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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안 될 놈들이었다 >
백 개의 고리가 금빛을 번뜩이며 허공을 수 놓는다.
그 하나하나는 길우몽의 극멸기를 잡아 상쇄시키며 삼두육비 거인의 빈틈을 예리하게 노린다.
얼음으로 된 종은 한 번 울릴 때마다 한파를 내뿜으며 여섯 개의 팔을 꽁꽁 얼려 놓는다.
극멸기의 힘으로 순식간에 그 한기를 몰아내지만 잠깐의 틈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런 중에 무허 선사의 선장과 염주에서 뿜어져 나온 황금빛은 계속 길우몽의 몸을 감싸고 있다.
무허 선사의 황금빛은 극멸기와 혼돈기 양쪽에 모두 피해를 주며 그 운용을 방해한다.
길우몽은 극멸기와 혼돈기가 움찔 거릴 때마다 소양 선자의 진백고에 상처를 입고 있었다.
삼두육비 거인의 몸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는데 그 모든 상처는 소양 선자의 진백고로 인한 것이었다.
물론 설국왕(雪國王)이라는 역락(逆落)의 얼음 종과 무허 선사가 입힌 내상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크아아앗! 죽여 주마!”
그런 중에도 길우몽은 이리저리 주먹질을 하고 세 개의 머리에서 각각 극멸기, 혼돈기, 영기의 광선을 세 수사에게 연이어 쏘아 내고 있었다.
무허와 소양, 역락은 자신들의 합공을 버티며 공격까지 하는 길우몽의 모습에 이전의 여유는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길우몽과 세 인계 수사는 모두 알고 있었다.
특별한 변수가 없다면 이 싸움은 인계 수사들의 승리가 될 것이다.
아주 조금씩이지만 길우몽의 내외상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는 중이었다.
그에 비해서 세 인계 수사의 피해는 그리 크지 않고, 간혹 피해를 입어도 동료에게 호위를 맡기고 요상단을 입에 털어 넣고 잠시 뒤로 빠져 쉴 여유가 있었다.
회복이 가능한 인계 수사들과 그렇지 못한 길우몽.
결과는 굳이 따져보지 않아도 나와 있는 셈이다.
그저 놀라운 것은 세 명의 합공을 끈질기게 버텨내는 길우몽의 능력이었다.
“우리가 셋이 아니라 둘이었다면 상황이 바뀌었을 수도 있겠소. 뼈를 묻는 것은 이쪽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는 말이오.”
무허 선사가 합장을 하고 선장과 염주의 황금빛을 한층 돋워 올리며 중얼거렸다.
“솔직히 믿어지지 않습니다. 고작 5백 년 전에 영체기였다는 놈이 어찌 우리 셋의 합공을 이토록 오래 버틸 수 있단 말입니까.”
“하아, 수사로만 본다면 저만한 인재가 또 없을 것입니다.”
역락과 소양 선자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무허 선사의 말에 동감을 표했다.
“으하하하하핫. 좋구나! 좋아!”
그 때였다.
갑자기 길우몽이 크게 웃으며 여섯 손으로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그 손뼉은 달리 무슨 특별한 공법이 아니라 그저 즐거움을 표현하는 방식에 불과했다.
그런 길우몽의 행동에 무허와 소양, 역락이 문득 공격을 멈추고 길우몽을 바라봤다.
하지만 언제든 길우몽이 다른 행동을 한다면 공격을 이어갈 준비를 한 상태였다.
혹여 길우몽이 이 짧은 여유에 내외상을 회복할 수작을 부린다면 가차 없이 공격을 퍼부을 것이다.
길우몽 역시 그 사실을 알았기에 다른 행동을 하지 않고 세 인계 수사를 보며 입을 열었다.
길우몽의 큰 웃음과 박수는 대화를 해 보자는 뜻이고, 인계 수사들 역시 그것을 받아들인 상황인 것이다.
“너희는 혹시 폐월이란 이름을 아느냐?”
문득 길우몽이 세 인계 수사를 향해 물었다.
“폐월? 그 진관국의?”
소양 선자가 먼저 폐월을 알고 있음을 드러냈다.
“뒤에서 수작을 부리던 놈들 중 한 놈이었지.”
역락 역시 폐월을 아는 듯 했다.
하지만 폐월에 대한 인식은 좋지 못해 보였다.
“네가 폐월을 안다? 그렇다면 설마 네가 그 놈들의 조직에서 멸계에 잠입시킨 밀정들 중에 하나란 말이냐?”
무허 선사는 소양이나 역락과는 달리 길우몽의 정체를 짐작했는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맞아. 나는 폐월이 멸계에 잠입시킨 위문진이야.”
