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
< 궁(弓)은 시(矢)를 만나고 길우몽은 희희낙락 줍줍 >
길우몽이 호각을 불고 그 자리에 머문 지 사흘이 지났다.
가부좌를 하고 명상 수련에 빠져 있던 그가 문득 무언가 다가오는 느낌을 받고 눈을 떴다.
그의 시선이 멀리 산맥쪽을 향했는데 조금씩 시선이 발치 쪽으로 가까워졌다.
쿠르르르르르릉 쿠구궁!
콰르르르르르릉!
“으음.”
길우몽은 앞쪽의 작은 언덕을 허물며 나타나는 거대 괴수의 모습에 작은 신음 소리를 냈다.
그것은 흑선풍이 키우던 거대 곤충이었다.
“선태(??:매미의 허물)처럼 생겼군.”
크기가 백여 장에 이르는 거대한 곤충의 모습은 매미의 허물을 닮아 있었다.
일반적인 선태가 누런색인 것과 달리 이것은 반투명한 검은 색의 껍질을 가지고 있었다.
키리리리리릭 키리릭!
선태 괴수가 길우몽에게 머리를 내밀며 마름모꼴 끝을 가진 더듬이로 길우몽을 건드렸다.
길우몽은 그 전에 이미 보물 창고의 열쇠인 대롱 호각을 꺼내 들고 있었다.
선태 괴수는 그 호각의 기운을 확인하고는 곧바로 입을 벌렸다.
길우몽은 커다랗게 벌어진 입을 들여다보다가 성큼 그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쿠르르르르르릉!
길우몽이 입 안으로 들어가자 선태 괴수는 곧바로 다시 땅 밑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며칠 후, 그 곳에 일단의 수사들이 몰려와 선태 괴수의 기운을 확인했다.
“이미 며칠 지났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누군가가 있었습니다.”
“누군지는 알 수 없습니까?”
“그걸 어찌 알겠습니까. 그저 있었다는 사실만 알아내는 것도 어려웠습니다.”
“으음. 그렇다면 흑선풍의 보물이 누군가 다른 놈의 손에 들어갔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그렇지요. 하지만 언제고 드러나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그 많은 진극멸기를 모두 소비할 수는 없을 것이 아닙니까.”
“그야 그렇지요. 솔직히 우리들 또한 본계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더 이상의 진극멸기는 화중지병일 뿐이지요.”
“그렇더라도 흑선풍의 진극멸기는······.”
“연이 닿는다면 취할 방도가 생길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차라리 그 사이에 인계 놈들을 족쳐 조금이라도 더 많은 진극멸기를 얻는 것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흐음. 흑선풍이 그렇게 수 백 만 년을 모은 진극멸기를 눈앞에서 놓쳤다는 것이 문제지요. 자칫 심마까지 올지 모를 정도로 울화가 치밉니다.”
“크하하하. 생각해 보면 그것도 또한 그렇기는 합니다.”
“그렇지요? 크흐흐흐흐.”
“자! 예서 할 일도 없으니 이만 물러나십시다. 여러 분의 눈빛을 보니 가는 길도 평탄치는 않을 거 같지만 말입니다. 하하하하.”
“다들 강녕하십시오. 그럴 수 있다면.”
“그러게 말입니다. 흑선풍의 보물은 취하지 못했지만 지금 이쪽 산맥에 얼마나 많은 수사들이 들어와 있는지. 그들의 주머니를 턴다면 지금의 아쉬움은 어느 정도 달랠 수 있겠지요.”
“쯧쯧쯔. 다들 다음에 또 보십시다.”
화제가 빠르게 급변했다.
흑선풍의 보물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이들의 눈빛은 위험하게 번들거렸다.
지금껏 함께 했던 동료들을 이제는 사냥감으로 보는 시선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서로 모두 비슷하게 느끼는 중이었다.
자연스럽게 서로간의 거리를 벌리고 동행을 파기하며 또 한편으로는 암중으로 손을 잡고 사냥감을 특정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수십 명의 수사들이 갑작스럽게 둔광과 함께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도주를 하고, 누군가는 추적을 하며, 또 누군가는 유인을 하는 복잡한 움직임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런 움직임은 흑선풍의 세력권 전체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흑선풍의 보물을 욕심내던 이들이 그 보물이 사라진 것을 알게 되자 서로를 사냥하는 난장판이 벌어진 것이다.
* * *
“이곳은 마치 아공간과 비슷하군.”
선태 괴수의 뱃속으로 들어온 길우몽은 그곳에 대한 인상을 그렇게 표현했다.
그 말대로 선태 괴수의 뱃속에는 외부와 독립된 공간 하나가 존재하고 있었다.
물론 건우의 아공간과 달리 고작해야 수천 장의 크기에 불과했지만 선태의 본래 덩치보다는 훨씬 넓은 공간이었다.
“저것이 진극멸기를 담는 멸기함분(滅氣含盆)이런 것인가?”
