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
< 내 그럴 줄 알았다 >
“그런 공격을 당하고도 저리 여력이 남았는데, 자보(子寶)를 회수했으면 어떠했을 것 같습니까?”
건우가 그 울음소리를 듣고는 곧바로 지준 수사를 압박했다.
“아니오. 내가 생각을 잘못했소. 지금껏 놈과 싸우고 물러나기를 반복하다 보니, 이번 싸움에 건우 수사가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치 못했소이다. 이번 참에 동동을 끝장내려는 것인데, 소소한 법보 따위에 연연할 수는 없지요.”
지준은 곧바로 말을 바꾸었다.
이전처럼 싸우다가 불리하면 도망을 가서 후일을 도모할 그런 때가 아니었다.
이번에는 어떻게든 동동을 끝장 낼 각오를 가지고 오지 않았던가.
게다가 지금 건우와 척을 지고 싸울 수는 없었다.
어차피 이미 자보를 잃었는데 여기서 사냥을 멈추고 물러나면 손해만 볼 뿐이었다.
그러니 건우의 비위를 맞춰 줄 수밖에.
“좋습니다. 그럼 계속해 보십시다. 이제 저 밑으로 들어가 다시 동동과 싸움을 벌여야 할 것 같은데, 어쩌겠습니까? 제가 먼저 들어갈까요? 아니면 지준 수사께서 먼저 들어가시겠습니까?”
지준이 슬쩍 물러서는 모양을 보이자 건우도 더는 따지지 않고 다음 순서를 물었다.
그 말에 지준은 잠시 고민하더니 답했다.
“동동에 대해서는 내가 건우 수사보다는 아는 것이 많으니 먼저 들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 아래에 놈이 펼친 공간 술법이 있을 텐데, 그것은 내가 조금 더 익숙하지 않겠습니까.”
“먼저 가시겠다면 그렇게 하시지요. 저는 뒤따라가겠습니다.”
“그럼 뒤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건우는 지준에게 선두를 양보했다.
건우의 주먹질에 땅 속 깊이 파묻힌 동동과 그 구멍 안에서 일어난 깃발 법기들의 폭발.
지금 이곳에서 일어난 상황은 단순하게 그런 것 같이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겉으로 보이는 단편적인 모습일 뿐, 실상을 보면 공간을 이용한 결계와 방어, 진법을 이용한 공격, 건우의 방패를 이용한 봉인 등이 뒤섞여 있는 복잡한 상황이었다.
지금 동동은 건우가 방패로 형성한 봉인 때문에 멀리 도망가지 못하고 땅 속에서 은신처를 만든 상황이었다.
당연히 그 은신처에는 동동 나름의 방어책들이 펼쳐져 있을 것이다.
그래서 방패 아래로 내려가는 것은 곧 동동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어서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지준은 동동이 부상이 클 거라고 생각하고 선두를 자처한 것이다.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그러시지요. 잠시 후에 뒤따르겠습니다.”
그리고 땅 밑의 상황이 만만치 않음에도 지준과 건우가 각자 따로 움직이는 것은 함께 있는 것보다 그것이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었다.
가까이 붙어서 서로를 견제하느니 조금 거리를 두는 것이 나을 것이란 암묵적인 합의였다.
어찌 상대를 믿을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 서로 동동을 사냥하고 약속한 이익만 나누면 그 뿐이었다.
만약 그 중에 무슨 수작을 부린다면 그 결과는 서로가 책임을 질 일일 뿐이다.
건우는 지준이 방패의 봉인을 지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고 한 참 후, 그 뒤를 따라 땅 밑으로 내려갔다.
* * *
동동은 땅 속 깊은 곳에 웅크리고 엎드려 있었다.
그런 동동의 몸에는 여기저기 찢기고 갈라진 흔적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두꺼운 지방층으로 된 피부 덕분에 겉보기 보다 상처는 깊지 않았다.
하지만 건우의 주먹에 얻어맞은 머리는 상황이 달랐다.
한 쪽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이 주먹 자국이 나 있었다.
그리고 그 주먹 자국을 중심으로 기묘한 기운이 계속 동동을 괴롭혔다.
금강불가살의 포식 기운이 동동의 선천지기를 자극하는 중인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나는 선천지기는 그 생명체가 가진 가장 순수하고 강력한 기운이지만 또 가장 본능적인 기운이기도 했다.
그래서 천적을 만난 선천지기가 금강불가살의 기운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날뛰는 것이다.
다른 곳보다 건우에게 맞은 상처가 제대로 치유가 되지 않고 있는 것은 그런 이유였다.
“하하하하. 동동, 결국 여기가 끝이로구나.”
그 때였다.
동동이 엎드려 있는 공동으로 지준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준은 남색 깃발을 지팡이처럼 찍으며 나타났는데, 동동은 그의 등장에 깜짝 놀라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크하하하. 네 놈도 당황하긴 하는구나.”
