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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지 법칙이? >
수미 세계의 중심에는 수미산이 있다.
그리고 그 수미산은 수미 세계 최고의 수도 문파인 수미선문이 있는데, 수미선문은 그 제자의 수나, 고계 수사들의 수와 경지를 따져도 수미 세계에서 최고라 할 수 있었다.
당연히 수미 세계의 멸계전에서도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건우가 수미산까지 오게 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건우에 대한 이야기가 널리 알려지면서 수많은 세력이 건우를 탐냈다.
건우가 처음 수미 세계에서 활동을 시작했던 남염부주의 도맹은 물론이고 건우의 능력을 크게 알리고 그를 발탁하는데 앞장선 상이 대륙의 상두족이 특히 건우를 데려가려 애썼다.
하지만 결국 건우의 거처는 수미산의 수미선문으로 결정이 되었는데 이는 결국 구산팔해 전체를 따져도 수미선문의 영향력이 가장 컸던 탓이다.
“벌써 3천 년 가까이 되었구나.”
건우를 찾아온 연꽃 선녀 유정정이 영초를 우린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그렇게 말했다.
그녀가 말하는 3천 년은 건우가 수미 선문에 온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유 선자님.”
건우는 그렇게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가 아직도 유정정을 정정 수사라 부르지 못하는 것은 당연히 그가 태령기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3천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건우는 고작 성령기 후기를 눈앞에 뒀을 뿐이었다.
“몇 달 후면 또다시 홍애지에 가겠구나.”
그런데 어쩐 일인지 유정정이 평소와 달리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매 100년에 한 번씩 정해 놓고 하는 일이니, 정확히 72일 남았습니다.”
“이번에도 다섯 명이겠지?”
“그렇습니다.”
“경지는 어떠할 것 같으냐?”
“그것은 제가 정하는 것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이번에도 대부분 태령기 후기나 완경의 어르신들이겠지요. 못해도 태령기 중기 이상은 될 테고요.”
건우는 당연히 그럴 거라는 투로 대답했다.
지금 건우와 정정의 대화는 홍애지에서 수미 세계로 데리고 오는 고계 수사들에 대한 것이었다.
건우는 상두족 수사인 경보를 만난 후, 홍애지의 고계 수사를 수미 세계로 데리고 올 수 있다는 것을 몇 번의 검증 끝에 인정을 받았다.
그 검증에만 3백 년의 시간이 걸렸고, 뒤로 갈수록 많은 고계 수사들이 몰려들어 검증을 확인하려 했었다.
어쨌건 건우는 능력을 인정받았고, 그 후 여러 세력의 영입 경쟁 끝에 수미 선문에 귀빈 자격으로 머물게 되었다.
그것이 벌써 3천 년 전의 일인데, 그간 건우는 100년에 한 번씩 홍애지의 수사를 수미 세계로 데리고 오고 있었다.
홍애지에서도 처음에는 멸계전이 벌어지는 수미 세계에 대한 소문을 믿지 못하는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소문이 구체화 되고, 먼저 수미 세계로 넘어간 검선이나 마선 같은 수사들의 증언 옥간들이 나돌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천겁이 없고, 멸계전에 승리하면 곧바로 선계에 속할 수 있으니 그 이야기를 들은 수사들은 너나없이 수미 세계로 가고자 했다.
특히 천겁을 앞두고 제대로 대비하지 못한 수사들은 어떻게든 수미 세계로 넘어오려 애썼다.
그런 상황에서 건우가 정한 것이 100년에 한 번, 한 번에 다섯 명 제한이라는 기준이었다.
실제론 100년이 아니라 한 달에 한 번씩도 할 수 있었지만 고계 수사가 그렇게 흔한 것은 아니었다.
소문을 듣고 찾아온다고 해도, 먼 곳에서 오는 이들은 수백 년이 넘도록 날아와야 할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한 달에 한 번씩 수사를 모집한다면 멸계전에 별 도움이 안 될 저계 수사들까지 몰려들 수도 있었다.
결국 못해도 태령기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기준에 맞추기 위해서는 최소한 100년이란 시간 간격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런 행사가 앞으로 몇 달 남지 않은 것이다.
“내가 요즈음 옛 기억을 되살리다 보니 새로 깨달은 것이 있다.”
정정 수사가 여전히 정색을 하고 말했다.
“가르침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건우는 정정 수사가 뭔가 자신에 대해서 말할 것이 있음을 알고 공손하게 말했다.
“천지 법칙은 없는 듯 하여도 항상 세상을 관통하여 균형을 살피고자 한다.”
정정 수사가 그렇게 설법을 시작했다.
건우는 바른 자세로 정정 수사의 말을 경청했다.
“네가 인계에서 경험했다니 알겠지만 멸계전이란 결국 그 균형 잡기의 한 방편이다. 어느 계의 수준이 기준 이상으로 높아지면 천지 법칙이 시련을 내려 그 수준을 낮추고자 한다.”
