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2)
< 상두족(象頭族)의 조상신령(祖上神靈) >
= 네 놈들은 누구냐?
건우 일행이 첫 번째 비석기둥 앞에 도착해서 그 내용을 읽기 위해 의념을 불어넣었을 때였다.
갑자기 그 의념을 타고 낯선 음성이 전해졌다.
"누구냐?"
흑선풍이 대뜸 목소리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그의 목소리가 진대상총의 넓은 대지를 휘몰아쳤다.
= 불청객이 도리어 주인에게 정체를 묻는 것이냐?
그러자 목소리가 어이가 없다는 기색으로 대꾸했다.
건우의 시선이 멀리 있는 거대한 코끼리로 향했다.
"대상(大象)이십니까?"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 내 이름이 대상은 아니지만, 네가 보고 있는 것이 나임은 분명하다.
그러자 목소리가 대답했다.
"이렇게 허락 없이 진대상총을 찾아 들어온 것을 사과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이에는 반드시 아셔야 할 곡절이 있으니 대화를 허락하시겠습니까?"
건우가 그 목소리를 향해 물었다.
= 대화? 나쁠 것 없지.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없는데.
목소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며 약점을 서슴없이 드러냈다. 하지만 건우는 그 말을 그대로 믿지는 않았다.
이곳 진대상총의 주인은 바로 저 거대한 코끼리가 분명했으니.
"알겠습니다. 그런데 어찌 부르면 되겠습니까?"
= 그냥 아까 불렀던 대로 대상이라 하거라. 나는 아직 스스로 이름을 밝힐 때가 되지 않았으니.
코끼리는 이름을 알려주기 싫은 듯 했다.
건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대상께선 지금 바깥의 상황을 알고 계십니까?"
= 밖의 상황? 멸계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 그리고 이전에 아이들이 들어와야 할 때가 되었음에도 들어오지 않아서 상황이 불리한가 하고 짐작했다.
"정확한 상황은 모르신단 말씀이군요?"
= 네가 보는 것처럼 이곳은 외부와 단절된 곳이다. 어찌 내가 바깥 상황을 알 수 있겠느냐.
"그렇군요. 그럼 여기 이 둘은 알아보시겠습니까?"
건우가 흑선풍과 길매를 가리키며 물었다.
= 극멸기를 수련한 태령기 완경의 수사들이구나.
대상은 곧바로 둘의 정체를 파악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호와 불호의 느낌이 들어 있지 않았다.
그저 공기를 보듯 무시하는 느낌이었다.
"그렇습니다. 이들은 멸계의 일곱 세력 중에서 두 곳의 주인들입니다."
= 태령기 완경이면 그런 자리에 있을 수도 있겠지. 그런데 너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이 둘이 이곳에 온 것을 보면 아시겠지만 지금 상이산맥은 멸계에게 점령당한 상태입니다."
= 그랬군. 그래서 때가 되었음에도 아이들이 들어오지 않은 거였어.
건우의 말에 대상은 지난번에 상두족이 진대상총으로 들어오지 않은 이유를 알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런데 저들이 저와 함께 있는 이유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여기서 건우가 이야기의 방향을 전환시켰다.
영기 수련 수사인 자신이 저들 멸계 수사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 것.
= 그렇구나. 그건 좀 이상한 일이지. 그래, 그 이유를 이제 알려주려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사실 저나 여기 있는 두 멸계 수사는 멸계전의 승리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습니다."
= 멸계 놈들이 멸계전의 승리에 관심이 없어? 그게 말이 되느냐? 인계의 멸계전이야 패하더라도 어찌어찌 몸을 숨겨 살 수 있겠지만, 선계 비승은 다르다. 극멸기를 품고는 선 계에 오를 수가 없어. 천지 법칙이 이를 허용하지 않을 터이니. 설마 그걸 모르진 않겠지?
"물론 그건 다들 알고 있습니다."
= 그런데 어찌?
"그야 멸계전 중에 멸계로 돌아갈 방법이 있기 때문이지요."
= 멸계전이 끝나지 않았는데 멸계로 돌아갈 방법이 있다고?
"그렇습니다. 그러니 적당히 멸계전에서 진극멸기만 챙긴 후에 멸계로 돌아가면 이득만 챙기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들은 그런 생각으로 저와 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 재미있구나. 진정 그렇다면 지금의 모습도 그럴 수 있다 싶구나.
"그렇지요. 그런데 순조롭게 일을 꾸미던 중에 문제가 좀 생겼습니다."
= 문제라니?
"대상께서 계신 이 진대상총의 존재가……
건우는 자신이 대상총에 만들던 함정들과 갑자기 드러난 진대상총 때문에 생긴 변화에 대해 설명했다.
= 그러니까 이곳 진대상총, 정확히는 내가 지금껏 축적한 기운들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
"그렇습니다. 가히 상상도 못할 영기를 쌓아두셨더군요."
