 자신도 아쉬울 것이 없었다.
지금만 봐도 그렇다.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낮선 목소리가 홍률상과 연관이 없을 수도 있다는 이 희망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가.
지금 느끼는 이 티끌같은 희망, 그 기대만으로도 이 암울한 상황을 훹씬 더 오래 버틸 힘을 얻지 않았나.
'제발, 기적이 일어나기를. '
경보는 오랜만에 누군가에게 기원을 올렸다.
하지만 그 기원이 이전처럼 종족신인 홍률상을 향한 것이 아님은 분명했다.
그렇게 다시 얼만지도 모를 인고의 시간이 경보의 정신을 억누르며 흘러갔다.
- 아직 정신을 차리고 있겠지?
그리고 억겁 같은 기다림의 끝에 드디어 그 보상이 돌아왔다.
예의 그 낮선 여성 수사의 목소리가 경보의 머릿속을 울린 것이다.
게다가 이번에는 그 목소리가 이전보다 훨씬 강렬해졌다.
그만큼 경보의 의식에 가깝게 접근했다는 이야기였다.
자, 내가 간단한 공법 하나를 전해 줄 테니, 잘 듣고 익혀 보아라. 다만 보면 알겠지만 이 공법은 단번에 성공을 해야 하니, 단단히 준비를 해서 펼쳐야 할 것이다.
그 목소리는 경보에게 그리 말을 하고는 신묘한 공법 하나를 일러 주었다.
경보는 그 공법을 듣고 조심스럽게 살피다가 그것이 혼을 나누는 종류의 것임을 알아차렸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공법을 펼치면 혼을 실과 허로 나눌 수 있는데, 오직 혼이 지닌 힘만으로 공법을 펼쳐야 한다고 했다.
봐서 알겠지만 의념이나 영기 따위를 움직이지 않고 혼의 힘, 혼력만으로 펼칠 수 있는 공법이다. 대신에 두 번 시도하기 어렵다. 왠지는 알겠지?
경보는 목소리가 걱정하는 바를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공법에 사용하는 힘이 혼의 힘인 까닭에 실패하면 혼에 미치는 후환이 매우 컸다.
성공하면 문제가 아닌데 실패하면 허와 실로 나누는 혼이 제대로 분리되지 않고 깊은 상처를 입게 되는 것이다.
결정은 네 몫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으로는 네게 희망이 없음을 알 테니 선택이야 뻔하겠지.
경보는 목소리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했다.
어차피 홍률상의 제물로 떨어질 바에야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도전해 보는 것이 옳다.
어차피 수사의 삶이란 것이 어디 녹록한 때가 있었나.
억천의 길을 걷는 수사가 위험에 스스로를 던지지 않고서 어찌 빛나는 보상을 얻을 수 있을까.
혼을 허와 실로 나눈 후에, 그 허를 대상(大象)에게 내어주고, 실은 스스로 영역을 구축해야 할 것이다.
이어서 공법을 사용한 후에 경보가 해야 할 일을 목소리가 일러주기 시작했다.
네가 있는 곳은 대상의 몸 속, 하지만 실제로 네 영혼은 다른 상두족 전체의 영혼과 함께 하나로 묶여서 환상세계에 갇혀 있다.
환상세계.
정확하게는 대상이 상두족을 현혹하여 실제라고 믿게 만든 곳을 말했다.
이를테면 대상의 몸에 들어와 잠든 상두족들은 그 환상 세계에서 대상이 이끄는 대로, 대상이 보여주는 것을 모두 진짜로 믿으며 사는 것이다.
자신들이 대상에게 제압되어 허상 속에 사는 것은 알지 못하고.
또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 결국 대상, 홍률상에 대한 믿음과 신앙만 충만하여 다른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영원토록 기도와 기원만 하며 그것이 옳다고 믿게 된다.
삶도 죽음도 의미가 없고, 오직 홍률상에 대한 찬양만으로 영원을 살게 되는 것이다.
너는 허혼(虛魂)을 대상에게 넘기고 실혼(失魂)으로 그 환상 세계에 들어가 부족 일원들을 깨워야 한다. 자, 일단은 공법을 펼쳐 대상의 감시에서 벗어난 후에 나와 이야기를 하도록 하자. 네가 공법을 펼칠 때까지 얼마든 기다려 줄 것이니 조급히 서둘 것은 없다.
경보는 여성 수사의 조언에 따라서 급해지려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공법을 궁구하기 시작했다.
'호호. 다행히 자질이 나쁘지 않은 녀석이군. '
유정정은 경보에게 공법을 전하고 경보의 의식이 이전보다 차분해진 것을 느끼고는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유정정이 경보에게 전한 공법은 건우가 유혼결의 일부를 뜯어내어 만든 것이었다.
