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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멸계 수사 진영의 균열 >
"모두 오신 것 같으니 이제 이야기를 시작하지요."
상석에 앉은 흑선풍이 회동의 시작을 알렸다.
그는 평소와 달리 함께 자리를 하고 있는 두 수사에게 예의를 지키는 모습이었다.
"흑 림주, 무슨 일로 우리를 이리 은밀히 불러 모은 것이오?"
"그러게 말입니다. 우리 상인문은 원래 충림과는 그리 교류가 없었는데 갑자기 이리 부르시니 겁이 나지 뭡니까?"
어딘지 알 수 없는 석실에서 흑선풍과 품자 형태로 마주 앉은 두 수사가 경계를 풀지 않은 모습으로 흑선풍을 보았다.
"상인문주, 보량현천의 천주. 두 분을 이리 모신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들의 생존과도 직결된 문제입니다."
그런 두 수사를 향해서 흑선풍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 말에 담긴 무게가 심상치 않은 것을 알아차린 상인문의 문주와 보량현천의 천주가 입을 다물고 흑선풍을 바라보았다.
"알고 계실지 모르지만 요즈음 자미혈궁과 사명당, 흑송림의 회동이 잦습니다."
분위기가 조성된 것을 확인한 흑선풍이 그렇게 이야기의 서두를 열었다.
"그들이 이전과 달리 조금 가까워진 것은 사실이지요.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마이산맥을 공략하기 위해 힘을 모으는 까닭이 아닙니까."
"그렇지요. 우리 보량현천과 상인문, 중림은 철위산맥과 함해, 니민달라 산맥을 주 영역으로 하고 있어 수미의 수사 놈들과 전쟁을 벌일 일이 적기도 하고."
흑선풍의 말에 상인문주와 보량현천주는 그게 무슨 큰 문제라도 되냐는 듯이 말을 받았다.
하지만 흑선풍을 그들과 한 번씩 눈빛을 맞추며 고개를 저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아니 라고요?"
"무슨 다른 속이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두 분도 요즈음 퍼지는 귀환진에 대한 소문을 들으셨겠지요?"
흑선풍이 두 수사에게 귀환진을 상기시켰다.
"귀환진, 그 길우몽이란 수사가 만들었다는 그것 말입니까? 언제든 본계로 돌아갈 수 있다는?"
"나도 이야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게 빈 말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하고 있고 말입니다."
상인문의 문주보다는 보량현천의 천주가 조금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듯, 귀환진의 신뢰성에 대해 언급했다.
"다들 아주 모르시진 않는 모양이지만, 제가 더 정확한 이야기를 해 드리자면, 그 귀환진은 사실입니다. 게다가 이미 설치해 놓은 진을 이용하는 것이라 발동에 큰 어려움도 없다 고 합니다."
"음? 그게 정말입니까?"
"중림주께선 그걸 어찌 아셨답니까?"
상인문는 그대로 혹한 모습을 보였고, 보량현천주는 흑선풍을 의심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물론 흑선풍은 상인문주 역시 말을 그렇게 하면서도 실제론 머 릿속으로 복잡한 계산과 확인을 하고 있을 것임을 짐작했다.
눈앞의 두 수사는 절대 허술하게 볼 수 있는 이들이 아닌 것이다.
"진광이라고 아실겁니다. 제가 이미 그 자를 만나 귀환진에 대한 이야기를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미혈궁과 사명당, 흑송림이 꾸미는 일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지 요."
"자세히 말을 해 보십시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입니까?"
진광이란 이름까지 거론하자 상인문주와 보령현천주가 엉덩이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아직 증거를 내놓지는 않았지만 흑선풍의 말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자미혈궁과 사명당, 흑송림은 이미 귀환진을 이용하여 본계로 돌아갈 뜻을 정했다고 합니다."
"음? 전쟁을 포기한단 말입니까?"
"그들이 수미의 영기 수사 놈들과 전쟁을 벌이며 희생이 좀 있다곤 하지만 그렇다고 전쟁까지 포기할 정도는 아닐 텐데요?"
흑선풍의 말에 두 수사가 이해하기 어 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허 귀환이 가능하다지 않습니까. 그런데 굳이 예서 목숨을 걸고 싸울 일이 뭐가 있답니까?"
흑선풍이 그런 둘을 보며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유가 왜 없습니까? 도대체 본계에서 이곳으로 넘어 오면서 목숨을 걸지 않은 이가 누가 있습니까. 모두 목숨을 걸고 전쟁에 참가한 것이지요. 그리고 그 이유야 두 말 할 것도 없이 진극멸기를 얻고자 함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다른 수련 자원에 대한 욕심도 있지만, 사실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진극멸기지요. 그리고 저만 하여도 전쟁 초기에 이곳으로 넘어올 때에는 고작 태령기 초 기였는데 지금은 완경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 모두가 따지고 보면 멸계전 특수를 누린 덕분이 아니겠습니까. 모두 그런 이유로 이곳으로 넘어오는 것이고 말입니다."
