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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사오리 소계? >
건우는 시선을 돌려 아공간의 중앙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이전과 달리 수미산의 상징이 허공에 떠 있지 않고 바닥에 놓여 있었다.
그 수미산 상징은 홍애지에서 다수의 고계 수사들을 수미 세계로 옮기려다가 천겁뢰를 맞아 세 조각으로 나뉜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세 조각의 수미산 상징 중에 하나가 가루가 되어 허공으로 스며드는 중이었다.
"나 때문에 수미산 상징이 저렇게 허무하게 사라지네."
- 어차피 다시 복구하긴 어려웠던 거였긴 하죠. 하지만 저렇게 완전히 못쓰게 되는 걸 보니까 기분이 이상하긴 하네요.
건우의 말에 루야도 시선을 돌려 수미산 상징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조각 하나가 완전히 사라져 두 개만 남은 상태였다.
그리고 사라진 하나의 조각은 사실상 아공간에 생긴 틈을 메우는 데 쓰였다.
"내가 아공간에 들어왔다고 아공간에 흡수된 겨자씨의 일부가 녹아 없어질 줄은 몰랐지."
- 그리고 그렇게 사라진 부분을 메우기 위해서 수미산의 상징 조각이 쓰일 줄도 몰랐죠.
"이번 일로 하나는 확실하게 알게 된 거지. 나하고 아공간은 확실히 영기 수도계에 속해 있다는 거."
- 건우 님이 멸계에서 머무는 동안 쌓인 기운이 아공간 자체를 위협할 줄은 몰랐어요.
"정확하게는 아공간을 지탱해주고 있는 겨자씨와 멸계의 기운이 상쇄되는 거지."
- 어쨌거나, 이제 건우 님이 다시 밖으로 나갔다가 아공간으로 들어올 수 있는 기회는 두 번밖에 없어요. 아시죠?
루야가 두 개 남은 수미산 상징 조각을 가리켰다.
"나도 알아. 그래서 제대로 준비를 한 후에 밖으로 나갈 생각이야."
- 준비요?
"그래. 그 자오로를 비롯한 태령기 놈들이 금방 죽어 자빠지진 않을 거잖아."
- 그러니까 당연히 건우 님을 수배했을 거라는 말씀이죠?
"나라도 그렇게 했을 거니까."
- 하긴 그러네요. 그래서 어떻게 하시려고요?
"신분을 감추고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지. 적어도 지금의 나타결공법 삼두육비 모습으로는 돌아다닐 수 없잖아."
- 다른 공법을 익힌다고요?
루야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멸계의 기운이 아공간에 좋지 못한 영향을 주는데, 건우가 본격적으로 멸계 공법을 익힌다면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멸계에서 돌아다니려면 극멸기를 써야 하는데, 지금은 나타결공법 이외에는 극멸기를 쓸 방법이 없잖아."
- 그렇다고 나타결공법을 쓰면 삼두육비의 모습이 되어서 너무 눈에 띈다는 거죠?
"맞아."
- 하지만 새로운 공법을 익히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지 않을까요?
최대한 빨리 수미 세계로 돌아가야 하는 건우로선 긴 시간을 들여서 새로운 공법을 익히는 것은 부담이 큰 일이었다.
"꼭 성령기까지 경지를 끌어 올릴 필요는 없지. 일단 화신기 정도까지만 해도 되지 않겠어? 이번 멸계전에는 화신기도 참가할 수 있다니까 말이야."
어차피 문제가 생겨서 싸움이 벌어지면 나타결공법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멸계에서 건우가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공법이 나타결공법인 까닭이다.
그러니 새로운 공법은 적당히 신분을 위장할 정도만 되어도 좋으리라.
- 그래서 무슨 공법을 익히실 건데요?
루야도 건우의 계획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그렇게 물었다.
"전에 유세명을 죽이고 얻어 놓은 태고마수 흑천호(崔天孤)의 진혈이 있었지."
- 그걸 쓰시게요?
"극멸기로 무명공을 익히되 그 재료로 흑천호의 진혈을 써 볼 생각이다."
- 극멸기로 무명공을요? 가능할까요?
"음, 괜찮을 거 같아. 이 무명공이 꽤나 범용성이 좋아. 극멸기로도 가능할 거 같아."
- 신기하네요.
"물론 극멸기가 있는 곳에서만 쓸 수 있을 거야. 내가 지금 이곳 멸계에서 영기를 바탕으로 한 공법을 못 쓰는 것처럼."
- 어쨌거나 극멸기로 무명공을 펼칠 수 있다면 신분 위장으로 그만한 것이 없겠네요. 나타결공법이 아니라면 영기나 혼돈기의 흔적도 드러나지 않을 테니까요.
"일단 해 봐야지."
건우는 그렇게 말을 하고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무명공을 깊이 들여다보며 되새기기 시작했다.
비록 문제가 없을 것 같기는 하지만 몇 번을 살펴도 부족할 일이었다.
***
흑천호(崔天孤) 변결공법(變結功法).
건우가 무명공을 통해 태고마수 흑천호의 진혈을 흡수하며 만들어진 공법의 이름은 그러했다.
