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
< 상황을 파악하고 적진으로 숨어들다 >
"그러니까 지금 멸계 세력에 구산팔해 중에서 세 곳의 산과 두 곳의 바다를 빼앗겼다는 말입니까?"
건우가 믿기지 않는 얼굴로 깜짝 놀라며 물었다.
"일이 그렇게 되었소이다."
"이유가 뭡니까? 어찌 그런 일이 생겼다는 말입니까?"
"그야 멸계의 세력이 워낙 강대하기도 하고 이리저리 신출귀몰하는 바람에……
"좀 더 정확히 설명을 해 주십시오. 그리 말씀을 하셔서야 어디 알아듣기나 하겠습니까?"
"그게 그러니까……."
건우의 압박에 원로원장이 조심스럽게 그간의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건우가 유정정과 함께 지하 세계에 있었던 시간은 1만 년.
태령기 수사에겐 그리 길다 할 수 없는 시간이지만 전쟁을 치르는 수미 세계에선 몇 번이나 큰 일이 벌어질 수 있는 시간이었다.
"당시에 알시평에 그들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우리는 그들은 모른 척 했습니다. 그 이유는 아시지요?"
"아직 멸계전을 끝낼 단서가 없었기 때문이라 했었지요? 수미 세계에 들어온 멸계 놈들을 모두 박멸한다고 멸계전이 끝나는 것은 아니라 하셨던가요?"
건우는 과거 수미산으로 돌아와 유정정의 거처를 찾기 전에 그간의 일을 보고했던 때를 떠올리며 말했다.
"바로 그렇습니다. 멸계전의 승리를 위해서는 반드시 멸계와 우리 수미 세계 사이의 연결점을 끊어 내야 하지요. 그런데 당시에는 그것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라서 처리한다고 해 도 어디선가 다시 생길 수밖에 없는 때였지요."
"좋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렸다는 것은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알시평에 대한 감시를 게을리하고 그 놈들의 세력이 그리 커질 때까지 방치한 것은 이해가 되 지 않습니다."
"허허허. 그것 참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게 또 일이 그렇게 된 까닭이 있습니다."
수미 선문의 원로원주는 면목이 없다는 듯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수염을 쓸어내렸다.
"상공, 마음을 가라앉히셔요. 어찌 그리 격하십니까. 아무리 평소에 범인지심(凡人之心.' 평범한 사람의 마음)을 지니는 것이 좋다고 하지만 과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유정정이 원로원주의 난처함을 풀어 주려는 듯이 슬며시 건우의 팔뚝을 잡으며 말했다.
건우는 그런 유정정을 돌아보고는 슬그머 니 의념을 갈무리했다.
원로원주의 말을 들으며 화가 날 때마다 풀어 놓았던 의념이었다.
"그래서 어찌 되었다는 것입니까? 마저 이야기를 들어 보지요."
건우가 등을 의자에 기대며 긴장이 풀린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원로원주도 조금은 편해진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과거 멸계 수사임에도 태령기 완경에 이르러 건우 수사의 눈을 속이고 수미로 넘어온 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말에서 등장한 것은 뜻밖에도 수엽사(壽獵師) 진광(振鑛)에 대한 것이었다.
"설마 그 자가 다시 우리 쪽으로 넘어와 세작 노릇을 했다는 것입니까?"
건우가 그건 아니겠지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허허허. 따지고 보면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원로원장의 대답은 그 설마에 뒤통수를 맞은 내용이었다.
"그 놈에게 속았다고요?!"
당연히 건우의 목소리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진정하시지요. 일이 어찌 된 것인고 하니……"
이어진 이야기는 건우도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회심의 수였다.
"그러니까 진광 그 놈이 자신이 익힌 공법을 멸계 수사 놈들에게 두루 익히게 해서 그놈들을 수미 세계 곳곳으로 퍼트렸다는 말입니까?"
"허허허. 그렇지요. 그런데 그것이 어찌나 감쪽같은지 어지간해서는 그들이 숨긴 극멸기를 찾아낼 수가 없었단 말이지요."
"그 중에는 고작 화신기 수준의 놈들도 있었다면서요? 그런데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입니까?"
"그 공법은 워낙 은밀해서 화신기가 익혔더라도 태령기 수준이나 되어야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입니다. 같은 태령기가 익혔다면 거의 알아차리기 불가능한 정도지요. 이전 수엽 사 진광이란 놈이 건우 수사의 도움으로 수미산에 도착했을 때, 알아차리지 못한 것처럼 말입니다."
"후우우."
건우는 원로원장의 말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불만스러운 마음이 꿈틀거 리고 있었다.
