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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 가려운 데를 이렇게 긁어 준다고? >
“파견이라 했습니까?”
건우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소식을 가지고 온 입령기 중기의 수사를 보며 되물었다.
“그렇네. 이번에 혼돈역이 발견되고 그곳에 파견대를 보내기로 했네. 거기에 우리 경의당(庚醫黨)의 수사도 지원을 하라는 명이 내려왔네.”
“그렇데 어째서 제가 가야 하는 것입니까?”
“자네가 경의당에 온 후로 동부 밖을 나선 적이 있었던가?”
“그게 중요합니까?”
“크음. 어르신들이 사람을 뽑을 때에 익숙한 이름을 뽑을 것 같은가 아니면 그렇지 않은 이름을 뽑을 것 같은가?”
“그 말씀은 제가 사교성이 없어서 이번 파견대에 이름이 올랐다는 말씀이군요?”
“자네뿐만이 아니라 양약성에서 온 세 명이 모두 함께 가는 것으로 결정이 났네.”
“결정이라, 알겠습니다. 이의가 있다고 해도 받아들여질 것도 아닌 듯 보이는군요.”
건우는 제 스스로 끓어 올랐던 열을 식히며 말했다.
그런 건우의 태도에 소식을 전하던 수사도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부당하다며 한동안 버틸 것이라 예상했는데 의외로 쉽게 수긍한다 싶었던 것이다.
“행여나 다른 생각은 하지 말게. 자네가 도맹을 탈하게 되면 양약성의 오련맹이 힘겨워 질 것인즉.”
“모르시는 모양인데, 저는 오련맹에 애착이 없습니다. 객경 장로로 들어가 맹주 경합을 통해 맹주가 되자마자 이곳으로 끌려왔는데 무슨 애착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걱정하시는 일을 벌일 생각도 없으니 안심하십시오. 혼돈역이라······. 가라면 가야지요.”
건우는 그렇게 말을 하고는 수사를 돌려보냈다.
그리고 간단하게 동부를 정리했다.
대외적으로 보일 공간낭을 꾸며 챙기고, 나머지는 아공간에 밀어 넣는 것으로 짐정리는 가볍게 끝이 났다.
그리고 출발 시기가 될 때를 기다리며 다시 무명공 수련을 시작했다.
- 쌍두단미영원 진혈의 기운이 크게 성장했네요. 이제 나타결공법을 입령기로 성장시킬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건우에게 루야가 말을 걸었다.
증장성에 온 것이 벌써 반 백 년이 넘었다.
그 사이에 건우는 경의당에서 요구하는 하급 영단의 생산을 루야와 극화조에 맡기고 자신은 무명공 수련에 힘썼다.
그 결과 얼마 전에 쌍두단미영원의 진혈이 크게 성장하는 쾌거를 이뤘다.
후반부가 보강된 무명공은 이전보다 훨씬 수준 높은 공법이 되었다.
그 덕분에 무명공으로 익힌 공법들이 발전할 가능성이 넓게 열렸다.
하지만 건우는 그 동안 오로지 쌍두단미영원의 진혈에만 몰두했고, 드디어 성과를 얻은 참이었다.
그런데 이런 때에 혼돈역으로 가는 파견대에 참가하라니!
‘일이 술술 풀리는 거지.’
건우는 희죽 웃었다.
- 아무튼 새가슴도 아니고. 그냥 아공간에서 진극멸기를 흡수해도 될 거 같은데요.
루야가 그런 건우를 보며 조금은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쌍두단미영원의 진혈이 성장하고 그를 바탕으로 하는 나타결공법을 입령기까지 끌어 올릴 수 있게 되었지만 건우는 진극멸기를 흡수하는 것은 망설이고 있던 중이었다.
사실 나타결공법을 입령기 수준으로 올리는 것은 굳이 진극멸기가 필요하지 않았다.
나타결공법은 영기와 혼돈기, 극멸기를 함께 쓸 수 있다.
그러니 입령기 수준의 영기라면 그것을 이용해 나타결공법을 입령기로 끌어 올리는 것이 가능하다.
그 뒤에 빠른 경지 상승을 위해서 진극멸기를 흡수하면 되는 것이다.
‘지금은 진극멸기를 흡수할 필요가 없지. 나타결공법을 입령기까지 끌어 올리는데는 지금 내 경지의 영기로도 충분하니까. 진극멸기는 그 다음에 필요한 거야.’
- 그게 아니어도 쫄아서 이곳에서는 진극멸기 흡수를 안 했을 거잖아요.
‘뭐, 그야 그렇지. 들키면 어쩌라고?’
진극멸기 흡수를 아공간에서 행할 계획이지만 증장성에 있을 지도 모를 태령기 수사들이 무서웠다.
성령기만 되더라도 아공간을 여닫는 것을 알아차릴까 염려가 되는데, 태령기라면 대번에 꿰뚫어 볼 것 같았다.
