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9)
< 변수에 또 다른 변수가 더해지다 >
상이산맥은 구산팔해(九山八海)의 구산 중에 바깥쪽에서 세 번째, 안쪽에서 일곱 번째에 있는 산맥이다.
물론 산맥이라 부르긴 하지만 어지간한 인계 수 백 개가 모여도 그 산맥 하나에 미치지 못할 정도로 광활한 영역이기도 하다.
원래 이 상이산맥은 코끼리의 머리를 가진 상두족이 번성한 곳이었으나 이제는 멸계 수사들의 점령지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드넓은 상이산맥에서 영기 수련 수사들이 전몰을 당한 것은 아니다.
아직도 산맥 곳곳에는 멸계 수사들이 발견하지 못한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곳들이 다수 존재했다.
대상총(大象豫)은 바로 그런 곳들 중에 하나로 태고 이래로 지금까지 상두족의 영지(靈地)로 이어진 곳이었다.
적어도 진광에게 발견되기 전까지는 그랬던 곳이었다.
"그것 참, 일이 묘하게 돌아가는군."
진광이 인상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마주 앉은 건우 역시 난처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래서 길 수사는 이 일을 어찌 할 생각이지?"
"이미 이곳에 투자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지금와서 장소를 바꾸는 것은 어 렵습니다."
"쯧.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그야 이곳을 제게 권한 분이 진광 수사가 아닙니까. 지금 와서 책임을 제게 물으려 하시면 곤란하지요."
건우는 슬쩍 뭐라 꼬투리를 잡으려는 진광의 기색에 정색을 하며 그를 노려봤다.
"끄응, 누가 뭐라나? 그리고 사실 내가 일이 이렇게 될 줄을 어찌 알았겠나!"
따지고 보면 원인이 자신에게 있으니 진광은 적반하장으로 목소리를 높인다.
"화를 내실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어쩌시겠습니까? 계획을 몇 백 년 미룬다면 방법이 아주 없지는 않을 거 같은데 말입니다. 그리 해 보시겠습니까?"
건우가 은근한 목소리로 권해 보지만 사실상 실현 가능성은 없는 이야기다.
"계획을 미루는 것이 말처럼 쉬웠으면 우리가 이리 고민을 하고 있겠나? 사실상 멸계에서 넘어온 모든 세력을 얽어서 벌이는 일인데, 그걸 어찌 몇 백 년씩이나 미룬단 말인가?"
이미 멈추거나 바꾸기에는 너무 많은 일들이 진행되고 있었다. 진광도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럼 어쩔 수 없이 이곳을 그대로 개방할 수밖에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아니! 그게 곤란하니 이러는 거잖아! 변수가 너무 크다고 이거 참!"
건우의 말에 진광이 버럭 화를 내다가 마땅한 대안이 없음을 떠올리고는 혀를 차고 말았다.
건우는 그런 진광을 보며 일이 이렇게 된 원인을 떠올렸다.
'여기가 평범한 유적이 아니었다니!'
문제는 그들이 멸계 세력을 끌어들여 상잔을 시킬 함정을 파던 대상총에서 새로운 발견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곳 대상총은 진광이 발견하여 건우에게 귀환진을 설치할 곳으로 권했던 곳이었다.
건우도 진광이 지정해 준 곳이라 처음에는 어떤 수작을 부리지 않았는가 의심하며 자세히 살폈지만, 이후에 한 배를 타기로 하면서 경계를 많이 거두었다.
그리고 길매와 흑선풍까지 끌어들여 멸계 세력 전체를 도모할 계획을 세우면서 대상총은 그 계획의 중심이 되었다.
건우는 멸계 세력을 크게 줄일 생각으로 대상총에 엄청난 함정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함정에는 건우가 알고 있는 모든 진법과 금제, 결계, 봉인의 지식이 종 동원되었다. 당연히 그 뒤에는 진광과 길매, 흑선풍의 조력이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준비가 절반 이상 이루어졌을 때, 뜻하지 않게 대상총의 숨겨진 일면이 드러났다.
수미 세계의 최강 종족 중에 하나인 상두족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진짜 코끼리 무덤'이 발견된 것이다.
건우도 대상총이란 이름을 들었을 때, 신화 속의 코끼리 무덤을 떠올렸지만 진짜 '코끼리 무덤'이 그곳에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진광 또한 멸계 세력이 상이 산맥을 빼앗은 후 대상총을 발견했지만 그저 그런 고대 유적 정도로만 생각했고, 발견된 보물들도 고만고만한 수준이었다. 혹시 들키더라도 겉으로 드러낸 것만 알아차리게 하여 도굴꾼을 속이려는 상두족의 노림수에 제대로 당했다고 할까.
사실 건우조차도 그 대상총에서 엄청난 진법, 금제, 결계, 봉인 작업을 하면서도 숨겨진 '진짜 코끼리 무덤'을 알아차리지 못했으니 그 은밀함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 짐작 할 만 했다.
