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3)
< 차라리 대상(大象)을 도모하는 것이 어떨까요? >
삼백육십육 개의 비석기등.
거기에 연결된 삼백육십 개의 쇠사슬.
"기둥은 물론이고 쇠사슬을 이루고 있는 고리 하나하나가 모두 고절한 수련 공법을 담고 있다."
"비록 영기 수련 공법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살펴도 도움이 될 것이 적지 않아요."
흑선풍과 길매는 진대상총의 비석기둥과 쇠사슬에 큰 감명을 받았다.
그것은 태고 시대부터 지금까지 상두족을 거쳐 간 모든 수련 공법의 총체였다.
연신기, 축기기, 성단기, 영체기, 화신기를 거쳐, 입령기, 성령기, 태령기에 이르는 길고 어려운 수련 과정이 그곳에 모두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오랜 세월 진대상총을 다녀간 수많은 상두족 수사들의 경험을 녹여서 만든 기둥과 쇠사슬이었다.
"태령기 완경에 이른 우리들에게 저계 술법이나 공법이야 별 소용이 없겠지만 우리와 비슷한 경지에 있었던 이들의 깨달음은 가히 금과옥조라 할 수 있겠지요. 정심을 다하여 궁구한다면 적잖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비석기둥과 쇠사슬의 가치를 높게 본 것은 건우 역시 흑선풍이나 길매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에겐 한가하게 그것들을 살피며 명상이나 하고 있을 여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눈앞에 먹음직한 잔칫상이 차려져 있는데 해야 할 일 때문에 그것을 외면해야 할 상황이었다.
이 때, 슬그머니 건우의 머릿속에 유정정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 상공, 차라리 대상(大象)을 사냥하는 것이 종지 않겠습니까?
'응? 정정, 그게 무슨 말이야? 대상을 사냥하다니?'
- 어차피 저 대상이란 존재는 정상적인 수사가 아닙니다. 그저 상두족이 만든 우상에 불과하지요.
'그렇다고 해도, 태령기 완경의 격을 지닌 존재를 단순히 우상이라고만 하긴 어렵지 않나?'
- 호호호. 그도 그렇긴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랍니까. 따지고 보면 저 대상이란 존재는 수미 세계의 근심거리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자칫하다간 상이산맥은 물론이고 수미 세계 전체의 재앙이 될 수 있음이지요.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 지금 이곳을 떠나 상두족을 찾고, 그들의 제사장을 데리고 돌아오는 것이 어디 간단한 일이겠습니까? 그렇게 제사장을 찾아 여기로 데리고 오는 것도 쉽지 않지만, 데려온 후에 대상의 협조를 얻는다 해도 바깥에 만든 함정과 이곳을 연계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리긴 하겠지. '
- 그러니 드리는 말씀이지요. 아예 대상을 도모하고, 대상이 축적한 영기를 상공께서 모두 차지하시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하지만 대상이 쌓은 기운을 내가 모두 차지한다 하여도 그것을 어디에 쓰겠소? 흡수하여 내것으로 할 수도 없는 것인데?'
- 호호호. 상공께서 굳이 흡수할 이유가 뭐가 있겠어요? 상공께선 공간 법칙을 쓰실 수 있으니 그저 대상의 기운을 따로 떼어내어 담아두시면 될 일이 아니겠어요? 그리 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에 끌어 쓰기만 해도 굉장한 도움이 될 텐데요.
'음. 정정의 말이 그럴 듯 하기는 한데……. 그러자면 일단 길매와 흑선풍을 밖으로 내보내어 상두족의 제사장을 찾도록 해야겠군. '
- 그리 해 두시고, 상공과 제가 힘을 모아 대상을 도모하면 되겠지요. 사실 보아하니 저 대상은 제 멋대로 힘을 쓰지도 못하지 않습니까.
'흐음. '
건우는 정정의 설득에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대상을 공격하는 것도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
- 상공과 제가 힘을 합치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꼭 대상을 완전히 죽일 필요도 없지요. 제압만 하고 감당하지 못하는 기운을 덜어내는 정도도 종지 않겠 습니까. 그리고…….
‘그리고 또 뭐가 더 있소?'
- 느껴 보시어요. 저 대상이 우상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그 내면에 강력한 진혈이 느껴지지 않으시는지요?
'진혈이라고?'
건우는 뜻밖의 말에 정신을 집중하여 무명공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무명공의 힘을 빌려 진혈을 찾기 시작했는데, 정말 유정정의 말처럼 대상의 내부에서 짙은 진혈의 기운이 느껴졌다.
정확히 어떤 진혈인지는 알 수 없지만 무명공에 활용할 수 있는 것임에는 분명했다.
- 어떠셔요?
유정정이 물었다.
<확실히 무명공에 반응하는 진혈이 있기는 하오. 그것도 매우 강렬한 반응인 것을 보아하니 귀한 진혈일 것이 분명하오. '
건우는 다른 것보다는 대상이 품고 있는 진혈이 욕심이 났다.