흑선풍의 말에 두 수사가 열을 올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어차피 멸계전에 참가할 때에는 모두가 죽음을 각오하고 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결국 진극멸기 때문이었다.
물론 어떤 이들은 당장 눈앞에 닥친 천겁을 넘길 자신이 없어서 멸계전에 참가하는 꼼수를 부린 이들도 있지만 그들도 결국은 진극멸기로 경지를 높여 천겁을 이기려는 것이다.
"다들 진정들 하십시오. 누가 그걸 모른답니까? 진극멸기, 그 귀한 보물을 얻기 위해서 이곳으로 온 것은 사실이지요. 하지만 그것도 죽고나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게다가 두 분의 멸기함분에도 꽤나 많은 진극멸기가 쌓이지 않았습니까?"
"완경의 경지에 오른 후로는 승경을 할 수 없어 되는 대로 모으고 있기는 하지요."
"나 역시 그렇습니다만 그렇다고 해도 아직은 아쉬운 바가 없지 않지요."
흑선풍의 말에 상인문주와 보량현천주 모두 어느 정도 진정된 표정으로 대답했다.
"자, 그럼 두 분께 지금 본계로 보내드린다고 하면 어찌 하시렵니까?"
그런 둘에게 흑선풍이 다시 물었다.
"지금이라면?"
"조금 고민이 될 듯 합니다만."
"그럼, 자미혈궁, 사명당, 흑송림이 사라진 상황이라면 어떻겠습니까?"
"으음. 그럼 전쟁에서 이길 가능성이 거의 없으니 본계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지요. 계속 남아 봐야 영기 수사 놈들에게 잡혀 죽을 일만 남지 않았겠습니까."
"그도 그렇지만 혹여 전쟁이 수미 놈들의 승리로 끝나게 되면 우리들 극멸기를 품은 수사들은 모두 천지 법칙의 재앙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극멸기를 품고는 선계에 오를 수 가 없어요."
보령현천주가 수미 세계가 선계에 편입될 때의 문제를 거론하며 몸을 떨었다.
그런 일이 벌어질 때에 수미 세계에 남은 멸계 수사들은 모두 소멸을 당할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량현천주께선 그것까지 생각을 하셨습니까? 그렇지요.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것입니다. 전쟁에 패하면 우리는 모두 죽은 목숨이란 사실 말입니다. 그러니 전쟁이 끝나기 전 에 본계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면 고민할 문제도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중림주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지금 자미혈궁과 사명당, 흑송림이 이미 전쟁을 포기하고 본계로 도망갈 생각을 하는 마당에, 우리가 애를 써 봐야 방법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까.''상인문주와 보량현천주가 뭔가 깨달은 표정으로 상황판단을 늘어 놓았다.
"그렇습니다. 제가 두 분을 모시고 하려던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지요.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흑선풍이 그런 둘에게 더욱 심각한 표정으로 뒷 이야기를 시작했다.
"뭐가 더 있다는 말입니까?"
"어디 들어보십시다. 중림주께서 그 동안 제법 애를 쓴 모양인데 무슨 일이 더 있는지 궁금하군요."
"하아, 참으로 하기 어려운 말입니다만, 일단 한 가지 묻겠습니다."
흑선풍이 슬쩍 뜸을 들이며 이야기의 흐름을 조절했다.
"말해 보십시오."
"무얼 묻겠다는 것입니까?"
"아까 두 분은 모아 놓은 진극멸기를 두고 만족치 못한다는 듯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렇지요?"
"그야......."
"당연한 것을 묻습니다. 누구에게 물어도 만족하다 하지는 않을 문제일 텐데요."
"그렇지요. 그래서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자미혈궁주 길매가 사명당과 흑송림을 끌어들여 본계로의 귀환을 논의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합의를 보았지요."
흑선풍은 그렇게 말을 하고는 잠시 둘의 표정을 살폈다.
두 수사는 그럴 것을 짐작했다는 듯이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렇게 귀환을 결정하고 나니 그들 역시 진극멸기를 더 많이 모으지 못한 것이 아쉬워졌지 뭐겠습니까."
"그렇겠지요."
"그 놈들이라고 뭐가 다르겠습니까. 다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을."
상인문주와 보량현천주는 당연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자, 그렇다면 이제 그들이 어찌하겠습니까? 아쉬움을 참고 그냥 가겠습니까? 아니면 크게 한 몫을 잡아 보려 하겠습니까?"
"음? 당연한 것을 묻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다는 말이 아닙니까?"