길우몽은 순순히 무허 선사의 말을 인정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드디어 폐수고라는 이 공간에 대한 파악이 끝났기 때문이다.
이 공간은 쉽게 해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이 공간을 원상태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아주 복잡하고 정교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게다가 폐수고 안에서 강력한 영기나 극멸기의 파동이 일어나면 일정 기간 동안은 절대 해체 자체가 불가능했다.
이를 테면 뭔가를 가둬서 완벽하게 무력화 시킨 후에야 폐수고의 개방이 가능해진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길우몽 자신이 죽거나 혹은 세 인계 수사를 제압하거나, 혹은 모두가 의기투합 하지 않는 이상 폐수고의 해체는 불가능하다고 봐야 했다.
그게 지금 길우몽이 세 인계 수사에게 정체를 드러낼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고.
“허어! 기가 막힌 일이군. 어찌 이런 일이.”
무허 선사가 깊은 한숨과 함께 탄식을 터트렸다.
곁에 있던 소양과 역락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인 듯 경악의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서 묻는 건데, 너희 셋, 솔직히 이야기 해 봐. 멸계 수사인 거륙하마 광광과 한통속이지?”
길우몽이 그런 세 수사를 향해 지금껏 묻고 싶었던 질문을 감추지 않고 던졌다.
“네가 폐월의 밀정이라고?”
하지만 그의 질문은 다시 소양의 반문으로 돌아왔다.
“내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있나? 나는 진관국의 위문진이다. 쌍두단미영원의 영찬을 획득하여 진상한 공으로 이름을 알린 적이 있었지.”
“위문진, 그런 녀석이 있었지. 하지만 그 때는 고작 연신기였을 뿐이었는데, 지금은 우리와 같은 화신기 완경이라고?”
“가히 경이로운 성장이라 할 만 하군. 그래서 폐월이 너를 멸계로 잠입시켰겠지.”
역락과 소양이 위문진이란 이름을 기억에서 끄집어내며 감탄했다.
“그래도 이렇게라도 너를 처리할 수 있게 된 것은 다행이구나.”
그 때, 무허 선사가 굳은 표정으로 길우몽을 노려보며 말했다.
“나를 없애게 된 것이 다행이라고? 내가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들었을 텐데?”
길우몽이 그런 무허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물론이다. 네가 진법을 퍼트려 멸계의 고계 수사들을 본계로 돌려보내려 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이미 들었다.”
“그렇지. 그래서 우리가 나선 것이고.”
“설마 네가 인계 수사였을 줄은 몰랐지만 네가 멸계의 전력을 크게 약화시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우리가 나선 것이니까.”
무허의 말에 역락과 소양 선자가 이전보다 한결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결국 니들이 폐월이 말했던 그 ‘보신주의자’ 놈들이란 소리네? 어떻게든 멸계와의 전쟁을 지속해서 결국 고착화 시키려는 놈들.”
길우몽이 세 머리에서 여섯 개의 눈이 섬뜩하게 빛을 냈다.
“이미 백 만년을 넘게 살아온 우리들이다. 깨달음으로만 생각하면 영계에 오르는 즉시 입령기를 돌파하고 이후 성령기도 바라볼 수 있는 수준이지.”
“호호호.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그렇게 경지를 높인다고 해도 우리처럼 수 백 만년의 수명을 누린 수사는 영계에도 몇 되지 않는다.”
“그렇지. 영계의 입령기 수사라도 고작해야 10만 년을 넘기기 어렵다. 천겁이 있는 이상 영계에 오르더라도 불로불사는 꿈일 뿐이지.”
“하지만 여기는 어떠냐? 비록 화신기 완경이라 하지만 이대로 살아가면 언제까지나 불로불사하며 지낼 수 있다. 이런 상황에 굳이 3천 년에 한 번씩 천겁을 맞이해야 하는 영계로 오를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이냐?”
“허허허. 게다가 영계의 존재들은 인계에 직접 관여하지 못해 이곳의 상황을 알더라도 손을 쓰지 못하니 이 아니 좋을 소냐.”
무허와 소양, 역락은 신이 난 듯이 제각각 떠들며 그들의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그들 역시 이곳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더라도 밖으로 새어나갈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여러 날을 싸우는 동안에 길우몽의 능력은 모두 파악해서 변수 따위는 없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들은 길우몽이 자신들 셋을 상대하며 힘을 숨기고 있을 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혹여 감춘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들이 힘을 모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 그럴 줄 알았지. 그러고 보면 이전에 폐월과 그가 속한 조직이 일망타진 된 사건도 너희와 연관이 있었겠군. 그 때, 일을 저지른 것은 멸계 수사들이었지만 너희가 정보를 줬겠지?”
