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6)
< 음모와 함정 >
"수엽사 진광의 이야기를 들었나요?"
길매가 혈주 안의 인물을 향해 물었다.
= 진광? 그 놈은 상이산맥으로 간 것으로 아는데? 그곳이라면 네 담당이 아니냐. 나는 철위산맥과 함해의 네 섬을 살피는 것으로도 벅차다만.
"그래서 모른다는 거군요?"
= 그리 나를 추궁하는 것을 보면, 진광 그 놈이 무슨 일을 벌이긴 한 모양이군. 그리고 그 일이 주인님과 연관이 있는 듯 하고.
"옳아요. 아직 확실치는 않지만 진광 그 자가 길우몽 수사를 만난 것 같아요."
= 드디어 길우몽 수사가 나타났단 말이냐? 주인님께서 기뻐하실 일이로군.
길우몽이란 말에 혈주 가까이 얼굴을 붙인 이는 다름 아닌 흑선풍이었다.
그의 몸을 이루고 있는 벌레는 과거와 달리 흑금색의 광채를 지니고 있었는데 과거의 검은 매미와는 비교할 수 없을 격조가 느껴졌다.
게다가 흑선풍 역시 길매와 마찬가지로 태령기 완경에 이르러 있었고, 직위도 7대 세력 중에 하나인 중림(蟲林)의 림주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사실 길매와 흑선풍은 알시평 혼돈역에 도착해서야 자신들이 같은 사람을 모시고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둘이 암중으로 힘을 합쳐 각각 자미혈궁과 중림에 공을 세우고, 경쟁자를 처리한 끝에 결국 궁주와 림주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더해서 천겁독에 중독된 태령기 수사를 각각 둘씩 배정받았으니 호랑이 등에 날개를 단 격으로 승승장구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 들어온 정보에 따르면 진광이 귀한 수련자원들을 대거 끌어 모으고 있답니다. 아시겠지만 그 놈이 그런 일을 벌일 이유가 달리 뭐겠습니까?"
= 이유야 여럿 떠올릴 수 있겠지만 그 중에서 가장 유력한 것은 멸계로 돌아가려 한다는 것이겠지.
"그리고 그렇게 진광을 움직일 수 있는 이는 길우몽 수사가 가장 유력하지요."
= 무슨 소린지 알겠다. 그럼 지금 길우몽 수사가 상이산맥에 있다는 이야기니, 나도 그곳으로 가야겠구나.
"그리 해 주시면 고맙지요. 저는 쉽게 자리를 비울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 하하하. 원래 금선탈각(金蟬脫殼)이 어디에서 나온 말이겠느냐. 금빛매미가 허물만 남기고 빠져나간다는 말이니, 나에게 딱 어울리는 이야기지.
"호호호. 그래서 제가 흑 수사에게 이리 연락을 한 것이 아닙니까. 물론 매번 흑 수사께서 수고를 하시는 것이 미안하긴 합니다만."
= 무슨, 그런 소리는 할 필요가 없다. 모두가 주인님을 위한 것인데 내가 어찌 수고로움을 피할까.
"항상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러면 흑 수사께서 이곳 상이산맥에 도착하면 다시 연락을 하지요. 그 때까지 최대한 진광의 행사를 파악하는 한편, 길우몽 수사의 행적을 찾아보도 록 하겠습니다."
= 알았다. 최대한 빠르게 가도록 하마.
"네, 그럼 나중에 뵈어요."
길매는 그렇게 인사를 마치고는 소매를 저어 혈주(血珠)를 흩어버렸다.
그리고 다시 궁의 제자들에게 명령을 내려 상이산맥에서 특별한 일이 없는지 자세히 살피게 하고, 특히 삼두육비의 수사에 대한 소문이 없는지 파악하게 했다.
그렇게 다시 십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고란사원(高欄寺院)의 원주께서 어쩐 일로 나를 다 찾아 오셨소?"
"진광! 지금 상황을 보고도 정신을 못 차리는 거냐? 너는 오늘 이 자리에서 죽을 수도 있음이다."
"하하하. 지금 나를 위협하는 것이오? 고작 원주가 데리고 온 저 놈들을 가지고?"
진광이 고란사원의 원주 뒤쪽에 서 있는 세 명의 태령기 수사들을 힐끗 쳐다보고는 크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 진광의 모습에 고란사원 원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와 그가 데리고 온 이들은 모두가 얼굴을 가리는 삿갓을 쓰고 소매와 바짓단을 단단히 조여 맨 복장을 하고 있었다.
