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환장 통수 선협전-236화 (236/499)

(235)

< 연꽃이 열렸다 >

해금시(解禁匙).

“보통 금제를 하나만 쓰는 경우는 거의 없지. 여러 개의 금제를 중첩하는 것이 보통이라 이 열쇠는 그다지 가치가 없어.”

건우도 경매에서 해금시를 수령한 후에야 그 맹점을 알아차렸다.

해금시가 금제 하나는 무조건 뚫어준다는 말에 중첩된 금제 무더기를 하나로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개별 금제 하나를 대상으로 하는 일회성 소모품이었을 줄이야.

“그 대행수 정치결이 수작을 부렸지. 분명히 해금시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넘어갔고, 다른 수사들의 참견도 없었어. 아마도 내가 있던 밀실에만 다른 수사들의 이야기가 전해지지 않게 했을 지도 모르지. 해금시를 내 놓은 것이 부금상련의 행상단 단주였을 수도 있고.”

건우는 해금시를 눈앞에서 돌려보며 중얼거렸다.

“뭐, 속은 내가 잘못이지. 당시에 조금 더 신경을 썼다면 해금시의 문제점을 파악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르는데 상급 영석 십만 개에 냉정을 잃은 것이 잘못이지.”

지난 일이지만 다시 한 번 반성을 하는 건우였다.

그러다가 다시 한 번 피식 웃고 마는 건우.

“그래도 이렇게 화가 복이 되었으니 뭐, 새옹지마가 별다르겠어? 이번 경우가 그런 거지.”

건우는 조금 전보다 훨씬 더 밝은 웃음을 지으며 한 손에 해금시를 들고 다른 손에 든 연화경의 손잡이 끝으로 가져갔다.

그렇게 연화경의 연꽃과 해금시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지자 건우가 해금시에 의념을 불어 넣었다.

해금시로 하여금 연화경 연꽃의 금제를 풀도록 의념으로 명령을 내린 것이다.

까라라라라라라라랑!

“으음.”

그 순간 시뻘겋게 녹이 슬어 있던 해금시가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붉은 쇳가루로 바스러졌다.

건우는 조금 놀라긴 했지만 경거망동하지 않고 붉은 쇳가루로 변한 해금시가 연화로 스며드는 것을 지켜봤다.

그리고 곧 의념을 이용해서 연화경의 금제를 살폈다.

“이건 도대체 뭐지?”

건우가 연꽃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지켜보다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붉은 쇳가루.

그것이 연꽃을 가두고 있는 금제에 달려들어 금제의 구성 요소를 갉아 먹고 있었던 것이다.

“쇠가 아니라 충(蟲)이었군. 도대체 이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날개 달린 의(蟻:개미)처럼 보였다.

다만 머리, 가슴, 배로 이루어진 개미와 달리 머리와 가슴만 있고 배가 없는 모양이라 다르게 보면 거미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라 건우도 정체를 알 수는 없었다.

그는 호기심이 동해 벌레 중에 하나라도 따로 챙기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그런 욕심을 꾹꾹 눌러 참았다.

해금시는 영계의 어떤 고명한 금제라도 해결할 수 있다는 신비를 담은 것으로 꽤나 이름이 알려진 것이라 했다.

그런 해금시이니 이런 광경을 본 이들이 건우 외에도 얼마나 많을까.

그럼에도 해금시가 귀한 것은 벌레를 잡아 비밀을 푼 이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잡아서 어찌할 수 있는 녀석들이 아니란 소리겠지. 그리고 당장 급한 것은 금제를 푸는 것이야. 혹시라도 방해가 될 짓을 할 수는 없지.’

자그마치 2백 년이나 걸린 일이 이제 끝을 보고 있다.

그런데 호기심 때문에 그 일을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건우가 붉은 곤충을 살피는 동안 결국 그것들은 금제를 깔끔하게 지워냈다.

우우우우우웅!

그리고 금제가 사라진 그 순간 연화경이 강력한 영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건우는 앞으로 일어날 변화를 예측할 수 없었기에 곧바로 미리 준비해 둔 진법과 술식을 발동시켰다.

금제가 풀린 후에 있을 혹시 모를 위험을 고려하여 준비해 둔 것이었다.

물론 상황이 급할 때에는 최후의 수단으로 아공간에 몸을 피할 준비도 해 두고 있었다.

파스스스스슷!

“어라?”

그 순간이었다.

연화경이 변화를 일으키는 중에 붉은 벌레들이 무리를 지어 나오더니 어디론가 날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으음?”

건우는 마치 본능처럼 봉인 술법이 가득 담겨 있는 옥함을 날려 그 벌레들을 담았다.

