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
< 가는 날이 장날이야? 왠 전쟁? >
수미세계는 그 중심에 제1산인 수미산이 있고, 그 수미산을 원형으로 둘러싼 여덟 개의 산맥이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그 여덟 개의 원형 산맥들 사이에는 바다가 있는데 그것을 팔해라 부른다.
그 바다들의 이름은 그것이 둘러싸고 있는 산과, 산맥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
수미산을 둘러싼 수미해를 그 밖으로 지쌍산맥(持雙山脈)이 둘러싸고, 그 지쌍산맥을 지쌍해가 둘러싸는 형태다.
그런 식으로 여덟 산맥과 여덟 산이 반복되는데 제일 바깥쪽에 여덟 번째 바다이자 마지막 바다인 짠물 바다 함해(鹹海)가 있다.
그리고 이 함해의 동서남북에 큰 섬들이 하나씩 있고, 그 중에 남쪽 섬을 남염부제(南閻浮提)라 부르는데 건우가 도착한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이 염부제는 수미세계에서 유일하게 인간들이 주류인 곳이었는데 화신기 수사들도 일생에 그 끝과 끝을 보는 것이 어렵다 할 정도로 넓었다.
건우는 우연히 만난 화신기 초기의 인간 수사에게 수미 세계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를 얻고는 다시 길을 나섰다.
그래도 이번에는 정처없이 떠도는 것이 아니라 목적지를 정해서 길을 나섰다.
“멸계전이 시작되더라도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봐야지. 그렇다면 지금은 내 실력을 쌓는 것이 우선이다.”
건우의 생각은 그랬다.
그리고 건우가 가장 쉽게 실력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은 무명공에 쓸 고급 진혈을 구하는 것이었다.
성해룡(星蟹龍)의 진혈이나 칠채선호접(七彩仙蝴蝶), 쌍두단미영원(雙頭短尾??)의 진혈은 이미 한계에 닿았다.
성해룡결공법, 나타결공법은 어찌어찌 화신기 완경까지 끌어 올렸지만 유잠공은 화신기 중기에서 멈췄다.
이제 그보다 더 질이 좋은 진혈을 구하지 못하면 그 공법들의 성장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건우가 수미세계에서 첫 목적지로 염부제의 중심에 있는 증장성(增長城)을 택한 것은 그곳이 수사들 사이의 거래가 가장 활발한 곳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태령기 수준의 고계 수사들의 물건까지도 나돈다는 곳이니 그곳이라면 새로운 진혈을 기대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저곳이 호지성(壕池城)인가?”
건우는 부양도를 타고 길을 나선지 꼬박 여덟 달 만에 첫 번째 목적지인 호지성을 눈앞에 두었다.
드넓은 수미세계에서 작은 한 부분에 불과한 남염부제라 하더라도 부양도로 그 중심까지 가기는 어렵다.
그러니 성과 성을 이어주는 전송진을 이용해서 이동하는 것은 당연한 선택이다.
이전에 만났던 화신기 초기의 수사는 전송진이 있는 가장 가까운 성으로 호지성(壕池城)을 일러주었다.
“어째 분위기가 좋지 않은데?”
그런데 막상 호지성을 눈앞에 두니, 그곳에선 한창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인간 수사는 물론이고 도마뱀, 개구리, 두꺼비, 원숭이, 목령(木靈) 등의 여러 종족 수사들이 뒤엉켜 있었다.
“으음. 입령기도 있군.”
건우의 시선이 호지성의 상공으로 향했다.
그곳에 네 명의 수사가 각기 따로 떨어진 상태로 대치하고 있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이게 뭔 일이래?”
건우는 성을 공격하던 무리들 중에 일부가 자신의 부양도를 향해 날아오는 것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누구냐!”
“어디서 온 놈이냐!”
“정체를 밝혀라!”
부양도로 접근한 이들은 세 개의 무리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각각 인간과, 뱀족, 목령족이 무리를 이끌고 있었다.
건우는 그들의 경지가 화신기 후기에서 완경임을 알아봤다.
“나는 건우라 하는 사람입니다. 호지성의 전송진을 이용할까 하고 오는 길입니다. 그런데 수사들께선 말을 험하게 하십니다 그려?”
건우는 순순히 자신의 이름과 용건을 밝히면서도 상대의 언행이 거침을 지적했다.
그런 건우의 반응에 무리를 이끄는 세 수사들의 눈빛이 반짝였다.
“건우 수사?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군. 게다가 그 비행 법기도 특이하고. 어디 멀리서 온 모양이군. 겁이 없는 것은 그 때문인가? 이곳의 사정을 몰라서?”
그런 중에 세 우두머리 수사 중에서 인간 수사가 건우를 보며 이죽거렸다.