거기에 삿갓 밑으로 드러난 얼굴조차 복면을 묶어 가렸으니 그 모습은 암살자를 떠올리게 하기에 중분했다.
원래 고란사원의 제자들이 어둠의 기운이 담긴 극멸기를 이용한 자객들로 유명하니 특별히 이상할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진광이 그런 고란사원의 원주와 원로들을 눈앞에 두고도 태연한 것은 이해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아무리 그가 태령기 완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것은 고란사원의 원주도 마찬가지고, 원로들도 모두 태령기 후기의 경지에 있었다.
그 넷을 진광이 감당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 할 터.
그럼에도 진광이 느긋하게 여유를 보인다면 분명히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고란사원주 아살(芽殺)의 삿갓에 가려진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동시에 잿빛의 광채를 뿜어내며 눈동자만 움직여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눈을 가린 삿갓 따위는 아무 지장도 없다는 듯이 진광과 그 주위를 살피는 아살의 눈.
이윽고 그가 뭔가를 발견했는지 어금니를 깨물며 진광을 노려봤다.
"미리 알고 준비를 했던 것이냐?"
"이런! 알아차리셨습니까? 역시 오래 속이진 못하리라 생각했지요."
아살의 물음에 진광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한쪽 손을 들어 올리자 그의 좌우와 등 뒤로 아지랑이 같은 일렁임이 일어나더니 몇몇 수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으음. 자미혈궁주와 충림의 림주? 어찌 당신들이?"
아살은 모습을 드러낸 수사들 중에서 길매와 흑선풍을 발견하고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흑선풍에 이르러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다시 묻기도 했다.
"충림 림주는 분명 철위산맥에 있어야 할 터인데? 어찌 이곳에 있을 수가 있지?"
아살도 고란사원의 원주로서 중요한 정보는 주기적으로 보고를 받고 있다.
그 중에 7대 세력의 움직임은 당연히 포함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얼마 전에도 흑선풍이 철위산맥, 중림에 있다는 보고를 들었다.
그런데 이곳에 흑선풍이 나타났다는 것은 고란사원의 정보가 잘못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원주, 지금 그런 것을 알아서 무엇하겠습니까. 그저 운명이라 여기고 이만 고된 수련 대도에서 물러나시기 바랍니다."
그 때, 진광이 앞으로 나서며 아살을 향해 그렇게 말을 하고는 등에 지고 있던 쇠그물을 던졌다.
촤롸롸롸 롸롸롸롸롸 !
진광의 그물이 넓게 펼쳐져 순식간에 수 천 장의 하늘을 뒤덮었다.
그 순간 아살과 세 명의 고란사원 원로들은 그물을 벗어나기 위해 급히 둔술을 펼쳤다.
파파팍! 타다닥!
"큭!"
"......."
"......."
하지만 그들의 시도는 즉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길매와 흑선풍, 거기에 태령기 초, 중기의 수사들 여섯이 일제히 의념을 펼쳐 둔술 시전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아살 등의 둔술을 방해한 방법은 간단했다.
진광이 던진 쇠그물과 연계된 진법을 빠르게 발동시켰기 때문이다.
"하하하. 다른 것은 몰라도 이 진광의 그물을 쉬이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내가 지금껏 이것으로 모은 진극멸기가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이 진광이 그것으로 태령기 완경 에 이르렀을 정도입니다."
아살과 세 명의 고란사원 원로가 둔술에 실패하는 모습을 보고는 진광이 크게 웃으며 그들을 놀렸다.
그런 중에 길매가 수인을 맺자 그녀의 등 뒤로 서른여섯 개의 검은 손이 나타나 제각각 다른 모양을 취했다.
"나도 놀고 있을 수는 없겠지."
이에 뒤질세라 흑선풍 역시 의념을 펼쳐 무언가 진언을 외웠다.
그러자 고란사원 원로 하나의 발 밑이 일렁거리더니 벌레의 사나운 가위모양 이빨이 솟아났다.
쿠르르르릉! 콰지직!
"커억!"
마치 사슴벌레의 이빨처럼 갈라진 곤충의 이빨이 한 원로의 허리를 물어 단번에 끊어 버렸다.
이에 허리가 잘린 고란사원 원로는 크게 비명을 지르며 검은 연기로 변해 흩어졌다.
하지만 흑선풍은 그 원로가 그대로 죽지 않을 것임을 알았기에 다시 의념을 뿌려 자신이 불러낸 괴수를 부렸다.
피리리리리 리리 릭!
