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
< 아, 이런 원숭이 쉑! >
스스슥!
나지막한 산봉우리 위에 건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후우, 이제 이곳도 제법 영기가 충만해졌군. 아직 영계 평균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런대로 많이 찼어.”
건우는 아공간에서 나오자마자 그곳의 천지 영기를 가늠해 보았다.
그렇지만 역시 수미세계에 비해서는 아직 천지 영기의 농도가 낮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이 영계에 편입된 것이 고작 몇 백 년도 지나지 않았으니 아직은 천지 영기가 골고루 퍼지기엔 이른 때였다.
“그나저나 이상하군.”
건우가 문득 정신을 집중하다가 인상을 찌푸리며 두 방향을 번갈아 바라봤다.
한 쪽은 용랑의 기척이 느껴지는 곳이고, 다른 쪽은 혈원의 금제가 느껴지는 곳이었다.
“어째 둘이 서로 다른 곳이 있는 거지? 게다가 용랑은 상처가 심각한데 혈원이 그것을 모른단 말인가?”
건우는 잠시 고민을 했다.
어느 쪽을 먼저 만나야 할 것인가.
하지만 결론은 빠르게 나왔다.
혈원이 전신부를 통해서 건우를 부르기는 했지만 몇 달 정도 늦고 빠른 것은 상관이 없을 듯 했다.
그렇다면 역시 부상이 심각한 용랑을 먼저 챙기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이쪽 방향이로군. 거리는 제법 되겠어.”
건우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다시 둔술을 펼치기 시작했다.
거리가 있다고는 하지만 입령기 수사에게 크게 부담될 거리는 아니었다.
고작 한 두 달이면 도착할 거리.
그 정도 시간이야 대수로울 것 없었다.
* * *
“으음. 이렇게 꽁꽁 숨어 있어야 할 이유가 있다면 일이 심상치 않겠어.”
몇 달 후.
건우는 혼으로 연결된 용랑을 찾아 제윤국으로 넘어왔다.
용랑은 과거 건우가 이쪽 세상에 처음 왔을 때에 도착했던 평토성(平土城) 근처의 작은 산맥에 숨어 있었다.
건우가 용랑이 숨어 있는 곳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은밀하기 이를데없는 금제와 은폐 진식이 겹겹이 펼쳐져 있었다.
그것은 사실 건우도 놀라게 할 정도로 대단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그만큼 철저하게 스스로를 감춰야 할 정도로 용랑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했기에 건우의 표정이 좋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열려라!”
건우가 손을 내밀어 숲의 한 방향을 가리켰다.
그러자 건우의 언령에 따라서 숲의 일부가 좌우로 벌어지며 오솔길 하나를 드러냈다.
건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잠시 고민하다가 그 오솔길로 걸음을 옮겼다.
이 오솔길은 이곳에 펼쳐진 금제를 통과하는 길이기도 하지만 상황에 따라서 사지로 끌어들이는 함정이 되기도 하는 길이었다.
그 때문에 건우는 이곳에 펼쳐진 금제와 은폐 진법 따위를 모두 날려버릴까 고민하다가 용랑이 펼친 것임을 생각해서 오솔길로 들어선 것이었다.
그 길을 걷지 않으려면 모든 것을 깨트리는 것이 제일 빠른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으음. 어찌 이 꼴이 되었지? 게다가 용랑 이 놈이 언제 이렇게 경지를 올렸어?”
오솔길로 들어선 건우는 몇 번의 위험한 시험을 무사히 통과하고 결국 용랑이 있는 석실에 도착했다.
그곳에 있는 용랑은 이미 오래전에 정신을 잃고 가사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용랑의 상태였다.
건우가 보기에 용랑은 입령기의 승경 과정에서 실패하고 큰 부상을 입은 것처럼 보였다.
입령기 승경이라니.
건우 조차 이제 겨우 성공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고작 화신기 중기로 세상에 내어 놓았던 용랑이 입령기 승경에 도전했다니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용랑의 상태에서 파악된 사실이니 믿지 않을 수도 없는 일.
“깨워서 물어보면 될 일.”
건우는 간단한 해결책을 떠올리고 용랑의 입에 영단 하나를 밀어 넣었다.
