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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미산 지하에는 또 다른 세상이 있다 >
= 호호호. 기특하구나. 그렇게 내 소식이 궁금했더냐?
건우의 반응에 유정정의 허상이 기분이 좋아진 듯이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허상은 옥간에 담긴 사념을 전하는 것일 뿐이라, 건우가 연리지를 통해 본체의 위급을 알아차린 것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선자님께선 어떤 일로 어디로 가신 것입니까? 어서 일러주십시오."
어차피 사념의 허상.
건우는 급한 마음에 유정정의 허상을 다그쳤다.
= 흥, 고약하구나. 어찌 나를 이리 대하느냐? 내 너를 만나면 가만 두지 않을 테니 두고 보아라. 아, 그리고 나는 지금 수미산의 지하에 있느니, 너는 그곳으로 나를 찾아와야 할 것이다.
"수미산 지하라니요? 거긴 무슨 일로 가신 것입니까?"
= 그곳에이 수미 세계의 비밀이 있느니라. 과거 선인께서 이곳 수미 세계를 겨자씨에 봉인하신 후로 흐르지 못하고 응결된 세계의 기운이 그곳에 있지.
"봉인 후에 응결된 기운이라니요?"
= 당연히 봉인이 풀렸으니 그 기운 또한 천지 법칙의 흐름에 녹아드는 중이니 원래는 문제가 없어야했다.
건우가 질문을 던졌지만 허상은 그에 반응하지 않고 제 할 말만 이어갔다.
= 그런데 하필이면 그곳에 멸계와의 통로가 열렸다. 아니, 어쩌면 그조차도 자연스러운 일일지 모르지. 천지 법칙의 심술을 누가 예측하겠느냐.
"그럼 선자께서 지금 그곳에서 멸계에서 온 이들과 싸우고 계시다는 말씀입니까?"
건우는 유정정의 상태가 좋지 않음을 연리지를 통해서 알았기에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묻고 말았다.
하지만 그런 질문에 옥간에 남아 있던 사념이 반응할 수는 없었다.
= 이제 너도 비밀을 알게 되었으니 나를 찾아와야 하겠구나. 그럼 내가 너에게 길을 찾을 수 있는 지도를 전해주마.
유정정의 허상은 여전히 제 할 말만 하더니 건우의 얼굴로 다가와 이마를 연리지 옥간으로 툭 쳤다.
그러자 건우의 머릿속에 수미산의 지하 세계에 대한 정보가 주르륵 심어졌다.
'이게 뭐야? 무슨 동굴이나 유적 따위가 아니라 하나의 세상이 있는 거였어? , 건우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수미산 지하의 모습에 입을 떡 벌렸다.
'거기다가 입구를 지키는 태령기 완경의 수사에게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허락을 받지 못하면 들어갈 수가 없으니 잘못하면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어? 이거 미치것네. , 건우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북북 긁었다.
그러다가 다시 연리지 옥간을 살피고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함을 질렀다.
"미쳐! 인생이 왜 이렇게 파란만장하냐고 좀! 좀! 응? 여유나 뭐 여유나, 여유 같은 건 내 인생에 없는 거냐고!"
하지만 버럭버럭 화를 내면서도 건우는 둔광과 함께 수미산을 향해 모습을 감췄다.
그 때문에 정원을 관리하는 저계 수사들만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몰라 눈을 똥그랗게 떴을 뿐이었다오
***
높이가 일천 장이요 폭이 십만 장에 이르는 거대한 절벽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성벽을 보는 듯했다.
그 절벽은 거대한 수미산 자락의 후미진 곳에 흉터처럼 드러나 있는 것으로 옛 시절 산사태의 흔적이었다.
산사태로 절벽에서 떨어져 나갔던 돌들은 이미 자갈과 모래, 흙이 되어 버렸건만 절벽만은 아직도 옛 모습을 그대로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절벽이 그렇게 시간과 풍우(風雨), 한서(寒暑)의 힘을 거스른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는데, 지금 건우는 그 이유가 되는 존재 앞에 엎드려 있었다.
"그래서 여길 통과하고 싶다고?"
"네, 어르신."
건우가 바닥에 납작 엎드리며 대답했다.
"고작 성령기 후기 따위가? 네가 들어간들 무슨 도움이 되지?"
건우의 대답에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하고 있는 것은 거대한 문에 양각된 강철 얼굴이었다.
그 얼굴은 머리카락과 귀가 없이 그저 이마부터 턱까지만 돋아난 모습인데 평범한 얼굴보다 아래위로 두 배는 길쭉했다.
"제가 비록 비천한 경지이긴 하지만 유 선자가 저에게 따로 이야기를 남긴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너는 아는 것이 없지만 유정정은 네게서 뭔가를 보았을 것이다? 그러니 네가 여길 들어가야겠다고? 웃기는 소리!"
