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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계 홍애지(洪涯地)의 혁개성(革開城) >
혁개성(革開城)은 홍애지(洪涯地)의 대성(大城)이다.
건우도 이쪽 영계를 넓게 돌아보지 못하여 이곳 영계를 칭하는 이름이 홍애지란 사실을 몰랐었다.
하지만 건우가 수미 세계에 있는 동안 인계에서 올라온 일곱 대륙의 홍애지 세계 편입이 거의 완성되었다.
그러면서 외부와의 교류가 늘어나 이제 자신들이 있는 영계의 이름이 홍애지임을 모르는 수사는 없었다.
건우도 홍애지로 넘어와 용랑의 근황을 확인하느라 몇 곳의 성을 둘러보며 홍애지에 대한 정보들을 이전보다 풍부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용랑이 입령기에 올라 여전히 원용문(猿龍門)을 이끌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사이에 용랑은 과거 인계의 7대륙에서 나름 어깨에 힘을 줄 수 있는 거물이 되었고, 원용문도 그 지역 한정으로는 거대 수도 문파로 성장했다.
건우는 그런 사실까지 확인했지만 굳이 용랑을 찾지는 않았다.
1만 개의 화신기급 괴뢰심을 처리하기엔 7대륙 구역은 너무 외지고 궁벽한 곳이라 그에게 일을 맡길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그저 잘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로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으면 그만이라 여기기로 했다.
그래서 용랑의 소식을 확인하고는 곧바로 전송진을 몇 번 갈아타며 홍애지에서도 이름난 대성을 찾았고, 그렇게 도착한 곳이 혁개성이었다.
- 성의 규모가 어지간한 인계 대륙 크기네요.
“범인은 들어올 수 없고, 오직 수사들만 거처하는 곳인데 이런 규모인 것은 놀랍군. 수미의 남염부제 증장성도 여기에 비하면 소성이라 해야 하겠어.”
건우도 멀리 보이는 혁개성의 규모에 깜짝 놀랐다.
“일단 가 보자.”
건우는 일정한 속도로 비행을 하며 혁개성의 성문으로 다가갔다.
혁개성의 성문은 문짝이 없이 좌우로 높이 천 장에 이르는 기둥 두 개가 서 있는 모습이었다.
당연히 그 두 개의 기둥은 서로 갖가지 금제와 술법, 법보들로 연결되어 있었다.
“언제든 기둥 사이를 틀어막을 금제와 진법이 백여 개가 넘는군. 거기에 드러난 공방 법보만 또 그 정도 숫자가 되고. 그나마도 내가 파악한 것이 전체의 절반도 되지 않겠어.”
건우가 성문에서 몇백 장 떨어진 허공에 서서 중얼거렸다.
그런 중에도 그의 발밑으로는 수많은 수사들이 오가고 있었다.
또한 그보다 적은 수의 수사들이 그의 옆이나 위로 지나갔다.
모두가 경지에 따라 비행 고도를 유지하는 것인데,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눈치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혁개성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어르신.”
건우가 성문으로 다가가자 입령기 수사 하나가 다가와 인사를 했다.
문을 지키는 수문 수사 중에 경지가 가장 높은 이로 보였다.
“내가 혁개성은 처음이다. 주의해야 할 것이 있느냐?”
건우가 그 수사에게 물었다.
“달리 특별한 규칙 같은 것은 없습니다. 다만 혁개성 성주님께서 소란이 이는 것을 싫어하시니 그것만 유의해 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그 전에 어르신의 존함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음, 나는 건우라 한다. 아울러 출신도 알려주랴?”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수문 수사가 활짝 웃으며 답했다.
“얼마 전에 편입된 인계가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곳 출신이다.”
“아, 그렇습니까. 그런데 벌써······. 아, 아닙니다.”
수문(守門) 수사는 건우의 말에 깜짝 놀라 뭔가 더 말을 하려다가 말꼬리를 흐렸다.
아마도 경지 상승이 빠른 것에 놀라고 또 궁금증이 생겼으리라.
하지만 어찌 선배 수사에게 멋대로 수련에 대해 물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소란을 조심하라 했더냐?”
그런 수문 수사를 보며 건우가 물었다.
“네? 네. 하지만 그건 어르신께서 따로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신다면 괜찮을 것입니다. 혁개성은 오래된 고성이라 체계가 잡혀 있지요. 그러니 상리를 벗어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그런데 혁개성엔 따로 통행료가 없느냐?”
본래 수도계의 성들은 대부분이 일정한 통행료를 받았다.
그런데 그런 말이 없으니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우였다.
“네. 따로 통행료를 받지는 않습니다. 워낙 성이 넓은데 그 안에서 수많은 거래가 있지 않겠습니까. 거기서 나오는 세금만으로도 충분하지요.”
