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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수갈과 금역에 들어가다 >
“그래서 어쩔 것이냐? 우리 둘 중에 누굴 선택할 거지?”
“우리도 계속 이렇게 대치만 하는 것이 지겹다. 네 놈의 선택에 따라서 누가 먼저 들어갈지 정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건우가 둘의 속내를 빤히 들여다보는 듯이 말을 했음에도 두 수사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도리어 빨리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둘 모두 데리고 들어가? 아니지 그럴 이유가 없지. 그랬다가 둘이 손을 잡으면 내가 곤란해지겠지.’
한 명이라면 어떻게든 감당이 되겠지만 둘은 곤란했다.
그렇다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둘 모두 건우의 제안을 받아들인 상황이라 자신의 선택만 남아 있었다.
‘둘 중에 어떤 놈이 그나마 상대하기 쉬울까?’
건우가 생각하는 선택의 기준은 그것이었다.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보다 중요한 것이 어디 있을까.
‘편복족은 혈(血)공법을 주로 쓴다고 했지. 그런데 저 인간 수사는 편복족의 말로는 요괴라 하는데 나는 그걸 알아차릴 수가 없단 말이지. 당연히 저 쪽이 내게는 상대하기 어려운 면이 있겠어.’
결국 건우는 고심 끝에 편복족 수사를 택하기로 했다.
“둘 중에 누가 좋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를 동료로 대해 주겠다는 쪽이 나을 것 같군요. 이리 말을 하면 내 뜻을 아시겠지요?”
건우가 그렇게 말을 하자 편복족의 얼굴 표정이 확 밝아진 반면에 인간 모습의 수사는 반대로 표정이 구겨졌다.
“저 음흉한 놈을 택하다니 스스로 명을 재촉하는구나.”
인간 모습의 수사는 건우를 보며 그렇게 말을 하고는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자칫 건우와 편복족 수사가 한꺼번에 달려들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거리를 벌이는 것이었다.
“눈치가 빠른 놈이라 아쉽군.”
그 모습에 편복족 수사가 진정 아까운 듯이 입맛을 다시며 멀어지는 수사를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건우 쪽으로 시선을 돌려 손짓을 했다.
“이리 와라. 괜히 시간 끌 거 없이 곧바로 금역으로 들어가자. 그래야 저 놈이 수작을 부리지 못하지.”
일단 누군가 금역 입구를 열고 들어가면 금역의 금제가 발동하기 때문에 적어도 3년 동안은 다시 입구를 열기 어렵다.
게다가 3년 후에 입구를 열어도 앞서 들어간 이들이 금역을 건드려 놓은 여파로 무질서한 금제와 결계, 봉인이 난무하게 된다.
그래서 그 여파가 가라앉을 때까지는 금역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이 관례라 했다.
편복족 수사는 그것을 고려해서 일단 금역 입구를 열고 들어가자고 재촉하는 것이었다.
건우도 그 제안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이고 편복족 수사 옆으로 다가섰다.
“쯧, 삼두육비의 형상은 보기 드물어 소문이 났을 법도 한데, 나는 너에 대해 들은 기억이 없구나.”
편복족 수사가 건우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말했다.
“나는 사오리 소계로 가기 위해서 몇 개의 소계를 거쳐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러니 수사가 나를 모르는 것이 당연하지요. 나는 길우몽이라 합니다.”
“하긴 다른 소계의 수사들까지 내가 모두 알 수는 없는 일이지. 나는 지수갈(漬水渴)이라한다.”
“지 수사셨군요.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듣자니 사오리로 간다고?”
“그렇습니다.”
“인연인지 몰라도 목적지가 나와 같군. 나 역시 사오리 소계로 가는 길이다.”
건우의 목적지를 확인한 지수갈이 웃는 얼굴로 자신 역시 그곳으로 간다며 웃음을 보였다.
“뻔한 이야기지만 멸계전에 참가하기 위한 것이겠군요?”
“지금 시기에 그런 이유가 아니라면 사오리 소계로 갈 일이 있겠나?”
“그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몇 개의 소계를 지나왔다고?”
지수갈이 붉은 기가 도는 새까만 눈으로 건우를 탐색하듯 바라보며 물었다.
“그렇습니다만.”
“그 과정에서 매번 금역을 지났고?”
“그것까지 답할 이유는 없지요. 다만 가장 빠른 수단을 이용해서 계와 계를 넘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건우는 확실한 대답을 피했다.
아직 계를 건너는 금역 내부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었기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렇다면야 굳이 강요할 일은 아니지.”