어쨌거나 문제는 그 숨겨진 '코끼리 무덤' 때문에 건우가 준비한 함정이 영향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길 수사도 예측하기 어려운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 하지 않았나? 그리 되면 우리 계획은 모두 물거품이 될 수도 있음이야."
"그렇기에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 않습니까. 일단 우리가 그 '진(眞) 대상총(大象豫)'으로 먼저 들어가서 그곳을 파악해야지요. 연후에 밖에 제가 준비한 함정과 연동되게 한다면……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야 좋겠지. 하지만 그걸 장담할 수 없지 않나? 게다가 길 수사 말대로 하자고 해도 시간이 필요할 것인데! 그것 참, 시간 여유가 없다니까! 시간 여유가!"
진광은 일이 틀어질 듯하자 평정을 잃은 듯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정녕 그리 불안하시면 진광 수사는 이대로 멸계로 돌아가도 될 것이 아닙니까. 조만간 한 번은 귀환진을 발동해야 할 터인데, 그 때에 진광 수사께서도 함께 하시면 될 일이지 요. 내 그간 수사의 공을 생각해서 그 진을 쓰게 해 줄 터이니."
"뭐라? 나에게 이대로 돌아가라고?"
건우가 선심 쓰듯 귀환진에 태워주겠다는데 도리어 진광이 눈을 부라렸다.
"그것 참, 옛 생각을 하십시오. 그냥 멸계로만 갈 수 있으면 족하다 하셨던 분이 어디의 누구셨습니까? 어찌 이리 변하셨답니까?"
건우가 그런 진광을 놀리듯이 눈을 흘기며 말했다.
"당연히 내 계획이 이리저리 많이 바뀐 때문이지. 보다 나은 미래를 계획해 두었는데 이전의 조촐한 만족 따위가 눈에 들어오기나 할까. 그리고 그렇게 계획이 바뀐 것이 누구 때문인가? 모두 길 수사가 나를 이리 만든 것이 아닌가?"
"이런 것을 두고 물에 빠진 놈을 구해 주니 보따리 내 놓으라 한다 하지요?"
"뭐라? 놈?"
"됐습니다. 상황이 이리 되었으니 어쩔 수 없습니다. 이대로 밖에 준비하려던 함정을 온전히 완성하겠습니다. 그 연후에……?"
"연후에?"
"진(眞)대상총(大象豫)으로 들어가서 거기에 있는 금제 결계와 제가 만든 것을 연계시켜야지요."
"그게 가능하겠나?"
"안 되면 어쩔 수 없이 이곳으로 끌어 들인 이들을 모두 진대상총으로 유인해야지요."
"응?"
"진대상총 역시 만만한 곳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길매 궁주와 흑선풍 림주가 각기 세력을 이끌고 서로 상잔하여 대립의 골이 깊어진 상태로 진대상총에 들게 하고, 그 연휴에 상잔을 유도하여 모두 묻어 버려야지요."
"흐음. 그리되면 유실되는 진극멸기가 적지 않을 텐데?"
건우의 말을 듣던 진광이 싸움의 과정을 연상해 보고는 그리 중얼거렸다.
원래대로면 대상총에서 두 파벌을 상잔시키고 이후 함정을 발동하여 남은 자들을 몰살하자는 계획이었다.
그 계획에 비하면 진대상총으로 끌어들여 죽게 만들면 회수하지 못하는 진극멸기가 늘어날 수도 있었다.
"욕심이 너무 과하십니다. 이 계획조차 제대로 될지 어떨지 모르는 판국에."
건우가 그런 진광에게 기가 막힌 표정으로 일침을 놓았다.
진광 역시 조금 과했다 싶었던지 얼굴이 붉어지며 시선을 피했다.
"어쨌거나 조만간 바깥일은 진광 수사가 맡아 주셔야 될 것 같습니다."
"응? 그게 무슨 말인가?"
"얼마 후, 길매 궁주와 흑선풍 림주의 파벌을 각각 만나 귀환진을 증명해 보여야 하지 않습니까. 그 일은 제가 아니면 할 수 없으니 그 때까지는 제가 있어야 하겠지요. 하지만 그 후로는 제가 진대상총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음."
"그러니 남은 일은 진광 수사가 길매 궁주와 흑선풍 림주와 의논해서 진행을 시켜야지요."
"길 수사 혼자서 진대상총으로 가겠다고?"
건우의 말에 진광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건우 혼자만 진대상총에 들어간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기색이 역력했다.
건우 역시 그런 진광의 표정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설마 진대상총의 보물을 욕심내시는 것입니까?"
건우가 진광에게 직설적으로 물었다.
"아니, 절대 범상치 않아 보이는 곳이니 그만한 보물이 있을 터인데, 길 수사가 독차지 하는 것은 말이 안 되지! 아무렴!"
