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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아아, 바람 잘 날이 없다 >
자미혈궁(紫微血宮x 고란사원(高權寺院), 사명당(死命黨),흑송림(黑松林), 보량현천(保良玄天),상인문(喪人門), 충림(蟲林).
수미 세계와 멸계전을 치르기 위해서 알시평에 웅크리고 있는 일곱 세력은 이와 같았다.
건우는 수십 년에 걸쳐 알시평을 종횡하며 이들 일곱 세력의 수장들을 모두 만났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모두 취한 후, 건우가 한 행동은 삼십육계줄행랑이었다.
"휴우, 일단 도망을 치기는 했는데 진광이 알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네."
건우가 부양도의 정자에 앉아 끝없이 펼쳐지는 바다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는 몇 달 전에 드디어 알시평 혼돈역에서 빠져 나와 수미 세계로 완전히 돌아왔다.
그리고 그 후 지금까지 줄곧 부양도를 타고 함해를 가로지르는 중이었다.
구산팔해(九山八海)를 이루는 여덟 바다 중에서 짠물로 이루어진 바다는 여덟 번째 바다인 함해 밖에 없는데, 마침 건우가 알시평에서 빠져나와 만난 바다가 바로 짠물이 가득한 함해 였다?
건우는 자신이 함해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곤 곧바로 천문을 읽어 알시평이 있는 위치를 파악했다.
그리고 지금은 함해의 지도를 바탕으로 가까운 대성을 찾아 움직이는 중이었다.
부양도의 장거리 전송진을 이용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건우가 알고 있는 좌표 중에 부양도의 장거리 전송진 이동거 리가 닿는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 진광 그 자도 건우 님의 정체를 쉽게 떠들지는 못하지 않을까요?
루야가 크게 걱정할 일은 없을 거란 듯이 말했다.
"왜? 내가 워낙 거하게 사기를 쳐서?"
피식 웃으며 하는 건우의 말에는 흥이 담겨 있었다.
자신이 알시평에서 벌인 일은 생각만 해도 이빨 사이에서 볶은 깨를 깨트리는 것처럼 고소하게 느껴진 것이다.
그렇잖아요. 지금 상황에서 진광이 건우 님이 영기 수도계의 수사란 사실을 떠들고 다니면, 그런 건우 님의 뒷배 노릇을 했던 진광이 더 곤란해 질 문제죠. 그렇게 했다간 아마 다른 태령기 수사들이 모두 진광을 찢어 죽이겠다고 달려들 걸요?
"하긴 속은 것을 알면 나라도 그렇겠자. 프프픗"
루야의 말에 건우가 피식거리며 웃었다.
그도 그럴 것이 건우는 그 동안 진광의 이름을 팔며 7대 세력의 우두머리들을 모두 만나, 그들로부터 막대한 지원을 얻어냈던 것이다.
심지어 건우는 몇 번이나 진광까지 불러서 함께 태령기 수사들을 만나기도했다.
그런 자리에서 진광은 건우를 재기 넘치는 후배로 소개하며 만약 멸계로 돌아갈 방법을 찾는 수사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길우몽일 것이라며 장담을 하곤했다.
그 덕분에 건우는 7대 세력의 수장들로부터 엄청난 지원을 받았고, 그렇게 투자 순회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알시평을 빠져나온 것이다.
건우가 여전히 금제에 걸려 있다고 확신하고 있을 진광으로선 생각지도 못한 일일 것이다.
"그래도 어쩌면 진광이 직접 나를 잡겠다고 알시평에서 나왔을 수는 있겠지."
하긴 그럴 수도 있겠네요. 진광 그 자는 영기 수련 수사로도 변신할 수 있으니까요.
"뭐, 그래도 나를 잡는 것보다는 알시평에서 자리를 잡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길 가능성이 높아. 진광도 자신의 세력을 만들려고 애를 쓰고 있는 중이니까."
건우는 진광이 뒤를 쫓을 가능성을 그리 높게 보지 않는지 크게 걱정하는 기색은 없었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네요. 건우 님이 알시평에서 사라진 것을 알고 곧바로 따라오면 그 때는 아공간 아니면 도망갈 곳도 없을 테니까요.
"괜찮을 거야. 그리고 나도 수미선문에 도착하면 한동안 수련에만 힘쓸 테니까 걱정하지 마라."
그냥 지금부터 아공간에서 수련을 해도 될 텐데, 굳이 수미선문까지 가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건우는 알시평의 멸계 수사들에 대한 정보 수집과 투자사기를 끝내면 곧바로 수련에 힘쓸 생각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수련은 아공간에서도 할 수 있으니 굳이 알시평을 벗어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날 문득 건우의 육감이 그에게 수미선문으로 가야 한다고 속삭였다.