그리고 손바닥을 저어 영단이 용랑의 몸에 잘 흡수되도록 도왔다.
다음은 쉬웠다.
잠들어 있는 용랑의 정신을 깨우고, 영단의 기운으로 내상을 수습하게 하면 그 뿐이었다.
“깨어나라(覺)!”
“끄으응!”
건우의 외침에 용랑의 눈꺼풀이 무겁게 올라갔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건우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화들짝 커졌다.
“주, 주인님!”
“떠들지 말고 우선 몸부터 추슬러라. 그 후에 자세한 이야기를 듣겠다.”
건우는 몸을 일으키는 용랑을 의념으로 눌러 막으며 말했다.
용랑은 건우의 말에 고개를 숙여 보이곤 곧바로 가부좌를 하고 앉아 공법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으음? 무명공? 용랑이 무명공을 익혔어? 그런데 뭔가 다른데?”
건우는 용랑의 영기 운용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래 용랑은 나오금강체술을 주력으로 익혔다.
그런데 지금은 무명공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원래 무명공을 용랑이나 혈원의 진혈에 맞추어 전해 주기는 했었다.
하지만 혈원이 무명공을 바탕으로 흑성성패력(黑猩猩覇力)을 연성한 것에 비해서 용랑은 독룡의 진혈을 흡수하고도 나오금강체술에 매진했었다.
‘그런 용랑이 무명공을? 그것도 이전과는 많이 달라진 것 같은 무명공을 익히고 있다?’
의구심만 늘어났지만 건우는 묵묵히 용랑이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며칠 후, 용랑이 몸에 퍼진 영단의 기운을 모두 갈무리하고 눈을 떴다.
“주인님.”
“그래, 어찌 된 일이냐?”
건우는 굳이 만남의 각별함 따위를 나누지 않았다.
영혼이 연결된 상태에서 느껴지는 용랑의 진심은 굳이 말로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주인님께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용랑의 첫 마디는 사죄의 말이었다.
“알아듣게 이야기를 해 봐. 먼저 어쩌다가 그렇게 다쳤어?”
건우가 물었다.
“혀, 혈원이 저를 기습했습니다.”
“뭐? 혈원이?”
용랑의 대답에 건우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그렇습니다 주인님.”
“아니 어떻게? 어떻게 혈원이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 설마 내 금제를 벗었다고?”
“그 때까지는 완전히 금제를 벗어난 것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렇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직까지는 녀석의 영혼 금제가 느껴지는데?”
“그것은 가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무슨 고작 혈원의 경지로 어떻······. 아니 그 전에, 네 상태를 보아하니 입령기 승경에서 천뢰겁에 당한 것 같던데? 그게 정말이냐?”
혈원의 경지가 낮다는 말을 하려던 건우는 용랑이 입령기 승경을 시도했던 것을 떠올리며 그것부터 확인했다.
“그렇습니다. 제가 기습을 당한 것이 바로 그 입령기 승경 과정에서였습니다. 기습이 없이 혈원이 제대로 도왔다면 입령기에 들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어떻게 벌써 입령기가 될 수가 있어?”
건우는 어쩔 수 없이 따지듯이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상식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건우 자신의 성장도 어느 누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다고 하는데, 고작 권속들이 자신을 추월하다니.
그건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무명공 덕분입니다.”
용랑이 대답했다.
“무명공? 그러고 보니 네가 익히고 있는 무명공이 내가 아는 것과는 조금 다르더군. 어찌 된 일이냐?”
“이것을 보십시오.”
건우의 물음에 용랑이 소매에서 옥간 하나를 꺼내 건우에게 내밀었다.
건우는 그것을 받아 의념을 불어넣어 내용을 확인했다.
그 시간은 꽤나 오래 걸렸다.
건우가 몇 번이나 재검토를 거듭했기 때문이다.
“이건 내가 익힌 무명공의 후반부가 분명하구나.”
결국 건우는 옥간의 내용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가 익힌 무명공에 이어지는 후반부 내용이었다.
그런 것이 있는지도 몰랐던 것이 용랑의 손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저와 혈원이 우연히 경매에서 발견하여 구입한 것입니다. 경매에서는 그것이 무명공의 후반부이거나 하는 식의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그저 혈기를 다스리고 성장시키기에 좋은 기본공 정도로 소개되어 경매에 올라왔었습니다.”