건우는 순간 눈썹이 꿈틀했다.
“어허, 공 수사께서는 좀 자중하시지요. 지금 여기서 굳이 적을 늘리려 하시는 겁니까?”
그런데 의외로 세 수사 중에 목령족의 우두머리인 여성 수사가 그 인간 수사를 막고 나섰다.
목령족은 오래된 나무에 영성이 생겨서 탄생하는 종족으로 수도계에서도 자주 보기 어려운 종족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목령족이 이끄는 무리 대부분이 같은 목령족이었다.
건우는 그것이 신기해서 내심 목령족 무리를 주시하고 있던 중이었다.
“수양(垂楊) 수사의 말씀이 옳습니다. 공 수사께서는 조금 삼가실 필요가 있습니다.”
“무슨,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모두가 함께 나서더니 어찌 모든 잘못을 나에게만 미룬다는 말입니까!”
또 다른 뱀족 수사의 말에 공 수사라 불린 인간 수사가 버럭 역정을 냈다.
녹색이 주를 이루는 무복을 입은 공 수사는 그와 비슷한 복식의 무리를 이끌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뱀족 수사는 여러 종족이 어우러진 무리를 이끄는데 대부분이 수인 계열이고 복장도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
‘목령족 중심의 세력이 하나, 인간들이 이룬 단체가 하나, 거기에 용병처럼 잡다하게 모인 집단이 하나로군.’
건우가 빠르게 그들의 편성을 파악했다.
그리고 7층 누각의 난간에서 훌쩍 몸을 날려 부양도 상공으로 올라섰다.
그것은 마치 세 무리와 대치하는 듯한 형국이어서 공 수사를 비롯한 세 우두머리가 바짝 긴장하며 건우를 경계했다.
“기세 좋게 달려들 때는 언제고 어째 지금은 그렇게 조심스러우십니까? 게다가 저 공 수사라는 분의 말씀대로 처음에는 세 분이 모두 안하무인으로 저를 핍박하더니 어찌 지금은 저 분에게 잘못을 모두 떠미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려.”
건우는 딱히 공 수사란 인간 수사만 못마땅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그들이 전투 중에 건우의 등장을 알아차리고 달려 나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건우를 핍박하려 한 것은 그냥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은 사실상 수미세계에서의 첫 공식 등장이 아닌가.
이런 자리에서 만만한 모습을 보일 수야 있나.
“오호? 믿는 구석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우리를 앞에 두고도 그리 당당하시니 말입니다.”
공 수사란 인간 수사가 의외란 표정을 지으며 건우에게 말했다.
그러면서도 손을 들어 뒤쪽에 있는 수하들에게 뭔가를 지시했다.
그러자 인간 수사들이 일제히 일정 방위를 접하고 늘어서 진법을 구축했다.
하지만 당장 공격할 생각은 없는지 진법의 기세는 평온한 상태였다.
“공 수사, 자중하시라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굳이 저 건우 수사라는 분과 싸울 일이 뭐가 있습니까?”
“누가 싸우자고 했습니까? 그저 만약의 상황을 대비하는 것일 뿐입니다. 저 건우 수사가 혹여 호지성의 놈들을 돕기 위해 왔을지 어찌 안단 말입니까?”
목령족 수양 수사가 공 수사에게 한 소리를 했지만 공 수사는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말은 정론이어서 딱히 나무랄 곳이 없기도 했다.
건우도 공 수사의 대처에 그리 기분이 상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직접 적대한 것도 아니고 만약을 대비하는 자세를 탓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건우 역시 손바닥을 뒤집어 부양도에 설치된 갖가지 공방 술법과 금제들을 불러 일으켰을 뿐이다.
거기에 부양도의 7층 누각에서 새까맣게 쏟아져 나오는 괴뢰들은 덤이었다.
“으음. 진정하시오 건우 수사. 나는 기장우라 합니다. 우리는 그저 건우 수사가 우리의 싸움에 간섭할 생각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왔을 뿐입니다. 아직 적아가 분명치 않은데 적절치 못한 언사로 수사를 노엽게 한 것은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건우가 그렇게 준비를 하자 곧바로 뱀족의 수사가 앞으로 나와서 두 손을 모아 공수하며 사과를 해 왔다.
그러자 목령족을 이끄는 수양 수사도 양 손으로 치맛자락을 잡고 살짝 무릎을 굽혀 인사를 했다.
“저 역시 사과드리겠어요. 한창 치열한 전투를 치르는 중이라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 큰 실례를 범했습니다. 수양미(垂楊薇)라 합니다.”
수양(垂楊)은 성(姓)이었던 모양이다.
건우는 우아한 자태로 고개를 숙이는 수양의 모습에 어느 정도 화가 풀렸다.