“그런데 안 들어갈 겁니까? 입구를 열 생각이 없다면 내가 나설 수도 있습니다만?”
건우는 쓸데없는 말은 그만하자는 투로 지수갈에게 쏘아붙였다.
지수갈은 그런 건우의 말에 눈빛 깊은 곳에서 혈광이 피어올랐지만 곧바로 가라앉았다.
“입구를 여는 것이야 내가 해야지. 이곳에 머문 것이 오래된 일인데 너보다야 내가 더 잘 할 수 있겠지.”
금역의 입구는 주위에 휘몰아치고 있는 무질서한 극멸기의 흐름을 적절하게 조정해야 열 수 있었다.
당연히 제법 시간과 공을 들여서 극멸기의 흐름을 관찰하고 연구해야 입구를 열 수 있다.
그런데 건우가 나서서 자신이 입구를 열어야 하냐고 물으니 지수갈이 체면 때문에라도 그리 하라고 할 수는 없었다.
“혹시라도 그 요괴 놈이 수작을 부릴지 모르니 잠시 주변을 경계해라. 그 사이에 내가 입구를 열 테니.”
지수갈은 그렇게 말을 하고는 곧바로 금역으로 통하는 입구를 열기 위해 의념을 부리기 시작했다.
건우도 곧바로 의념을 넓게 펼쳐 혹시 숨어들지 모를 다른 수사들을 경계했다.
파지지직! 츠츠츳츠화홧!
그 사이에 지수갈은 사나운 극멸기의 흐름에 의념을 투사하여 나름의 질서를 만들어 냈다.
무질서한 극멸기의 움직임에 모종의 질서가 만들어진 순간, 멸계의 대법칙에 따라서 소계와 소계 사이를 이어주는 금역의 입구가 열렸다.
“열렸다. 어서 들어오너라!”
그 즉시 지수갈이 고함을 지르며 입구로 몸을 날렸고, 건우 역시 망설이지 않고 뒤를 따랐다.
이 입구는 그리 오래 유지 되지 않기에 서둘러 입장을 해야 했다.
하지만 건우가 입구로 뛰어든 직후 희끗한 그림자 하나가 거의 닫혀가는 금역 입구로 스며든 것은 지수갈과 건우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
“들어왔구나.”
건우가 금역 안으로 들어서자 지수갈이 뒷짐을 지고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건우는 지수갈을 경계하며 금역의 모습을 살폈다.
그런데 금역의 모습은 건우에게 꽤나 익숙한 느낌을 주었다.
‘이건 투명한 해저 통로를 떠올리게 만드네? 뭐 통로를 감싸고 있는 것이 극멸기란 것이 다르지만.’
- 극멸기도 평범한 극멸기가 아닙니다. 아주 파괴적인 동시에 죽음의 기운을 담고 있는 극멸기입니다.
루야도 아공간에서 금역의 모습을 살피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괜찮아. 통로만 벗어나지 않으면 위험할 일은 없을 테니까.’
- 그게 말처럼 되면 좋겠죠. 그런데 통로에선 수시로 금제가 발동하잖아요. 거기에 걸리면 저 끔찍한 극멸기에 휘말려 죽을지도 모른다고요.
‘그 전에 금제를 해결하면 되잖아.’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는 것이냐? 막상 단 둘이 남게 되니 걱정이 앞서느냐?”
건우가 말없이 금역을 살피며 서 있자 지수갈이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이참에 건우의 버릇을 고쳐 자신의 말을 고분고분 듣게 만들 요량이었다.
“걱정은 무슨 걱정이겠습니까. 설마 내가 지 수사를 겁낼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건우의 반응은 지수갈의 기대와는 전혀 달랐다.
도리어 이전보다 훨씬 당당하고 거침없는 기세가 느껴졌다.
“······.”
지수갈은 잠시 말문이 막힌 듯이 조용히 건우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얼마 후 얼굴에 웃음을 떠올렸다.
“하하하. 담이 크구나. 좋다. 나는 그런 사람을 싫어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이미 너를 동료로 인정하겠다 약속했으니 그 약속을 지키겠다. 그러니 너도 나를 크게 경계할 것은 없다.”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요. 그나저나 지 수사께서는 금역의 금제를 뚫을 비책을 가지고 있습니까?”
건우는 지수갈의 약속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았다.
영기 수도계에서도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꾸는 이들이 넘치는데 멸계에서야 말할 것이 있을까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니 그저 서로의 역량을 확인하고 금역을 통과하는 것에나 신경을 쓸 일이었다.
