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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예(刈叡) 수사? 만나서 반갑습니다 >
길우몽은 공간 이동이 완료된 순간 곧바로 경계 태세를 갖추며 의념을 넓게 퍼트려 주변을 살폈다.
그가 도착한 곳은 작고 아담한 석실로 한 변의 길이가 스무 걸음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석실의 벽과 천정, 바닥에는 아무 장식도 없이 밋밋했다.
하지만 길우몽은 겉으로 드러난 것이 전부가 아님을 느끼고 더욱 경각심을 높였다.
그런 그의 시선이 석실 중앙에 앉아 있는 수사에게 멈췄다.
‘예예(刈叡) 수사.’
건우에게 물려받은 기억에 선명히 남아 있는 영족, 예예 수사가 그곳에 있었다.
예예에 대한 건우의 마지막 기억은 영계 비승로를 거꾸로 돌아 나온 모습이었다.
그런데 지금 가부좌를 하고 눈을 감고 있는 예예의 모습은 바로 그 당시의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안색이 창백하고 기운이 많이 쇠한 느낌이 들기는 했다.
그녀는 길우몽이 나타났음에도 눈을 뜨지 않고 여전히 가부좌 상태로 굳은 듯이 앉아 있었다.
‘예예 수사가 진의 축이다. 이곳 염화업동은 물론이고 염사 혼돈역의 화염지대를 장악한 거대한 금제진의 중심이 저 예예 수사였군.’
아무것도 없이 비어 있는 것 같은 석실이지만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 영기의 흐름이 석실에 가득 차 있었다.
그 영기들은 바닥과 벽, 천정에 숨겨진 진법 문양과 법문, 도형 등을 거쳐서 화염지대의 거대한 진법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예예 수사가 깨어나지 못하는 거지?’
길우몽은 건우의 경험과 지식까지 모두 동원해서 예예 수사의 상태를 파악하려 애썼다.
그리고 결국 상황을 파악해 내는데 성공했다.
‘금제진과 연결된 상태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거군. 자신이 만든 진법에 잡아 먹혔어. 아니 혼돈역의 괴수들이 몰려들어 진법을 장악하는 바람에 주도권을 잃은 거야.’
원래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혼돈역의 괴수들을 진법의 지킴이로 써 먹었던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 괴수들이 진법을 조금씩 장악하여 도리어 예예 수사의 기운을 빼앗아 가는 상황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진법의 힘으로 괴수들을 제어할 수는 있는 모양이군. 그 덕분에 지금까지는 어찌어찌 버텼는데, 결국 인계 수사들과 멸계 수사들이 한꺼번에 몰려 오면서 파탄이 났어.’
길우몽은 거기까지 파악하고는 예예가 왜 이런 식의 진법을 펼쳤는지 살폈다.
그러자 답은 쉽게 나왔다.
진법의 초기 형태는 보호와 요상이었다.
예예는 자신을 보호하며 부상을 치료할 목적으로 진법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부상을 치료하느라 시간이 흐르면서 진법 자체를 괴수들이 장악하고 변화시켰다.
그 결과 염사 혼돈역에 거대한 금제진법이 만들어지고, 예예는 진법의 중심 축으로 잡혀 오도가도못하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이걸 어쩐다? 조만간 이곳에 인계든 멸계든 화신기 수사가 들이닥칠 것은 분명한데? 그렇게 되면 예예 수사는 당연히 먼저 도착하는 수사의 손에 들어가게 될 테지.’
화신기 수사가 지금의 예예 수사를 제압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건 곤란한단 말이지. 으음.’
길우몽은 잠시 고민을 하다가 조심스럽게 예예 수사에게로 다가갔다.
“움직이지는 못하셔도 정신은 있으시겠지요?”
그리고 예예 수사를 보며 물었다.
- 살필 것은 다 살핀 모양이구나. 그래서 이제 무얼 하려느냐? 멸계의 아이야.
예예 수사가 길우몽의 머릿속에 의념을 전달하며 물었다.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그 정도가 전부였다.
“음, 제가 사연이 좀 많이 복잡합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저는 멸계가 아닌 인계에 속해 있습니다.”
- 재미있는 말이구나. 사연이 많이 복잡하다고?
“그렇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제 사정이 중요한 것은 아니겠지요. 지금 중요한 것은 예예 수사의 일입니다.”
- 너! 네가 어찌 내 진명을 알고 있지?!
예예는 길우몽이 그녀의 이름을 거론하자 깜짝 놀라며 물었다.
“제 이름은 길우몽이라 합니다. 혹시 떠오르는 것이 없으십니까?”
길우몽이 그런 예예를 보며 물었다.
- 길우몽? 설마 네가 검선의 유산을 이었던 그 길 수사와 연관이 있느냐?
예예가 건우의 다른 모습인 길우몽이란 이름을 떠올리고 물었다.
“그러니 제가 예예 수사를 아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저는 예예 수사가 아는 그 길우몽은 아닙니다만.”
