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
< 정이 깊으니 더 아프구나 >
“커어어억!”
혈원은 순식간에 제 의념 영역을 잃고, 동시에 천지 영기의 장악도 놓쳐버렸다.
그런 상태에서 혈원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튼튼한 몸뚱이로 건우의 힘을 견디는 것뿐이었지만 그것이 오래 갈 수는 없었다.
뿌지지지지직! 화르르르르륵!
하지만 오래지 않은 어느 순간 혈원의 몸은 완전히 뭉개지고 이어서 그 몸에서 피어오른 백색의 불꽃에 타올랐다.
혈원은 원래 진혈로 이루어진 몸이라 한계 이상의 열기에 순식간에 불타버린 것이다.
그 속에서 혈원의 영혼이 울부짖었다.
하지만 그 영혼조차 건우는 용서하지 않고 불태워 버렸다.
“네가 여기서 소멸하면 어딘가에서 윤회하고 있을 네 반쪽 영혼이 온전해 지겠지. 네가 소멸하며 나온 기운이 자연스럽게 반쪽을 찾아갈 터이니. 물론 진짜 그런지는 모르겠다만.”
말은 그렇게 하지만 건우는 우끼끼의 영혼이 온전해 질 것이라 확신했다.
경지가 오르면서 조금씩 이해하게 된 천지 법칙이 그렇게 알려주고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혈원이 완전히 소멸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용랑이 대전에 모습을 나타내며 건우에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정이 깊을수록 실망이 큰 법이지. 혈원의 배신은 아프구나.”
건우가 용랑을 보며 중얼거렸다.
“저는 절대 주인님을 배신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건우를 위로하려는 듯이 용랑이 고개를 들어 충직스런 눈빛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
하지만 건우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아니야.”
그리고 그 말과 함께 건우는 의념을 움직여 용랑에게 걸어 두었던 영혼의 금제를 풀어 버렸다.
“어, 어찌! 주인님 어찌 이러십니까. 저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주는 것이다. 이리하면 네가 나를 배신할 일이 크게 줄지 않겠느냐. 그리고 이후에 다시 우리가 만나게 된다면 그 때는 주종이 아니라 같은 대도를 걷는 도우(道友)로 서로를 대하면 그만이겠지.”
“아니, 하지만······.”
“자, 받아라.”
말을 잇지 못하는 용랑에게 건우가 작은 옥함 하나를 날려 보냈다.
용랑이 그것을 받아들자 건우가 말했다.
“금혈승승단(金血昇昇團)이라는 것이다. 강제로 입령기의 경지에 잠시 오를 수 있게 해 주는 영단이지. 위급한 상황에서 입령기의 힘을 일부 사용할 수 있다. 그러니 대천겁 같은 위기를 넘기는 데도 요긴하겠지.”
“이런 것을······.”
용랑이 뭐라 말을 하려 했지만 이어진 건우의 말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그것을 먹고 입령기를 경험해 보면 네가 승경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나도 그 영단의 힘을 빌려서 입령기에 오른 것이나 다름이 없다.”
“가, 감사합니다. 주인님.”
“나는 이제 네 주인이 아니다. 다만 내가 너에게 부탁할 것이 있느니라.”
“부탁이라니요 무엇이든 말씀만 하십시오.”
건우의 말에 용랑이 급히 고개를 숙였다.
“너와 혈원만큼 나에 대해서 잘 아는 이는 루야 밖에 없다. 하지만 이제 너와 내가 서로 갈라서게 된 상황에서 내 마음이 편하지 않구나.”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제가 주인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너무 많으니 그 때문에 불안하시겠지요. 그럼 무슨 방법이 있겠습니까?”
용랑은 건우의 말을 쉽게 이해했다.
그리고 무엇이든 건우의 요구를 수용할 자세를 보였다.
“네가 동의한다면 너의 기억 일부를 지우고자 한다.”
