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환장 통수 선협전-271화 (271/499)

(270)

< 멸계로군 >

파지지지지지직!

어둑한 누런색의 하늘에 뇌전이 뭉쳐 터지며 사람 하나를 뱉어냈다.

온 몸이 뇌전에 그을린 이는 홍애지의 질포소택성(秩泡沼澤城) 바위산 정상에서 사라진 건우였다.

허공에서 튀어나온 건우는 정신을 잃은 상태로 한참을 떨어져 내린 후 그대로 지면과 충돌했다.

쿠구궁!

추락의 여파로 자그마치 십여 장의 지면을 뚫고 들어갔지만 건우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후 강력한 충돌음에 호기심을 느낀 짐승들이 건우가 파고든 구덩이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다리가 여섯에 몸의 털이 무성한 염소 모양의 짐승이 먼저 나타났다.

하지만 곧이어 덩치는 큰데 머리가 유독 작아 보이는 잿빛의 표범이 나타나 염소를 닮은 짐승에게 하악질을 했다.

염소를 닮은 짐승은 곧바로 바람을 타고 물러나 모습을 감췄고, 머리가 작은 잿빛 표범은 승리의 포효를 터트렸다.

캬아아우우우우! 퍼걱! 캬악!

하지만 의기양양했던 모습은 사라졌던 염소 괴수가 뾰족한 두 개의 뿔로 그 작은 머리를 꿰뚫기 전까지만 유효했을 뿐이다.

허공에 모습을 감췄던 염소 괴수가 은밀하게 다가와 표범의 머리를 찔러버린 것이다.

키힐힐힐힐! 으적으적, 으적!

이후 염소를 닮은 괴수는 머리 작은 표범을 맛나게 씹어 먹었다.

그리고 식사가 끝나기 전에 구덩이로 다가온 또 다른 짐승들도 은신술을 이용해서 깔끔하게 사냥하는 데 성공했다.

당연히 그렇게 잡은 사냥감도 모두 염소 괴수의 뱃속으로 들어갔는데, 자기 몸의 몇 배를 먹고도 염소 괴수의 배는 홀쭉하기만 했다.

키힐힐힐힐힐!

이윽고, 모든 사냥감을 씹어 삼킨 염소 괴수가 구덩이 아래로 몸을 날렸다.

콰드드득! 뿌드득! 키히일!

하지만 염소 괴수가 구덩이 아래에 닿기도 전에 밑에서 올라온 거대한 손이 그 목을 잡고 비틀어버렸다.

쿠구구구구구구!

“멸계!”

삼두육비의 모습을 한 건우가 구덩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염소 괴수의 목을 부러뜨린 건우는 나타결공법을 운용하여 몸을 부풀리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구덩이에서 삼두육비의 거인이 자라나는 듯 보였다.

뿌드드득! 뿌득!

건우는 세 개의 왼손 중 하나에 들고 있던 염소 괴수의 머리에서 두 개의 날카로운 뿔만 뽑고 다른 부위는 멀리 던져 버렸다.

쓸만하다 싶은 것은 뿔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으음. 아공간은 열리네.”

건우가 뿔을 아공간으로 밀어 넣으며 중얼거렸다.

- 괜찮으신 거예요?

곧바로 루야의 의념이 전해졌다.

건우가 천겁뢰를 맞은 충격으로 루야와의 의념 연결이 끊어졌다가 지금 아공간 입구를 열면서 다시 연결이 된 것이다.

“좋지는 않다. 여긴 영기가 없고 극멸기가 가득한 것을 보니 멸계인 듯하네.”

- 멸계요?

“음.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수미산 상징이지.”

- 아! 세 조각으로 쪼개졌네요?

루야가 이제야 확인을 했는지 깜짝 놀라며 말했다.

건우는 이곳이 멸계란 사실을 파악하자 곧바로 수미산 상징을 살폈고, 그것이 쪼개진 것도 확인한 후였다.

“천지법칙이 아주 제대로 내 통수를 쳤다. 수미산 상징은 부숴놓고 나는 멸계로 보내고.”

- 그럼 이제 어떻게 해요? 이거 고칠 수는 있을까요?

루야가 부서진 수미산 상징을 의념으로 건우에게 보이며 물었다.

“어렵지. 솔직히 쓰기는 잘 썼지만 그것에 담긴 이치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잖아. 그런 주제에 그걸 어떻게 고치겠냐? 아마 진선의 경지에 올라야 가능할 걸?”

- 그럼 이제부터 멸계에서 살아야 해요? 뭐, 나타결공법이 있으니 멸계에서 못 살 것은 아니겠지만요.

“그래도 여기서 살 수는 없지. 어떻게든 수미 세계로 돌아가야지.”

- 어떻게든 이라고요?

루야가 별로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되물었다.

“지금 수미 세계에서 멸계전이 벌어지고 있잖아. 그럼 멸계에서 수미 세계로 가는 연결점이 있다는 이야기고.”

- 아, 그래서 그걸 찾아 가시겠다는 거네요?

“그렇지. 하지만 그 전에 일단 여기가 어딘지부터 알아야겠지.”