게다가 단순한 흡수가 아니라 경지를 중기나 후기로 올리는 승경을 할 때에는 아공간 밖에서 일을 진행해야 한다.
그걸 이곳 수련동에서 하다가는 영락없이 다른 수사들에게 들키고 말 것이다.
건우가 아직 진극멸기 흡수를 하지 못한 것은 나타결공법을 입령기까지 끌어 올리지 못한 이유도 있지만, 진극멸기 흡수를 들킬 것을 걱정한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때에 마침 혼돈역으로 가라고 등을 밀어주니 이 아니 좋을까.
그곳이라면 영기와 혼돈기, 극멸기가 서로 뒤엉켜 있는 곳이라 아공간에서 진극멸기를 다룬다 하더라도 들킬 가능성이 극히 낮아진다.
그래서 겉으로 투덜거리면서도 속으로는 쾌재를 올렸던 참이었다.
***
파견대의 규모는 건우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게다가 건우가 포함된 파견대는 2차 파견대로 이미 혼돈역에 들어가 있는 수사들도 있다고 했다.
“이보시오 오련맹주.”
경사궁의 궁주인 민운도가 건우가 있는 객실 문 밖에서 기척을 내었다.
건우는 나타결공법 운공을 하던 중에 경사궁주의 방문에 수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건우가 몸을 일으켜 슬쩍 창밖을 내다봤다.
보이는 것은 흰 구름과 거칠게 뒤섞인 천지영기의 파동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건우가 타고 있는 거대 비행 법보 운승대선(雲乘大船)은 그렇게 거칠게 흐르는 천지영기의 흐름을 타고 빠른 속도를 내는 종류였던 것이다.
‘아직 목적지에 닿으려면 2년은 더 남았을 텐데, 어쩐 일로 경사궁주가 나를 찾았지? 보아하니 백환문주 조여지도 함께 온 모양인데.’
건우는 의문을 가지며 손가락을 튕겨 자신의 방에 펼쳐 두었던 금제와 결계를 잠시 거두었다.
“들어들 오시지요.”
그리고 밖에 있는 이들에게 방문을 허락했다.
이 운승대선은 배 모양의 초거대 영기(靈機)로 돛대와 돛은 없는데 선체가 커서 그 안에 십여 개의 층이 있고, 곳곳에 공간 확장이 되어 산과 계곡까지 들어 있는 보물로 부금상련(富金商聯)에서 내어준 것이라 했다.
양약성 출신의 세 연단 수사는 그 중에 운승대선의 선미 쪽 5층에 3층 전각 규모의 객실을 받아 함께 나누어 쓰고 있었다.
백환문의 조여지와 경사궁의 민운도가 출발할 때부터 건우와 함께 객실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건우는 출발 때 인사를 하고는 그 뒤로 자신의 거처에서 수련에만 몰두하여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백환문의 조여지와 경사궁의 민운도는 그런 건우를 어려워하며 거리를 두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전에 집행사자를 따라서 양약성에서 증장성으로 오는 동안에도 건우는 데면데면한 면이 있었다.
누구와도 깊은 교류를 하지 않고 항상 일정한 거리를 두며, 불가근불가원의 선을 그었던 건우였다.
그러니 특별한 일이 없이 건우를 부르거나 하는 것은 조여지와 민운도에게도 부담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객실에 들어온 후에 서로 왕래가 없었던 것인데 두 수사가 건우를 찾아 왔으니 호기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이오. 가끔 나와서 서로 환담이라도 하고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너무 수련에만 몰두하는 것이 아니오?”
백환문의 조여지가 먼저 인사를 했다.
이름이나 외모로 보면 분명히 여성 수사이지만 그녀는 항상 남자같은 언행과 복장을 즐겨했다.
“의논할 일이 있어서 건우 수사의 청정을 깨트렸소이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이번에는 경사궁의 민운도가 손을 모아 내밀며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건우는 슬쩍 몸을 비틀어 인사를 흘리며 말했다.
“그런 일로 그리 과한 예는 부담일 뿐입니다. 뭔가 용건이 있으니 찾으신 것이겠지요.”
말은 부드러우나 합당하지 않은 용건이 아니기를 바란다는 뼈가 들어 있는 말이었다.
“물론입니다. 객실에만 계시니 외부 소식을 모르실 것 같아서 찾아온 것입니다.”
“외부 소식이라니요? 이 비행법보가 천지 영기의 거친 흐름을 타고 날아가는 중인데, 외부의 소식이 들어올 일이 있답니까?”
건우가 민운도의 말에 깜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이 운승대선이 천지영기를 타고 움직이는 동안은 그 비행이 너무도 빨라서 외부와의 통신이 불가능하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외부 소식이라니.
“하하하. 그 외부가 아니라 우리 거처 밖에서 일어나는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대선의 규모가 워낙 크니, 가히 작은 나라라 불릴 정도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토벌대 내에서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말입니까?”
건우가 상황을 이해하고 놀람을 가라앉히며 민운도에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이번에 부금상련(富金商聯)에서 경매를 추진한다고 합니다.”