“주인님에 대한 기억을 말입니까?”
“너와 내가 만난 시기부터 따져가며 몇 가지 내용을 지우는 것이다. 이를 테면, 네가 내 아공간에서 수련을 한 기억은 그대로 남겠지만 그곳이 아공간이란 사실은 모르게 되겠지.”
“괜찮습니다.”
“아공간에 대한 기억을 모두 지울 것이니 루야나 수미산의 상징 같은 것도 잊을 것이다.”
“괜찮습니다.”
“그것이 있었다는 것은 기억하고, 내가 너의 동의를 얻어 기억을 지운 것도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아공간, 수미세계, 루야, 무명공은 잊게 될 것이다.”
“혹여 다른 기억들에서 주인님께 큰 비밀이 있음을 유추할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차라리 저를 윤회로 돌려보내심이 쉽고 빠르지 않겠습니까?”
건우의 말에 용랑이 도리어 극단적인 해결책을 꺼내들었다.
가장 쉽고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었다.
“무정한 대도의 길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비인(非人)의 선을 넘고 싶지는 않구나.”
건우가 슬쩍 허공에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주인님.”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또한 너와 처음 만났던 그 세절도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기억을 모두 반추할 것이니 오랜만에 길게 회포를 풀게 되겠구나. 그 속에는 혈원의 기억도 있겠지.”
혈원을 이야기하는 건우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렇게 기억을 되새기며 주인님께 불안이 될 내용을 지운다는 말씀이군요?”
서둘러 용랑이 나서서 말을 돌려 건우의 상념을 깨트렸다.
“그래, 그렇게 하는 것이 너에게 후유증이 남지 않을 것이다. 너는 나와 함께 기억을 되새기며 내용을 지운 것을 기억할 테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주인님께서 그리 하시는 것이 편하시면 따르겠습니다.”
용랑은 건우의 말을 거부하지 않았다.
이미 영혼의 금제가 풀린 마당이라 건우에게 복종할 이유는 없지만 건우의 배려가 고마웠다.
어느 수사가 자신의 약점을 알고 있는 권속을 배려하여 이와 같은 일을 해 주겠는가.
금제가 풀렸음에도 용랑은 건우에 대한 감사와 충의를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후 백일 동안 건우와 용랑은 원용문의 대전에서 기억을 다듬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백일이 지난 후.
“이제는 되었다. 네게서 무명공을 거두기는 했지만 독룡의 진혈에서 나온 독룡흑린공법은 남겼다. 그것은 온전히 네 것이니 앞으로 독룡의 진혈을 얻은 후인에게 공법을 전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주인님.”
“네가 무명공을 통해서 독룡의 진혈로 얻은 독룡흑린공에는 진혈을 성장시키는 요결도 포함이 되어 있으니 그것을 극성으로 익힌다면 등선도 꿈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귀한 공법은 보물이라 드러나면 위험하니 항상 조심하거라.”
“명심하겠습니다.”
“이후에 언제 어떻게 다시 만날지는 모르겠다만, 이전에 말한 대로 다시 보았을 때, 너와 나는 대도를 함께 걷는 도우(道友)였으면 좋겠구나.”
“······.”
“그럼, 네가 대도의 끝을 보기를 기원하마.”
건우는 대답이 없는 용랑에게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둔광을 펼쳐 모습을 감췄다.
대전에 홀로 남은 용랑은 건우가 사라지고도 한참을 넋놓은 듯이 서 있다가 대전 바닥에 엎어지며 큰절을 올렸다.
“금수로 태어나 수사가 되고, 이리 높은 경지에 오른 것이 모두 주인님의 은혜입니다. 항상 잊지 않고 피에 새겨 두겠습니다. 이후 저와 제 후예들은 항상 주인님을 받들어 섬길 것을 맹세합니다. 이는 천지 법칙이 듣고 새겨 놓을 맹세입니다.”