-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사연이 복잡하다 할 만은 하겠구나. 그래서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
예예는 지금의 처지에서 눈앞의 수사가 무슨 짓을 해도 막지 못함을 알기에 다시 담담한 음색을 되찾으며 물었다.
어차피 일을 주도할 것은 길우몽이니 그의 뜻이 중요할 뿐인 상황이었다.
“저는 어떻게든 멸계를 몰아내고 이곳 인계를 영계에 편입시키고자 합니다. 그런 중에 예예 수사께서 인계의 편을 들어 주시면 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 그러니까 내가 이곳 인계의 편에서 멸계와 싸워주기를 바란다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 그거야 내가 이곳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당연히 그리 할 일이다. 나도 영계 비승을 꿈꾸는 수사이니 당연한 일이지.
“그럼 된 것입니다. 저는 그 약속이면 족합니다.”
- 그래서 네가 나를 구하겠다고? 하지만 그건 어려운 일이다. 나는 이미 진법의 중심에 고정되어 쉽게 몸을 뺄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해결책도 가지고 있지요.”
- 해결책이라고?
예예가 뜻밖이란 듯이 물어 볼 때, 길우몽이 소매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것은 얼마 전 항국(恒國)의 종관(縱貫)이 그에게 주었던 령부였다.
“이것은 령부입니다. 물론 인계로 내려와 위력이 많이 줄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령부의 전송을 막을 것은 인계에 거의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 령부! 그것도 전송 효과가 담긴 령부라니! 그것이라면 충분히 진법의 제약을 끊어내고 빠져나갈 수 있겠구나.
예예는 길우몽이 꺼낸 령부에 그만한 위력은 충분히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영계 수준의 전송부인데, 그것을 인계 수준의 진법이 어찌 막을 수 있을까.
자신이 펼치고 괴수들에 의해서 변형된 진법이 강력하기는 하지만 그래봐야 인계의 최고 수준일 뿐.
- 그 귀한 것을 나에게 주겠다는 것이냐?
예예가 길우몽을 보며 물었다.
“제가 예예 수사를 강제하거나 제압해서 어디에 쓰겠습니까? 고작 영체기 초기에 불과하지만 제 앞가림을 예예 수사에게 맡길 정도로 부족하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이리 예예 수사께 빚을 지워두면 장차 좋은 일이 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길우몽이 안 그런 듯 하면서도 예예 수사에게 부담을 잔뜩 씌워 줄 말을 늘어 놓았다.
- 알겠다. 확실히 빚을 진 것은 기억해 두겠다. 언제든 네가 원할 때에 나를 부르거라. 그리하면 어떤 일이든 너를 위해 목숨을 걸겠다.
예예 수사가 길우몽에게 그렇게 말을 하는 순간, 예예 수사의 몸에서 거대한 각궁의 모습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그 각궁의 몸체에 조금 전에 예예 수사가 했던 말이 고래된 고대 법문으로 아로새겨졌다.
맹약이 말 뿐이 아니라 실제로 그녀에게 각인된 것이다.
길우몽은 그 모습에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곧 표정을 담담하게 바꾸고 손에 든 전송 령부를 예예 수사에게 날려 보냈다.
날아오는 황금빛 령부를 예예 수사가 애써 인도하여 가슴골 사이로 받아 감추었다.
“그럼 이제 곧바로 떠나시겠습니까?”
그런 예예를 보며 길우몽이 물었다.
- 그럴 수야 있겠느냐. 받은 것이 있으면 응당 돌려줘야지. 게다가 네가 말하지 않았더냐 내가 멸계와 싸워주길 바란다고.
“무슨 방법이 있겠습니까?”
- 내가 진법의 축임을 잊었느냐. 내가 하고자 하면 이곳 염사 혼돈역 전체를 날려버릴 수도 있음이다. 당연히 목숨을 버려야 가능한 일이었다만, 네가 준 령부가 있다면 일을 벌이고 몸을 빼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겠지.
“하지만 그리 되면 혼돈역에 들어온 인계 수사들 역시······.”
- 그들의 피해를 줄일 수 있는 방법도 생각을 해 보자꾸나. 일단 공간 균열부터 장악을 해야겠다.
“공간 균열을 예예 수사께서 조절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길우몽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염화업동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을까.
- 진법을 폭주시킬 각오를 해야만 할 수 있는 일이다. 공간 균열을 내 멋대로 움직이면 오래지 않아 염화업동의 진법이 일그러지게 될 것이다. 이후엔 빠르게 폭주하여 결국 붕괴되고 말겠지.
“그렇게 되면······.”
- 나도 감당하지 못할 일이 벌어진다. 염사 혼돈역 전체가 폭발과 붕괴에 휩싸일 테지. 물론 나는 그 전에 령부를 이용해 빠져 나가면 그만이지만. 호호홋.
“쌓인 것이 많으신 모양입니다.”
- 실없는 소리 할 것 없다. 어서 세세한 계획을 짜 보도록 하자꾸나.
예예 수사는 이전과 달리 생기와 의욕이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 뒤로 길우몽과 예예는 염사 혼돈역을 뒤엎을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 * *
촤좌좌좌좌좍!