= 커엄, 그야 태고 이래로 상두족의 수사들이 스스로를 희생하여 쌓아온 것이니 그 크기를 어찌 짐작할 수 있을까.
"역시 선계 비승을 하지 못한 상두족 수사들이 이곳에서 마지막을 맞이하셨던 것이군요?"
= 네 짐작이 맞다. 수미 세계에 상두족이 탄생할 때부터 시작된 일이지.
"그렇군요.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 무엇이냐?
"도대체 대상께선 어떤 존재이십니까? 품고 계신 힘으로 보자면 수미 세계를 몇 번은 뒤집어엎을 정도로 강대한데 또 막상 가늠해 보면 대상께서 지니신 격이 그 힘에 맞지 않습니다. 고작해야 태령기 완경 정도의 격이 아닙니까."
건우는 대상과 대화를 나누며 이상하게 느낀 점을 그대로 물어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대상의 격은 태령기 완경의 수사에 불과했다.
그런데 축적했다고 하는 힘은 그야말로 가늠도 안 될 정도로 크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 크음. 잘 보았다. 실로 나는 태령기 이상의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지금 나를 묶고 있는 이 쇠사슬들의 쓸모가 무엇이겠느냐. 내가 가진 힘을 제어하기 위한 것이다. 자칫 내 안에 쌓인 힘이 폭주하는 날에는 수미 세계 전체가 위험할 수도 있기 때문이지. 적어도 상이산맥 정도는 날릴 수 있을 것이다.
"그게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어떻게 그런 힘을 쌓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 그것은 내가 상두족의 믿음에서 태어난 존재이기 때문이다.
"네?"
= 따지자면 나는 영족에 가까우나 그 태생이 상두족들의 믿음이란 소리지. 물론 그 시작은 태고에 상두족이 흙으로 빚어 만든 작은 흙 인형에 있겠지만 그 이후로 상두족의 기원이 쌓이고 쌓여서 내가 태어났다.
"일종의 종족 신(神)이라 할 수 있겠군요"
= 오호라, 옳다. 바로 그것이다. 나는 바로 그런 존재이지. 하지만 드디어 그 격을 채우고 선계 비승을 할 시기가 가까워 왔을 때에 문제가 생겼다.
"설마 그 문제란 것이 수미 세계가 겨자씨에 봉인된 것은 아니겠지요?"
건우도 설마 하며 물었다.
= 쯧, 왜 아니겠느냐. 바로 그것이 문제였지.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이 뭔지 아느냐?
"더 심각한 것도 있습니까?"
= 승경 전에 겨자씨에 봉인이 된 것도 문제였지만 그 후 봉인이 풀리며 곧바로 멸계전이 시작된 것이 컸지.
"멸계전의 시작이 왜 문제가 되었습니까?"
= 겨자씨에 갇혔던 수미 세계의 봉인이 풀리는 것을 느끼고 내가 선계 비승을 미리 준비했기 때문이다. 이미 가진 힘이 강력하니 선계 비승이야 단박에 이룰 자신이 있었지. 그렇게 되면 곧바로 선계에서 상두족의 조상신으로 거듭나 대라(大羅)나 도조(道祖)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
= 봉인이 풀리는 것을 느끼고 비승 준비를 마쳤는데 비승의 길이 열리지 않고 멸계전이 시작되었다. 당연히 비승을 위해 준비했던 힘이 문제가 되었지. 그 때문에 쇠사슬 백여 개를 다급히 걸쳐야 했다.
"그렇군요. 그런데 이제 남은 비석 기둥이 고작 여섯 개에 불과한데, 자칫 그 이상이 되면 위험한 것이 아닙니까?"
건우는 앞서 확인했던 비석기둥의 수를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 아직은 괜찮다. 여섯 개의 비석기둥이면 못해도 60만 년은 버틸 수 있을 테니,그 사이에 멸계전이 마무리 되겠지.
"혹여 이기지 못하면 어찌 합니까? 그럴 수도 있지 않습니까?"
건우는 대상에게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슬쩍 미끼를 던졌다.
= 어쩌긴 어쩌겠느냐. 멸계전에 패하게 되면 상두족이 멸족을 할 것이고, 그리되면 나 역시 그것을 알 수 있겠지. 그런 상황이면 내가 무엇을 아끼겠느냐. 상두족이 없다면 나도 없는 것이거늘.
"아, 바깥 상황을 모르고 있다가 그렇게 될 수도 있겠군요?"
= 그렇지.
건우는 대상의 말을 듣고 그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겠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번에 대상께서 저희를 좀 도와주시면 어떻겠습니까?"
= 너희를 도와달라고?
"그렇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이곳 진대상총의 바깥에 제가 만든 함정이 있습니다."
= 그래서?
