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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선풍에 이어서 길매까지? >
"너희가 이곳 조옹진에 온 것이 벌써 여러 날이 되었는데 이젠 거취를 결정해야 하지 않겠느냐?"
흑선풍이 건우와 양유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그저 담담하게 물어보는 말에 지나지 않았지만 정작 건우와 양유는 큰 압박감을 느껴야 했다.
은연중에 흑선풍이 보이지 않게 기세를 뿌려 둘을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것은 당장이라도 흑선풍이 속한 세력에 귀의하라는 뜻이었다.
"어르신 소인이 아직 이곳 견문이 짧아 아는 것이 없습니다. 어르신께서는 어떤 곳에 속해 계시는지요?"
그때, 건우가 어렵게 흑선풍의 기운을 이겨내며 물었다.
"뭐라? 너는 저 아이에게 그것도 알려주지 않았더냐?"
건우의 물음에 흑선풍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양유에게 호통을 쳤다.
얼굴을 이루는 벌레들 몇이 떨어져 나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날갯짓을 했다.
"죄, 죄송합니다. 어르신을 기다리게 할 수 없어 급히 달려오란 연통만 했습니다."
양유가 그 벌레들이 자신에게 달려들까 두려워하며 급히 허리를 숙였다.
"쯧, 일처리를 그리하면 쓰나."
흑선풍이 혀를 찼다.
그리고 건우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새끼손톱보다 작은 매미들이 무리를 지어 엉켜 있는 흑선풍의 얼굴, 그곳에 검은색으로 반질거리는 곤충의 눈이 드러났다. 건우는 흑선풍과 눈이 마주치자 급히 고개를 숙였다.
"나는 원자명 어르신을 모시고 있다. 너는 원자명 어르신을 아느냐?"
그런 건우에게 흑선풍이 물었고, 건우는 고개를 숙인 상태로 대답했다.
"어찌 저 같은 것이 그리 높은 어르신을 알겠습니까. 그저 고명(高名)만 들었을 뿐입니다."
"그래?"
"그리고 원 어르신께서 결심원(扶心院)을 이끌고 계시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 전부입니다."
"그래도 결심원의 이름을 아주 모르진 않으니 다행이다. 옳다. 내가 바로 그 결심원에 속해 있느니라. 그리고 내가 여기 온 것은 너희가 나를 따라올 것을 권하기 위해서다. 어떠 하냐?"
건우는 그렇게 묻는 흑선풍에게서 사나운 기세를 읽었다.
겉으로 드러낸 것은 아니지만 분명하게 느낄 수 있는 압박이었다.
이리되면 흑선풍의 제안을 거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봐야 했다.
'결심원이 일곱 세력의 3강(强) 2중(中) 2약(弱) 중에서 2약에 속해 있다던데. 하필 제일 세력이 약한 쪽에 걸리다니, 운이 없는 건가? '
건우는 속으로 낙담하여 중얼거렸다.
그럼에도 내키지 않지만 거부하기는 어렵다.
물론 조옹진 내에서 영입 대상에게 해를 가하거나 강제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일곱 세력이 그렇게 약속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원래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법이다.
여기서 일이 벌어진 후에야 일곱 세력의 약속 따위를 떠들어 봐야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게다가 따지고 보면 건우의 입장에서야 어차피 수미 세계로 넘어가기만 하면 될 일이라 소속 세력의 선별 따위는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다.
물론 당장 양유는 결심원이라는 말에 안색이 안 좋게 변하긴 했지만 그조차도 건우가 신경 슬 일은 아니다.
"어르신께서 이리 직접 찾아와 권하시는 일인데, 소인들이 어찌 싫다 하겠습니까. 당연히……?"
"호호호호. 이게 무슨 일이람. 흑 수사, 설마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이런 짓을 하고 있었단 말입니까?"
막, 건우의 입에서 수락의 말이 나오려는 때에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객실을 흔들었다.
"으음? !"
그리고 흑선풍은 낮은 신음소리를 내며 소매를 흔들었다.
그러자 언제 뿌려 놓았던 것인지 객실 벽과 바닥, 천정에서 벌레들이 떨어져 나와 소매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벌레가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여성 수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엇! 유매매(5兪媒殊)? '
건우는 새로 나타난 여성 수사를 살피기 위해 고개를 들다가 급히 다시 고개를 숙였다. 뜻밖에도 이번에 나타난 여성 수사는 다름 아닌 유매매였던 것이다.
"길매 수사, 오랜만이오이다."
그때, 흑선풍이 짐짓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뒷짐을 지며 유매매에게 인사를 했다. 건우는 흑선풍이 그녀를 길매라 부르는 것이 의아해했지만 묻지 못하고 슬그머니 둘의 눈치만 살폈다.
양유 역시 옆에서 부리부리한 눈을 굴리고 있었다.
양유의 입장에는 뜻밖에 또 다른 입령기 완경의 수사가 나타났으니 당황스러울 법도 했다.