길우몽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짐작이 간다는 듯이 그렇게 말을 하고는 세 개의 머리를 동시에 저었다.
“그게 어쨌다는 것이냐? 솔직히 백 만 년이 넘도록 멸계 놈들과 싸우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인 멸계 놈들 따위야 전쟁 이후 30만년 정도가 되었을 때부터 언제든 밀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지. 인계는 서로 돕고 협력하며 함께하는 분위기가 무르익어 평화롭기 그지없고, 멸계란 적이 있으니 수련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호호호. 그래서 지금 인계 수사들의 수준은 그야말로 엄청나다 할 수 있지. 처음 멸계가 침입하여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에 비하면 수십 배의 전력이 상승했다는 이야기다.”
“허허허. 하지만 그렇게 경지가 높아진 이들은 대부분 지금의 상황에 만족했다. 특히 오래전에 천겁을 경험해 본 이들은 모두가 영계 비승을 거부하고 있고, 그런 선배들의 충고를 들은 많은 후배들이 또한 지금 상태의 고착화를 원한다.”
“뭣도 모르는 것들만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멸계 놈들과 싸우는 거지. 뭐 그것도 꽤나 위태해서 간혹 폐월 같은 것들이 나오면 그걸 정리해 주기도 해야 하지만.”
이미 속을 드러낸 이상 더는 감출 것이 없다는 듯이 무허와 소양, 역락은 제 마음대로 마구마구 떠들었다.
길우몽은 그런 그들의 말을 들으며 조용히 새로운 법보를 소환했다.
“음? 그건 뭐지?”
무허가 먼저 그것을 알아보고 표정을 굳히며 물었다.
“성해룡의 여의주.”
길우몽은 그렇게 대답하며 나타결공법을 거두고 성해룡결공법을 일으켰다.
그러자 삼두육비의 모습이 사라지고 용린과 두꺼운 갑각으로 갑옷을 입은 거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뭐냐? 성해룡? 그 영계의 신수가 어찌?”
무허는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그렇다고 상황을 위험하게 보지는 않았다.
새로운 공법을 펼치고 있지만 상대의 기운은 여전히 이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강력하고 방대한 의념이 부담이 되기는 하지만 그래봐야 자신들 셋을 능가하진 못한다.
그렇다면 어떤 싸움이 벌어져도 자신들이 불리할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며칠 동안 길우몽과 싸우면서 상대 전력을 어느 정도 파악한 후에 내린 결론이었다.
소양 선자와 역락 역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큰 위기감은 느끼지 않는 모습이었다.
도리어 그 짧은 시간에 저토록 뛰어난 공법을 두 가지나 익힌 후배의 모습에 대견해 하는 모습마저 보였다.
길우몽은 속으로 그런 세 수사를 비웃었다.
수 백 만년을 살았다지만 정말 삶이 곧 투쟁이고 생존이었던 과거에선 멀어질 대로 멀어진 놈들.
오래도록 최고의 자리에만 있으면서 위기를 겪지 못하니 감(感)을 잃은 것이 분명했다.
‘어디 그 웃음이 얼마나 가는지 두고 보자!’
이제는 길우몽 보다는 건우의 모습에 더 가까워진 그가 성해룡주에 영기를 불어 넣으며 그 능력을 사용했다.
쿠구구구구구궁!
“어엇?”
“이게 무슨 일이야?!”
“폐수고에 이런 것은 없었을 텐데?”
갑작스럽게 폐수고 안쪽의 공간이 급변했다.
숲과, 계곡과 산과 호수가 생겨났다.
거기에 짙은 영기가 가득 뿜어져 나왔는데 기이하게도 그 영기들이 세 인계 수사들을 압박했다.
꾸우우우욱!
“으으음!”
“어어어?”
“이, 이게 뭐죠? 천지영기가 우리를 찍어 누르다니!”
무허와 역락, 소양은 온 세상이 그들을 적대하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급하게 의념을 펼쳐 영역 확보에 나섰다.
하지만 그렇게 확보한 영역은 얼마 되지 않았다.
건우의 의념이 그들을 찍어 누르고 있었고, 거기에 더해서 루야까지 가세했기 때문이다.
루야는 여전히 아공간 안쪽에 머물며 밖으로 나오지 않았지만 열린 입구를 통해서 건우와 함께 하는 중이었다.
“그만 죽어라. 일단 너희를 제압하고 그 영혼만 남겨서 추혼술을 펼쳐 보겠다.”
건우는 세 수사에게 시간을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삼백육십성광검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 역시, 안 될 놈들이었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