"그 함정에 대상께서 지니신 힘을 조금 보태 주시지요. 멸계 놈들을 대상총에 끌어들인 후에, 그 함정에 진대상총의 힘을 더하여 발동시키면 단박에 멸계 놈들을 몰살시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 흐음.
"물론 그걸 위해서는 밖에 만든 함정과 이곳을 연결하는 작업이 필요하긴 합니다만, 그 정도는 제가 할 수 있습니다. 그저 대상께서 허락만 해 주시면……
= 불가하다!
건우가 한창 흥을 내어 대상을 설득하고 있는데, 갑자기 대상이 건우의 말을 딱 잘라 버렸다.
"네? 어찌?"
건우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까마득히 멀리 있는 코끼리를 쳐다봤다.
그러자 지금껏 미동도 하지 않던 거대한 코끼리의 눈동자가 스르륵 움직여 건우를 바라보았다.
= 내 태생이 뭐라 하였느냐? 나는 상두족으로부터 난 존재니라. 그러니 나는 너나 멸계 놈의 바람을 들어줄 수 없는 것이다.
건우는 대상의 말을 듣는 순간 알 수 있었다.
대상이 건우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 이유.
그것은 대상이 태생적으로 지니고 있는 제약과 같은 것이었다.
대상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상두족의 기원(祈願)이 필요했다.
"상두족이 필요하겠군요. 그것도 상두족을 대표할 수 있는 이가 있어야겠습니다."
건우는 그렇게 말하며 누구를 데리고 와야 할지를 고민했다.
그리고 그런 건우의 머릿속에 과거 인연이 있었던 상두족 수사의 모습이 떠올랐다.
"정동상아 일족의 두두였던 경보란 자가 있었는데 아직 살아 있을지 모르겠군."
= 음, 끼어들어 미안한데, 네가 말하는 그 경보란 아이는 저기 저곳에 묻혀 있다만.
"아, 어찌? 멸계전 중이라 천겁을 만날 일도 없었을 텐데 왜?"
건우가 대상의 말에 이해가 되지 않아서 물었다.
상두족이 이곳에 들어와 마지막을 맞이하는 것은 천겁을 넘기지 못할 상황에서나 취하는 행동일 것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영체기 이후로 천겁이 아니라면 불의의 사고 이외에는 죽을 일이 없는 것이 수사가 아닌가.
그러니 진대상총에 들어와 스스로 죽을 일은 없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두두 경보가 이곳에 묻혀 있다고?
= 이곳을 다녀간 아이들은 밖에서 죽더라도 그 영혼과 격은 이곳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경보란 아이도 얼마 전에 밖에서 죽어서 영체 일부와 혼만 돌아왔지.
"음, 그렇군요."
건우는 대상의 대답에서 상아를 통해서 이곳에 들어온 상두족들이 어떤 제약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급히 품에 있는 상아를 살펴 자신에게 그와 같은 제약이 걸렸는지 확인했다.
이에 길매와 흑선풍도 조심스럽게 상아를 꺼내 확인하려 했다.
그러자 길매와 흑선풍의 극멸기가 상아의 기운과 충돌하여 상아가 가루가 되는 일이 벌어졌다.
= 걱정할 거 없다. 너는 상두족이 아니니 내가 너를 강제할 수단은 없는 셈이다.
대상이 그것을 알아차렸는지 건우를 안심시켰다.
그러면서도 대상은 길매나 흑선풍에겐 관심을 주지 않았는데 의도적으로 둘을 무시하는 모습이었다.
"아무튼 경보가 이곳에 있다면 다른 대상을 찾아야 할 것 같군요. 대상께서 혹시 추천해 줄 상두족이 있으십 니까?"
건우는 대상에게 물어보면 간단한 문제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렇게 물었다.
= 가장 좋은 것은 아무래도 제사장의 뜻을 받아 오는 것이겠지.
"상두족에 제사장이 있습니까?"
수사가 신을 섬기거나 믿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역천의 길을 걷는 수사가 누구를 섬기고 믿으며 신앙을 가진다는 말인가.
= 대족장을 찾아가 물어보면 알게 될 것이다. 그 전까지는 내가 너를 도울 수는 없다.
"알겠습니다."
건우는 대상의 말을 순순히 수긍했다.
태생에서 비롯된 제약이니 왈가왈부 해 봐야 달라질 것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럼 나가기 전에 이곳을 좀 둘러보겠습니다. 아, 비석과 쇠사슬에 담긴 내용들을 좀 봐도 되겠지요? 돕지는 못하시더라도 방해하지 않을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건우는 대상과의 대화를 마무리하며 문득 생각난 듯이 그렇게 물었다.
하지만 실상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통보에 가까웠다.
태고부터 진대상총에 남겨진 엄청난 보물들을 그냥 두고 보기만 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어차피 대상은 가진 힘을 제 마음껏 쓰지도 못하는 상황인 듯하니 선만 넘지 않으면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 상두족(象頭族)의 조상신령(祖上神靈)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