"누가 보물을 차지하기 위해서 들어간답니까? 그것 참 답답도 하십니다. 그깟 보물에 눈이 어두워 대사를 그르치려 하시는 겁니까?"
건우가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진광에게 고함을 질렀고, 동시에 건우의 의념이 들끓어 오르며 영기와 극멸기, 혼돈기가 한꺼번에 요동쳤다.
그 모습에 진광이 흠칫한 표정을 지었지만 어깨에 건 쇠그물을 굳게 잡으며 건우를 노려봤다.
"이치가 그렇지 않나! 어찌 혼자 보물을 독차지 하려 해?!"
그리고 한 치도 물러나지 않고 건우와 대치하며 고함을 질렀다.
"에이! 썅 노무 새끼! 내가 이런 놈과 무슨 일을 하겠다고!"
그 순간 건우가 버럭 욕설을 내뱉으며 여섯 개의 손에 성광검을 소환해 들었다.
"뭐, 뭐냐? 길 수사 지금 진정으로 나와 싸우겠다는 거 냐?"
그 모습에 진광이 당황한 모습으로 한 걸음 물러서며 물었다.
"너 같이 속 좁은 놈과 일을 꾸민 내가 잘못이다! 됐다. 모두 없던 일로 하자. 차라리 영기 수도계의 수사들을 끌어 모아 본격적인 반격을 하는 것이 낫겠다. 겸사겸사 귀환진을 이용해서 돌아가겠단 놈들을 꼬드기면 어떻게든 멸계전이야 승리할 수 있겠지."
건우는 이젠 될 대로 되라는 듯이 그렇게 말을 하며 의념을 넓게 펼쳐 진광의 의념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뭐라? 이 놈이 진정 끝을 보자는 것이냐?"
이에 진광이 버럭 화를 내며 당장이라도 그물을 던질 듯이 움찔, 움찔 시늉을 했다.
하지만 진광이 그렇게 시늉만 할 때에 건우는 정말로 성광검을 진광을 향해 날려 보냈다.
슈슈슈슈슛! 지이이이잉!
다섯 개의 검을 진광에게 날리고 하나의 검을 가슴 앞에 세로로 세워 영기와 극멸기를 불어 넣기 시작하는 건우.
그것은 영기와 극멸기를 충돌시켜 강력한 위력을 얻으려는 모습이었다.
"이, 이런!"
치리리링! 치리링!
진광이 급히 그물을 종횡으로 휘둘러 제 앞으로 날아드는 다섯 성광검을 막아냈다.
건우의 성광검은 진광의 그물을 뚫지 못하고 튕겨나가 다시 건우의 어깨와 머리 위에 자리를 잡고 검첨을 진광에게 겨누었다.
그리고 그 때는 이미 건우의 다음 수가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영기와 극멸기를 함께 충전한 검이 진광을 향해 겨누어졌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지금 같은 편끼리 싸우고 있는 것이냐?"
그 때, 허공에서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길매와 흑선풍이 모습을 드러냈다.
건우는 자신과 진광 사이에 나타난 두 사람 때문에 영기와 극멸기가 담긴 성광검을 뻗지 못하고 물릴 수밖에 없었다.
"으음. 어쩐 일이십니까? 두 분께서 연락도 없이? 지금은 오실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건우는 뭔가 변고가 있음을 알아차리고 그렇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당연히 문제가 생겨서 급히 온 것입니다만, 여기도 상황이 좋은 것은 아닌 모양이군요."
"그러게. 어쩌다가 서로 싸우게 된 거지?"
길매와 흑선풍이 건우와 진광을 보며 물었다.
건우는 잠시 뭐라 대답을 해야 할지 망설였다.
하지만 이왕 뽑을 칼을 다시 넣기는 싫었다.
"진광 저 놈이 과한 욕심을 부리고, 상황 파악을 못 하는 것 같더군. 그렇지 않아도 지금 이곳의 상황이 꼬여 있는데, 저 놈까지 정신을 못 차리니 차라리 계획을 바꾸는 것이 좋 겠다 싶었지."
"그러니까 길 수사께서는 아주 작정을 하셨다는 말씀이군요?"
"맞다. 어차피 진대상총 때문에 지금까지의 계획을 조금 바꿀 필요가 있었는데, 이참에 저 놈을 정리하려고 했지."
"그렇군. 하지만 그건 네 생각일 뿐이지."
건우의 말에 흑선풍이 성큼성큼 걸어 진광의 곁으로 붙어섰다.
"맞아요. 길 수사는 사실 영기 수련 수도자가 아니던가요? 그런 길 수사를 믿기 보다는 아무래도 진광 수사를 믿는 것이 옳을 듯 하네요."
이어서 길매 또한 진광에게로 향했다.
그렇게 흑선풍과 길매가 진광의 양쪽에 서서 건우와 대치했다.
건우가 그 모습에 피식 웃으며 성광검을 거두었다.
< 변수에 또 다른 변수가 더해지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