"제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흑 수사께서 여기 이 아이들을 억지로 데리고 가시려 한 것 같습니다만?"
흑선풍이 인사를 했지만 길매는 매서운 눈빛으로 그를 추궁했다.
"그럴 리가 있는가. 나는 그저 우리 결심원에 가입하면 좋지 않겠느냐 권하고 있었을 뿐이지."
"강권(强勸)은 협정 위반임을 잊으셨던 모양입니다?"
"강권이라니, 그저 일상적인 권유였을 뿐이네."
"호호호호. 그 말씀은 제가 잘못 보았다는 말씀이군요?"
길매가 매서운 눈빛으로 흑선풍을 노려보며 물었다.
"끙, 길매 수사가 오해할 법한 모습이 아주 없지는 않았지. 그리 보일 수 있었음을 인정하네. 하지만 또 조금만 너그러이 본다면 크게 문제될 것도 없지 않은가."
어쩐 일인지 흑선풍은 길매에게 쩔쩔매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건우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어쨌거나 유매매, 즉 길매 쪽 세력이라는 선택지가 하나 더 생긴 것이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흑선풍의 강압에 끌려가는 것보다는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서 가는 모양새가 그나마 나을 테니까.
"좋아요. 그렇다면 흑 수사가 오해를 살 법한 행동을 했으니 이 아이들에게선 관심을 끊으시는 것이 어떨까요?"
"길매 수사, 그렇지 않아도 요즈음 우리 결심원의 세가 약하다는 소리를 듣고 있는데, 자미혈궁(紫微血宮)의 행사가 너무 각박한 것 아니오?"
대놓고 영입 경쟁에서 물러나란 소리를 들은 흑선풍이 제대로 항의도 못하고 애원하듯 말했다.
하지만 이미 유리한 고지를 차지한 길매는 전혀 봐 줄 생각이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요 아니고말고요. 호호호. 흑선풍 수사 정말로 끝까지 잘잘못을 따져보시겠습니까?"
그리고 이어진 길매의 말은 섞여 있는 웃음소리와 달리 차갑기 짝이 없었다.
그런 길매의 태도에 흑선풍의 곤충 눈에서 서늘한 기운이 슬쩍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애원하던 표정을 담담하게 고치고 몸을 세워 두 손을 허리 뒤로 하며 뒷짐을 졌다.
"커어엄. 좋습니다. 이 흑 모가 실수를 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하지만 길매 수사도 조심하셔야 할 것입니다. 다음에 상황이 서로 다르다면 이 흑 모도 양보가 없을 것이니 말입니다."
"호호호. 그야 당연하지요. 마땅히 그러해야 하고말고요. 하지만 우리 자미혈궁은 규칙을 잘 지키니 지금과 다른 상황에서 서로 마주할 일은 없을 거예요."
"앞일을 누가 알겠습니까. 길매 수사."
"그야 그렇지만, 지금은 흑선풍 수사께서 여길 떠나 주셔야 할 때인 것 같네요. 호호호."
"끄응, 다음에 봅시다. 길매 수사."
결국 흑선풍은 손해만 가득 안은 상태로 검은 둔광과 함께 모습을 감췄다.
"쯧. 지저분한 수를 쓰려 하다니."
그리고 흑선풍이 사라진 직후, 길매가 인상을 쓰며 엄지에 중지를 걸어 튕겼다.
피잉! 파지지지직!
그러자 길매의 중지에서 응결된 극멸기가 튕겨지며 일순 수십 갈래로 갈라져 날아갔다.
그리고 그렇게 갈라져 날아간 극멸기가 벽과 천정, 바닥 곳곳을 두드리니 보이지 않던 벌레들이 튀어나왔다.
길매의 극멸기에는 뇌전의 기운이 담겨 있었는지 그 벌레들은 다리와 날개를 잘게 떨며 불에 탄 냄새를 풍겼다.
"흐 I"
길매가 그 모습을 보며 가소롭다는 듯이 짧게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건우와 양유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너희는 어찌하기로 했더냐?"
"소인 등은 이미 오래전에 자미혈궁(紫微血宮)에 속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습니다. 마침 이렇게 선자께서 오셨으니 저희의 뜻을 받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런데 길매의 물음이 떨어지자마자 양유가 불쑥 앞으로 나서며 호들갑스러운 언행으로 그렇게 말했다.
건우는 양유가 의논도 없이 멋대로 행동하는 것을 보고 짜증이 났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호호호. 재미있구나. 그런데 내가 듣기로 너희의 책사는 저 여우 일족의 아이라 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거취에 대한 결정도 저 아이가 내리기로 했고."
그런데 약삭빠른 양유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길매가 건우를 가리키며 말했다.
양유는 길매가 그런 사실까지 듣고 있었을 줄은 몰랐는지 잠깐 눈빛이 흔들렸다.
하지만 양유의 순발력은 남다른 바가 있었다.