건우가 익히고 있는 여러 공법 중에서 그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이 무명공이었다.
그가 익히고 있는 나타결공법이나 금강패갑공 등의 공법이 모두 무명공에서 나온 것이니 당연한 일이다.
'그럼 이리 합시다. 일단 길매와 흑선풍을 내보내서 상두족을 잦게 하고, 동시에 나는 대상의 허락을 얻어서 바깥에 만든 진법 결계와 연동될 진법을 이곳에 설치하겠소. '
- 그리고요?
'정정 당신은 대상의 눈을 피해서 대상을 잡을 방도를 찾아보는 것이오. 당신은 상아를 가지지 않은 상태로 이곳에 들어왔으니 대상이 당신을 느끼지 못할 것이오. '
- 호호, 재미있겠네요. 솔직히 대상에게 들킨다 해도 걱정하진 않아요. 제가 보기에 대상은 상두족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에 불과하니까요.
건우의 말에 정정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진대상총의 상황은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유정정이 대상을 염탐하면서 생각지도 못한 사실이 밝혀지게 될 것은 건우도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건우는 길매와 흑선풍을 밖으로 내보내 상두족을 찾도록 했다.
그리고 따로 안배해 두었던 영기 수련 수사들에게도 은밀히 연락을 쥐해 상두족 제사장을 탐문하도록 했다.
그렇게 다시 시간이 흘렀다.
***
상공! 놀라지 말고 들으셔요.
'음? 무슨 일이오?'
건우는 진대상총의 삼백육십육 비석기등을 이용하여 진법을 구축하던 중에, 다급하게 들려온 유정정의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유정정은 지금껏 은밀히 대상(大象)의 약점을 잦기 위해 움직이던 중이었다.
그런 그녀가 연락도 없이 건우를 찾아와 의념을 전하는 것은 뭔가 일이 생겼다는 뜻일 것이다.
건우는 의념을 풀어 모습을 숨긴 유정정이 있는 곳으로 찾아 아공간 입구를 열었다.
'우선 아공간으로 들어오시오. 안에서 편히 이야기를 하는 게 좋겠소. '
네, 상공.
유정정은 건우가 시키는 대로 곧바로 아공간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건우에게 알릴 소식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조바심을 잠지 못하고 아공간에 들어가자마자 서둘러 이야기를 시작했다.
상공도 이 소식을 들으면 정말 놀랄 거예요. 제가 대상의 몸을 살피던 중에 무얼 발견했는지 아세요?
유정정은 평소와 달리 무척 흥분해 있었다.
그만큼 대단한 일이라는 뜻일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러시오? 조금 진정하시오. '
건우가 짐작한 어조로 유정정을 달랬다.
상공, 대상의 몸 안에 상두족이 있사와요.
그런데 이어진 유정정의 말이 도리어 건우를 놀라게 만들었다.
'응? 그게 무슨 말이오? 대상의 몸에 상두족이 있다니?'
드린 말씀 그대로여요. 상이산맥에서 모습을 감춘 상이족 수사 대부분이 대상의 몸 안에 있다는 말씀이어요.
'아니! 그렇다면 대상이 어째서 그것을 숨겼단 말이오? 그럴 이유가 없지 않소?'
건우는 생각지도 못한 유정정의 말에 깜짝 놀라 물었다.
대상이 상두족을 보호하고 있다면 굳이 밖에서 제사장 따위를 찾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재미가 있다는 것이지요. 지금 대상의 몸 안에 있는 상두족들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어요.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면?'
아마도 대상이 상두족들을 모두 장악해버린 모양이에요.
'장악하다니? 설마 상두족 수사들을 강제로 어찌 했다는 이야기요?'
네. 제가 보니 상두족 수사들 모두가 잠든 모습으로 누워 있는데, 그런 중에도 숨은 끊어지지 않은 모습이어요.
'영문을 모를 일이군. 내가 파악하기로 대상(大象)은 상두족이 없이는 존재할 수가 없소. 상두족의 기원(祈願)을 바탕으로 존재하는 것인데 어찌 그런 대상이 상두족을 강제할 수가 있단 말이오?'
그건 이제부터 알아봐야겠지요. 하지만 일이 평범치 않은 것은 확실해요.
'음, 확실히 그런 거 같소. 그럼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십시다. '
건우는 뜻밖의 소식에 놀라 대상과 상두족의 상황을 좀 더 파악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 일의 대부분을 유정정이 맡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길매와 흑선풍이 진대상총 밖으로 나가고 없었기에 대상의 시선이 건우에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상두족 중에 청동상아 일족의 두두인 경보(硬步)는 멸계전의 혜택을 크게 받은 수사들 중에 하나였다.
그는 멸계전 전에 태령기 중기에 이르렀으나 끝내 후기엔 오르지 못하고 대천겁이 멀지 않은 상황까지 몰렸었다.
그래서 오래지 않아 대천겁을 피해 진대상총으로 향해야 할 것이라 생각하고 주변 정리를 하려 했다.
그런데 그러던 어느 날, 수미 세계가 봉인에서 풀리며 멸계전이 시작되었다.