그리고 그 공간의 중심에 흑선풍이 진극멸기를 담아 놓은 그릇, 멸기함분이 있었다.
원래 진극멸기를 담아두는 그릇은 멸기함분이라 부르지만 그 형태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그릇을 만드는 이에 따라서 완성된 그릇의 형태는 천태만상이다.
그래서인지 흑선풍이 만든 멸기함분은 곤충의 모습을 닮아 있었는데 특히 지금 길우몽이 들어와 있는 선태 괴수와 판박이였다.
“선태 괴수가 저 멸기함분을 만드는 주체이니 멸기함분이 저리 생긴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하겠군.”
길우몽은 그렇게 말을 하고는 조심스럽게 선태 모양의 멸기함분에 다가갔다.
매미 허물 모양의 멸기함분은 그 크기가 3장 정도 되었는데 검은 수정으로 만든 듯이 광택이 흘렀다.
길우몽은 멸기함분 앞에서 잠시 심호흡을 하고 흑선풍의 공간낭에서 뭔가를 꺼냈다.
“이건 뭐 벌레 성애자도 아니고.”
투덜거리는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멸기함분과 같은 재질로 만들어진 얇은 날개였다.
“완전히 매미 날개네. 역시 이것 매미였던 건가?”
길우몽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한 쌍의 날개를 멸기함분에 날려 보냈다.
이미 연화를 마친 날개가 날아가 멸기함분의 등에 안착했다.
파르르르르르르!
이후 멸기함분은 연화된 날개의 정보를 받아들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 크기가 손바닥 크기로 줄어들어 길우몽에게로 날아왔다.
길우몽은 긴장하며 날아오는 멸기함분을 받아들었다.
“흐음. 휴우우.”
그리고 무사히 손에 들어온 멸기함분을 보며 그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겨우 손바닥 크기로 보이는 멸기함분, 그 안에 얼마나 엄청난 진극멸기가 담겨 있는지 가늠하기도 어려웠다.
그런 엄청난 것을 손에 넣으려는데 긴장이 되지 않을 수가 있을까.
겉으로 태연한 척 해도 입 안은 바짝바짝 말랐던 길우몽이었다.
그런데 드디어 최종 과정까지 마무리하고 흑선풍의 보물을 취하는데 성공했다.
일은 완벽하게 마무리되었다.
멸기함분을 취했으니 당연히 선태 괴수 역시 길우몽의 것이 되었고, 선태 괴수가 있다면 어디든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을 것이다.
화신기 완경, 그 중에서도 입령기를 엿본 이들이라면 지하로 다니는 선태 괴수를 감지할 수 있겠지만 그들 조차도 선태 괴수를 잡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땅 속으로 움직이고 몸을 숨기고 또 위기의 순간에 금선탈각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선태 괴수에게 있었다.
금선탈각은 자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하기만 하면 인계에선 누구도 선태 괴수를 잡을 수 없다.
흑선풍이 선태 괴수를 보물 창고로 지정한 가장 큰 이유가 그것이었다.
언제든 몸을 피하고 감출 수 있는 능력.
물론 이제는 그 모든 것이 길우몽의 것이 되었으니 죽은 흑선풍이 알았다면 분통이 터져 다시 한 번 죽을 일이다.
“좋군. 그럼 이제 좀 더 깊은 곳에 들어가 숨어서 경지를 끌어 올려 볼까? 진극멸기를 이용할 수 있다는 건 이래서 좋단 말이지. 진극멸기만 있다면 경지를 올리는 것이 인계 수사들에 비해서 훨씬 쉽고 간단하니까.”
길우몽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선태 괴수에게 의념을 보내 지하 깊은 곳에 숨도록 명령했다.
* * *
스화화홧!
“으응?”
예예(刈叡)는 자신이 혼돈역을 빠져 나와 낯선 곳에 도착했음을 알아차렸다.
그 길우몽이란 아이의 말이 맞다면 이곳은 항(恒)이라는 나라의 편전일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그녀가 도착한 곳은 딱 보기에도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대전(大殿)의 실내로 보였다.
“침입자가 있다!”
그 때, 밖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리더니 줄줄이 밖을 둘러싸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예예는 그들이 대부분 성단기 수준의 수사들임을 파악하고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비록 내상이 심하다곤 하지만 그녀의 경지는 화신기 완경.
고작 성단기 따위를 신경 써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대신 그녀는 의념을 넓게 펼쳐 주변 상황을 살피기 시작했다.
“오호? 제법?”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예예의 아미(蛾眉)가 꿈틀거렸다.
궁궐 전체를 휘감는 진법과 결계의 움직임이 느껴진 탓이다.
혼돈역에서 진법 때문에 고초를 겪은 그녀에게 진법의 움직임은 무척이나 거슬리는 것이었다.
스르르르르릉!
당장 그녀의 손에 활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본체인 거대 각궁을 그대로 빼어 닮은 소궁이었다.