“······.”
“물론 시련이 있으면 그것을 이겨냈을 때의 보상도 있어야 하겠지. 그래서 인계가 영계로 편입되고, 영계는 멸계전에 승리하면 선계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정정은 그렇게 서두를 떼고는 다시 찻잔을 들어 입을 축였다.
“그런데 네가 홍애지와 우리 수미 사이를 오가며 고계 수사들을 이동시키는 것은 어떠하냐?”
“제 행동이 천지 법칙의 개입을 부를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까?”
건우가 물었다.
“홍애지에서 네가 수미로 데리고 온 태령기 이상의 수사가 벌써 이백 명에 가까워지고 있다. 어찌 문제가 되지 않겠느냐.”
“생각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고작 그런 일에 천지 법칙이 간섭을 할까 하고 가볍게 생각하긴 했습니다.”
“다른 것을 거론할 것 없이 홍애지만 놓고 따져 봐도 간단치 않은 문제다. 자칫 홍애지의 수준이 영계의 평균에 미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음이다.”
“그리되면 어찌 되는 것입니까?”
“수백 개로 쪼개져서 천지 영기의 농도가 떨어지겠지.”
“그 말씀은 영계가 인계가 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까?”
“오르는 것이 있는데 내리는 것이 없겠느냐?”
“그런······.”
건우는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에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멸계와의 싸움에서 패한 세계가 멸계에 잡아먹힌다는 소리는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영계가 수백으로 갈라져 인계가 될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
“어쨌거나 홍애지가 갈라져 인계가 되건 어쩌건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겠느냐.”
“그건 그렇습니다. 단지······.”
“그래, 단지 천지 법칙의 개입으로 네가 어떤 화를 당할지 모른다는 것이 문제지.”
“그럼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이제 홍애지에서 수사들을 데리고 오는 것을 그만 두어야지.”
“하지만······.”
“왜? 쏠쏠한 수입이 사라질 것 같아서 아쉬우냐?”
망설이는 건우의 태도에 정정 수사가 다시 이전처럼 웃는 얼굴로 장난치듯 물었다.
“그것도 그것이지만 수미 세계의 멸계전을 생각하면 그래도 좀 더 많은 수사를 데리고 와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네가 홍애지에서 데리고 온 태령기 이상의 수사가 200에 가깝다. 그만하면 할 만큼 했느니.”
“그럼 이참에 모험을 한번 해 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모험?”
“지금까지는 한 번에 다섯 명을 데리고 오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만.”
“그런데?”
“진법의 힘을 빌리면 어찌어찌 서른에서 쉰 명 정도를 한 번에 데리고 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동안 그런 것을 궁리하고 있었느냐? 어서어서 태령기에 오를 생각은 않고?”
“아, 아닙니다. 유 선자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언제 수련을 태만히 한 적이 있었습니까?”
“흐응? 입술에 침이나 바르거라.”
“······.”
“아무튼 한 번에 최소 서른 정도를 데리고 올 방법을 만들었다는 게로구나?”
“그렇습니다. 그러니 이번에 가서 그와 같은 소문을 내고 300년 정도 시간을 주었다가 한 번에 서른에서 쉰 정도를 데리고 오면 어떨까 합니다.”
“나는 내키지 않는다만, 네 욕심을 내가 어찌 막겠느냐. 알아서 하거라! 흥!”
건우의 말에 정정 수사는 샐쭉한 표정을 짓고 툭 쏘아붙이더니 앉은 자세 그대로 모습을 감췄다.
오고 가는 것이 항상 제 멋대로인 정정 수사라, 건우도 놀라지 않고 그저 그러려니 했다.
이제 또 언제 모습을 드러낼지는 건우도 알 수 없었다.
내일 불쑥 찾아올 수도 있고, 몇 년 소식이 없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정정 선자가 귀찮을 정도로 건우를 찾아온다는 것은 분명했다.
‘아직도 온전치 못하단 말이지.’
정정 선자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건우가 루야에게 의념을 보냈다.
- 그러게요. 태령기 완경의 경지를 회복했다는데도 정신은 완전해지지 않았다니 확실히 후유증이 크긴 해요.
‘다른 것은 거의 멀쩡해졌는데 왜 나에 대한 것은 바뀌지 않는지 모르겠어. 솔직히 나는 유 선자가 나에게 집착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 오래 봉인되어 있다가 풀려나며 처음 본 것이 건우 님이고, 거기에 정정 수사가 가진 정화 법칙에 건우 님이 영향을 받아 그렇겠죠. 일종의 각인 아닐까요?
‘정정 수사가 새냐? 각인은 무슨.’
- 정정 선자가 하는 걸 보면 알에서 깨어나 처음 본 대상을 어미로 생각하는 것이나 별 달라 보이지 않는데요?