당연히 대천겁의 위기를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어 진대상총에 들 일이 없어졌다.
그 뒤로 멸계전을 대비하는 동안에 몇 가지 좋은 기회를 얻어 결국 태령기 후기를 이루었고, 종국에는 태령기 완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만하면 수사로서 크게 성공했다 할 만 했고, 상두족 전체에서도 큰 어른이 되었다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기쁨은 거기까지가 끝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악재가 결국 경보(硬步)를 지금의 허망한 꼴로 만들었다.
멸계 놈들이 엄청난 숫자의 밀정을 곳곳에 퍼트리고, 그 때문에 영기 수사들 사이에 갈등과 오해, 불협이 일어나지만 않았다면.
그 상황에서 사나운 멸계 놈들의 기세에 어처구니없이 밀려 상이산맥까지 위태로운 상황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상이대륙의 그 작은 위태로움을 틈타서 종족신인 홍률상(私律象)이 스스로 몸을 내어 줄 테니 종족 모두가 들어와 잠시 위험을 피하라 현혹하지만 않았다면.
아니 상두족의 우두머리들이 어리석게 그 홍률상의 음모에 말려들지만 않았다면.
그랬다면 지금과 같은 꼴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나도 멀지 않았다. '
경보(硬步)는 자꾸만 흐려지려는 정신을 가다듬고 있었지만 희망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넓고 큰 질서로 상두족을 지탱해 주리라 믿었던 홍률상이 일족을 불러들인 후, 이렇게 제압하여 가둔 것이 벌써 수 백 년이 흘렀다.
그런 중에 종족 대부분이 이미 홍률상을 이루는 일부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알고 보니 홍률상은 아주 오래전부터 선계 비승에 실패하고 이곳 진대상총을 찾아 최후를 맞은 조상들을 모두 제 몸의 일부로 삼고 있었다.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닌 상태의 조상들은 그저 홍률상의 신도(信徒)로 존재했다.
윤회에 들지도 못하고 불완전한 영혼의 형태로 남아서 홍률상에 대한 신앙만 착취당하는 상태로 존재하는 조상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런 가운데 홍률상은 이번 상이산맥의 위기를 틈타, 모든 상두족을 제 몸으로 끌어들여 제압하고 같은 꼴을 만들려 했던 것이다.
'종족신이라고 너무 쉽게 믿은 것이 잘못이다. 다들 각자의 거처에서 수련에만 열중하라는 소리에 속아서 흩어졌다가 각개격파를 당하듯 제압이 되고 말았어. '
홍률상이라 하더라도 태령기 완경의 수준에 불과하다.
그러니 상두족에서 홍률상을 상대할 수사가 열 명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각기 따로 떨어져 홍률상의 몸 안에서 홍률상에게 기습을 당했으니 어찌 버틸 수 있을까.
그렇게 종족의 최고 경지의 수사들이 제압된 후에야 홍률상이 두려워 할 것이 뭐가 있었을까.
그대로 수 억의 상두족 수사들이 모두 홍률상의 제물이 될 수 밖에.
'나도 오래지 않아서 이지를 상실하고 홍률상 놈을 맹종하는 허수아비가 되겠지. 그렇게 홍률상 놈이 우리 상두족을 모두 제 것으로 만들면 그 후엔 홍률상이 곧 상두족이 되 는 것일 테고. '
대충 짐작이 갔다.
홍률상은 상두족의 신앙에서 태어난 존재.
당연히 상두족의 신앙과 기원이 없으면 흩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 상태에서 상두족 전체의 정신을 홍률상이 멋대로 좌우할 수 있다면, 종족신이면서 스스로의 욕망에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지 않겠나.
어차피 이제 밖에 남은 상두족은 얼마 되지도 않고, 경지도 낮은 이들이라 시간이 지나면 결국 홍률상도 잊힐 것이다.
그리되면 홍률상의 신도는 지금 이곳에 잡혀서 허수아비가 된 상두족 수사들만 남게 되는 것이고.
'우리가 괴물을 만든 게지. '
경보는 속으로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그런 경보가 있는 곳은 작은 토굴 안이었는데, 마치 관처럼 파인 공간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런 경보의 상하 좌우에는 그와 같은 공간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경보의 말처럼 상이산맥에 있던 상두족 대부분이 지금 경보와 같은 꼴로 토굴 안에 누워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무수한 토굴들은 경보가 홍률상이라 부르는 대상의 뱃속 공간의 모습이었다.
흐응, 정신을 잃지 않은 녀석이 있구나?
그 때였다.
경보의 머릿속으로 한 가닥 희미한 음성이 흘러들었다.
경보는 깜짝 놀라 꿈인가 했다.
그렇구나, 견(堅)의 법칙, 단단함과 굳음. 그 덕분에 아직도 버티고 있는 게로구나?
경보의 머릿속에서 또 다시 조금 전의 낮선 목소리가 중얼거렸다.
< 차라리 대상(大象)을 도모하는 것이 어떨까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