- 조심하세요. 극멸기만 쓸 수 있으니 건우 님이 쓸 수 있는 힘에도 제약이 많아요. 나타결공법은 성령기 초기잖아요.

“음. 금강패갑공이나 검선의 검공은 극멸기로 쓰기 어렵지.”

- 성해룡주를 이용한 아공간 현실 구현도 쉽지 않을걸요?

“성해룡주를 극멸기로 활성화 시킬 수는 없지만 아공간에 있는 천지 영기를 루야 네가 활용하면 어찌 방법이 있지 않을까?”

- 제가 이 안에서 성해룡주를 이용해서 아공간을 밖으로 구현하라고요?

“내가 아공간 구현을 하고 안에서 네가 호응하는 것을 해 봤잖아.”

- 그걸 건우 님 도움 없이 저보고 혼자 해 보라는 거군요? 알았어요. 최대한 노력을 해 볼게요.

“어째, 평소보다 훨씬 협조적인 태도다?”

- 그럼 어쩌겠어요? 지금 같은 위급 상황에서 건우 님과 장난을 칠 수는 없잖아요.

“그렇긴 하네, 낯설어서 그렇지.”

- 그건 그렇고, 건우 님.

루야도 평소와 다른 자신의 행동이 계면쩍었던지 화제를 돌리기 위해 정색을 하고 건우를 불렀다.

“왜?”

- 지금 멸계에 왔잖아요. 그럼 전에 멸계로 보냈던 유혼결(幼魂結)의 분혼과 연결이 되지 않을까요?

“어? 유혼결의 분혼?”

- 같은 멸계니까 전에 그랬던 것처럼 영혼 연결이 되지 않겠냐는 거죠.

“그게 되면 멸계의 상황을 조금 더 잘 알 수 있겠군. 어디 해 볼까?”

건우는 루야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여기고 곧바로 구덩이 밖으로 걸어나와 그대로 땅바닥에 가부좌를 하고 앉았다.

이미 주위에 특별히 강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였다.

그러니 잠시 명상을 한다고 해도 문제는 없을 것이라 판단했다.

휘휘휘휘휙!

물론 몇 개의 검은 깃발을 주위에 던져 간단한 진법 결계를 만드는 것은 잊지 않았다.

영기를 사용하는 방식을 극멸기로 발현하도록 만드느라 위력이 많이 떨어졌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렇게 간단한 준비를 마친 건우는 자신의 분혼과 소통하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하지만 사흘 후 눈을 뜬 건우의 표정은 어두웠다.

- 연결이 안 되네요?

“그래. 홍애지와 수미 세계에 있을 때에도 그저 분혼이 무사하다는 것만 알 수 있었는데, 여기서도 다를 바가 없구나.”

- 그건 그 분혼이 지금 건우 님이 계신 이곳에 없다는 소리겠죠?

“그렇겠지. 멸계 역시 영기 수도계 만큼 크고 넓은 곳이라 했으니.”

건우는 살짝 한숨을 쉬며 아쉬움을 달랬다.

하지만 크게 기대한 것은 아니어서 그 아쉬움이 크지는 않았다.

어차피 멸계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소계(小界)로 나뉘어져 있다.

그 작은 계(界)들이 영기 수도계의 수많은 인계, 영계와 같다고 봐야 한다.

그러니 서로 다른 소계(小界)에 있다면 분혼과 연결이 되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천지법칙의 벌을 받아서 멸계에 떨어졌는데, 형편 좋게 분혼이 있는 소계(小界)로 보내줬을 리는 없지.”

- 설마 천지법칙이 그렇게까지 세세하게 간섭했겠어요? 그냥 에라 죽어봐라 하고 천겁뢰를 때리고 말았겠죠.

“에라 죽어봐라? 너 어째 평소 태도로 돌아간 것 같다?”

- ······.

“아무튼 분혼은 잘 있는 모양이지만 연결이 되지 않아서 도움을 받을 수는 없겠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내가 알아서 해야지.”

건우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가부좌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삼십 장에 이르는 삼두육비의 거체(巨體)가 몸을 일으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어둑한 누런 하늘이 세상을 뒤덮고 있었다.

건우는 습관처럼 출도령패를 꺼내려다가 머쓱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었다.

영기 수도계의 령보인 부양도를 이곳 멸계에서 쓸 수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이거 갑자기 선태 괴수 녀석이 떠오르네.’

쿠구구구구구구궁!

여섯 개의 손 중에 하나로 뒷머리를 긁던 건우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몸을 꼿꼿하게 세우고 허공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삼두육비의 거인은 한 번에 수만 리씩 허공을 건너뛰기 시작했다.

극멸기를 이용해서 둔술을 펼치는 연습을 시작한 것이다.

비록 나타결공법 하나만 제대로 쓸 수 있지만 그래도 성령기 초기의 경지를 쓸 수 있는 건우였다.

극멸기를 영기 대신에 써도 기본적인 술법 정도는 무리 없이 쓸 수 있었다.

“어디 멸계 수사 놈들이 분명히 있을 터인데?”

허공을 가르는 건우는 그렇게 희생양이 될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

“크아아악!”

