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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엽사(壽獨師) 진광(振鑛) >
"이렇게 우연히 너를 만나게 되는구나."
등에 쇠로 만든 그물을 짊어진 수사가 삼두육비의 건우를 보며 말했다.
"진정 우연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 역시 뵙고 싶었습니다."
건우도 태연한 표정으로 그와 인사를 나누었다.
물론 상대는 태령기 완경의 수사라 태도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하하하. 확실히 우리 연이 가볍지는 않지. 우리처럼 멸계전을 두 번이나 겪는 이가 얼마나 될까. 그것도 같은 멸계전을."
하지만 건우와 마주선 태령기 수사는 그가 어떤 태도를 취하든 상관없다는 듯이 그저 건우를 향해 호감을 보일 뿐이었다.
"그건 확실히 그렇습니다. 수엽사(壽獨師) 어르신."
이에 건우 역시 최대한 상대를 받드는 모습으로 공손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런 건우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다름 아닌 수엽사(壽獨師)였다.
수엽사(壽獨師) 진광(振鑛).
그는 과거 건우가 인계에서 멸계전을 치를 때에 멸계7존이라 칭하던 이들 중에 하나였다.
다만 다른 이들은 모두 건우와 마주쳐 인연이 있었지만 수엽사 진광만은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당연히 인계 멸계전 당시에 수엽사 진광은 건우에게 멸계로 돌아가는 진법을 구한 일이 없었다.
건우는 그런 그가 어떻게 수미 세계에와 있는 것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커엄, 너도 짐작하겠지만 내가 한동안 너를 찾아 이곳 알시평 곳곳을 뒤지고 다녔다."
건우가 생각에 잠겨 있는데 문득 진광이 고개를 똑바로 들고 그를 노려보며 정색한 얼굴로 말했다.
"물론 짐작했습니다. 이런 한적한 곳에서 어르신을 만난 것이 우연이긴 어렵겠지요."
"하하. 그래, 그러니 내가 감추지 않고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이 아니냐."
"네, 어르신."
"자, 그럼 다른 말 할 것 없이, 너는 내가 너를 찾은 이유도 짐작하겠지?"
진광은 당연히 그럴 거라는 표정으로 물었고, 건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르신께서 제게 바라실 것이 달리 뭐가 있겠습니까. 이곳에서 멸계전이 벌어지는 중에 본계로 돌아갈 방법이 필요하시겠지요."
그것 외에 뭐가 있을까.
굳이 깊이 따져볼 일도 없었다.
"옳다. 옳아. 그럼 너는 이제 네가 어찌 대답해야 할지도 알겠구나?"
그렇게 말하며 진광은 건우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허튼소리로 자신을 실망시키지 말라는 뜻이 명백했다.
"송구하지만 저는 어르신께서 원하는 답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건우는 그런 진광의 표정에도 주눅 들지 않고 제 뜻을 서슴없이 밝혔다.
"뭐 라?"
"그리고 사실 저는 저보다 어르신께서 본계로 돌아갈 방법이나 그 실마리를 더 많이 가지고 계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래서 어르신께서 저를 찾아오실 수 있도록 약간의 정보를 흘리기도 했고 말입니다."
거기에 더하여 건우는 자신이 진광을 불렀다 말하고 있었다.
"뭐라? 그럼 내가 너를 만난 것이 네 계획이었다는 말이냐?"
"일부분 그런 면이 있기는 합니다."
"하하하. 고작 성령기 놈이 나를 희롱했단 말이지?"
진광은 크게 진노한 듯 그를 감싼 극멸기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하지만 건우는 여전히 태연한 얼굴을 가장하고 있었다.
어차피이 일은 약간의 위험은 감수하기로 작정하고 꾸민 일이었다.
"원래 어르신께선 과거 인계의 전장에서 제가 고안한 진법을 얻지 못하셨습니다."
건우가 침착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러자 금방이라도 분노를 터트릴 듯 했던 진광이 기세를 누그러뜨리고 '어디 들어나 보자,는 표정으로 건우를 바라봤다.