바닥에 엎드린 용랑은 그렇게 건우가 듣지 못할 맹세를 가슴에 깊게 아로새겼다.
하지만 그 때 건우는 이미 원용문에서 멀어져 아공간으로 들어간 후였다.
그리고 아공간으로 들어간 건우는 수심어린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수미산 상징 아래 가부좌를 하고 앉았다.
그가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몸을 일으킨 것을 그로부터 3년 후였고, 그는 그 즉시 수미산 상징을 통해 수미 세계로 넘어가 버렸다.
* * *
“놓쳤다?”
“송구합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검들이 유영하는 공간, 그 중앙에 앉은 검선 앞에 창백한 인상의 청년이 엎드려 있었다.
“나도 중간에 검의 기운이 사라진 것을 느꼈다. 당연히 없어진 검을 네가 찾아 올 수는 없었겠지.”
“제가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검의 기운이 사라진 후였습니다. 그래서 탐문을 해 보니 건우라 하는 수사가 있었습니다.”
“그 이름은 친우들을 통해 들었지. 우리의 유산을 한 자리에 모았을 때, 내 검을 지니고 있던 녀석의 이름이 건우라 했지. 다르게 길우몽이란 이름을 쓰기도 했고, 또 다른 이름도 썼다지.”
“그렇습니다. 알아보니 이번에 멸계전을 통해서 편입된 곳이 있는데, 그곳에서 건우란 자가 활동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영계 비승로에 문제가 생겼을 때에 그곳으로 흘러간 모양이구나.”
“그렇다고 합니다. 게다가 그곳에는 궁선 님의 유산도 함께 있습니다.”
“궁선의 활이?”
“특이하게도 영족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궁선의 손은 떠났다고 봐야지. 영성을 얻어 영족이 되었으면 이미 영혼까지 갖춘 존재가 아니더냐. 그런 존재라면 소유를 주장할 수 없음이지. 권속으로 부리는 것은 또 다른 문제겠지만.”
“다시 건우란 자의 말씀을 드리자면 무척 특별한 능력을 지녔던 모양입니다.”
“그래?”
“멸계전을 종식시키는 데에도 크게 공을 세웠다고 합니다.”
“으음. 그렇다면 천지 법칙의 보이지 않는 가호도 만만치 않게 얻었겠구나.”
검선이 태령기에 오르고 나서야 겨우 알게 된 사실.
특별한 경우에 천지 법칙이, 역천의 존재인 수사에게 호의적인 경우가 있다.
그것을 천지 법칙의 가호라 하고, 멸계전에서 큰 활약을 했다면 분명 그런 가호를 입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그 가호가 도움이 될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천겁이나 승격 시험과 같은 경우에도 가호는 적용이 되지 않았다.
천지 법칙의 가호는 등선 정도로 큰일이나 되어야 슬그머니 영향을 주는 것이고, 그조차도 확실하진 않다.
보이지도 않고, 알아차릴 수도 없지만 얻었다면 무조건 손해는 아닌 것이 그 천지 법칙의 가호였다.
“검의 기운이 사라진 지역을 샅샅이 뒤지고 또한 여러 해를 기다렸지만 변화가 없어서 되돌아 왔습니다.”
“되었다. 언제고 다시 모습을 드러내겠지. 찾아오면 좋겠지만 또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니 얽매일 것은 아니다.”
검선이 무심하게 손을 저었다.
그러자 그의 앞에 있던 청년이 한 자루의 검이 되어 두둥실 떠올랐다.
그 청년은 본래 검선이 지닌 수많은 명검들 중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갈 명검이 본체였던 것이다.
영족처럼 온전히 영혼을 가지고 태어난 것은 아니되, 검선의 공법을 받아 마치 인간처럼 움직일 수 있는 검의 령.
검선은 심부름을 마친 검을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려 유영하는 검들 사이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다시 명상 수련에 들었다.
건우의 검을 되찾아 오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지금은 그것에 연연할 때가 아니었다.