그 모습에 지준이 즐거운 듯이 광소를 터트렸다.
지금 건우는 동동이 만든 은신처의 입구에서 시간을 허비하고 있을 터였다.
동동이 은신처를 만들며 건우와 지준을 막기 위해 만들어 놓은 갖가지 방어 술법과 금제, 함정 따위가 만만치 않을 테니까.
꾸에에엑!
동동이 울음을 토하며 머리를 주억거렸다.
그러자 그 몸에서 여러 구슬들이 떠올라 공동을 환하게 밝혔다.
“하하하. 열두 개의 구슬이라. 대단하군. 하지만 그 중에 제대로 힘을 쓸 수 있는 것은 고작 셋 뿐. 나머지 아홉은 이미 기운이 많이 쇠하였지.”
땅 위에서 싸울 때에 동동이 썼던 아홉 개의 구슬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처럼 자세히 보면 동동이 띄운 구슬들 중에서 아홉 개는 빛에 어둑한 느낌이 스며 있었다.
파지지지지직! 카르르르릉!
지준이 뭐라 떠들던 동동은 본능에 따라서 구슬의 기운을 움직였다.
동동이 먼저 움직인 것은 노란색의 뇌전 기운과 은색의 쇠(金)의 기운이었다.
쇠의 기운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바늘을 만들었고 뇌전의 기운은 그 바늘 하나하나에 스몄다.
“으음. 그래, 어차피 목숨을 건 싸움인데 대충 할 수는 없겠지.”
그 모습에 지준도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두고 진중한 표정을 드러냈다.
파바바방!
그와 함께 지준이 양 팔을 벌리자 그의 품에서 몇 개의 깃발을 튀어 나왔다.
그리고 그 깃발들은 남색의 깃발과 나란히 서서 지준의 앞을 막아섰다.
새로 나타난 깃발의 수는 모두 여섯 개, 결국 지준은 남색의 깃발까지 일곱 개의 깃발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 놈이 오기 전에 어서 끝장을 보자꾸나.”
지준은 뒤에서 따라올 건우를 떠올리며 서둘러 깃발을 움직였다.
적(赤), 황(黃), 녹(綠), 청(靑), 남(藍), 백(白), 흑(黑).
깃발들은 일제히 동동을 향해 날아갔고, 동동은 뇌전을 머금은 바늘을 지준에게 날려 보냈다.
“어헛? 이 놈이?”
지준은 설마 동동이 깃발들을 막지 않고 자신을 공격하는데 전력을 다할 것은 생각지 못했는지 깜짝 놀란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급하게 소매를 휘저었는데, 그 소매가 길게 늘어나 깃발처럼 나부꼈다.
재미있는 것은 그 소매의 색이 그가 사용하는 일곱 개의 깃발 색으로 꾸며져 있다는 것이다.
색색이 색동을 들인 소매가 펄럭이며 동동의 바늘을 막았다.
그리고 먼저 날아간 일곱 깃발은 원형으로 동동을 가두며 땅에 박혔다.
쿠르륵! 쿠륵!
그 깃발들에 동동은 영기의 대부분이 제약되고 말았다.
파지지지지직!
“크으으, 하하하핫.”
그 사이에 지준은 동동의 바늘에 여기저기를 찔려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다가 크게 웃기 시작했다.
다행히 그의 일곱 색동 소매가 동동의 바늘 대부분을 막아냈다.
그 중 몇 개에 찔리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버틸 만 했다.
그런데 정작 동동은 자신이 날린 일곱 깃발에 완벽하게 사로잡히지 않았나.
충분히 기뻐할 만한 일이었다.
“내가 그 동안 너를 잡지 못한 것은 내가 이 수법을 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움직임이 제한된 공간에 너를 가둘 수가 없었지. 드넓은 곳에서 이리 느린 깃발을 날려봐야 네가 모두 피해 버릴 테니 말이다. 그래서 지금껏 나는 이 수를 한 번도 내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비록 금수라 하더라도 같은 수에 몇 번을 당할 정도로 멍청하진 않다.
도리어 지준의 자보를 통한 진법 포위를 한 번 겪은 후로는 어렵지 않게 약점을 파악하고 뚫어내는 모습을 보였던 동동이다.
그래서 지준은 마지막 수를 지금껏 아껴 두었던 것이다.
쿠르르극 뀌이이익!
“건우 수사의 금제가 이토록 고명할 줄은 나도 예상치 못했지. 설마하니 이렇게까지 너의 움직임을 봉할 줄을 어떻게 예상이나 했겠느냐.”
금강패갑공의 방패를 이용한 금제였다.
원래부터 금제와 봉인에 특별한 효능이 있는 금강패갑공인데, 동동은 금강불가살의 천적 적용까지 받았다.
사실 그 천적 적용만 아니었어도 동동이 이리 쉽게 지준의 수에 당하진 않았을 것이다.