"그런데 어르신께서 이렇게 다시 전장에 나타나셨으니 어르신께서도 전쟁의 승패와 상관없이 본계로 돌아갈 방법이 있으셨던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끄으응!"
건우의 말에 진광이 앓는 소리를 냈다.
"제가 잘못 생각한 것입니까?"
건우가 그런 진광을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멍청한 놈. 나는 과거 멸계전의 패배 이후로 본계로 돌아가지 못했다."
진광이 일그러진 얼굴로 쏘아붙이듯 말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본계로 돌아가지 못하셨다니요?"
건우는 앞뒤가 맞지 않는 말에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이곳 알시평(車L屍I平)에 수엽사 진광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어렵게 그를 자신에게 오도록 꾸몄던 이유가 무엇인가.
진광이 과거 인계 멸계전에서 자신처럼 전투 승패와 상관없이 본계로 돌아갈 방법을 알아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둘이 머리를 맞대면 멸계로 갈 방법을 쉽게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했었다.
그런데 진광은 지금까지 멸계로 돌아간 적이 없었다고?
"표정을 보아하니 전혀 생각도 못한 모양이구나. 쯧.'
, 진광이 등 뒤에 지고 있던 쇠그물을 버릇처럼 추켜 올리며 혀를 찼다.
"어찌된 일인지 후배에게 알려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건우가 공손하게 여섯 손을 모두 모아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러자 진광은 소매를 휘둘러 흙바닥에서 의자와 탁자를 뽑아 올리고 털썩 걸터앉으며 건우에게도 맞은편 의자를 권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거기에 앉거라."
"감사합니다. 어르신."
건우는 진광의 권유를 마다하지 않고 공손하게 돌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진광이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알시평의 동도들 몇은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고, 수미의 영기 수도계 녀석들도 알아낸 이야기니 숨길 것도 없다. 나는 과거 인계에서 멸계전이 패배로 끝날 즈음에 영기 수련 수 사로 위장하여 몸을 숨겼다."
"극멸기를 익혔는데 그게 가능했습니까?"
"못할 것이 뭐가 있단 말이냐? 지금 네 놈이 익히고 있는 그 공법만 하여도 세 가지 기운을 모두 쓰지 않느냐? 그런데 극멸기를 감추는 공법이 없겠느냐?"
"그럼 그 후에 어찌 되었습니까?"
건우는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때에 멸계전이 끝나고 인계는 영계로 승격하며 홍애지의 일부가 되었다.
그렇다면 진광 역시 홍애지에서 활동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홍애지의 수사들 중에 몇이 수미 세계로 넘어왔다.
바로 자신의 손을 거쳐서.
"별 것 없다. 그 후로도 정체를 감추고 진극멸기를 모아 흡수하며 빠르게 경지를 끌어 올렸을 뿐이지."
"네? 멸계전이 끝났는데 어찌 진극멸기를 모은단 말입니까?"
건우는 진광이 진극멸기를 모아 경지를 올렸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
"크하하하하. 그것은 내게 특별한 재주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영기 수도계에서 극멸기를 이용하여 살생을 하면 진극멸기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나에게 있었지."
"그럼 그 방법으로 진극멸기를 얻어 지금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어찌 태령기의 극에 이를 수 있었겠느냐. 내가 알기로 그 때에 나와 비슷한 경지에 있었던 놈들은 고작해야 입령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던데? 아, 물론 멸계전 당시에 모아둔 진극멸기의 양도 제법 되었지. 그것만으로 성령기에 오를 정도였으니까."
"대단하십니다. 존경스럽습니다. 그런데 어르신."
건우는 쌍엄지를 치켜들며 진광을 추켜세우다가 진지하게 그를 불렀다.
"무엇이 궁금하냐? 말 해 봐라."
"그런데 어떻게 이곳 수미 세계로 오셨습니까? 이곳이 과거 멸계전을 치른 그 인계가 속한 곳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미 답은 나와 있었지만 그래도 궁금했던 것이기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야 내가 있던 홍애지에서 이곳 수미 세계로 올 방법이 있었기 때문이지."
"그렇습니까?"
"그래, 그런데 말이다."
"네?"
건우는 진광의 음성이 진득하게 변하는 것을 느끼고 속으로 바짝 긴장하며 물었다.