문에 새겨진 얼굴이 가당치도 않다는 표정으로 잘라내듯 말했다.
건우는 그에게 통행을 허락받는 것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며 표정이 어두워졌다.
"오래전에 수미 세계가 봉인되며 천지 법칙의 커다란 흐름이 막히는 일이 생겼다."
그러자 강철 얼굴이 저 홀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건우는 유정정이 전해준 정보에서 이럴 때에는 절대 강철 얼굴의 말을 막지 말라는 내용을 전해 들었기에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하지만 흐름이 막혀버린 천지 법칙의 힘이 지하에 응결되어 소용돌이치는 세상을 만든 것을 수미 세계의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결국 그 세상의 힘이 밖으로 터져 나오는 일이 생겼지."
건우는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의외로 흥미로운 부분이 있어 슬며시 고개를 들고 그 이야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천지 법칙의 흐름은 원래 끊기거나 멈출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수미 세계가 겨자씨 안에 봉인되면서 그 흐름에 문제가 생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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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그 때 문제가 생긴 그 흐름이 얼마나 강대한 것인지 모를 것이다. 애초에 이곳 수미 세계에 해당하는 천지 법칙은 그대로 살아 있지 않았더냐. 심지어 봉인된 세상에서도 대 천겁은 멈추지 않았다. 그렇지?"
"네? 네. 그리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이 세상의 천지 법칙은 그대로인데 뭐가 문제였을꼬?"
강철 얼굴이 이제는 건우를 시험하듯 물었다.
'네가 그것을 알 수 있겠느냐?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봉인으로 문제가 되었다니 당연히 수미 세계가 대천세계에 속해 있음으로 생기는 천지 법칙의 흐름이 아니었겠습니까. 하나의 세계가 다른 여러 세계와 엮이면서 이루어야 할 흐름 말입니다."
"오호? 너는 무척 영민한 데가 있구나. 어찌 그것을 그리 쉽게 추측할 수 있지?"
건우의 대답에 강절 얼굴이 놀랐다는 듯이 아래위로 입을 쩍 벌렸다.
건우는 그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듯이 더욱 자세를 낮추었다.
"네 말이 옳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 때 멈춘 법칙의 흐름에는 반드시 일어나야 했을 멸계전이 멈춘 것에 대한 것도 있었지. 너는 이게 무슨 의민지 알겠느냐?"
다시 강철 얼굴이 물었고, 건우의 표정은 전보다 훨씬 굳어졌다.
"지하에 멸계전과 연관된 아주 중요한 뭔가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크하하하. 옳구나 옳아. 네 말이 진정 옳다. 수미산의 지하에 천지 법칙의 힘이 응결되며 새로운 세상이 만들어졌고, 거기에는 멸계로 통하는 길도 만들어졌다."
"멸계로 통하는 길입니까?"
"그렇다. 물론 그 길은 정상적인 것이 아니다. 과거에 열렸어야 할 것이 열리지 못하고 비틀어진 것이지."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까?"
"비틀린 것을 바로잡으면 어찌 되겠느냐?"
건우의 물음에 강철 얼굴이 도리어 반문을 던졌다.
"멸계전에 참가할 수 있는 멸계 세력의 힘이 더욱 강해지는 것입니까?"
건우가 설마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 멸계전으로 연결된 곳이 아닌 다른 소계가 더해질 가능성이 있지. 그렇게 되면 우리 수미 세계는 멸계의 소계 두 곳과 전쟁을 치러야 할 것이다."
건우는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 수미산 지하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멸계의 전력이 두 배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아,그런데 너는 그것에 대해서 알고 있느냐?"
심각한 이야기 중에 강철 얼굴이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영문을 알지 못한 건우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내가 어찌하여 이곳에 있게 된 것인지 말이다."
"아닙니다. 후배는 어르신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습니다. 송구합니다."
= 뭐 그럴 줄 알았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지. 그에 대해서 내가 자세히 이야기를 해 주면 될 것이 아니냐. 너는 내 이야기를 듣고 싶은 생각이 있느냐?"
"물론입니다. 어르신의 이야기를 어찌 듣고 싶지 않겠습니까?"
건우는 강철 얼굴의 물음에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사실 유정정이 전한 정보에는 이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강철 얼굴은 자신의 공적을 자랑하는 습관이 있는데 그것을 잘 들어줘야만 문을 통과할 작은 기회라도 생긴다했다.
만약 그의 옛 이야기를 무시하면 절대로 문을 지날 수 없을 거라는 경고도 있었다.
"고놈 참. 된 놈이지 않은가. 크하하하. 그래 내가 그 이야기를 해 줄 테니 잘 듣거라."
강철 얼굴은 기뻐하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줄거리는 그가 어째서 문의 조각이 되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소위(WK)는 본래 수미 세계의 고대 수도 문파의 뒷문에서 태어난 영족 수사라했다.