이미 금제와 봉인에 짓눌린 까닭에 지준의 수를 피하지 못한 것이다.
지준도 동동을 제압한 순간 그것을 알아차렸던 것이고.
“자, 그럼 곱게 가거라.”
지준이 몸에 박힌 바늘들을 털어내며 동동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일곱 깃발의 원 밖에서 동동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에는 언제 꺼낸 것인지 날이 손바닥 길이 정도 되는 비도 하나가 들려 있었다.
손잡이는 그저 형식적으로 작게 달려 있는 비도.
번쩍!
꾸에에엑! 털썩!
그 비도가 빛을 내며 모습을 감추는 순간 동동이 찢어지는 울음소리를 짧게 내었다.
그리고 앞다리부터 무릎을 꿇더니 그대로 쓰러지고 마는 동동.
“하하하핫, 역시 힘을 잃었구나. 그리고······.”
지준은 동동이 맥없이 쓰러지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 역시 오랜 세월을 살아온 노회한 수사.
뻔히 보이는 수를 놓치지는 않았다.
턱, 터더더더덕! 테구르르르!
동동이 쓰러지는 것과 동시에 바닥에 떨어져 뒹구는 열두 개의 구슬들.
지준은 그 중에 하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것은 마지막까지 빛을 잃지 않고 있었던 하늘색 구슬이었다.
빠지지직! 부스스스스.
그리고 그 구슬은 지준의 손에서 부서져 가루가 되어 흘러내렸다.
“흥! 이런 하찮은 수로 도망을 치겠다고?”
지준이 코웃음을 치며 이리저리 공동 내부를 살피기 시작했다.
분명히 그가 나타났을 때, 동동이 만든 열두 개의 구슬은 모두가 진짜였다.
그런데 지금 하늘색 구슬 하나는 가짜로 바뀌었고, 그 구슬에 동동이 숨어 든 것이다.
열하나의 구슬과 본체까지 이곳에 남았으니 그 구슬에 깃든 힘이야 1할도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조차도 놓치기 싫은 것은 당연한 일.
지준의 눈빛이 사납게 공동을 훑었다.
그런데 그 순간 지준이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스스스슷!
“이런, 수사께서 한 발 빠르게 사냥을 끝마치셨습니다 그려?”
건우가 동공 안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아니, 어찌 이토록 빠르게?”
지준은 저도 모르게 내심을 드러내며 놀라고 말았다.
“뭘 그렇게 놀라십니까? 지준 수사께서는 저보다 훨씬 빠르게 이곳에 도착해서 동동 사냥까지 마치셨는데, 제가 이제야 도착한 것이 도리어 부끄러울 일이지요.”
건우는 그렇게 말을 하고 공동의 입구를 막아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지준은 그런 건우의 행동에 자신의 선택이 남았음을 알아차렸다.
여기서 동동을 독차지하고 아울러 저 건우란 놈까지 어찌 해 볼 것인지, 아니면 약속대로 동동의 지분을 나눌 것인지.
“어찌 놀랍지 않겠습니까. 나는 동동의 수법을 익히 알아서 그 허점을 뚫었습니다. 그래서 이 놈이 만들어 놓은 함정이나 방책 따위는 문제가 아니었지요.”
지준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일이 그의 뜻대로 풀리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건우란 놈의 태도도 뭔가 석연찮은 부분이 있었다.
“하하하. 그거야 다 지준 수사의 재주가 아니겠습니까. 물론 그게 좀 이상하기는 합니다. 어차피 어찌 사냥이 끝나더라도 저 동동에 대한 분배는 이미 약정이 되어 있는 것인데, 지준 수사가 그리 서둘러 무리하게 마무리를 할 이유가 있었는가 싶어서요.”
“설마 아무것도 모른다 하시는 겁니까?”
건우의 말에 지준이 비웃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역시 그런 것입니까? 지준 수사께서 지나가신 길을 의도적으로 막아버리신 것이 정말이었군요?”
그러자 건우도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태연한 표정으로 물었다.
“설마 그 길까지 찾으셨습니까? 이거 제가 그것을 막지 않았으면 함께 마무리를 했겠습니다 그려.”
“그러니 말입니다. 굳이 그걸 막고, 무리하게 혼자 사냥 마무리를 하고. 참, 이러시니 제가 떠오르는 것이 하나 밖에 없습니다만.”
“뭘 그리 혀를 길게 놀리십니까. 뻔히 보이는 일을 두고 말입니다.”
휘리리리릭!
일곱 개의 깃발이 뽑혀 지준을 에워싸고 회전을 시작했다.
건우는 그 모습에 금강패갑공을 끌어 올리며 손에 삼백육십성광검을 꺼내 들었다.
지준이 건우의 검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체술이 아닌 검술이라니, 지준이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던 것이다.
“이리 되었으니 어디 끝장을 봐 보십시다.”
건우가 검을 지준에게 겨누었다.
< 내 그럴 줄 알았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