그는 곧바로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선자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원래 이 친구가 책사로서 저희 무리의 거취를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을 보면 이 친구가 아니라도 답을 알 수 있는 상황이 아니겠습 니까. 저는 무리의 수좌로서 이 친구 역시 저와 같은 결론을 낼 거라고 믿었습니다."
제 멋대로 건우 역시 자미혈궁을 택했을 거라고 주장하는 양유.
길매는 슬쩍 시선을 돌려 건우를 바라봤다.
하지만 건우는 그저 깊게 허리를 숙일 뿐이었다.
"호호호호. 재미있구나. 무리의 수장이란 놈이 그리 말을 하면 책사가 아니라 할 수가 없겠지. 더구나 지금 당사자인 내가 앞에 있는 데야 더더욱 그렇겠고."
길매는 상황이 뻔히 보인다는 듯이 그렇게 말하며 크게 웃었다.
하지만 그녀는 건우나 양유를 더 이상 곤란하게 하지는 않았다. 대신 다시 한번 양유의 결정을 확인했다.
"좋아. 너희는 분명히 자발적으로 우리 자미혈궁에 들기로 했다. 맞느냐?"
"이미 드린 말씀에 거짓은 없습니다. 맹세합니다 선자님."
양유는 목소리를 높여 대답했고, 백호진의 모습을 한 건우는 숙인 고개를 조금 더 깊이 내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길매는 그런 건우의 모습이 거부의 뜻이 아님을 알았는지 책하지 않았다.
대신 차가운 눈빛으로 양유에게 짧은 명령을 내렸다.
"좋다. 그럼 너희는 곧바로 조옹진의 자미혈궁으로 찾아 오거라. 미적거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직후 길매는 회백색의 둔광만 남기고 모습을 감췄다.
"휴우우우우.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람."
그리고 얼마 후, 양유는 긴 한숨을 쉬며 흑선풍이 앉았던 의자에 몸을 깊이 묻었다.
건우는 낮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그의 맞은편에 있는 의자에 앉아 얼굴을 쓸어내렸다.
"커엄. 백 수사, 내가 경솔하게 나섰습니다. 이해를 해 주시구려."
잠시 후, 두 손으로 눈을 눌러 지압을 하고 있는 건우에게 양유가 슬쩍 눈치를 보며 말했다.
"이해할 것이 뭐가 있답니까? 수사께서 저에게 무슨 잘못이라도 하셨답니까?"
하지만 돌아오는 건우의 대꾸는 바짝 날이 서 있었다.
본래 짜증이 많은 성격으로 위장한 백호진의 모습으로 딱 어울리는 반응이었다.
"거 참, 그리 날카롭게 굴 것은 없지 않습니까. 사실 백 수사에게 결정을 맡겼어도 길매 선자님의 청을 거부할 수는 없었지 않습니까."
양유는 그런 건우의 태도를 두고 의외로 대립각을 세웠다.
어차피 같은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무리의 수좌가 나서서 결정을 내린 것이 뭐가 그리 잘못이냐는 뜻이었다.
건우는 그런 양유를 멀뚱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렇게 둘이 마주보며 잠깐의 눈싸움이 벌어졌다.
"어이구! 이런, 생각해보니 내가 정말로 큰 실수를 했습니다. 맞습니다. 백수사 내가 잘못했습니다. 내 진심으로 백수사에게 사과하리다."
그런데 갑자기 양유가 얼굴빛을 바꾸며 이렇게 말하고는 의자에서 주르륵 미끄러져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탁자를 밀어 공간을 만들고 이마를 바닥에 대며 말했다.
"이| 양유가 잘못했습니다. 백 수사께 진심으로 죄를 청합니다."
그에 백호진의 모습을 한 건우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 놈이 또 무슨 생각이지? '
아무리 봐도 겉과 속이 달라 보이는데, 그 꼬투리는 좀처럼 잡히지 않던 양유였다.
그런 그가 이제는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고 있었다.
건우는 당황한 표정으로 의자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0| 놈의 처세술은 남다른 바가 있단 말이지. 여기서 이렇게 사과를 하는데 받아주지 않을 도리가 있나? '
건우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거 참, 그리 진심으로 사과를 하시는데이 백 모가 사과를 아니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알았습니다. 내 양유 수사의 실수를 용서하리다."
"하하하. 고맙습니다. 백 수사."
"하지만 그리 생각없이 행동해서야 어디 일행의 안위를 책임질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자미혈궁에 들기 전에 무리의 수좌 자리는 제게 양보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하,하,하. 백 수사!"
"밖에 있는 동도들도 상황을 알 터이니 이해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수좌의 자리라고 해 봐야 자미혈궁에 들면 새로운 직분을 받을 테니 크게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그저 자미혈궁에 들어 자리를 받을 때까지만 그리 하자는 것입니다."
수좌가 그 배정에서 더 나은 자리를 받을 것이 분명하지만 양유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흑선풍에 이어서 길매까지?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