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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태(高泰) 공역궁(空逆宮) 폐허 >
콰과과광! 콰광!
차자자자장! 카가가가각!
“쓰러져라!”
황금빛의 갑옷을 걸친 5장 크기의 거인이 한 손에 검을 들고 몰려오는 석수(石獸) 괴뢰(傀儡)들을 몰아치고 있었다.
그 거인이 들고 있는 것은 삼백육십성광검이고 몸에 두른 것은 금강패갑공의 기운이다.
- 건우 님, 여긴 이제 정리가 된 것 같아요. 지금 쓰러뜨린 괴뢰들의 부산물만 아공간으로 옮기면 되겠어요.
루야가 건우에게 의념을 전한다.
이번에 사방 십여 리 밖에 되지 않는 반구형의 공간에서 쓰러뜨린 석수 괴뢰의 수가 천 마리가 넘는데, 그 하나하나가 모두 화신기 완경 이상의 위력을 지녔다.
승경에 성공하여 성령기 초기에 이른 건우에게 화신기 완경 따위야 눈에도 차지 않을 수준이지만 이곳이 태령기 경지의 고계 수사가 만든 공간이란 것이 문제였다.
이곳에서 석수 괴뢰는 제약을 받지 않는데, 침입자인 건우는 강력한 금제를 받는다.
그래서 입령기 초기에서 중기 정도의 힘밖에 쓸 수 없는 상태로 석수 괴뢰를 상대해야 하는 건우에게 천 마리가 넘는 석수 괴뢰는 무시할 수 없는 전력이었다.
“이런 것을 뭐 하러 만들어 놨는지 모르겠단 말이지.”
건우가 소매를 저어 쓰러진 석수 괴뢰의 잔해를 아공간으로 밀어 넣으며 중얼거렸다.
진극멸기를 흡수하여 무사히 성령기에 오른 건우였다.
그 과정은 시간이 오래 걸렸을 뿐, 실제로 큰 위험은 없었다.
건우가 익히고 있는 금강패갑공과 검선의 검법에 갖가지 진법의 도움을 받으니 성령기 승경의 관문도 어렵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진극멸기를 이용한 승경이었기에 나온 결과일 뿐, 영기 수련으로 성령기에 오르려 했다면 그리 간단히 성공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건우는 자신이 나타결공법을 익혀 멸계 수사의 방식을 쓸 수 있다는 것이 최고의 패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다.
- 침입자를 막기 위해 만든 거지 별다른 이유가 있겠어요?
루야가 건우의 혼잣말에 뭘 그런 것을 묻느냔 듯이 대꾸했다.
“그게 이상하다는 거지. 여길 아무나 들어오겠어? 그만한 능력이 있으니까 들어왔을 거 아냐? 그렇게 보면 여기 있는 괴뢰들은 별 의미가 없단 말이지.”
- 건우 님이니까 쉬운 거지, 다른 수사들이었으면 어림도 없었을 걸요?
“아니, 내 말은 성령기 초기 정도론 여기를 들어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거지. 나 정도 되니까 지금 경지에 여길 들어온 거고, 일반적인 수사들이라면 적어도 성령기 후기나 완경은 되어야 할 거라고.”
- 에? 결국 건우 님이 잘났다는 말을 하시고 싶으신 거였어요?
“너도 냉정하게 생각해 봐라. 앞에 있던 세 겹의 금제와 석문을 일반적인 성령기 초기 수사가 뚫고 들어올 수 있겠냐?”
- 냉정하게요? 뭐, 어렵겠죠.
“그럼 결국 성령기 후기나 완경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내 말에 동의하지?”
- 네에.
“그러니까 하는 말이잖아. 성령기 후기나 완경이면 이 통로에 있는 석수 괴뢰들이 막을 수 있겠냐?”
- 어렵겠네요. 확실히 건우 님 말씀대로 통로를 지키는 석수 괴뢰들은 의미가 없긴 하네요.
“그래서 내가 이상하다고 하는 거잖아. 무슨 생각으로 이런 것들을 늘어놨는지 모르겠다고.”
건우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들어온 반대편 입구를 향해 미끄러지듯 날아갔다.
하지만 그곳엔 황금과 은, 구리 따위로 음각된 금제 문양이 복잡하게 빛나는 문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것도 그래, 앞에 있던 금제를 뚫고 들어온 침입자를 이런 문으로 어떻게 막아? 쯧!”
건우가 혀를 차며 소매를 휘저어 불개미들을 문으로 날려 보냈다.
불개미들은 곧바로 문으로 날아가 음각된 문양들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사가가가가가가각! 사가가각!
쿠르르르릉 콰르르르릉!
그리고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문 자체를 완전히 허물어 버렸다.