그러자 괴수가 크게 입을 벌리고 손톱보다 작은 곤충을 연기처럼 뿜어냈는데, 그 연기가 어느 허공에 이르자 허리 잘린 고란사원의 원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그 사이에 잘린 허리를 붙이고 회복하던 중이었는데, 모습이 드러나자 회복이 멈추고 말았다.
"이, 이런! 살(殺)! 청부(請負)! 진광. 청부(請負)! 자미혈궁주. 청부(請負)! 충림주! 출행(出行)!"
그런 중에 고란사원주 아살이 자신의 몸을 허공에 녹여 넣으며 크게 고함을 질렀다.
그것은 고란사원의 원주로서 제자들에게 청부를 명령하는 말이었다.
스스스스슥! 스스슥!
그 직후 아살과 세 명의 고란사원 원로가 일제히 허공으로 숨어들어 모습을 감추었다.
이제 모습을 감춘 그들이 언제 어떻게 살행을 할지 알 수 없게 되었다.
"하하하. 보통 때라면 진정 두려워 할 일입니다. 하지만 이미 그대들은 나의 그물에 갇혀 있음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하하하."
하지만 진광은 아살 등이 몸을 숨겼어도 크게 두려워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도리어 가소롭다는 듯이 크게 웃는 진광.
그가 한 순간 자신이 던진 그물과 연결된 줄을 거칠게 잡아 흔들었다.
줄렁 출렁 출렁!
수천 장의 하늘을 덮고 있던 쇠그물이 그의 손을 따라서 요동을 쳤다.
그러자 그물에서 은빛의 기운이 뿜어져 나와 가루처럼 흩날렸다.
파직 파지지직! 파직 파지지지!
그리고 그 은빛 가루가 닿은 몇 곳에서 새하얀 뇌전이 터지며 아살과 고란사원 원로들의 모습을 허공 밖으로 끌어 냈다.
"이런!"
아살이 낭패한 음성으로 탄식을 하더 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미 그와 원로들은 진광, 길매, 흑선풍에게 포위가 되었고, 그들 뒤로는 여섯 명의 태령기 초, 중기 수사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한 명씩 데리고 간다! 방어는 없다."
결국 아살은 마지막 명령을 내리고 소매에서 비수 하나를 꺼내 들었다.
팔뚝 길이에 손잡이와 날의 색이 모두 검은 그 비수는 아살의 본명법보였다.
아살은 그것을 사용하면 적어도 한 명과는 동귀어진을 할 수 있으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그의 본명법보에는 살(殺)의 기운이 법칙에 가까울 만큼 축적되어 있었던 것이다.
여건이 되었다면 법칙의 힘으로까지 성장시킬 수 있었을 테지만 티끌 같은 모자람을 채우지 못했다.
아살은 지금 이 순간 그것이 너무나 아쉬웠다.
하지만 어차피 일은 이미 이렇게 된 것.
아살은 잡념을 지우고 느릿한 움직임으로 진광에게 다가가 비수를 내밀었다.
마치 건네줄 테니 받으라는 듯이 느리게 내미는 비수.
"크으음! 이런!"
그런데 막상 당하는 진광은 그 비수를 피하지 못했고, 지켜보는 이들도 아살의 움직임을 놓친 듯 했다. 아살이 익힌 공법이 살행 대상인 진광의 감각을 무디게 만들어 반응하지 못하게 만든 것이었다.
원래 태령기 수사들의 싸움이란 범인이 보기에는 눈 한 번 깜짝 하는 사이에 천지가 개벽을 하고도 남는다.
아살의 암살 공법은 수사의 감각을 극단적으로 낮추는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아살의 암살 공법에도 분명한 약점이 있었다.
카강!
"어엇? 어떤 놈이?"
"아! 길 수사!"
한 자루 검이 날아와 아살의 비수를 쳐내며 동시에 그의 암살 공법까지 깨트렸다.
그리고 진광은 그 검의 주인이 누군지 알아차리고 반색하며 탄성을 터트렸다.
그러자 번뜩이는 금색 둔광과 함께 삼두육비의 모습을 한 건우가 진광의 옆에 모습을 드러냈다.
"방심을 하셨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진광을 보며 그렇게 말을 하더 니 손짓을 했다.
그러자 아살의 비수를 쳐 냈던 검이 여섯 개로 나뉘어져 각각의 손아귀로 날아들었다.
"무얼 한다고 시간을 끌고 있답니까? 망설일 일이 뭐가 있다고!"
건우는 여섯 개의 검이 손에 들어오자 곧바로 다른 수사들을 나무라며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 음모와 함정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