그리고 그 이름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무명공이 탄생시킨 이 공법은 이전 유세명과는 성격이 많이 달랐다.
유세명은 유혹이나 매혹의 힘이 극멸기에 담겼는데, 건우는 변(變), 즉 변화의 힘이 담겼다.
그래서 흑천호변결공법을 익힌 건우는 수시로 변신을 할 수 있는 재주를 지니게 되었다.
- 여자로는 안 되는 건가요?
루야가 건우를 보며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놀리듯이 물었다.
"내가 천성이 남아(南兒)인 까닭인지 그건 안 된다. 아무리 태고 마수의 힘을 빌린 변신이라고 해도 제약이 없지는 않은 모양이다."
- 그래도 어떻게든 여장을 하려면 못할 건 없겠죠?
"그런 식으로 해서 누구의 눈을 속인단 말이냐? 적어도 의심을 사지 않을 정도가 되려면 절대로 그런 하찮은 수를 써서는 안 되지."
- 쳇, 여장을 한 번 시켜볼까 했더니.
"장난치지 말고."
- 네네. 알았어요. 그래서 이젠 어쩌실 거예요?
"어쩌긴, 대성으로 가서 전송진을 타고 계간 이동을 할 수 있는 곳으로 가야지."
- 이번에는 금역으로 안 들어가실 거예요?
"금역을 통과하면 빠르긴 하겠지만 고작 화신기 따위가 금역으로 갔다가는 의심만 사겠지. 이번에는 매당(賣堂)의 계간 이동선을 탈 생각이다."
- 그렇군요.
"그나저나 자오로 패거리가 어떤 수작을 부려 놓았을지 걱정이구나."
건우는 막상 가까운 대성으로 가는 것조차 모험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태령기 수사들이 주는 부담감이 컸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오리 소계로 가는 발걸음을 멈출 수는 없는 일.
건우는 자오로 일행에게 천겁독을 뿌리고 숨은 날로부터 70년이 지난 즈음에 드디어 아공간 밖으로 나섰다. 삼두육비의 괴물 모습이 아니라 이십대 호인(孤人) 남성의 모습이었다.
하얀색의 양쪽 눈썹 끝이 사납게 올라가고 머리에는 뿔처럼 여우의 귀가 달려 있는 화신기 완경의 수사. 그것이 건우가 한동안 쓰려고 만든 하얀 여우 일족 수사의 모습이었다.
***
"백호진 수사? 오랜만에 나오셨습니다 그려?"
"양유 수사? 저에게 무슨 용건이 있으십니까? 어찌 저를 찾으셨습니까?"
건우는 오랜만에 선실 밖, 측면 복도로 나와 있다가 아는 척을 하는 수사의 목소리에 덤덤하게 대꾸했다.
하얀색 머리카락과 눈썹, 머리에 난 여유의 귀, 건우 모습은 지금 영락없는 백호(白®) 일족이었다.
그리고 그런 건우를 부른 양유란 수사는 키가 작고 체구가 넉넉한 것이 달마대사를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었다.
달마대사가 머리카락을 기르고 비단옷을 입으면 양유의 모습이 될 것이다.
"거의 20년 만이 아닙니까. 어찌 그동안 선실에만 칩거를 하셨습니까?"
양유가 건우의 심드렁한 대꾸에도 아랑곳 않고 옆으로 나란히 서서 난간 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그들이 있는 곳은 계간(界間) 운송선의 2층 측면 복도였는데 이미 많은 수사들이 밖으로 나와 풍광을 감상하고 있었다.
"밖에 나와 봐야 볼 것이 없지 않았습니까. 고작해야 사나운 극멸기의 소용돌이만 가득한데 뭣하려고 밖으로 나온단 말입니까?"
여우 일족의 모습을 한 건우가 조금은 신경질적인 투로 양유의 말을 받았다.
건우는 여우 일족인 백호진으로 있을 때에는 조금 신경질적인 성격을 쓰기로 정해 놓고 있었다.
다른 수사들이 쉽게 다가오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이런 태도가 양유에게는 거의 소용이 없었다.
"아, 역시 그런 이유였습니까? 하긴 그럴 만도 하지요. 하하하."
양유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듯이 말하며 밝은 표정으로 크게 웃었다.
양유는 건우가 이 배를 탈 때에 처음 만난 자였는데 오지랖이 무척 넓은 이였다.
그는 이리저리 간섭하여 끼어들기를 좋아하고 또 사람 사이의 관계를 주선하기를 즐겼다.
그러면서도 양유는 누구에게나 좋은 인상을 주고 다툼을 만들지 않는다는 재주가 있었다.
간혹 다툼이 있을지라도 양유가 호인인 양 작은 손해는 아랑곳하지 않고 감수하니 많은 수사들이 그를 싫어하지 않았다.
하지만 건우는 그런 양유의 모습이 미덥지 않았다.
그가 처음 봤을 때부터 양유에게서 밑밥 뿌리는 낚시꾼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오오오, 드디어 도착입니다. 하하하."