“그야 당연하지. 설마 아무 대책도 없이 금역으로 들어왔을까 보냐. 그리고 너 역시 당연히 재주를 가지고 있겠지? 이미 계를 몇 개는 넘었다 했으니 그 재주가 남다를 것이고.”
지수갈은 꽤나 기대가 된다는 듯이 은근한 어조로 그렇게 물었다.
“숨길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비책을 가지고 있지요. 저의 비책은 이것입니다.”
건우는 마치 그것이 귀에 들어 있다는 듯이 오른쪽 제일 위의 손을 들어 새끼손가락으로 세 개의 머리 중에 오른쪽 검은 머리의 귀를 후볐다.
그러자 그 안에서 붉은색의 개미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앞발에 집게를 달고 있는 변종 앙천적의였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지만 지수갈은 앙천적의를 알지 못하는지 놀란 얼굴로 물었다.
“견문이 좁은 모양입니다. 이것은 금제만 특정하여 갉아먹는 괴수 개미입니다. 아시는 바가 없습니까?”
“그런 것이 있다고? 나는 들은 바가 없다.”
지수갈은 믿기기 않는다는 표정으로 앙천적의를 살피며 말했다.
건우의 검은색 머리에서 쏟아져 나온 앙천적의의 수는 모두 3천 마리.
건우가 부릴 수 있는 앙천적의의 1할에 해당하는 수였다.
“그거야 보면 알 일이 아닙니까. 설마 금방 들통날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건우는 약간 비웃는 투로 그렇게 말을 하고는 손짓을 하여 앙천적의를 움직였다.
건우의 부림을 받은 앙천적의는 하나의 띠를 만들며 날아가 지수갈을 지나 금역의 통로로 진입했다.
“자, 잠깐. 그리 무턱대고 들어가면······.”
지수갈이 깜짝 놀라 앙천적의를 막으려 했지만 건우가 의념을 뿌려 그것을 방해했다.
때문에 앙천적의는 지수갈이 손을 쓰기 전에 이미 통로 안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지수갈은 곧바로 몸을 날려 통로 입구에서 최대한 멀어졌다.
그러느라 지수갈은 건우와 가까운 곳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통로에 침입자가 생기면 곧바로 금제가 발동한다. 그리 되면 통로가 흔들리고 저기 저 극멸기가 쏟아져 들어온단 말이다! 너는 그것도 모르느냐!”
지수갈은 길우몽이란 이 놈이 다른 계를 거쳐왔다는 말도 거짓이 아닐까 의심하며 그렇게 따졌다.
그런데 건우는 태연한 얼굴로 웃으며 손가락을 들어 통로를 가리켰다.
“보십시오. 뭐가 문제란 말입니까?”
“뭐? 어? 저, 저게 어찌 된 일이냐!”
건우의 말에 등을 돌린 지수갈은 삼천여 마리의 붉은 개미들이 검은 색으로 응결된 극멸기를 갉아 먹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말을 더듬었다.
그 정도로 충격이 컸다는 이야기였다.
“저 앙천적의는 정말 어렵게 구한 것입니다. 보는 것처럼 숨겨진 금제를 찾을 수 있고, 그것을 반발 없이 무력화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지요. 본능적으로 금제을 탐색하여 그 약점부터 갉아 먹는 것입니다.”
“저런 것이 있다니,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가 않는군.”
“어떻습니까? 이만하면 금역을 빠르게 통과할 수 있겠지요?”
“이를 말이냐, 당연히 그렇겠지.”
건우의 말에 지수갈은 체면도 잊고 활짝 웃는 얼굴로 맞장구를 쳤다.
“그래도 지수사께서 도움을 주시긴 해야지요.”
“내 도움이라? 저런 것이 있는데 내 도움이 필요할까?”
지수갈은 건우의 말에 미적거리는 느낌으로 물었다.
“보십시오. 지금 앙천적의들이 금제를 갉아먹고 있지만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까? 이럴 때에 지 수사께서 금제 해체에 도움을 주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저 붉은 개미들의 일을 도우면 더욱 빨리 금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란 말이구나?”
“그렇지요. 지 수사께서도 남다른 비책이 있지 않겠습니까?”
‘어딜 혼자 놀고 먹으려고? 내가 그 꼴은 못 보지. 노는 건 나 혼자로 충분하단 말이지.’
건우는 지수갈이 핑계를 대며 능력을 숨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 지수갈과 금역에 들어가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