- 고작해야 서른다섯 겹의 진법이 중첩된 방어 법진이었네요. 화의모의 간식거리도 안 되겠어요.
루야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문에 새겨져 있던 진법을 평가했다.
건우도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아, 이제 알았어요.
그 때, 루야가 뭔가 생각이 난 듯이 말했다.
“뭘?”
건우가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 별 것 아닌 것들을 통로에 늘어 놓은 이유요.
“응? 이유를 알겠다고?”
- 간단한 거죠.
“그래? 그게 뭔데?”
- 시간이요. 그냥 시간을 끄는 거죠. 침입자가 있으면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버티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요. 여기 통로는 그런 이유로 존재하는 게 아닐까요?
“그럴 듯 하네. 확실히 그렇게 보면 존재 이유가 충분한 공간이긴 하네.”
건우는 그렇게 말하며 피식 웃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 * *
“귀찮게 만들려던 것이 분명했던 모양이네.”
건우가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석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일정한 길이의 통로와 넓은 반구형 공동, 그리고 그곳을 지키는 석수 괴뢰.
반구형 공동 안의 환경과 석수 괴뢰의 종류는 매번 바뀌었지만 결과적으로 비슷한 형식의 통로가 이어졌다.
그런데 이번에 나타난 공간은 확실히 달랐다.
“박살이 났군. 딱 봐도 알겠네.”
건우가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고 팔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성령기에 오른 건우조차도 그저 보는 것만으로 소름이 돋게 하는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 도대체 천겁이 얼마나 강하면 이렇게 될 수가 있는 거죠?
루야도 살짝 떨리는 목소리를 냈다.
공역궁(空逆宮)이라 적힌 현판이 부러져 반은 끄트머리가 박혀 있고, 나머지 반은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거대한 폐허가 공역궁이란 이름을 지녔던 곳인 모양이었다.
“성벽은 두 겹, 성의 지름은 오십 리. 수많은 전각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무너졌군.”
- 엄청난 진법이 설치되어 있었던 모양인데, 흔적만 남기고 모두 타버렸네요. 이런 규모의 성을 한 번에 날려버릴 정도의 천겁뢰는 상상이 되지 않네요.
폐허에서 느껴지는 기운.
그것은 수사들이라면 누구나 치를 떨 천겁뢰의 기운이었다.
건우의 몸에 소름이 돋은 것도 바로 그 천겁뢰의 기운 때문이었다.
그것도 아주 오래 전에 멸망한 공역궁의 폐허에 남은 흔적만으로.
“저기 중앙에 유일하게 멀쩡한 건물이 있네. 저기에 이 공간의 주인이 있었겠지.”
건우가 스르륵 몸을 띄워 공역궁의 중앙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 위험하지 않을까요?
“저 중앙 건물 외에는 어떤 영기 파동도 느껴지지 않아. 위험이 있다면 저 중앙건물에 있겠지만 주인이 없는 상태니까 괜찮을 거야.”
- 그래도 태령기 완경의 수사가 있던 곳인데요?
“천겁을 맞아 마지막을 준비했다면 뒤를 남기진 않았을 걸? 최선을 다해보고 안 되면 깔끔하게 가는 거지.”
- 그래도 혹시 뒤에 오는 놈이 누구든 한 번 당해봐라 할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쓸 힘이 있으면 천겁을 막는데 써야지. 당장 급한 일을 두고 그런 하찮은 잡념을 가질 수는 없지.”
- 그것도 그러네요. 고계 수사가 자신이 죽은 후를 생각해서 장난질 따위를 하는 것도 이상하네요.
“그래도 완전히 긴장을 풀 생각은 없으니 걱정하지 마라. 여기까지는 위험할 것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온 거니까.”
그 사이에 건우는 공역궁 폐허의 중심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단층이지만 높이가 100 장이 넘는 거대한 전각 하나가 온전한 모습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기와로 이루어진 지붕 아래에 네 면의 벽은 모두 다섯 가지 색의 옥을 섞어 화려하게 꾸민 전각이었다.
그 벽 전체는 여러 형태의 문살이 있는 창호문들이 있었는데 창호지를 백색의 옥이 대신하고 있었다.
건우는 전각 전체에 의념을 투사하여 그 내외를 자세히 살폈다.
그리고 얼마 후, 공역전(空逆殿)이라 적힌 현판 밑의 문으로 걸어가 둥근 문고리를 거침없이 잡아당겼다.
스르르르릉!
옥으로 된 문은 미세한 마찰음을 내며 부드럽게 열렸다.
그리고 전각 내부의 모습을 훤히 드러냈다.
“으음.”
건우가 살짝 신음소리를 냈다.