“그렇군. 그럼 개인 거래에도 세금을 떼는 것이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정식으로 공인된 거래에만 세금이 부과될 뿐입니다. 개인 거래나 교류회는 대상이 아니지요.”
“알았다. 그럼 물은 김에 하나만 더 물어봐도 되겠지?”
“그럼요. 하문하시지요.”
“혁개성에서 경매를 하려 한다. 대수롭지 않으나 수량이 많은 것을 처분하려는데 적당한 곳이 있겠느냐?”
“경매라면 이름난 상단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중에 어느 곳이나 능력이 부족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군. 알았다. 그럼 수고하거라.”
“네, 어르신. 다시 한 번 혁개성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건우가 인사를 하고 성안으로 날아가기 시작하자 수문 수사가 공손히 읍을 하며 배웅했다.
건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심히 혁개성 내부로 날아가 곧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인계가 편입된 것이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성령기라니! 엄청난 수련 자질을 지닌 어르신이군.”
수문 수사는 건우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
“응?”
혁개성은 넓었다.
그런데 그 넓은 혁개성 어디에도 바늘 하나 꽂을 곳이 없이 빽빽하게 주인이 있었다.
어느 동산에는 입령기 수사의 거처가 있었고, 어느 계곡에는 성령기 수사의 동부가 있었다.
또 어느 전각은 모 상단의 상점이고 그 옆의 건물은 손님을 맞는 객잔이었다.
혁개성의 산과 들, 계곡과 호수는 물론이고 번화한 거리의 수많은 건물들도 수사들로 넘쳤다.
건우는 그런 광경을 살피며 유유자적 허공을 걷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중에 문득 익숙한 문양을 발견하고 우뚝 멈추었다.
가부좌를 하고 앉은 사람이 양쪽으로 실 한 가닥씩을 뻗고 있는 모습, 그 사람의 형상도 자세히 보면 수많은 실들이 뭉쳐서 만들어진.
그런 모습이 어느 다관의 차(茶)라 적힌 깃발에 숨겨져 있었다.
“망천유역이 생각나네.”
과거 건우가 만은사와 첫 인연을 맺었던 곳이 망천유역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봤던 만은사의 표식이 바로 저러했다.
“영계에도 만은사가 있다는 소리군.”
건우는 살짝 웃음을 지으며 만은사 표식을 내걸고 있는 다관 앞으로 내려섰다.
그리고 곧바로 다관 안으로 들어갔다.
몇 개의 탁자가 있고 그 너머에 다관의 점원이 매대 뒤쪽에 서 있었다.
점원 뒤의 벽에는 장식장이 있고 여러 종류의 차를 담은 항아리와 옥병 등이 진열되어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점원이 매대 뒤에서 건우 앞으로 나와 인사를 했다.
영체기 중기의 수사였다.
그 정도로는 건우의 경지를 가늠하는 것도 불가능할 터다.
그저 감히 감당할 수 없는 경지의 수사임만 은연중에 짐작할 뿐.
“묻겠다.”
“네, 어르신.”
“여기가 만은사와 연관이 있는 곳이렷다.”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너희 만은사와 거래를 할 수 있겠느냐?”
“그 말씀은 저희 만은사에 이름이 올라 있지 않다는 말씀입니까?”
건우의 말에 점원이 물었다.
“그것 참, 뭐라 해야 할까. 홍애지의 만은사와는 연이 없다. 하지만 이전 인계에서는 만은사와 적잖은 거래를 했었지.”
“아! 그러십니까? 그러시면 여기에 그때 쓰시던 존함을 넣어 주시면 확인을 해 보겠습니다.”
건우의 말에 점원의 얼굴빛이 밝아지며 매대로 가서 차림표 같은 것을 들고 와 내밀었다.
그것은 분명 다관에서 파는 상품들을 적어 놓은 것이 분명하지만 건우는 상관하지 않고 영기를 불어 넣었다.
이전 인계에서 만은사와 거래할 때에 쓰던 방식으로 자신을 증명한 것이다.
그러자 차림표의 표면에 화려한 비단 천이 떠오르더니 거기에 다시 몇 가닥의 금실이 건우의 이름을 수 놓았다.
“아! 인계에서 길우몽과 건우란 이름을 함께 쓰셨던 모양이군요. 등급은 비단 등급을 받으셨네요? 그럼 다시 이 내용으로 홍애지에서의 등급 조정을 신청하겠습니다.”
인계의 능라라 해도 영계에 왔으면 삼베 대우도 못 받을 것이다.
어쨌건 과거의 연을 이어갈 수 있다니 나쁘지 않았다.