이미 상두족 모두가 대상에게 영혼이 제압된 상태라 경보가 의념이나 영기를 움직여 뭔가를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 즉시 대상이 알아차릴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정정도 경보와 직접적인 의식 연결도 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건우는 그런 상황에서 쓸 수 있는 방법은 영혼은 둘로 나누어 그 중에 한 쪽을 대상에게 내어주는 것이 제일 손쉬운 방법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만든 것이 유혼결의 일부를 이용한 분혼(分魂) 공법이었다.
게다가 어차피 대상이 꾸민 일을 방해하려면 환상 세계로 들어가야 하는데, 환상 세계와 연결된 영혼이 있으니 딱 맞춤한 것이 아닌가.
물론 건우는 유정정이 찾은 상두족 수사가 청동상아 일족의 두두, 경보란 사실은 전혀 짐작도 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감사합니다.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정동상아 일족의 두두, 경보라 합니다. ]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건우가 내어준 분혼 공법을 완벽하게 깨우친 경보가 드디어 혼을 둘로 나누는데 성공했다.
경보는 허혼을 홍률상에게 넘기고 진짜 혼은 그 감시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 후에는 태령기 완경의 능력을 이용하여 홍률상의 환상세계에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했다.
그렇게 준비가 끝나자 곧바로 유정정에게 감사 인사를 한 것이다.
경보? 전에 상공께서 대상에게 너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대상은 네가 비석기둥 아래에 묻혔다고 했었지.
유정정은 경보의 이름을 듣자마자 언젠가 건우가 그 이름을 언급했던 것을 기억해냈다.
[상공이란 분께서 저를 아신단 말씀입니까?]
경보도 유정정의 상공이 자신을 안다는 말에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너는 건우란 이름을 모르느냐?
[건우 수사가 어찌 제가 그를 모르겠습니까. 건우 수사는 오래 전에 제가 지실곡(志室谷)의 혼돈역에서 만나 수미선문으로 안내한 바가 있습니다. 그 때에 건우 수가 곁에 마선 과 검선이란 수사도 함께 있었지요. ]
경보가 이전에 건우를 만났던 기억을 떠올리며 말했다.
흐응, 그런 인연이 있었구나. 하지만 네 언사가 너무 가볍구나. 건우 상공은 이미 태령기 완경에 이르러 이 유정정의 반려(伴侶)가 되셨으니 너는 매사 언행을 조심해야 할 것 이다.
유정정은 경보가 건우를 대하는 데에 거침이 없이 조심스럽지 못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이 그렇게 경고했다.
[그,그렇군요. 확실히 건우 수사는 수련자질이 뛰어난 바가 있습니다. 그 짧은 시간에 태령기 완경까지 이르렀으니 말입니다. ]
경보는 유정정의 말에 건우를 가볍게 대해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을 받고 그렇게 건우를 추켜세웠다.
아무튼, 지금 네가 펼친 그 공법 또한 상공께서 너를 긍휼(矜?)히 여겨 만들어 주신 것이니 그 은혜를 가볍게 보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를 말씀이겠습니까. 이 경보, 절대로 은혜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
그래. 그러면 되었다. 자, 이제 너는 내가 따로 이르지 않아도 어찌 해야 할지 알 것이다.
유정정도 경보를 몰아붙일 생각은 없다는 듯이 곧바로 앞으로의 일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물론입니다. 이곳 환상세계는 홍률상이 만든 곳이지만 이곳은 결국 우리 상두족인들의 영혼이 모여 유지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홍률상이라도 이곳에 마음대로 개입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이곳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 정말로 회심의 한 수라 할 수 있겠지요. ]
호호홋, 상공께서 이미 그것을 아시고 네게 알맞은 공법을 전한 것이 아니겠느냐. 그러니 너는 그곳에서 네가 회유할 수 있는 이들을 회유하여, 대상, 이니 홍률상이라 했더냐? 그 놈에 반하는 힘을 키우도록 하거라.
[물론입니다. 아마 어린 녀석들 보다는 수련 경지가 높은 이들의 마음을 돌리는 것이 훨씬 쉬울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홍률상의 더러운 수작을 알아차리는 일족이 늘어날수 록 홍률상은 궁지에 몰리게 되겠지요. ]
하지만 한동안은 조심해야 행해야 할 것이다.
[물론입니다. 선자님께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그래, 너희 상두일족의 미래가 네게 달렸음을 잊지 말고 조심, 또 조심해서 행하거라.
【네, 감사합니다. 선자님. ]
그럼 기회를 보아서 다시 찾아오마. 수고하거라.