이미 대충 파악을 하기는 했지만 직접 보니 충격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 완전히 타버렸네요.
루야가 대신 전각 내부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 말처럼 전각 내부는 새까맣게 탄 흔적이 가득했다.
“그래도 저거 하나는 남았네.”
건우가 다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그의 걸음은 전각 중앙에 있는 소형 전각으로 향했다.
녹색의 기와지붕 전각은 네 모퉁이를 청색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모습이었는데 삼면의 벽은 창이나 문이 없고 한 쪽 면은 훤히 트여 있었다.
거대 전각 안에 작은 전각은 어찌보면 가마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안에 이 궁전의 주인이었을 수사가 일그러진 얼굴로 앉아 있었다.
- 저게 마지막 모습이었군요.
루야의 목소리에 안타까움이 담겨 있었다.
공역궁의 주인은 작은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야차족이군.”
건우는 그 수사가 야차족인 것을 알아봤다.
수미 세계의 주류 종족 중에 하나인 야차족은 머리가 커서 삼등신 비율을 지니는데 귀 또한 머리와 비슷할 정도로 크고 그 귀에 둥근 귀걸이를 하는 것이 특징이다.
야차족의 외모는 대부분 험상궂은 면이 있는데 공역궁의 주인 또한 다르지 않았다.
흔히 흉신악살이라면 떠올릴 법한 얼굴인데 한껏 찡그리기까지 하여 더욱 무섭게 보였다.
그는 가슴 앞에 수인 맺은 한 쪽 손을 반대쪽 손바닥 위에 올린 상태로 인상을 쓰며 천정을 올려보고 있었다.
“재만 남았군.”
건우가 중얼거리며 살짝 손을 내밀어 영기를 흘렸다.
파삭!
그 순간 야차족 수사의 몸이 가루가 되어 그 자리에 허물어졌다.
- 이미 천겁뢰에 당해서 아무것도 남지 않은 상태였군요.
“그래. 그대로 두느니 차라리 이렇게 정리를 해 주는 것이 좋겠지.”
건우가 다시 소매에서 작은 옥함을 꺼내 야차족 수사의 흔적을 옮겨 담았다.
그리고 그 옥함을 야차족 수사가 앉아 있던 자리에 던져 놓았다.
대신에 그 주변에 떨어져 있던 옥대 하나와 공간낭 하나를 당겨왔다.
장례를 치러준 대신에 야차족 수사의 유산을 취하기로 한 것이다.
“흐응! 아서!”
그 때였다.
갑자기 연꽃 선자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건우의 손에서 옥대가 모습을 감추었다.
건우는 깜짝 놀라 옆에 나타난 연꽃 선자를 바라봤다.
“이건 네가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야.”
연꽃 선자가 옥대를 자신의 허리에 두르며 말했다.
건우는 아직 그 옥대의 정체조차 파악하지 못한 상태라 호기심이 일었지만 아무런 반발도 하지 않았다.
“왜 말이 없느냐? 억울하지 않으냐?”
그런 건우에게 연꽃 선자가 물었다.
“선자께서 헤아려 하시는 일인데 우둔한 제가 무엇을 알고 억울해하겠습니까. 그저 연유라도 알려주시면 답답함은 가실 것 같습니다.”
“호호호홋, 역시 말을 예쁘게 하는 아이라니까. 그래, 성령기가 되었다고 주제를 모르면 안 되는 거지. 아, 그래 나는 유정정(瑜靜鼎)이라 한다. 네가 성령기가 되면 이름을 알려주겠다 했었지?”
“네, 유 선자님.”
“그래 일단은 그리 부르면 되겠네. 그리고 이 옥대는 원래 내 것인데 고태(高泰)가 빌려갔던 것이다. 그러니 내가 회수하는 것이 옳지. 뭐, 이리저리 망가진 것이 많아서 고치려면 손해가 막심하겠다만.”
“그렇습니까.”
“그래, 그러니까 억울해 할 필요는 없다는 거다. 게다가 너도 여기까지 오는 동안 얻은 것이 적잖을 테니 마냥 손해랄 수도 없지. 안 그러냐?”
“물론입니다. 덕분에 봉인과 금제에 대해서 크게 눈을 떴습니다.”
“흐응. 그렇지? 그러라고 내가 너를 여기 보냈지. 그런데 아이야.”
“네? 선자님.”
건우는 갑자기 온도가 확 떨어진 연꽃 수사의 부름에 바짝 긴장하며 대답했다.
“어찌 이렇게 빨리 금제를 뚫고 여기까지 왔지? 게다가 성령기에 오른 것도 이상하구나.”
연꽃 선자가 건우의 비밀을 캐물었다.
그 물음에 건우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 고태(高泰) 공역궁(空逆宮) 폐허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