원로원장이 진광을 수미 세계로 데리고 온 것이 건우였음을 거듭 거론한 까닭이었다.
결국 지금 상황이 이렇게 된 것에는 건우의 책임도 적지 않다고 에둘러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원로원주께서는 말을 조심해 주셔요. 그 진광이란 멸계 놈이 이곳 수미산(須彌山)으로 넘어온 것에 상공이 관여했다지만, 그 때의 상공은 고작 성령기에 불과했어요. 그런데 당 시 수미로 넘어온 수사들을 관리하던 이들을 두고, 어찌 상공에게 책임을 묻는단 말인가요?"
그런 기미를 알아차린 유정정이 당장 발끈하고 나섰다.
당시에 홍애지에서 넘어온 고계 수사들은 모두 수미 선문을 중심으로 하는 수도계의 고위급 수사들이 나서서 관리했다.
그들에게 수미 세계에 대한 정보를 주고, 거처를 잡아 준 것은 물론이고, 적당히 일을 골라 맡긴 것도 그들이었다.
그런데 고위급 수사들이 가려내지 못해서 생긴 문제를 건우에게 따진단 말인가.
"아닙니다. 어찌 건우 수사에게 그 책임을 묻겠습니까. 절대 그런 의도는 없었습니다."
이에 원로원장이 다급히 손을 내저으며 변명을했다.
하지만 건우나 유정정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되었습니다. 보아하니 나를 두고 말들이 많은 모양이군요. 그래서 지난 1만 년 동안 지하 세계에 머무는 나와 정정 수사를 한 번도 찾아보지 않았던 것이겠고 말입니다."
"허어, 그것 참."
건우의 말에 원로원장이 난처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것이었군요. 멸계와 연결될 공간 통로를 처리하는 문제인데 어쩐지 한 번도 확인조차 하지 않는다 싶었더니, 우리를 일부러 멀리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려."
유정정도 상황을 파악했다는 듯이 섭섭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하 세계의 공간 균열은 무척 중요한 문제였다.
물론 척제를 비롯한 네 명의 수사들이 먼저 나와서 일이 무사히 처리되었음을 알렸겠지만 그렇더라도 1만 년 동안 아무도 찾지 않는 것에 이상하다 생각했었다.
그 답이 이런 것이었다니.
"그것 참, 두 분이 이리 영민하시니 저로서도 어쩔 수 없게 되었습니다. 네, 있는 그대로 말씀을 드리지요."
원로원주는 결국 한숨을 쉬며 포기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어진 이야기는 건우의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수엽사 진광으로 인해서 멸계의 첩자들이 횡횡하게 되자, 건우를 두고 그 책임을 논하는 이들이 늘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지각 있는 이들은 진광의 일을 건우에게 미루는 것은 옳지 못하다 했지만 많은 경우에 그러하듯 여론은 이성적이지 않았다.
"그럼 결국 원로원주께서 상공의 거취를 감추고 알리지 않았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이야기를 듣던 정정이 확인하듯 물었다.
"초기에 워낙 원성이 자자하여 건우 수사에게 화가 미질까 우려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리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다들 상공의 일을 잊었답니까?"
"이제는 건우 수사에 대해서 말하는 이들이 거의 없지요. 벌써 1만 년 가까이 지난 일이 아니겠습니까."
"흥, 그래도 다시 상공께서 나선 것을 알면 헛소리를 하는 이들이 나오겠지요."
유정정이 화를 누르지 못하고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원로원주 역시 그 말을 부정하지 못하는지 유정정의 시선을 피했다.
그 때, 건우가 유정정의 손을 슬그머 니 잡았다.
"괜잖소. 과거에 나를 찾아와 따지는 이가 있었다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여야 했겠지만, 이제는 그런 자가 있으면 주리를 틀어 줄 것이오. 그러니 정정 선자는 마음을 다스리고 진정하시오."
"아, 실로 그렇습니다. 이제 누가 있어 상공께 함부로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제가 잠시 그것을 생각지 못했습니다. 호호호호."
건우의 만류에 정신이 든 듯, 유정정의 표정이 밝아지며 교소(婚笑)를 터트렸다.
그런 유정정의 반응에 원로원주가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건우를 다시 살폈다.
지하 세계로 들어갈 때에는 고작 성령기 후기에 불과했던 건우였다.
그런 그가 1만 년 만에 태령기 완경이 되어 나타났으니 원로원주는 건우의 기초가 부실하리라 추측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워낙 짧은 시간에 경지가 급격히 오르면 대부분의 수사들이 모자란 구석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유정정이 자신만만하게 건우를 상대할 자가 없으리라 하니 원로원주도 건우를 다시 살피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모습으로는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 없었기에 원로원주는 잠시 의아하게 여겼다.