물론 그 옥함으로 벌레를 가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럴 수 있었다면 어찌 해금시의 비밀이 아직도 풀리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짧은 순간이라도 벌레들을 상자에 가두는 것이 중요했다.

건우는 그 상자를 곧바로 아공간에 던지고, 그 상자만 따로 공간을 격리하여 보관했다.

“아, 바쁘네. 바빠!”

그렇게 벌레를 아공간에 잡아 넣은 후, 건우는 그것들이 어쩌는지 세밀히 살펴야 했다.

그런데 막상 눈앞에서는 연화경이 극적인 변화를 만들어 내는 중이라 그 쪽도 신경을 써야 했다.

연화경은 강렬한 영기를 뿜어내며 둥근 거울 몸체가 부풀어 올라 넓이 삼장 가량의 연못으로 변했다.

그리고 손잡이는 줄어들더니 연꽃이 그 연못 위에 놓이게 되었는데, 연꽃도 덩치가 커져서 작은 정자 크기가 되었다.

“으으음.”

하지만 변화는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연못 중앙에 위치한 연꽃의 꽃잎이 조금씩 벌어지며 만개하기 시작했다.

꽃잎이 하나하나 펼쳐질수록 점점 밝고 상서로운 서광이 주위를 가득 밝히기 시작했다.

건우는 그 서광을 접하는 것만으로 몸이 정화되는 느낌을 받았는데, 실제로도 몸속의 기운이 한결 순수해 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신기하네. 영기는 물론이고 혼돈기와 극멸기까지 깨끗해지고 있어. 이 빛은 기운의 종류와 상관없이 순수함만 따지는 모양이군.’

건우는 그런 생각을 하며 벌어지는 연꽃을 조용히 지켜봤다.

아직까지는 위험해 보이는 요소는 보이지 않았다.

‘그나저나 저 연못도 실제로는 5만 리 지름의 거대한 호수일 텐데, 어찌 그런 공간을 저리 응축시켜 놓을 수 있는지 궁금하군.’

건우는 연꽃이 피기를 기다리며 이전부터 궁금했던 문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있었다.

자신 역시 아공간에 광대한 넓이의 공간을 가지고 있었고, 거기에는 일반적인 수도계의 식생이나 환경이 형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의념공간인 아공간도 연화경처럼 축소시킬 재주는 없는 건우였다.

그것은 과거 금은연리 옥함을 만들었던 극금문의 비전을 바탕으로 지금까지 금제와 봉인에 대한 지식을 남 못지않게 쌓은 그로서도 불가능, 불가해의 영역이었다.

게다가 지난 200년 동안 건우는 연화경의 금제와 씨름하며 그만큼 견문이 넓어진 상태였다.

그럼에도 호수를 축소시켜 연화경을 만든 방법은 감도 잡지 못했다.

그것은 연화경을 감싸고 있던 금제들과는 또 다른 영역의 술법이었던 까닭이다.

‘배울 수 있으면 좋겠지. 지금의 변화가 끝나면 그 비밀을 알 수 있을까?’

건우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다시 연꽃의 변화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그렇게 다시 몇 달의 시간이 흐르고 연꽃에서 뿜어지던 서광마저 빛을 잃을 즈음, 드디어 연꽃의 마지막 꽃잎 다섯 장이 펼쳐졌다.

분홍색 연꽃잎 안에 노란색과 하얀색이 어우러진 수술이 가득하고 그 중앙에 역원뿔 모양의 꽃턱이 있었다.

원래 그 역원뿔 모양의 꽃턱은 나중에 꽃잎이 진 후에 열매가 맺히는 부분인데 지금 그 곳에는 한 여인이 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었다.

‘역시! 안에 수사가 있었어. 그것도 경지가 높은 고계 수사!’

건우가 그 여성 수사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움찔하며 긴장했다.

언제 만들어졌는지 연원조차 알 수 없는 연화경, 그 안에 금제로 봉인되어 있던 수사가 아닌가.

당장 건우의 감각으로는 여인의 경지를 가늠조차 할 수가 없었다.

‘아름답군.’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지금 건우가 보고 있는 여인은 그가 지금껏 봤던 그 어떤 수사들 보다도 아름다웠다.

‘어찌 저리 맑고 투명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것은 피륙의 아름다움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옅은 분홍색과 흰색이 잘 어우러진 경장을 입은 여성 수사는 가까이 대하는 것만으로도 몸과 마음이 정화되는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건우는 그것이 연꽃이 개화하는 백일 동안 이어졌던 서광과 같은 기운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기운 때문에 여인이 더욱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임도 알았다.

‘굉장하군.’

하지만 그런 여성 수사의 아름다움에 건우가 정신을 빼앗기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애초에 그 아름다움은 매혹이나 유혹과는 거리가 멀었다.

차라리 존중이나 경외라면 또 모를까.