“경매라고요?”
건우는 또다시 놀라고 말았다.
지금 상황에서 경매라니.
“운승대선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니 답답해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그렇다고 천지영기의 흐름 밖으로 나가서 대선의 비행을 멈출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다른 방법으로 수사들의 답답함을 풀어주자는 취지이지요.”
“그 경매 때문에 저를 찾으셨다는 말씀입니까? 경매의 진행을 알려주시려고요?”
건우가 조금 날카로운 눈빛으로 민운도를 노려보았다.
고작 그 정도 일로 자신의 수련을 방해한 것이냐는 책망이 담겨 있었다.
“하하하. 너무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사실 건우 수사나 저, 그리고 여기 조수사도 이만한 경매나 교류회를 구경이나 해 봤습니까? 따지고 보면 경매물을 구경만 해도 수련이 끊긴 가치는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경매를 할 때에는 그 물품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따르는 법이 아닙니까. 모자란 견문을 넓히기에 이만한 기회도 없지 않겠습니가?”
민운도는 그 정도면 충분히 건우의 수련 청정을 깨트릴 가치가 있지 않느냔 듯이 당당하게 말했다.
건우는 그런 민운도의 말을 들으며 살짝 찌푸렸던 인상을 폈다.
“듣고 보니 옳은 말씀입니다. 민 수사께서 저를 배려해 이렇게 찾아 주신 것인데, 제가 너무 무례했습니다. 수련이 중간에 끊겨 예민했던 탓이라 생각해 주십시오.”
건우가 살짝 손을 모아들며 가볍게 사과를 했다.
어차피 수련의 흐름은 끊어진 것이고, 민운도의 말처럼 경매를 보고 배울 것이 많을 수도 있었다.
화를 낸다고 끊긴 수련 흐름이 다시 이어지는 것도 아닐 터, 굳이 언성을 높여 감정을 상할 필요는 없었다.
“다행입니다. 민 수사께서 수사를 찾아간다는 것을 말리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는데 그리 이해를 해 주시니 걱정이 녹아 사라집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조여지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원래 건우를 부르지 말고 그냥 두자는 쪽이었으나 민운도의 적극적인 태도에 밀려 함께 오게 된 상황이었던 것이다.
“아닙니다. 그런데 경매란 것이 어찌 진행이 되는지 알고 계십니까? 이 비행 법보에 타고 있는 수사들의 수만 하더라도 수만 명이 넘을 터인데 말입니다.”
“수가 많기도 하고 격의 차이도 있으니 화신기까지의 인급(人級)과 그 위의 영급(靈級)으로 나누어 경매를 진행한다 합니다.”
“화신기를 기준으로요? 적당한 듯 합니다.”
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그가 화신기였다면 아쉬움과 섭섭함에 몸을 떨었겠지만 입령기이니 화신기의 입장 따위는 멀찌감치 밀어버린 것이다.
“아울러서 내어 놓은 경매물의 급수에 따라서 좌석 배정을 한다고 합니다. 사실 이 민 모가 건우 수사를 찾은 것에 그런 이유도 있습니다.”
“으음? 좌석 배정 말입니까?”
건우가 무슨 말인가 하는 표정으로 민운도를 바라봤다.
그러자 민운도가 조여지와 눈빛을 교환하더니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 셋이 일행이 되어 공동으로 경매물을 내어 놓으면 좌석 또한 같이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건우 수사와 의논하려 한 것입니다.”
“사실 염치없이 건우 수사의 능력에 기대 볼까 하는 사심도 적잖이 끼어 있다고 해야겠지요.”
이번에는 조여지도 ‘이왕 이렇게 된 거’하는 표정으로 시원하게 속을 털어 놓았다.
“그러니까 두 분께서 경매에 내 놓을 괜찮은 물품이 없어서 저를 찾아 오셨다는 말씀이군요?”
건우는 둘의 말에 그다지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지 않았다.
굳이 수련중인 자신을 깨웠을 때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터, 고작 경매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찾아오지 않았으리란 것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게다가 공동으로 경매물을 올린다 하더라도 자신이 낙찰 대가를 모두 받는 것에 문제는 없을 터.
겨우 경매에서 조금 나은 자리를 위해 자신에게 기대 보겠다는 것에 역정을 낼 일이 뭐가 있겠는가.
“그럼 우선 두 분께서 준비하신 물건들이 어떤 것인지 확인부터 해 볼까요? 제가 가진 것이 그보다 못하다면 여기서 먼저 꺼내봐야 손이 부끄러울 뿐이 아니겠습니까.”
건우가 웃는 얼굴로 둘이 가진 패를 먼저 확인하려 들었다.
민운도와 조여지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각자 경매에 내 놓을 물건들을 꺼내 탁자에 올렸다.
건우는 그것을 꼼꼼히 살피며 생각에 잠겼다.
< 어? 가려운 데를 이렇게 긁어 준다고?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