“그것을 네가 구했다고?”
“독룡의 진혈을 품은 저에게도 조금은 쓸모가 있을 것 같았고, 애초에 피에서 나온 혈원의 경우에는 제법 효과가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낙찰을 받았는데, 그 내용을 살피다보니 무명공에 이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 무명공에 이 후반부의 내용을 더하게 되면 진혈을 성장시킬 수 있게 되지. 하찮고 미약한 진혈이라도 이 완성된 무명공을 이용하면 얼마든 성장을 시킬 수 있어.”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와 혈원이 무명공에 옥간의 내용을 더해서 익히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제가 흡수한 독룡의 진혈이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그 결과가 입령기에 드는 것이었나?”
“네, 주인님.”
“그런데 입령기 승경 과정에서 혈원이 기습을 했단 말이지? 어째서냐?”
건우가 눈빛을 날카롭게 빛내며 물었다.
“저를 기습한 후에 혈원이 떠든 말을 종합하면 놈은 주인님을 배신할 뜻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내게서 벗어날 생각을 했다? 그럼 너를 공격한 것은 방해물을 치우겠다는 뜻이었겠구나?”
“제가 먼저 입령기에 오르면 혈원으로선 큰 부담을 안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기습을······.”
“그래, 네 충성심이야 나도 알고 있다. 그런데 혈원이 놈이 어찌 내 영혼 금제를 뚫고 배신의 마음을 품었는지 모르겠구나.”
영혼의 금제는 강력하여 그것을 깨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데 화신기 완경의 혈원이 어찌 건우의 영혼 금제를 뚫고 배신할 생각을 품었을까.
건우는 그 답을 찾아 고민에 빠졌다.
“제가 이곳에 숨어 궁리를 거듭하다 떠올린 생각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혈원의 태생이 혈모원 우두머리의 피가 아니겠습니까. 기존 무명공에 후반부가 더해지면서 피의 성장이 가능하게 되었으니 어쩌면 혈원의 태생 때문에 금제가 깨어진 것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진혈을 성장시키는 무명공의 후반부 요결이 혈원의 근간이 되는 혈모원 우두머리의 피를 진화시키면서 내 영혼 금제에 틈을 만들었다면! 그래, 그렇다면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긴 하겠구나.”
건우는 용랑의 말에 무릎을 쳤다.
역시 오래 고민을 했다더니 용랑이 그럴 듯한 답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혈원 그 놈은 이미 입령기에 도달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때, 용랑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무래도 혈원의 경지가 주인의 경지보다 높아졌을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던 것이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구나. 그러니 놈이 전신부를 통해 나를 불러들이는 것이겠지.”
“네? 혈원이 주인님을 불렀다는 말입니까?”
“그래, 수미세계에 있는 나를 전신부로 부르더구나. 그래서 무슨 일이 있는가 하고 넘어온 것이다. 놈이 자신이 있으니 나를 불렀을 것이고, 그렇다면 입령기는 되었다는 이야기겠지. 내 능력을 대부분 알고 있는 그 놈이 그만한 자신이 없이 나를 부르진 않았을 테니까.”
“그, 그럼 큰일이 아닙니까. 주인님 이럴 것이 아니라 곧바로 수미세계로 돌아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후 혈원 놈을 처리할 준비를 마치고 다시 돌아오심이 좋겠습니다.”
용랑은 후일을 기약할 것을 조심스럽게 권했다.
건우는 그런 용랑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동안 숨기고 있던 입령기의 경지를 슬그머니 드러냈다.
“어어어? 어엇? 주, 주인님!”
용랑이 그것을 알아보고 크게 놀라 말을 잇지 못하며 눈을 크게 떴다.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내가 그 혈원이 놈을 잡아 죽일 수 있을 것 같으냐? 아닐 것 같으냐?”
“하하하핫. 역시 주인님이십니다. 그야 당연히 그 원숭이 새끼를 잡아 죽일 수 있으실 것입니다. 이 용랑은 항상 주인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하하하핫.”
자신을 기습한 혈원의 깜깜한 미래를 떠올렸는지 용랑의 웃음소리는 시원하기 짝이 없었다.
< 아, 이런 원숭이 쉑!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