“으음.”

한 순간 건우가 낮은 신음 소리를 냈다.

그것은 여성 수사가 눈을 떠 건우와 눈을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여성 수사는 건우의 눈을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건우는 그 눈빛을 받는 순간 낮은 신음소리만 내고는 그 후로 손끝 하나 움직이지 못하고 굳어버렸다.

‘겨우 눈빛을 받았을 뿐인데 꼼짝도 못하다니! 게다가 지금 저 수사는 내게 적대적인 것도 아니야. 그저 바라볼 뿐인데 어찌 이렇게······.’

기가 막힐 일이었다.

입령기 완경이 되어서 이제 조금 어깨를 펴 볼까 했는데 가벼운 눈빛에 제압이 되는 꼴이라니.

건우는 내심 자괴감이 들 정도였다.

“아빠?”

“커억!”

한동안 자신을 바라보던 여성 수사의 말 한 마디에 건우가 놀라움을 이기지 못하고 숨통 막히는 소리를 토해냈다.

‘아빠라니! 미친!’

“아닌가? 그럼 오빠?”

“무, 무슨 말씀입니까? 어찌 제가 선자(仙子)님의 오라비가 될 수 있겠습니까.”

이어진 말에 건우가 깜짝 놀라며 부정했다.

건우는 경직되었던 자신의 몸과 마음이 풀려난 것을 그 순간에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아빠도 아니고, 오빠도 아니다? 거기에 나를 선자라 부르는 것을 보면 아들이거나 혈육도 아니겠구나?”

여성 수사가 건우를 보며 물었다.

“그,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네게서 이토록 친근함이 느껴지는 것이냐?”

건우의 대답에 여성 수사가 다시 물었다.

하지만 그 물음에는 건우도 내 놓을 답을 알지 못했다.

난처한 표정을 짓는 건우, 그를 향해 여성 수사가 다시 말했다.

“으음. 너는 누구지? 그리고 나는 누구고? 여긴 어디냐?”

‘아, 이건 또 무슨?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이 익숙한 느낌인데? 아니, 그게 아니지.’

건우는 살짝 고개를 저어 떠오르는 잡념을 털어내며 여성 수사를 바라보았다.

“선자, 저도 선자님이 어떤 분인지 모릅니다. 다만 지금 상황을 설명드리자면, 선자께서는 연화경에 봉인되어 계셨습니다.”

“연화경?”

“5만 리 크기의 호수를 축소시켜 지금 앉아 계신 연꽃의 자양분으로 삼은 법보를 그리 불렀습니다.”

“아, 뭔지 알겠구나. 내가 그것을 만들었지. 음, 그래 떠올려보면 내 스스로 생연화에 나를 봉인했었구나. 그럼 그것을 풀어준 것이 너였다는 것이냐?”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설명을 드리자면······.”

건우는 경매에서 연화경을 낙찰받은 것부터 시작해서 그녀가 깨어난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차분하게 설명했다.

여성 수사는 조용히 건우의 이야기를 끝까지 경청했다.

“그렇구나. 결국 네가 나를 금제에서 벗어나게 해 준 것은 사실이구나. 비록 첫 단추를 잘못 풀어서 고생을 자초하긴 했다만.”

“그, 그게······.”

“아, 걱정할 것은 없다. 지금의 내 상태가 정상적이지 않은 것은 네 탓이 아니다. 이것은 천지 법칙을 거스른 것에 대한 벌일 뿐이다.”

“그렇다면 정말 다행스런 일입니다.”

“어쨌거나 내가 너에게 큰 도움을 받았구나. 고마운 일이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은혜를 입었으면 당연히 보답을 해야겠지. 하지만 지금은 내 급한 상황부터 추슬러야 할 것 같구나. 네가 이해를 하거라.”

“이를 말씀이겠습니까. 선자님의 옥체를 수습하는 것이 당연히 우선이지요.”

“말을 예쁘게 하는구나. 예뻐.”

“네?”

“흐음. 아니다. 네게는 나의 기운이 가득하니 네가 어디를 가든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내가 떠나더라도 섭섭히 여기지 말아라.”

“알겠습니다. 저는 상관치 마시고 선자님의 뜻대로 하십시오.”

“흥!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금방 다시 오마.”

무슨 이윤지 콧바람을 뿜은 여성 수사는 연못의 물을 휘몰아 소용돌이를 만들어 연꽃을 휘감더니 어느 순간 허공의 한 점으로 빨려들 듯 사라졌다.

털썩!

여성 수사가 사라지가 건우는 저도 모르게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짧은 순간 심력의 소비가 그만큼 컸던 것이다.

“다시 온다고?”

건우는 여성 수사의 말을 떠올리며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 연꽃이 열렸다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