건우는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언제쯤 결과가 나오겠느냐?”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일단은 혁개성 내에서만이라도 자유롭게 저희 만은사와 거래를 할 수 있도록 할 것이고, 이후에 만은사 전체에 이름을 올릴 등급을 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냐? 그럼 그 근거는 어찌 되느냐?”
“그것까지는 소인이 입에 담을 문제가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점원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되었다. 굳이 만은사와의 거래를 고집할 이유는 없겠지. 너희가 하는 양을 보고 이후를 결정할 것이니 알아서 하거라.”
“네? 네!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보자꾸나.”
건우는 별다른 미련은 없다는 듯이 등을 돌려 다관을 나왔다.
뒤에서 점원이 공손한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안녕히 가십시오.”
***
건우는 그 후로도 혁개성의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녔다.
그러면서 가끔씩 거대 상단의 상점을 들러서 거래 물품들을 살피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어디에서나 물가를 파악하는 것은 중요했다.
또한 거래되는 물품의 수준이나 종류도 잘 파악해 두는 것이 바가지를 피하는 기본이었다.
그렇게 며칠을 혁개성 곳곳을 누비고 다닌 건우가 번화가를 벗어나 후미진 골목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어디에나 있는 뒷골목.
음습하고 또 사이한 기운이 흘러 다니는 그런 곳이었지만 따지고 보면 세상 어디든 양이 있으면 음이 있는 법이다.
게다가 성령기인 건우가 사고를 걱정할 일은 별로 없었기에 그의 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이런 곳엔 또 다른 곳에서는 구할 수 없는 것들을 찾을 수도 있지. 이참에 그동안 던져두고 있었던 마귀팔면호령을 좀 더 쓰임새 있게 만들 방법을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고.’
건우가 굳이 음습한 뒷골목으로 들어온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비록 진극멸기로 경지를 끌어 올리고 있기는 하지만 건우는 일컬어 정도(正道)를 걷는 영기 수사다.
그런 그에게 사기나 마기, 혈기 따위의 수련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에게 마기와 연관된 것으로 제법 애착이 가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마귀팔면호령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그것을 어찌 더 낫게 만들 방법이 있을까 하여 뒷골목의 상점들을 훑어보려는 것이었다.
“건우 어르신.”
그때였다.
누군가 건우 앞으로 다가오며 그를 불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작별 삼일 괄목상대라 하더니 어르신께서는 이리도 큰 성취를 얻으셨습니다. 감축드립니다.”
그녀는 건우에게 깊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
“그래, 만은사의 능라 조예령이었지? 십이비선 중에 금선의 유산을 뒤늦게 차지했던.”
“알아봐 주시니 감사합니다.”
조예령.
건우와 함께 십이비선의 영계 비승로를 열었던 유산주들 중의 하나가 나타났다.
“그래, 반갑구나. 그리고 너도 입령기에 올랐구나. 축하할 일이다.”
“송구합니다. 어르신께선 벌써 성령기이신데, 저는 고작 입령기 초기에 불과합니다. 어찌 어르신 앞에서 경지가 오름을 자랑하겠습니까.”
“하하하. 그 이야기는 굳이 더 할 필요가 없겠구나. 그런데 네가 나를 찾은 것은 역시 만은사의 일이더냐?”
건우는 그녀를 보는 순간 그녀가 이곳에서도 만은사에 속해서 일을 하고 있음을 짐작했다.
“그렇습니다. 아울러서 소녀는 황금상단의 일도 함께 보고 있습니다.”
“황금상단?”
“황금상단과 만은사는 서로 돕는 관계입니다. 그리고 황금상단은 원래 금선 어르신께서 몸담고 계시던 곳입니다.”
“으음. 금선, 네가 그 유산을 이었었지.”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어르신께서 의뢰하신 경매를 잘 주선할 수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내가 다른 상단에 일을 맡길까 서둘러 찾아온 모양이구나?”
“그리 이해득실만 따진 것은 아닙니다. 인계에서의 연을 어찌 가벼이 하겠습니까.”
“쯧. 그러면 너와 연을 이어서 어떤 도움이 될지 한 번 알아보긴 해야겠구나. 알았다. 내가 너와 거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보마.”
“감사합니다. 어르신. 그럼 모시겠습니다.”
건우의 말에 조예령이 활짝 웃으며 앞장서서 길 안내를 시작했다.
그런 그녀가 비행하는 높이는 성령기 수사들의 그것과 같았다.
건우를 안내하는 것이니 그 수준에 맞춘 것이다.
건우는 말없이 그런 조예령의 뒤를 따랐고, 얼마 후 화려한 객관에 도착했다.
황금상단에서 운영하는 것이었다.
“안으로 드시지요.”
조예령이 객관 후원의 동산에 있는 별채로 건우를 안내했다.
< 영계 홍애지(洪涯地)의 혁개성(革開城)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