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환장 통수 선협전-242화 (242/4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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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족해? 그럼 채워야지. >

백 여 년 후.

금제를 품은 문자와 문양들이 복잡하게 얽혀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 겹의 투명한 막.

삼두육비의 거인 형상을 하고 그 앞에 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는 건우에게 루야가 의념을 전했다.

- 여기 금제를 보면 꼬리를 문 뱀, 아니면 뫼비우스의 띠, 뭐 그런 게 떠올라요.

이곳의 금제가 스스로 복원되는 기능이 뛰어난 것을 빗대어 하는 말이었다.

“그래도 얼마 전부터는 새로 생성되는 술법진 보다 없애는 숫자가 더 많으니까 결국 우리가 이기는 싸움이 될 거야.”

- 뭐, 그건 불개미들의 수가 늘어서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는 금제의 수가 늘어난 덕분이죠. 하지만 화의모의 소화 능력이 빨리 늘지 않은 것도 문제 아니에요?

“억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서 시간 이외엔 답이 없으니까.”

건우가 아공간에서 웅크리고 있는 화의모를 의념으로 훑어보며 말했다.

지금도 화의모는 일개미들이 물어온 금제를 받아먹고 그것을 소화시키느라 잠이 들어 있는 상태였다.

그런 화의모의 크기는 이제 어지간한 대형견보다 커 보였다.

이곳에 도착했을 때 손톱 크기였던 것을 생각하면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성장을 한 것인지 놀라울 정도다.

하지만 사실 그런 화의모의 성장은 정상적이지 못한 면이 없잖아 있었다.

태령기 완경의 수사가 만든 이곳의 금제는 화의모에게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포식을 넘은 폭식의 밥상이 되어 주었다.

그 덕분에 화의모는 먹는 것보다 소화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지금 화의모의 커다란 체구도 절반 이상은 소화되지 않은 음식을 저장하느라 늘어난 부분이라고 봐야했다.

- 그게 좀 걱정이기는 하죠. 이러다간 결국 더 이상 금제를 먹지 못하게 될 거 같지 않아요? 그리고 그렇게 되면 금제를 처리하는 속도가 줄어들게 될 거고, 저 봉인 금제의 막이 다시 회복되어 버릴 수도 있어요.

“그러면 하는 수 없이 내가 극멸기를 이용해 도와야지. 네가 도와주면 가능하잖아. 그럼 현상 유지는 할 수 있겠지.”

- 지금까지 금제를 처리한 순서를 제가 모두 저장해 뒀으니 불개미가 일을 못해도 그 순서에 따라서 건우 님이 직접 금제를 지우시겠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지. 그렇게 금제의 복원을 늦추면서 화의모가 깨어나기를 기다리면 되겠지.”

- 화의모가 깨어나면 지금보다는 훨씬 많은 양을 먹어 치울 수 있을 거고, 일개미의 수도 늘어나겠군요?

“처리할 수 있는 금제의 수준도 높아지고 속도도 빨라겠지.”

여왕이 성장하면 더 많은 불개미를 거느릴 수 있고, 처리할 수 있는 금제의 수준도 높아진다.

- 어쩌다 보니 화의모만 복 터진 꼴이 되었네요.

“처음 금제 하나를 먹기까지 고생이 좀 있었지만, 그 뒤로는 네 말이 맞지.”

고작 축기기 수준의 불개미 여왕이 처음부터 이곳에 있는 금제를 먹어치울 수는 없었다.

그래서 최소한의 기준을 충족하기 위해서 한동안 건우가 화의모의 이유식으로 단계별로 저급한 금제들을 만들어 줘야 했다.

극멸기를 이용해서 금제를 뚫어 보려다 그것이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는 불개미가 유일한 해결책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화의모를 성장시켜 첫 금제를 갉아먹게 한 후에는 사실상 시간의 흐름만이 필요했다.

지금도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기다리기만 하면 결국 화의모가 부리는 불개미들이 이곳의 금제를 모두 뚫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시간만 있으면 반드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확정적인 일이었다.

다만 건우가 그 시기를 당기고 싶은 욕심에 이리저리 애를 쓰고 있었을 뿐.

파지지지직! 파칫!

“어엇! 이런!”

건우가 그런 생각을 하며 극멸기를 운용하다가 안타까운 탄식을 터트렸다.

잠깐의 실수로 건드리지 말아야 할 부분을 극멸기로 지워버린 것이다.

그렇게 되자 곧바로 금제의 막이 반응을 보이며 영기가 급격히 움직여 금제들을 복원했다.