성령기 후기에 이른 수사의 육감이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지와 같다.
그래서 건우도 평소와 달리 강하게 느껴지는 감을 무시하지 못하고 알시평을 벗어나 최대한 빠르게 이동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
"흥! 이제야 모습을 드러냈군. 도대체 그 구석진 곳에서 뭘 하고 있었던 거지?"
그 즈음, 유정정은 자신의 연꽃궁전 안에서 건우의 기운을 느끼고 깊은 참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아무튼 애를 먹이는 녀석이라니까. 도대체 나조차도 파악할 수 없는 일들에 뒤엉키다니 생각할수록 기묘한 녀석이야."
유정정은 건우를 떠올리며 못마땅한 듯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매번 자신의 이목을 벗어나니 속이 상한 것이다.
그런데 그 때였다.
그녀의 앞에 하얀 옥간 하나가 공간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유정정이 자신의 궁전으로 옥간이 전해진 것을 알아차리고 불러들인 것이었다.
누군가 유정정이 수련에서 깨어난 것을 어찌 알아차리고 연락을 보낸 것이었다.
"무슨 일이지?"
유정정은 옥간의 주인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서슴없이 의념을 발동하여 그 내용을 읽어 내렸다.
그리고 점차 그녀의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이런 일이라면가 보지 않을 수가 없겠네. 쯧, 이러면 건우 그 녀석과 만나는 것은 또 미뤄지는 건가?"
옥간에는 유정정이 거부하기 어려운 사안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당분간 자리를 비울 수밖에 없게 되었다.
"조금만 더 서둘렀으면 얼마나 좋아 아무튼 마음에 안 들어 흥!"
유정정이 쌍수수련법이 기록된 연리지 옥간을 얼굴 앞으로 가지고 와서 화난 표정으로 노려보며 코웃음을 쳤다.
"음? 뭐지?"
- 왜 그러세요?
"아니, 뭔가 서늘한 느낌이 들어서. 이유 없이 한기가 도는 것이 범인들이 몸살 직전의 그것과 비슷하네.
성령기 수사가 몸살은 무슨 몸살이에요? 그보단 근처에서 누가 건우 님을 노리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 수사는 없는 것 같은데?"
그래도 모르니 어서 전송진에 오르세요. 전송진을 타고 니민달라(足民達羅) 산(山) 영역으로 가면 끝이잖아요.
"하긴, 그건 그렇지. 그나저나 수미선문에 보낸 소식은 제대로 전해졌나 모르겠네."
건우는 그렇게 스치듯 느낀 오한에 대한 쓸데없는 걱정은 털어 버리고 대신 수미 선문에 보낸 소식을 떠올렸다.
그야 건우 님이 수미산에 닿기 전에는 들어가지 않을까요? 가끔 생각하는 거지만 이쪽 대천 세계는 의외로 장거리 통신이 부족한 거 같아요. 직접 이동을 하는 것이나 크게 차 이도 안 나는 것 같고요.
"그야 어쩔 수 없지. 생각을 해 봐라. 저계 수사들이 통신을 한다고 해 봐야 그 거리가 얼마나 되겠냐? 아마도 고계 수사가 둔술 한 번에 이동할 거리조차 소통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할 거다."
결국 능력 차이란 말씀이죠?
"그렇지. 내가 수미에 소식을 전하겠다고 했지만 태령기 어르신들께서 그 일을 해 주진 않을 거잖아. 잘 해야 입령기나 성령기 정도가 통신 중계를 하겠지. 그리고 말을 전하는 것 이나 몸이 움직이는 것이나 큰 차이도 없고."
아, 말을 전하는 것이나 직접 이동을 하는 것이나 큰 차이가 없다! 확 느낌이 오는 설명이네요.
"아무튼 이제부터는 대성의 장거리 전송진으로 계속 이동하기만 하면 수미산에 닿을 수 있을 테니 걱정할 일은 없을 거다."
네, 건우 님. 어서 가요.
건우는 루야의 재촉을 들으며 우화주 대성의 거대 전송진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그곳에는 이미 나민달라로 가려는 수사들 십여 명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건우는 전송진이 발동할 때까지 그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전송진의 발동과 함께 구산팔해의 여 덟 번째 산인 나민달라 산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렇게 몇 번의 장거리 전송진을 이용한 끝에 건우는 수미 세계의 중심인 수미산에 닿을 수 있었고, 도착과 동시에 수미선문의 장로원에 불려갔다.
***
"고생이 많았구나."
건우의 보고가 끝나자 원로원주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건우는 두 손을 모은 상태로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지금 그의 앞에는 일곱 명의 원로가 커다란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자세히 보면 원로원주를 제외한 나머지는 허상이었다.
여섯 원로들은 제각각 맡은 일이 바빠서 의념으로 형상화한 허상을 보내 건우의 보고를 들은 것이다.