건우가 잠시 양유에 대한 평가를 떠올리고 있는데, 옆에서 양유의 호들갑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건우는 양유를 보지 않고 고개를 들어 전방을 주시했다.
"으음"
멀리 희끗한 안개 덩어리가 보이자 건우의 입에서 낮은 신음소리가 나왔다.
지난 130년의 시간 동안 오로지 검은색 극멸기의 소용돌이만 보이던 공간에 새로운 것이 나타났으니 감회가 남달랐던 것이다.
원래 계와 계 사이의 공간에 있는 극멸기는 사기(死氣)와 살기(殺氣)를 짙게 머금고 있어 닿기만 해도 위험했다.그런 기운이 천지 법칙의 힘까지 받아 뒤엉켜 있으니 어느 누구도 그 공간을 마음대로 오고갈 수가 없다 하지만 특별히 제작된 법보를 이용하여 그 공간을 통과할 수도 있는데 매당(賣堂)이 그 방법을 독점하여 계간 운송 사업을 벌이는 것이다.
어쨌거나 지금 건우가 선실 밖으로 나온 이유는 운송선이 130년의 항해 끝에 드디어 사오리 소계에 닿았기 때문이다.
"하하하. 이제 되었습니다. 이제 멸계전의 전장으로 가기만 하면 천겁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겠습니다. 우하하하하."
양유는 멀리 극멸기의 소용돌이가 갈라지며 보이는 희끗한 안개에 흥을 이기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운송선을 타고 있는 다른 수사들도 저마다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환호성을 올렸다.
"흥! 고작 사오리 소계에 닿았을 뿐인데 벌써부터 그리 설레발을 친답니까? 멸계전의 전장으로 가는 것이 그리 쉽답니까?"
하지만 백호진의 모습을 한 건우는 코웃음을 치며 냉랭하게 말했다.
그 목소리가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양유는 충분히 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
"백 수사, 어찌 그리 냉담합니까. 그래도 일단 사오리 소계에 닿은 것만도 기뻐할 만하지 않습니까. 이 양 모는 사오리 소계에 오기까지 네 번의 계간 이동을 했습니다. 그 길이 얼마나 험난했던지 화신기 초기에 출발하여 완경에 이르지 않았겠습니까."
"자칫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하고 천겁을 당하여 죽었을 수도 있었겠습니다. 그러느니 차라리 한 곳에서 얌전히 수련을 하는 것이 좋지 않았겠습니까?"
"하하하. 그도 그렇긴 합니다만 그래도 막상 여기까지 온 이상에야 제 선택이 옳았다 싶지 않습니까?"
"뭐, 위험을 감수한 가치는 있어 보입니다."
건우는 양유의 노력이나 사오리 소계에서 얻을 수 있는 장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대답을 하면서도 건우는 양유의 말에 허점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고작 화신기 주제에 어찌 몇 개의 계를 지나 여기까지 온단 말인가.
입령기나 성령기라도 대성 하나를 찾아가는데 몇 년이 걸리고, 대성과 대성 사이는 전송진이 아니면 넘을 생각도 못하는데 하물며 화신기 따위가 몇 번이나 계간 이동을 했다고?
그 말은 양유가 경지를 숨겼거나 혹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것도 아니면 엄청난 뒷배를 가지고 있거나.
"그렇지요? 역시 그런 것이 맞지요? 하하하하. 보십시오. 모험을 해서 여기까지 오는데 성공을 했으니 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그러니 백 수사께서도 그리 무심하게 그러지 마시고 속에 담긴 기쁨을 터트려 보십시오. 그리 속에만 쌓아두면 심화가 생기는 법입니다."
양유는 건우가 자신의 말에 어느 정도 동조해 주자 신이 나서 떠들었다.
하지만 건우는 다시 양유에게 대꾸를 해 주지 않았다.
건우 역시 사오리 소계에 닿은 것이 기뻤지만 백호진의 성격은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이었다.
구구구구구 궁 ! 콰콰콰콰콰콰!
"드디어 도착입니다! 하하하."
그러는 사이에 빠르게 내달린 운송선은 안개를 뚫고 들어가더니 검은색과 금은이 뒤섞인 것 같은 금제 진법을 통과해서 마침내 사오리 소계에 닿았다.
계간 통로를 빠져나온 매당의 운송선이 모습을 드러낸 곳은 거대한 도시의 광장이었다.
"어? 백 수사, 어째 분위기가 이상합니다?"
그런데 매당의 운송선이 광장에 내려서자 운송선을 타고 온 수사들이 모두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광장을 포위하고 있는 수사들의 기세가 사뭇 거칠고 흉포했기 때문이다.
= 모두 가만히 꼼짝하지 말거라. 혹시라도 빠져 나가려는 이가 있다면 무사치 못할 것이니.
그리고 그 불안을 확인시켜 주듯이 엄청난 기운을 담은 목소리가 운송선에 탄 수사들을 짓눌렀다.
"크윽!"
"크윽!"
"으음"
양유와 건우 역시 그 압력에 신음소리를 내며 비틀거릴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이건 또 뭐야?'
건우의 인상이 와락 찌그러졌다.
<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사오리 소계?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