콰득! 푸우욱! 퍼벅!

“크허헉! 운이······ 없었군.”

인간형의 몸에 사슴벌레를 닮은 머리를 달고 있는 충족(蟲族) 수사가 비명을 질렀다.

그를 공격하는 것은 삼두육비의 거인으로 두 개의 단검으로 충족 수사를 찌르고 남은 빈손 네 개로 주먹질을 하고 있었다.

단검에 찔리고 팔다리가 부러진 충족 수사는 어떻게든 살아보려 영체를 뽑아내어 도망가려 했지만 그조차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망연한 표정을 지으며 운이 없었다고 한탄했다.

하지만 곧이어 건우가 영체를 잡은 손가락에 힘을 주자 버티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건우는 작은 호리병을 소환하여 그 영체를 밀어 넣고 봉인했다.

이후에 놈을 추궁하거나 추혼술을 펼쳐 정보를 뽑아낼 생각이었다.

“으음. 이건 좀 미안하긴 하네. 하지만 네가 눈치가 너무 빨랐던 것이 잘못이지. 내가 멸계 소속이 아니란 것을 알아버렸으니 말이야.”

건우는 그렇게 영체를 봉인한 후에 충족 수사의 몸에서 공간낭과 몇 가지 기물을 취하며 중얼거렸다.

- 건우 님. 조심하세요. 이곳에서 멸계란 소리는 되도록 안 하는 게 좋잖아요. 이번 싸움도 그 때문에 시작됐는데요.

그런 건우에게 루야가 다급하게 주의를 주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거 확인했다. 그래도, 조심하긴 해야지. 이렇게 간단하게 정체를 들킬 거라곤 생각도 못 했으니 말이지.’

건우도 이번에는 자신의 실수가 컸던 것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번 싸움의 시작은 건우의 어이없는 말실수 때문이었다.

건우는 자신이 떨어진 곳의 정보를 얻기 위해 수사를 찾던 중에 우연히 사슴머리 충족 수사를 만나게 되었다.

탐색을 거듭하며 이동하던 중에 충족 수사의 동부에 펼쳐진 결계를 발견하고 교류를 청했던 것이다.

충족 수사는 건우가 자신과 같은 성령기 초기임을 알고는 망설였지만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 없어 결계를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그때, 대화를 시작하면서 건우가 큰 실수를 하고 말았다.

그 충족 수사 앞에서 ‘멸계, 멸계 수사’ 따위의 단어를 사용한 것이다.

건우에겐 일상적인 어휘지만 실제로 멸계 수사들 사이에선 거의 쓰이지 않는 말이란 것을 몰랐던 것이다.

그에 충족 수사가 건우를 의심스럽게 보았고, 얼마 가지 않아서 건우 역시 충족 수사가 자신을 의심스럽게 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후 두 수사가 서로 목숨을 걸고 싸운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건우는 정체를 들켜서는 안 될 입장이었고, 충족 수사는 자신의 거처를 두고 도망을 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충족 수사는 나중에 싸움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몸을 피하려 했지만 그때는 이미 늦은 후라, 결국 영체가 건우의 손에 잡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것이 이번 싸움의 시작과 끝이었다.

루야가 건우에게 ‘멸계’란 말을 쓰는 것에 주의를 준 것도 그런 이유였고.

‘그래도 다행이긴 해.’

- 뭐가요?

‘수미 세계와 멸계전을 치르는 소계(小界)에 대한 소식을 이 놈이 알고 있었다는 거.’

- 그건 그러네요. 소문을 들었다니 그쪽 소계(小界)가 아주 멀지는 않을지도 모르죠.

‘거기에 영기 수도계와 다르게 이곳 멸계는 소계(小界) 사이의 이동이 쉽다는 것도 다행이지.’

- 맞아요. 저 쪽처럼 계와 계 사이를 넘어가는 것이 어려웠다면 정말 수미 세계로 돌아가는 건 포기해야 했을지도 몰라요.

‘그래도 포기할 수야 있나.’

- 왜요? 이쪽에서 극멸기로 수련해서 멸계 수사로 신선의 경지에 오르면 되죠.

루야는 꼭 영기 수도계에서 신선이 되는 것만이 답은 아닐 수도 있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건우는 곧바로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음. 그게 좀······. 멸계는 내 성향이 아닌 거 같거든. 묘하게 경지의 한계가 있을 거 같단 말이지.’

- 그 말씀은 최악의 경우엔 멸계에 뿌리를 내릴 생각도 해 보긴 했다는 거네요?

‘응, 그런데 어려울 거 같아. 뭔가 체질적으로 안 맞아.’

- 하긴, 멸계 수사하고 영기 수도계 수사는 정말 상극이니까요.

‘아무튼 이놈의 동부에서 좀 쉬었다가 가자. 알아볼 것도 많고.’

- 네, 좋아요. 그나저나 그 수사도 참 운이 없군요.

‘반대로 나는 운이 좋았지.’

건우는 충족 수사의 몸뚱이를 수습하고 곧바로 그 수사의 동부를 향해 몸을 날렸다.

< 멸계로군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