‘너 그런 소리 유 선자가 들으면 어떨 거 같으냐?’
- 헹, 정정 수사도 아공간은 알아차리지 못하는데 무슨 걱정이에요?
‘그건 좀 이상한 일이야. 이전에는 분명히 아공간 입구를 다른 수사들이 알아차리곤 했는데, 어쩐 일인지 영계에 온 후로는 그런 일이 없어. 아공간에 녹아든 겨자씨의 효과인 거겠지?’
건우가 영계에 오르면서 수미 세계가 겨자씨에서 빠져나갔다.
그리고 껍질만 남은 겨자씨는 지금 건우의 아공간을 감싸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태령기 완경의 정정 수사도 건우의 아공간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공간을 열고 그곳에서 뭔가를 꺼내는 것은 알아차려도 어디서 꺼내는지는 알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 아마도 그렇겠죠. 그 겨자씨가 보통 겨자씨는 아니잖아요. 자그마치 수미 세계를 담고 있던 건데요.
‘휴, 그 겨자씨 연구도 좀 더 해야 하는데 여유가 없네. 여유가.’
- 지금 급한 건 금강패갑공과 검선의 검공이죠. 이제 성령기 후기에 도전해야 하는데 겨자씨에 한눈 팔 여유가 어딨어요?
‘그건 그렇지.’
겨자씨에 대한 연구는 건우의 경지를 끌어올리는데 효율적이지 못하다.
지금 건우가 성령기 후기를 눈앞에 둔 것은 모두 금강패갑공과 검선의 검공법에 집중한 결과였다.
- 게다가 정정 수사의 말처럼 홍애지에서 고계 수사를 데리고 오는 것이 위험할 수도 있다면, 그에 대한 대비도 해야죠.
‘그건 그렇지. 아무래도 많은 수의 수사들을 이동시키려면 경지를 한 단계라도 더 올리는 것이 좋겠지?’
- 그걸 말씀이라고 하세요? 당연하죠!
‘쯧, 다음은 300년 정도 미뤘다가 할 거니까 그 사이에 승경을 하면 되겠지.’
- 무슨 승경을 당연하다는 듯이 말씀하시네요.
‘뭐, 준비는 끝났지. 공들여 단계만 밟으면 될 일이잖아.’
- 하긴······.
루야는 건우가 성령기 후기에 도전하기 위해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에 그 말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건, 이번 홍애지 행은 이전과는 좀 다르겠구나.”
문득 건우가 멀리 운해에 가린 수미산 봉우리로 시선을 던지며 중얼거렸다.
***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래, 그동안 성취가 좀 있었네?”
“모두 어르신의 배려 덕분이 아니겠습니까.”
“무슨 그런 말을. 네 노력이 없이 어찌 그런 경지가 가능했겠느냐.”
“고작해야 입령기 완경일 뿐입니다. 그리고 아시겠지만 저는 여기가 한계입니다.”
“으음. 스스로 한계를 지었단 말이냐?”
건우의 목소리에 설핏 안타까움과 언짢음이 담겼다.
“송구합니다.”
“원용문이 그동안 꽤나 커졌어.”
건우가 더는 이야기 하기 싫다는 듯이 화제를 돌렸다.
“어르신께서 남겨주신 독룡흑린공법이 있는데 당연한 일이지요.”
독룡흑린공법은 후반부까지 보완한 무명공으로 만들어낸 뛰어난 공법이었다.
건우는 용랑에게서 무명공은 거두었지만 무명공에서 파생된 독룡흑린공법은 남겨 주었다.
그리고 그 공법을 원용문의 절기로 삼아 전승할 수 있게 허락해 준 바가 있었다.
그 덕분에 원용문은 성세를 이룰 수 있었고, 지금 용랑이 입령기 완경에까지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
“어르신, 송구하지만 부탁을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건우가 잠시 옛 생각에 잠겨 있는데 문득 용랑이 물어왔다.
“부탁?”
“오늘이 어르신을 뵙는 마지막이 될 듯합니다. 그래서 송구하지만 제 후손 중에 하나를 거두어 달라 청하고 싶습니다.”
“으음. 내 제자로 들이고 싶다는 것이냐?”
“언감생심 그렇게까지 바라지는 않습니다. 그저 수미 세계에 작은 수도 문파 하나만 열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호오? 터를 아주 수미로 옮기고 싶다는 게로구나? 이후에 멸계전이 끝난 후도 기대하는 것이고?”
“송구합니다.”
“쯧, 내키지 않지만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겠지. 어디 아이들을 한 번 보여 보거라.”
건우는 차라리 용랑을 수미 세계로 데리고 갈까도 생각했지만 용랑이 원용문을 두고 떠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다시 보기 어렵다는 생각에 아쉬움이 있었는데 이런 부탁을 들어주면 마음의 부담이 조금은 덜어질 듯싶었다.
< 천지 법칙이?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