하지만 아직 남은 것이 있으니 건우의 시선이 이번에는 인간 수사들 쪽으로 향했다.
공 수사가 건우의 눈빛을 받더니 그 역시 두 손을 모아 앞으로 내밀며 허리를 숙였다.
“미한하게 되었소이다. 남명문(南冥門)의 공해찬(孔偕撰)이 결례에 진심으로 용서를 구합니다.”
그는 이전과는 달리 극진하고 정중한 태도로 건우에게 용서를 구했다.
건우는 세 수사들과 그들이 이끄는 무리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나는 이곳 호지성의 일과는 전혀 무관한 외인이니 싸움에 간섭하거나 끼어들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니 수사들께선 나를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믿겠습니다.”
“믿고 싶습니다. 하지만 또 그것이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니 이 공해찬이 건우 수사께 청이 하나 있습니다.”
기장우와 수양미는 건우의 말을 믿고 받아들이는 듯 했지만 공해찬은 달랐다.
건우가 공해찬의 뒷 말을 눈짓으로 재촉했다.
“수사께서 호지성의 전송진을 쓰시겠다면 싸움이 끝나거나 진정될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당연히 그렇겠지요. 그래서요?”
“그러니 한동안 이 근처에 머문다는 것인데, 이 비행 법보는 물론이고, 수사의 능력 또한 비범하니 우리들 입장에는 뒤통수에 창 하나가 서 있는 꼴이 아니겠습니까.”
“음, 하고자 하는 말이 뭡니까?”
“청하건데 이곳에 제 수하들 몇을 남겨 두어도 되겠습니까?”
“하하하 대놓고 감시를 하겠다는 말이구려?”
건우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공해찬을 보며 물었다.
“기분이 좋지는 않을 테지만 달리 생각하면 그것이 서로를 안심시키는 좋은 방법이 아니겠습니까.”
“음?”
“물론 이 또한 결례가 분명하니 싸움이 끝난 후에, 우리 남명문의 이름으로 건우 수사께 예물을 보내어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공해찬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고, 건우는 슬쩍 턱을 쓰다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내 부양도에 몇 사람 더 머문다고 크게 문제가 될 것도 아니니 그렇게 하지요.”
그리고 흔쾌히 공해찬의 제안을 받아 주었다.
그러자 기장우와 수양미도 다급하게 공해찬과 같은 조건으로 부양도에 수하들을 남기겠다고 나섰다.
그것은 사실 일종의 끈 만들기와 같은 것이었다.
공해찬은 건우의 변심을 미리 대비하면서 싸움이 끝난 후에 건우에게 예물을 보내고 교류를 이어갈 수 있도록 수를 써 놓은 것이다.
그리고 기장우와 수양미도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같은 제안을 했던 것이고.
“그럼, 나중에 다시 뵙기를 바라겠습니다.”
“다음에 뵈어요.”
“우리는 바빠서 이만 가 봐야겠소이다.”
그 후, 세 수사는 곧바로 수하들을 이끌고 급히 호지성의 전장으로 되돌아갔다.
건우는 다시 누각의 7층에 올라 앉아 호지성 쪽을 보며 전투의 흐름을 살폈다.
그러면서도 연신 호지성 상공에 대치한 네 명의 수사들을 살폈다.
화신기 이상의 경지가 분명한 네 명이 대치를 하고 있는데, 잘 보면 한 명의 수사가 세 명의 수사를 상대하는 형국이었다.
그러면서도 한 쪽의 세 수사 역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는 모습이었다.
‘저 한 명의 수사는 호지성의 주인인 듯 하고, 나머지 셋은 남명문, 목령족, 조인족이군.’
허공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호지성의 주인, 물로 만든 발판에 올라서 있는 남명문의 수사, 민들레의 홀씨 같은 우산을 든 목령족 수사, 회색과 은색이 뒤섞인 깃털 날개를 등에서 펄럭이는 조인족 수사.
건우는 그들이 대치하며 천지영기를 이용하여 일종의 의념 싸움을 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봤다.
‘역시, 입령기 정도 되면 권능이 중요한 힘이 되는 거군.’
과거 성광하주(星光河主)를 비롯한 고계 수사들과 싸울 때에 간혹 맛봤던 그 힘이 네 명의 입령기 수사들의 대치에 쓰이고 있었다.
‘저건 나도 성해룡주로 아공간을 구현해야만 어찌어찌 감당할 수 있는 힘이다. 그게 아니면 상대할 수 없어.’
건우가 슬쩍 입술을 깨물었다.
인계 최강의 화신기 완경이 이제는 고만고만한 수준으로 떨어진 것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어! 붙는다!”
그 때, 호지성의 상공에서 네 수사들이 본격적으로 맞붙기 시작했다.
< 가는 날이 장날이야? 왠 전쟁?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