수도 문파의 쪽문으로 오랜 세월을 보내다 영기를 흡수하고 문에 붙은 갖가지 법부들의 힘을 받아 영성을 얻게 된 것이다.
그 후로 소위는 그 문파의 제자로 수련하여 결국 태령기의 완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수미 세계가 겨자씨에 봉인이 되고 선계로 갈 길이 끊어지고 말았다.
이에 크게 실망하여 수련의 의지조차 잃어버린 소위는 스스로 영성을 잠재우고 초라한 문짝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그렇게 하여 수사의 자격을 버리고 천지 법칙의 천겁을 피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오랜 세월을 흐른 후 그렇게 잠들어 있던 소위를 수미 선문의 수사들이 깨웠다.
이유는 수미산의 자락에 산사태가 나며 지하에서 사나운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다는 것.
그것을 막기 위해 산사태로 드러난 절벽에 금제를 걸고 문을 달기로 했다는 것이다.
벽만 있으면 소통이 막히고, 당연히 지하 세계의 기운이 쌓이고 쌓이다가 결국 폭발할 것이니 문을 만들어 그 위험을 줄이겠다는 의도였다. 그래서 절벽에 달아 둘 문을 찾다가 고대 문파의 폐허에서 소위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수미 선문의 수사들은 쓰러져 있는 문짝에서 영족의 기운을 느꼈고, 더욱 자세히 살피다가 그 안에 잠들어 있는 소위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이 나에게 부탁을 했지, 이곳에서 지하로 가는 통로를 지켜 달라고 말이지."
"하지만 어르신께선 천겁을……?"
"크하하하. 아니지. 지금의 나는 영족이 아니라 그저 문의 일부일 뿐이다. 나를 두고 수사라 할 수는 없지."
건우의 말에 소위가 크게 웃었다.
"나는 더 이상 수련 경지를 끌어올리지 못하는 몸이다. 그저 절벽과 문에 새겨진 금제의 일부에 불과하지. 그 덕분에 천겁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건우는 소위의 말을 조용히 듣기만했다.
소위가 말을 그렇게 하고 있지만 건우가 느끼기에 그는 분명히 태령기 완경의 수사나 다름이 없었다.
"결국 나는 수미 세계의 안전을 위해서 금제의 일부가 되는 희생을 했다는 말이지. 어떠냐? 존경스럽지 않으냐?"
소위가 이야기 끝에 건우를 보며 그렇게 물었다.
건우는 엎드렸던 고개를 들고 강철 얼굴이 된 소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존경스럽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은 아닐 것이라 생각합니다."
"응? 무슨 소리 냐?"
"어리석은 후배가 생각하기에 어르신께서는 그만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셔도 될 것 같습니다. 어차피 수미 세계가 봉인에서 풀렸으니 어르신의 역할은 끝이 나지 않았겠습니 까?"
건우는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소위가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 고심했다.
그리고 몇 번을 다시 생각해도 소위가 문에 갇혀 있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을 듯했다.
어차피 소위도 이제는 천겁의 위협을 벗어난 상태가 아닌가.
게다가 봉인이 풀려 지하에 응결되었던 기운도 풀어지는 마당이니 소위가 문을 지키고 있을 이유가 없어진 상태였다.
"하지만 지하에는 아직 포악한 마물들이 많은데?"
"그것까지 어르신이 책임질 일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하긴 그도 그렇지. 나야 원래 응결된 천지 법칙의 흐름을 적당히 조절하는 역할이었으니까."
"이젠 그 일도 할 필요가 없어지지 않았습니까?"
"하하하하. 옳다. 네 말이진정 옳다. 하하하하."
소위가 건우의 말에 앓던 이가 빠진 듯이 시원한 표정으로 크게 웃었다.
그러다가 문득 웃음을 멈추고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건우를 바라봤다.
"네 말이 옳으나 내 천성이 안과 밖을 지키는 문(門)인지라 쉽게 내 책임을 벗어 던질 수는 없다. 그러니 내가 너와 함께 지하로 내려가 상황을 살피고 거취(去就)를 결정하겠다."
"저와 함께 말씀입니까?"
"물론 나의 진체가 너와 함께 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내 문고리 하나를 줄 터이니 그것을 가지고 가거라. 그리하면 어디서나 나와 의념을 연결할 수 있을 것인 즉!"
"알겠습니다. 후배가 어르신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건우가 다시 얼굴이 바닥에 닿을 정도로 엎드리며 대답했다.
'역시! 상황이 바뀌면 마음도 바뀌는 법이지. 천겁이 없어진 상황에서 마음속에 불만이 없을 리가 있나: 그리고 생각대로 일이 돌아가는 것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수미산 지하에는 또 다른 세상이 있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