그러다가 문득 원로원주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떠올랐다.
'내가 건우 수사의 특별함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 그것이 곧 건우 수사의 대단함일 수도 있겠군. 유 수사가 저리도 자신하는 것을 보면 분명 내 생각대로일 것이야.'
원로원주는 관점을 바꾸어 그런 결론에 이른 것이다.
"그럼 이제 두 분은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그 동안 크게 수고를 하셨으니 휴식이라도……
"아닙니다. 우리는 따로 할 일이 있습니다. 어쨌거나 수미 세계에 속한 수도자인데 어찌 멸계전에서 눈을 돌릴 수가 있겠습니까."
"나는 어차피 상공을 따를 것이니 따로 물어볼 것도 없어요."
원로원주의 물음에 건우와 유정정이 각각 그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건우는 그 후로 몇 달을 수미선문에서 머물다가 어느 날 홀연히 유정정과 함께 수미산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구산팔해의 가장 바깥에는 철위산맥이 있고, 그 철위산맥과 니민달라(尼民達羅)산맥 사이에 함해(鹹海)가 있다.
이어서 니민달라와 상이(象耳)산맥 사이에 상이해가 있다.
이렇게 구산팔해의 아홉 산맥은 외곽에서부터 절위산맥, 니민달라산맥, 상이산의 순서로 있는데, 지금 그 세 개의 산맥과 그 사이에 있는 바다 두 곳을 모두 멸계 세력에게 빼앗 긴 상태다.
그래서 지금은 네 번째 산맥인 마이(馬耳)산맥과 세 번째 상이산맥 사이에 있는 마이해에서 수미 세계의 수사들과 멸계 수사들이 혈전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건우는 마이산맥까지 장거리 전송진으로 이동할 수 있었지만 그 이후는 전송진을 이용할 수 없었다.
이미 멸계의 영역이 된 곳은 대응하는 전송진을 모두 폐쇄했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도 은밀하게 감춰놓은 비장의 전송진들이 있겠지만 건우가 그것을 쓸 수는 없었다.
그래서 건우는 마이산맥의 대성 한 곳에 도착한 후 곧바로 부양도에 올랐다.
그리고이 때부터 부양도에 설치된 전송진이 톡톡히 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과거에 비해서 부양도의 전송진 이동 거리가 비약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대성의 전송진 이동 거리에 비할 수가 없었지만 건우가 태령기에 오른 이후에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소비되는 자원이 끔찍하리만큼 많기는 하지만 부양도의 전송진을 이용하면 구산팔해의 바다나 산맥 하나 정도는 가볍게 건너 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역시 건우가 태령기의 깨달음을 바탕으로 부양도를 개변(改變)한 결과였다.
건우는 부양도의 전송진을 이용하여 멸계 세력의 영역이 된 상이산맥의 어느 곳으로 이동했다.
"좌표만으로 이렇게 이동하는 것이 가능하다니 부양도의 전송진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어찌 이런 것을 만들었는지 놀랍습니다."
부양도가 상이산맥에 도착하자 유정정이 감탄을 금치 못하며 건우를 추켜세웠다.
원래 대부분의 장거리 전송진은 도착하는 곳에 대응진을 두기 마련이다.
그런데 지금 부양도는 대응진 없이 좌표만으로 바다를 건너 대륙 깊은 곳까지 한 번에 이동한 것이 아닌가.
유정정이 놀라는 것도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정정, 당신이 과거에 나를 찾아서 공간을 이동했던 것은 잊었습니까? 그에 비하면 나는 부양도의 진법을 이용한 것이라 부족하기 짝이 없지요."
"상공, 그 무슨 말씀이세요. 당시에 제가 상공과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음을 잘 아시면서 놀리시는 거지요? 아무리 저라 하여도 멀리 떨어져 있으면 어찌 상공을 찾았겠습니 까?"
슬그머니 과거 건우 모르게 곁에서 맴돌고 있었음을 밝히는 유정정이었다.
건우는 이미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또 이렇게 유정정을 놀리는 것이 재미가 있었다.
"흥, 이제보니 저를 놀리신 거군요?"
하지만 역시 유정정에게 금방 들켜버리고 마는 건우였다.
이제부터는 토라진 그녀를 달래야 할 때였다.
'무슨 상관이라, 놀리는 것도 좋고, 이리 달래는 것도 좋은데. 하하하.'
<상황을 파악하고 적진으로 숨어들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