"과거 인계에서 멸계전이 끝난 후에 소문이 하나 돌았느니라."
"소문이라니요?"
"네 놈이 본계의 주력들을 빼돌리는 바람에 전쟁의 승패가 뒤틀렸다고 하더구나?"
"아, 아닙니다. 어르신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그 때는 이미 영기 수도계 놈들의 전력이 훨씬 우세한 상황이라 어차피 패배가 정해진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네 놈이 본계의 수사들에게 살 길을 찾아 준 것이란 말이구나?"
"그렇습니다."
"그래, 그런데 말이다. 그 덕분에 나는 패배한 전장에서 쫒기는 개 신세가 되지 않았느냐? 그건 어찌 생각하느냐?"
"네?"
억지였지만 또 달리 생각하면 진광이 그리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건우 덕분에 전쟁은 영기 수도계 쪽으로 급격하게 기운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말이다. 내가 듣자니 그 때에 그런 일을 꾸민 놈이 실상은 본계의 놈이 아니라 영기 수도계의 놈이란 이야기도 있었느니라."
"네?"
"바로 네 놈이 본계의 놈이 아니라 영기 수도계의 놈이란 이야기지. 게다가 또 나를 이곳 수미 세계로 옮겨 준 놈도 바로 그 놈인데,그리되면 그 놈이 네 놈이란 소리가 아니냐?"
"어르신,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후배는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크하하하. 네가 이 모습을 모른다 하지는 못할 텐데?"
건우의 발뺌에 진광이 홀연히 제 모습을 바꾸었다.
그런데 그 모습은 건우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모습이었다.
검은 얼굴에 흰 머리카락과 수염.
건우가 흑안백염의 수사라 불렀던 바로 그 태령기 완경의 수사였던 것이다.
지금이 순간 그 흑안백염의 수사는 극멸기를 쓰는 수사가 아니라 온전히 영기 수련 수사로 보였다.
"어떠냐? 이래도 모른다 할 것이냐? 클클클."
진광이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며 건우를 보며 물었다.
건우는 진광의 웃음에도 아무 대꾸를 하지 못했다.
지금 상황은 건우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진광이 설마하니 홍애지에서 영기 수련 수사로 위장하여 태령기 완경까지 올랐을 줄은 몰랐다.
거기에 자신의 도움으로 수미 세계로 넘어오기까지 했다니.
"이런 상황에서 후배가 변명을 해 본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결국 건우가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네 놈이 그 놈임을 인정하는 것이냐?"
진광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제가 길우몽이며 동시에 건우입니다."
"크하하하하. 그래. 그래야지. 만약 끝까지 아니라 했으면 내가 너의 팔다리를 모두 뽑아 버렸을 것이니라."
"죽이진 않으셨을 것이라니 제게 바라는 것이 있으시군요?"
건우는 진광의 말에서 아직은 상황이 끝나지 않았음을 알아차렸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지금까지 너와 이렇게 말씨름을 하고 있었겠느냐?"
"역시 바라시는 것은 이곳에서 멸계로 돌아갈 방법입 니까?"
"네 놈이 과거 인계의 멸계전에서도 우리 극멸기 수사들을 본계로 돌려보낸 바가 있고, 또한 홍애지에서 고계 수사들을 수미 세계로 옮긴 전례가 있다."
"그렇지요."
"그런 예로 보아서 너는 세계간의 이동에 특별한 재주가 있음이 분명하다. 게다가 듣자니 얼마 전까지 너는 분명히 본계에 있었다지?"
"그건……
"이미 확인했으니 거짓을 말할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네가 본계에서 이곳 알시평으로 넘어 온 것이 맞느냐 아니냐?"
"마, 맞습니다."
태령기 완경의 진광이 기세를 뿜어 압박하며 묻는 말에 건우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보아라. 수미에 있던 네 놈이 어찌 본계로 갔겠느냐. 한 번 갔으면 또 갈 수도 있음이겠지. 아니 그러냐?"
진광은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눈빛으로 건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쌍, 답정너냐.''
<수엽사(壽獨師) 진광(振鑛)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