검선의 운명을 가를지 모를 큰 위기가 그를 향해 다가오는 중이었다.
지금은 그 대비를 하는 것이 우선 급한 일이었다.
* * *
“아이고, 건우 장로님 드디어 출관을 하시는 것입니까?”
“네가 여긴 어쩐 일이냐?”
건우는 동부를 나서다가 황급히 달려와 인사를 하는 수사를 보고 되물었다.
그 수사는 이전 그가 폐관에 들기 전에 원로원으로 보냈던 그 수사였다.
그런데 그 사이에 경지가 올라 성단기가 되어 있었다.
“무슨 말씀을 그리 섭섭하게 하시······. 아니 장로님 혹여 이, 입령기에 오르신 것입니까?”
“둔한 녀석 같으니. 하긴, 성단기인 네 놈이 보기에 화신기 완경이나 입령기가 모두 대해와 같아서 구별하기 어렵기는 하겠구나.”
건우는 입을 떡 벌리고 있는 수행 수사를 지나 걸음을 옮기며 고개를 저었다.
“자, 장로님 어디를 가십니까요? 출관을 하셨으면 뭔 하명이라도 해 주셔야지요.”
그런 건우를 황급히 뒤따르며 성단기 수행 수사가 하소연을 했다.
“시끄럽다. 폐관에 들 때에 네 녀석이 다른 곳으로 갔을 줄 알았더니 어째 그대로 내 동부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더냐?”
“그야 장로님께서 아니 계시는 이곳에 배치하는 것이 제일 큰 형벌이라 해서 그리 된 것이 아닙니까요.”
“내가 없는 곳에 머무는 것이 벌이라?”
“그렇지요.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하고 홀로 동부의 입구를 지키며 영초를 가꿔야 하니 말입니다. 사실 축기기였던 제가 성단기에 이르지 못했으면 이미 윤회에 들지 않았겠습니까요.”
“그러니 죽을 때까지 내 동부의 입구를 지키는 벌을 받았는데 경지를 올려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이야기구나?”
“네, 그렇습지요.”
“그거 축하할 일이구나. 옛다!”
건우는 까마득한 경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능청스럽게 곁을 얻으려는 수행 수사의 넉살이 싫지 않았다.
그래서 슬쩍 소매에서 수행에 도움이 될 영단 몇 개를 불러내어 던져 주었다.
“어? 이, 이게 뭡니까요?”
“연단 문파에 있으면서 그게 뭔지 모른단 말이냐? 모르면 알도록 공부를 해야지.”
건우는 대답을 하지 않고 훌쩍 둔광과 함께 모습을 감추었다.
‘깊이 정을 주지는 말자. 이 정도는 그냥 일상에 가벼운 변화일 뿐이지.’
둔광을 펼쳐 원로원으로 향하며 건우는 그렇게 다짐했다.
혈원의 일로 받은 상처가 건우의 마음 길에 적잖은 영향을 끼친 것이었다.
“으음. 건우 장로. 오랜만입니다. 그 동안 어찌······. 이런 입령기에 오르셨습니다 그려.”
원로원으로 들어서는 건우를 발견한 3대 원로 중에 하나가 아는 척을 하다가 깜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화신기 후기에 있는 그로선 입령기에 오른 건우 앞에서 고개를 들기 어려웠던 것이다.
“오랜만에 동부를 나와서 맹주 경합이 어찌 되는지 알지 못한다. 나도 입령기에 올라 경합 자격을 얻었으니 그것이 궁금하여 찾아왔다. 일러줄 수 있느냐?”
건우가 그 장로를 보며 오련맹의 맹주 경합에 대해서 물었다.
건우의 하문에 젊은 3대 원로가 다시 허리를 깊이 숙이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어르신께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맹주 경합은 아직 정식으로 시작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미 십여 년 전에 맹주 경합에 대한 준비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 정이 깊으니 더 아프구나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