“크아악!”
“와우, 몇 번을 봐도 무섭군요.”
길우몽이 중첩된 공간 균열에 갈려 나가는 멸계 화신기 수사의 모습에 소름이 돋는 듯이 팔을 부비며 말했다.
- 이미 염화업동에서 화산의 폭발과 공간의 뒤틀림에 심각한 부상을 입은 상태라 그런 것이다. 온전한 상태로 왔다면 저리 쉽게 죽지는 않았겠지.
예예 수사는 온 몸이 땀에 젖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임에도 곧은 의념을 전해왔다.
그녀는 지금 염사 혼돈역 전체에 퍼져 있는 진법을 폭주시키는 중이었다.
그녀가 만들었던 초기 진법은 흔적만 남고, 혼돈역의 수 많은 괴수들이 엮이고 엮여서 만들어낸 거대 진법.
그것이 지금 폭주를 일으키는 중이었다.
그 때문에 염화업동 내부는 그야말로 지옥이 강림했다.
수시로 공간 균열이 일어나 괴수와 수사들을 가리지 않고 갈갈이 찢어대고 있었다.
그런 공간 균열과 붕괴는 화신기 수사라도 만만히 볼 수 없는 것인데, 문제는 염화업동의 금제 역시 이전보다 훨씬 강해졌다는 것이다.
강해진 금제에 불규칙적이고 빈번하게 일어나는 공간 균열과 비틀림이 섞인 붕괴.
거기에 진법의 힘이 포함된 화산의 폭발까지 더해지자 염화업동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이 생명의 위협을 당하고 있었다.
예예는 그 중에서도 유독 부상이 큰 멸계 수사를 따로 빼내어 이곳 석실로 소환했다.
그리고 이곳으로 소환된 수사들은 도착과 동시에 특별히 만들어진 공간 중첩 균열에 갈려 나갔다.
콰르르르릉! 콰과과광!
- 흐음.
“괜찮으십니까? 예예 수사. 이쯤하고 그만 떠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석실이 뒤흔들릴 정도의 폭발 충격이 전해지가 길우몽이 예예에게 탈출을 권했다.
- 아직이다. 지금껏 나를 괴롭혔던 혼돈역의 괴수 놈들의 씨를 말릴 것이다. 아울러서 염화업동에 들어온 멸계 화신기 놈들도 끝장을 내야 하지 않겠느냐.
“하지만 예예 수사께서 너무 위험한 것이 아닙니까.”
- 괜찮다. 어차피 지금 염사 혼돈역에서 벌어지는 재앙은 내 힘이 아니라 진법의 힘이다. 오랜 세월 괴수들과 괴수들이 서로 맞물려 만들어낸 거대 진법이다. 그 중에 화신기 급의 괴수가 어디 한 둘이겠느냐? 거기에 혼돈역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화산의 힘까지 더했다. 호호호. 이참에 아주 이 염사 혼돈역 전체를 날려 버릴 것이다.
예예가 그렇게 광기를 뿌릴 때, 염사 혼돈역의 중심, 그때 화산의 깊은 곳에서 지금껏 억눌려 있는 용암의 기운이 진법의 힘을 뚫고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예예는 그 화산의 분출을 염화업동에서 마침 멸계 수사들이 많이 몰려 있는 구역으로 이끌었다.
금제 때문에 약해진 상태에서, 염화업동을 빠져나갈 궁리를 하고 있던 멸계 수사들은 일순간 화염의 재앙을 맞이했다.
그리고 그 중에는 멸계8존의 한 명인 흑선풍도 끼어 있었다.
흑선풍은 본래 벌레군집으로 이루어진 수사였다.
손톱보다 작은 벌레들이 무리를 이루어서 군체의식을 만들고, 그 군체의식에서 영성이 이루어져 태어난 벌레(蟲) 수사가 바로 흑선풍인 것이다.
그 흑선풍의 몸을 이루는 벌레들이 화산의 뜨거운 기운에 불타올랐다.
화신기 완경, 그것도 입령기를 엿본 흑선풍의 본래 능력이라면 진법의 힘이 포함된 화산의 열기라도 충분히 견뎠을 것이다.
하지만 하필 금제로 약해진 상황에서 공간 균열로 내상을 입은 상태까지 겹치자 화산의 열기를 버티지 못했다.
게다가 몸을 이루는 벌레들의 수가 줄어들수록 군체의식도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일정 수준 이상의 숫자를 유지하지 못하면 판단능력이나 사고력이 급격히 떨어지는 것이다. 오랜 세월 인계와의 전쟁을 이끌며 멸계8존으로 불렸던 흑선풍이 순식간에 불에 타올랐다.
그리고 그렇게 타오르던 흑선풍의 모습은 어느 순간 공간 균열에 휩싸여 사라졌다.
하지만 다른 멸계 수사들은 그런 흑선풍의 상황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들 역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진법 금제와 공간 균열에 화산폭발까지 감당하느라 다급했던 것이다.
< 예예(刈叡) 수사? 만나서 반갑습니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