“쯧, 함정이었군. 같은 진법 문양과 술식이 나오다가 후반부가 달라지는 거였어.”

건우가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가부좌 상태로 미끄러지듯 뒤로 물러났다.

그는 세 개의 막과 그 뒤에 있는 석벽이 한 눈에 들어올 정도로 물러난 다음 손뼉을 쳐서 손을 터는 시늉을 했다.

“한 번 실수로 8년 쌓은 탑이 무너졌네.”

순서에 맞춰서 금제를 처리하지 않으면 지금처럼 순식간에 폭발적인 복원이 이루어진다.

더 심한 경우에는 강력한 반격 술법이 터져 나올 때도 있다.

그럴 때에도 당연히 지웠던 금제들이 다시 복구된다.

물론 완전히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해체 과정의 커다란 마디 하나 정도는 복구 된다고 봐야 한다.

지금 건우의 작은 실수가 바로 그런 상황을 만들었다.

“아직도 많이 모자라. 이런 실수를 하다니.”

- 건우 님이 모자란 것은 아니죠. 여긴 태령기 완경의 수사가 만든 봉인 공간이라고요. 어지간한 태령기 수사라도 건우 님처럼 하지는 못할 걸요?

“내가 태령기 완경 정도는 못되어도 입령기 수준을 넘기긴 했겠지. 그런데도 지금 같은 실수를 하는 게 문제지만.”

- 그건 실수라기 보다는 건우 님의 경지가 낮아서 그런 거잖아요. 아, 이참에 차라리 성령기에 도전해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루야가 문득 그 동안 미뤄두고 있었던 승경 문제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 문제는 건우도 요즈음 고민하고 있던 것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태령기 수사의 금제를 상대하다보니 영기나 극멸기는 물론이고 의념까지 부족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역시 그래야 할까? 성령기가 되면 여길 뚫는 것도 조금 더 쉽겠지?”

- 그야 당연하죠. 이미 건우 님의 입령기 완경 경지도 안정된 상태니까 성령기 승경에 도전해도 괜찮을 거고요.

“그렇기는 하지. 하지만 좀 아까운데?”

건우가 불개미들이 달라붙어 있는 막을 쳐다보며 턱을 쓸었다.

여기서 불개미를 철수시키면 저 막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원래 상태로 돌아갈 것이다.

- 불개미들을 데리고 갈 이유가 있나요? 그냥 여기 두면 되잖아요.

“그렇긴 하지. 여긴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으니까.”

- 그리고 솔직히 이대로 가면 첫 번째 막은 어떻게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 뒤로는 건우 님의 역할이 줄어들게 될 거예요. 일은 불개미들이 거의 다 하게 될 게 뻔하죠.

“입령기 수준으로는 뒤로 갈수록 할 일이 없어질 거란 소리지? 하고 싶어도 못 하는 거겠지만.”

건우도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었지만 막상 루야에게 직접 들으니 입맛이 썼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걸 외면할 수도 없는 일.

“좋다. 그럼 절벽으로 가서 수련 동부 하나를 파 보자.”

그는 고민 끝에 결국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부양도를 불러냈다.

그리고 떠나기 전에 화의모를 아공간에서 꺼내어 자신이 있던 곳에 내려놓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어차피 이곳엔 어떤 위험도 없었다.

위험이 있다면 금제를 잘못 건드려 사달이 나는 것이지만 불개미는 절대 그런 문제를 만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곳에 두면 알아서 금제를 먹고 성장할 것이다.

화의모도 건우가 전하는 의념을 받고 그 뜻을 수긍했다.

다만 오래 떨어져 있는 것이 불안한 듯 했지만 몇 잠을 자고 나면 볼 거라는 건우의 사탕발림에 쉽게 넘어갔다.

그렇게 화의모를 금제의 중심에 남긴 건우가 부양도를 출발시켰다.

봉인 공간의 중심인 이곳으로 오는 것은 어려웠지만 멀어지는 것은 아무 문제도 없었다.

건우는 부양도를 타고 곧바로 봉인 공간의 외벽인 절벽으로 향했다.

부양도가 이동하는 동안 건우는 차분하게 승경 시험을 대비할 방도를 궁리하며 시간을 보냈다.

굳이 둔술을 쓰지 않고 느린 부양도를 이용하는 것도 그런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절벽에 닿은 건우는 곧바로 수련 동부를 파고 승경 준비에 들어갔다.

*   *   *

진극멸기를 흡수해서 경지를 끌어올리는 것은 영기를 수련하는 수사들이 경지를 올리는 것에 비해서 쉬운 편이다.