그런 원로원주를 비롯한 원로들의 복장은 은은한 빛을 뿜는 백색의 학창의로 통일되어 있었고, 머리에는 옥과 은으로 만든 관을 쓰고 있었다.
그 학창의와 관은 신비로운 빛을 머금고 있었는데 건우는 그 빛 속에서 헤아리기 어려운 영기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더 할 이야기가 있느냐?"
원로원주가 마지 막으로 확인하듯이 물었다.
건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태도로 입을 열었다.
"송구하지 만 한 가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음? 궁금한 것이 있더냐?"
원로원장이 물었다.
"알시평에 대한 토벌은 언제나 하게 될지 그것이 궁금합니다. 소인이 이제부터 수련을 시작하려 하온데 그 수련을 마치고 토벌에 참가할 여유가 있을까 궁금합니다."
"흐음."
건우의 물음에 원로원주가 다시 수염을 슬었다.
그러자 그의 오른쪽에 있던 원로 허상 하나가 건우를 보며 말했다.
"너는 걱정할 것이 없다. 알시평 혼돈역에 대한 공세는 금방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군세를 모아야 하니 당장 공격을 하지 않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그것만은 아닌 듯 하니 연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건우는 멸계 수사들의 본거를 곧바로 치지 않을 것이란 원로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일이 그리 간단치 않기 때문이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다. 무르익지 않은 과실을 따 봐야 먹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지."
또 다른 원로가 묘한 의미가 담긴 말을 중얼거렸다.
건우가 그를 바라보자 그는 더는 말을 하지 않겠다는 듯이 짧게 한마디만했다.
"궁구(窮究)해 보거라."
따질 입장이 되지 않는 건우는 고개를 숙이고 원로원을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물러난 건우가 겨우 여유를 얻어 유정정을 찾았을 때,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유정정이 머물던 거처가 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원래 유정정은 수미선문에서 내어준 아름다운 정원에 연꽃궁전을 펼치고 생활하고 있었다.
그런데 건우가 찾아가니 정원만 남아있고 연꽃궁전이 사라지고 없었다.
건우는 정원을 한참 뒤지고 나서야 유정정이 숨겨놓은 옥간을 발견할 수 있었다.
= 애썼다. 그래도 이리 내가 남긴 전언(傳言)을 찾았으니 칭찬해주마.
건우가 그 옥간에 의념을 불어 넣자 팔뚝 크기의 유정정 허상이 솟아나 건우를 보며 말했다.
"어찌 된 일입니까?"
건우가 그 허상을 보며 물었다.
비록 허상이라 하지만 유정정의 사념이 깃든 것이라 옥간에 들어 있는 정보에 대해서는 대화가 가능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 급한 일이 있느니라.
"급한 일이라니요?"
= 알고 싶으냐? 알려주랴?
건우의 물음에 유정정의 허상이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요리조리 건우의 얼굴 앞을 오갔다.
"당연히 알고 싶습니다. 알려주시겠습니까?"
= 흐응? 어쩔까?
유정정의 허상이 팔짱을 끼고 고민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건우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 알려줄 테니, 너는 한 가지 약속을 하거라.
"어떤 약속입 니까?"
= 내가 일러주면 너는 곧바로 나를 찾아오겠다고 약속하거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지 않을 테다.
"선자님게서 계신 곳으로 오란 말씀입니까?"
= 흥! 오기 싫으면 이야기를 안 들으면 된다. 하지만 이야기를 듣겠다면 그 즉시 나를 찾아와야 하지. 어떠냐? 그래도 듣고 싶으냐?
건우는 유정정의 말에 숨겨진 의미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유정정은 자신이 매우 중요한 일을 하고 있으며 그것이 비밀임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건우가 그 비밀을 알게 되면 곧바로 그 일에 참가해야 한다는 뜻이기도했다.
= 흥! 고민을 하는 것이냐?
그 때, 건우의 대답이 늦어진다고 여겼는지 유정정의 허상이 화를 내었다.
그러면서 팔뚝 크기의 허상은 건우의 얼굴로 다가와 갸름한 옥간으로 건우의 코를 때렸다.
"어 엇?"
건우는 유정정의 허상에게 코를 맞은 직후 뭐가를 깨달은 듯 손바닥을 뒤집어 허공에서 쌍수수련법이 기록된 청금색의 연리지 옥간을 꺼내들었다.
"이런!"
그리고 옥간을 보자마자 깜짝 놀라며 탄식을 터트렸다.
옥간의 색이 탁해진 것은 물론이고 은은하게 혈광이 맺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유정정의 신상에 문제가 생겼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어디에 계십니까? 후배가 당장 선자님을 찾아뵙겠습니다."
건우가 급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 하아아, 바람 잘 날이 없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