마음속의 분노가 활을 소환하는 것으로 드러난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깊이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안정시켰다.
길우몽이란 아이의 말대로라면 자신은 한 나라의 궁전에 불법으로 침입한 상황이었다.
지금 밖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은 침입자에 대한 당연한 반응이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들을 징치하는 것은 과한 일이었다.
“모두 멈추어라. 나는 이곳에 해를 가할 생각으로 온 것이 아니다. 그러니 책임자를 불러 오너라. 그와 오해를 풀어야 할 것 같으니.”
예예가 밖에 있는 이들이 듣도록 목소리에 영기를 담아 차분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 후, 오래지 않아 화신기 후기의 수사와 중기 수사 둘이 예예가 있는 편전으로 들어왔다.
“항국의 내정을 책임진 항주유라 합니다.”
“항국의 군사를 책임진 항우적이라 합니다.”
“항국의 외교를 책임진 항규지라 합니다.”
세 명의 화신기 수사는 동일하게 항(恒)이라는 성씨를 쓰고 있었는데 그것은 항국의 주요 관리로서 사용하는 이름인 듯 했다.
“나는 예예라 한다. 오래 전에 이곳이 아닌 다른 인계에서 영계 비승을 하다가 공간 폭발에 휩싸여 이곳에 오게 되었느니라.”
“다른 인계란 말씀입니까.”
예예의 말을 받은 것은 내정을 맡았다는 항주유였다.
그를 비롯한 세 수사들은 푸른 관복을 걸쳤는데 전형적인 늙은 관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
“증명할 수 있으시겠군요?”
“어렵지 않다. 나는 영족이라 태생이 되는 본체를 살피면 출신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요. 그 정도는 시간만 주시면 충분히 검증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인계 출신이 나타난 것은 정말 오랜 만의 일이군요.”
“비슷한 시기, 이미 이곳에 나와 같은 곳에서 온 수사가 있었다. 함께 비승을 하다가 폭발에 휘말렸지.”
“그렇습니까? 하지만 영계 비승을 할 정도로 높은 경지의 수사가 이쪽으로 넘어왔다는 이야기는 없었습니다만.”
“그래? 이상한 일이군.”
예예가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지을 때였다.
가만히 지켜보던 외교 담당의 항규지란 자가 앞으로 나섰다.
“오래 전에 제윤국의 국사인 손진이 다른 인계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수사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그 수사는 추혼술을 이용한 검증을 거부하고 손진 국사와 싸움을 벌인 후에 물러났다 했습니다.”
“오오, 그래서 그 후로 그 자가 사용한 특별한 영기 기운을 등록하여 공적으로 올리지 않았습니까?”
항규지의 말에 항주유가 생각이 났다는 듯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지금 예예 수사의 말을 들어보니 그 자가 어쩌면 예예 수사께서 아는 이가 아닐까 싶습니다.”
“으음. 멸계와의 싸움 때문에 의심스러운 이에 대한 검증이 반드시 필요한데, 그런 경우를 당하는 입장에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긴 하지요.”
“솔직히 다른 계에서 넘어오는 수사가 어디 흔합니까? 수백 만 년에 한 둘 있을까 말까 한 일이 아닙니까. 그러니 그런 일이 있어도 유야무야 되고 마는 것이지요.”
항주유와 항규지, 항우적이 각각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며 예예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예예는 별로 불괘한 기색을 보이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어쨌거나 이제 예예 수사께서 스스로를 증명하시면, 이후 그 수사를 만나서 확인을 해 주실 수 있겠지요. 당연히 그리 되면 그 수사에 대한 검증도 따로 할 필요가 없을 테고요.”
“그렇지요. 화신기 완경의 예예 수사가 신분 보장을 한다면야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그건 그런 상황이 되었을 때에 다시 이야기를 해도 될 문제겠지. 지금은 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다.”
세 항씨 관료들이 건우에 대해서 떠들 때, 예예는 그 문제를 차후로 미루었다.
성향상 누가 누구의 보증을 서거나 하는 것은 그녀가 아는 수사들 관계에서는 그리 탐탁한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녀 역시 이곳 멸계전이 벌어지는 인계의 가치관이나 문화에는 익숙치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서로 경쟁하며 살아온 예예가 어찌 모두가 함께 힘을 모으고 스스로를 희생하여 대의를 세우는 것을 생각할 수 있을까.
그런 예예의 반응에 관료 셋이 머쓱한 표정을 지을 때였다.
편전의 영기가 뒤흔들리며 황금색 빛이 퍼져 나갔다.
예예는 그것이 전송 령부로 누군가 이동해 오는 것임을 알아보고 살짝 긴장하며 소궁을 움켜 잡았다.
그리고 그 순간 황금빛이 사라지며 항국의 국왕인 종관(縱貫)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
그리고 그는 편전에 우두커니 서 있는 예예를 보고 눈동자가 커지며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 궁(弓)은 시(矢)를 만나고 길우몽은 희희낙락 줍줍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