"하긴, 세 개의 세력이 힘을 모아 수작을 부리면 마이산맥이 아니라 선견이나 첨목 산맥까지도 넘볼 방법이 있을지 모르겠군요. 그만한 힘이 하나로 응집된다면 보지 않고 속전속결로 치고 빠질 생각을 했다면, 정말 쉽게 예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대단할 것입니다."
두 수사들은 자미혈궁을 비롯한 세 세력이 어떤 행동을 하게 될지 중분히 짐작이 간다는 듯이 그렇게 떠들었다.
그런데 그런 두 수사를 보는 흑선풍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어두웠다.
그래서 한참 떠들던 두 수사가 입을 다물고 흑선풍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입니까?"
"말을 해 보십시오. 우리를 부른 것은 함께 의논을 하자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둘은 흑선풍을 달래며 이야기를 종용했다.
"크음. 저들 세 세력이 일을 꾸미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 방향이 좀 다릅니다."
"다르다고요?"
"무슨 말입니까?"
"자, 들어보십시오. 두 분은 영기 수사들이 있는 마이, 선견, 첨목 산맥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음? 그야 이전 진광 수사의 공법을 익혀 스며든 세작들이 있어 어느 정도는 파악을 하고 있습니다만."
"저도 다르지 않지요. 제법 많은 정보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래도 부족하지요. 특히 수도계 상층으로 갈수록 정보가 제한되어 진정 중요한 내용은 별반 없지 않습니까?"
"하하, 아주 아니라곤 못하겠군요."
"그건 중림도 마찬가지일 텐데요?"
"누구를 탓하거나 낮춰 보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그저 현실을 말하는 것이지요. 자, 그렇다면 두 분은 자미혈궁(紫微血宮)이나 사명당(死命黨), 흑송림(黑松林)에 대해서는 얼마나 아십니까?"
"그야 알고자 하면 제법 깊은 곳까지 들여다 볼 수 있겠지요."
"사실은 나도 충림주에겐 미안하지만 이 회동이 끝나면 곧바로 우리 보량현천의 제자들을 동원하여 사실 확인을 해 볼 생각입니다. 그리고 어렵지 않게 사실 확인을 할 수 있으 리라 생각합니다."
"뭐, 좋습니다. 뭐가 되었건 이 흑모가 묻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두 분이 영기 수도계 놈들을 파악하는 것이 쉽습니까? 아니면 자미혈궁을 비롯한 다른 7대 세력을 파악하 는 것이 쉽습니까?"
"그야 당연히……
"으음?"
"그리고 음모를 꾸며 함정에 끌어들이자면 영기 수도계 놈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쉽겠습니까, 아니면 다른 7대 세력을 속이는 것이 쉽겠습니까?"
"무, 무슨 그런 말을……?"
"설마 자미혈궁과 배를 맞춘 놈들이 우리를 제물로 삼을 생각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까?!"
역시 이번에도 보량현천의 천주가 빠르게 흑선풍의 말 뜻을 알아차리고 소리를 질렀다.
"일단, 오늘 회동은 이것으로 마치지요. 제가 할 이야기는 다 한 것 같습니다. 나머지는 두 분이 알아서 확인을 해 보시는 것이 좋겠지요. 그만한 역량이야 되시지 않겠습니까?
물론 은밀히!"
"30년 후에 다시 보십시다."
"나도 그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 그 때 다시 만나서 이야기를 하십시다."
흑선풍이 갑작스럽게 회동의 끝을 알렸지만 두 수사는 곧바로 30년 후를 기약했다.
여기서 흑선풍이 아무리 둘을 더 설득하려 해도 의미가 없음을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할 이야기를 모두 했으니 이제는 각자 알아서 상황 파악을 할 일이었다.
세 수장의 회동은 그렇게 끝이 났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건우 수사."
"호호호, 그 동안 어찌 그리 감쪽같이 사라지셨답니까? 혹자들은 수사께서 홍애지에서 실종되었다 하기까지 했습니다."
"항상 볼 때마다 사람을 놀라게 만드는군. 벌써 태령이 완경이라니."
"그래, 우리를 불러 모은 이유가 뭔가? 마땅히 특별한 이유가 있을 터인데?"
건우의 인사에 괴뢰선, 예예, 종선생, 종관이 순서대로 반응을 보였다.
"아직도 저를 잊지 않고 이리 나와 주시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그리고 종관 수사의 말처럼 제가 여러분을 모신 것은 마땅히 그만한 일이 있기 때문이고, 그것은 여러분들 모두에 게 유익할 것입니다."
건우가 그들을 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그가 멸계 세력들 사이에서 꾸미고 있는 일과 연관된 것이었다.
< 멸계 수사 진영의 균열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