유정정은 그렇게 경보와 일을 도모하고는 조심스럽게 대상의 몸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곧바로 건우에게로 와서 아공간으로 몸을 숨겼다.
* * *
우르르르르릉 쿠구구구구궁 !
"이게 무슨 짓입니까?! 대상!"
갑작스러운 지진과 함께 건우가 만들던 진법의 상당 부분이 뒤흔들렸다. 건우는 급히 영기를 끌어 올려 진법을 보호하는 것과 동시에 대상을 노려보며 고함을 질렀다.
= 무슨 수작을 부린 것이냐!
그런 건우를 향해 대상의 거친 의념이 쏟아졌다.
"무슨 말씀입니까? 수작이라니요? 제가 펼친 진법이야 이미 대상께서도 모두 보고 살핀 것이 아닙니까."
건우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삼두육비의 몸을 크게 부풀리고 허공에 몸을 띄우며 소리쳤다.
= 네가 한 짓이 아니라고? 이곳에 너 말고 누가 있단 말이냐? 일은 벌어졌는데 수작을 부릴 놈은 너 밖에 없지 않으냐.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도대체 무슨 일이 어찌 벌어졌다는 것인지를 먼저 이야기 하시지요. 그래야 제가 이해를 하지 않겠습니까?"
건우는 부지런히 손바닥을 뒤집어 영기를 뿜으며 대상(大象)이 무너뜨린 진법을 복구하며 짜증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그런 모습에 대상은 건우에 대한 의심을 버리지는 못했지만 마땅히 건우를 추궁할 빌미도 찾지 못했다. 그렇다고 자신이 상두족을 모두 제 뱃속에 가두고 연화하고 있다는 말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 아닌가.
= 고약하구나. 어쨌거나 지금 나에게 일이 생겼으니 너는 이만 이곳을 나가줘야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의심스러운 놈을 진대상총 안에 남겨둘 수도 없었다.
그래서 홍률상이 생각한 것은 건우를 진대상총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었다.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지금껏 내가 이곳에 투자한 것이 얼마나 되는지 알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게다가 이곳의 일이 제대로 되기만 하면 곧바로 수미 세계의 멸계전을 승리로 이끌 대공을 세울 것인데, 그것을 그만두라는 말입니까?"
진대상총 밖으로 나가라는 대상의 요구에 건우가 버럭 화를 내며 대상을 노려봤다.
= 내 영역에서 나가라 하는데, 감히 그것을 거부하겠다고?
그러자 대상 또한 버럭 화를 냈다.
쩌러러러렁! 쩌러러러렁!
그와 동시에 비석기둥에 묶여 있는 삼백육십 개의 쇠사슬이 일제히 요동치며 뒤흔들렸다.
건우는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이 요동치는 쇠사슬들의 모습을 훑어보며 혀를 찼다.
"쯧, 진정하시지요. 어차피 쇠사슬을 끊어낼 수도 없지 않습니까."
= 뭐라?
"저는 도무지 당신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무슨 일이 있기에 멸계전의 승리조차 안중에 두지 않고 이리 다급하고 졸렬한 일처리를 하려 하시는 것입니까? 제가 만든 진법을 이렇게 이유도 없이 깨트려도 된단 말입니까?"
건우가 그렇게 소리치며 손바닥을 뒤집어 일천성광검을 소환해 내었다.
그리고 곧바로 그 일천성광검을 분리하여 천 개의 검을 허공에 띄웠다.
별빛을 머금은 천 개의 검이 진대상총을 가득 채우며 검 끝을 대상에게로 향하고 예기를 뿜어냈다.
= 노옴!
"나는 마땅히 그 이유를 들어야 하겠습니다. 크게는 수미 세계의 안녕을 무시하고, 작게는 제 개인의 노고를 이리 폄하(敗下)한 것에 대해서!"
= 뭐라?
"내가 대상 수사를 높이 대해 주니, 대상 수사는 나를 아주 낮추어 본 모양입니다만, 지금 대상 수사는 선을 크게 넘은 듯 합니다."
우우웅 우우우웅!
건우의 말과 함께 일천 개의 성광검이 빛을 머금고 부풀어 올라 대들보처럼 커졌다.
그래봐야 대상에 비해서는 솜털만도 못한 크기지만 각각의 검에 깃든 기운은 절대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 이 노음. 여기가 어디라고!
대상 또한 건우의 적대적인 모습에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기운을 끌어 올렸다.
그러자 삼백육십 개의 쇠사슬이 붉은 빛을 머금고 맥동치기 시작했다.
< 대상(大象)의 뱃속 회충(蛔蟲), 경보(硬步)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