건우는 화신기 완경에서 입령기에 오를 때에 금강패갑공을 통한 영기 수련으로 경지를 올렸다.

하지만 그 후 중기, 후기, 완경에 이르는 과정은 모두 진극멸기를 흡수해서 통과했다.

그리고 사실 그 과정은 무척 쉬웠다.

고작 100년 만에 입령기 초기가 완경까지 오른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입령기 완경에서 성령기가 되는 것은 진극멸기 흡수를 통한 것이라도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각 경지의 초기에서 중기, 후기, 완경에 이르는 시험도 절대 가볍게 볼 수 없는 것이지만 그 시험을 다 합쳐도 완경에서 다음 경지의 초기로 가는 것과 비교할 수는 없다.

당연히 진극멸기 흡수를 통한 것이라도 성령기에 오르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라 단단히 각오를 한 것이다.

그 때문에 그나마 건우가 가지고 있던 수련 자원과 진법 재료, 연단 재료들이 바닥을 드러냈다.

승경 시험에서 떨어질 천겁뢰를 막기 위해 쓸 수 있는 모든 자원을 끌어 쓴 것이다.

수련 동부를 파고, 승경 준비를 마치는데 또 5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렇게 준비를 마친 후, 그는 드디어 성령기에 오르기 위한 도전을 시작했다.

나타결공법을 극성으로 끌어 올린 그는 삼두육비의 형상으로 여섯 개의 손을 아랫배와 명치, 가슴에 마주잡았다.

그리고 아공간에서 토기 항아리처럼 생긴 멸기함분을 꺼내 허공에 띄운 후 진극멸기 흡수를 시작했다.

그 멸기함분은 유혼결(幼魂結)로 만든 분혼을 멸계로 보낼 때에 선태 멸기함분에서 진극멸기를 나누어 남겨 놓은 것 중에 가장 용량이 큰 것으로 성령기 도전을 위해 아껴뒀던 것이었다.

스스스스습 스스습 스습 스습!

삼두육비의 건우가 한 번 호흡을 할 때마다 멸기함분에서 흘러나온 진극멸기가 호흡에 딸려들어갔다.

그렇게 흡수된 진극멸기는 곧바로 건우의 극멸기와 합쳐지며 입령기 완경의 벽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경지가 오르는 것을 막고 있는 무형의 벽은 의념의 크기나 강함은 물론이고 극멸기의 양과 밀도의 증가도 가로막고 있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그 벽만 허물 수 있다면 허물을 벗고 몸집을 부풀리는 생명체처럼 모든 것을 성장시킬 수 있다.

그것이 곧 경지의 상승이다.

하지만 원래 그 과정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의념을 확장하고 강화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깨달음이 필요하고 더 밀도 높은 영기나 극멸기를 품기 위해서는 육체의 진화가 필요하다.

그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어야 감히 승경을 꿈꿀 수 있는 것인데, 진극멸기는 수사가 벽을 허무는 수고를 덜어준다.

게다가 벽을 허문 이후에 그 경지를 수습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는데, 비유하자면 수사가 세워야 할 건물의 뼈대를 대신 세워주는 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진극멸기를 이용한 승경이 영기 수련 수사의 그것과 달리 편하고 쉽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스스습 스습 습습습.

쩌저저저적!

3년 후, 건우 앞에 떠 있던 항아리 모양의 멸기함분이 불길한 소리를 내며 쩍쩍 갈라졌다.

그리고 그렇게 갈라진 멸기함분의 조각들은 다시 올올이 풀려서 진극멸기가 되더니 건우의 호흡에 딸려 들어갔다.

우르르르르르릉!

그에 맞춰서 건우가 있는 동부의 입구에 짙은 보랏빛 먹구름이 끼더니 샛노란 뇌전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먹구름 속에서 천둥소리가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동부 입구를 통해서 안쪽 깊은 곳에 가부좌를 하고 있는 건우에게도 전해졌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건우는 꼼짝도 않고 심상 세계에서 허물어지고 있는 승경의 벽을 관조하고 있었다.

번쩍! 파지지지직! 짜자자자작!

그 때, 동부 밖에 있던 보랏빛 구름에서 한 가닥 샛노란 뇌전이 터져 동부의 통로를 따라 건우에게 쏘아졌다.

하지만 그 한 가닥의 뇌전은 동부의 전실에서 진법에 막혀서 버둥거리다가 흩어졌다.

그렇게 건우의 성령기 승경을 막으려는 천지 법칙의 시험이 시작되었다.

< 부족해? 그럼 채워야지.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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