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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산의 염화업동(炎火嶪洞) >
여섯 달을 지속한 전투 끝에 백여 명이 넘던 영체기 멸계 수사들이 몇 남지 않았다.
도관중과 네 화신기 수사들은 갈곡 끝을 지키던 염경과 그 부하 괴수를 결국 잡아냈다.
길우몽이 보기에 그 과정에서 다섯 화신기 수사의 부상도 만만치 않은 것 같았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화염지대의 금제를 받으면서 본명법보를 그토록 강력하게 사용했으니 어찌 후환이 없을 수 있을까.
그럼에도 도관중은 영체기를 다시 재촉하여 갈곡 다음의 영역으로 들어갔고, 그곳에서도 또 다른 수문장 괴수를 상대했다.
그 두 번째 수문장 괴수는 충형(蟲形) 괴수로 마디가 일곱 개인 지네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일곱 마디에 각각 기괴한 문양이 있었는데 그 하나하나가 특별한 힘을 지니고 있어 화신기 수사들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당연히 그 괴수 역시 화염지대의 강력한 금제를 발동시켰기에 더욱 상대하기가 어려웠다.
바로 그 두 번째 수문장 괴수를 상대하면서 특히 영체기들의 희생이 많았는데, 도관중과 화신기들이 영체기를 방패처럼 쓴 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곱 마디 지네 괴수의 공격 중에 피하거나 막기가 어려운 위험한 것이 있었는데, 다른 수사의 생명을 방패로 삼으면 어렵지 않게 막을 수 있었다.
그것을 알아차린 도관중과 화신기들이 영체기를 끌어 당겨 공격을 막는데 쓰는 일이 생겼다.
처음에는 그들도 그런 방식을 망설였지만 결국 어느 순간부터 영체기를 붙잡아 공격을 막는 것이 쉽고 간단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당하는 영체기들 입장에서는 이를 갈 일이지만 다섯 화신기에게 항변을 할 여건이 되지 못했다.
흑선풍이 분명 같은 멸계 수사에게 위해를 가하지 말도록 명했지만 도관중 등은 그것을 고려치 않고 마음대로 행동했다.
그리고 그 후, 세 번째 수문장까지 처리하며 결국 화산의 기슭에 도착한 지금, 영체기 멸계 수사는 열네 명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나마 죽은 이들 중에 영체라도 보존한 이들이 삼할은 된다는 것이 위안이면 위안이지만, 그들의 영체가 모두 도관중의 소매로 들어간 것은 또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모를 일이었다.
도관중이 그의 본명법보인 피리로 망령을 부린다는 점에서 그의 소매에 들어간 영체들이 그 망령으로 거듭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는 것이다.
“후우, 아슬아슬하군.”
매방이 가부좌를 한 길우몽 곁에 다가와 털썩 주저앉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길우몽이 슬그머니 눈을 뜨며 그런 매방에게 눈길을 주었다.
“어차피 이제 화산에 도착했으니 우리들이 나설 일은 없지 않나.”
길우몽은 슬그머니 저 멀리 보이는 화산의 분화구를 눈길로 훑으며 말했다.
그 분화구에 어슴하게 깔려 있는 보광의 흔적이 그의 감각에 잡히고 있었다.
길우몽은 어떻게 하면 저 화산 안으로 들어갈까를 고민하는 중이었다.
“그게 아닌 거 같네.”
매방이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무슨 말인가?”
길우몽은 대충 돌아가는 상황이 예상되었지만 확인하듯 물었다.
“염화업동(炎火嶪洞)으로 우리도 함께 데리고 간다더군.”
대답하는 매방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그는 조인족에 속하는 이로 땅굴 속으로 들어가는 것에 심리적인 저항감이 있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종족이 땅굴 속을 기어야 한다면 대충 이해할만한 거부감이다.
게다가 이곳 화산에 있는 염화업동은 말 그대로 불지옥이라 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기본적으로 화염지대의 금제가 강하게 깔려 있고, 안쪽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간 결계와 갈림길이 존재했다.
자칫 한 번 발을 디디면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할 수도 있는 험지인 것이다.
게다가 그런 곳에 화산에 터를 잡은 괴수들이 득실거렸다.
“금제 때문에 성단기 만큼의 힘도 제대로 내지 못하는 우리를 데리고 가서 어디 쓰겠다고?”
길우몽은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러자 매방이 조심하라는 듯이 눈짓을 줬다.
길우몽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도관중 등이 영체기 멸계 수사를 염화업동으로 데리고 갈 이유가 없었다.
있다면 일곱 마디 지네를 상대할 때처럼 짧게라도 방패로 쓸 용도 정도일까?
“어차피 빠져 나갈 틈은 없네. 화신기 어르신들의 이목을 어찌 빠져 나가겠나?”
길우몽은 금방 포기했다는 듯이 태연한 신색을 회복했다.
안 될 일을 두고 앙앙불락 하지 않는 것은 문진이 길우몽으로 활동하면서 내세우는 성격이었다.
게다가 길우몽은 어차피 염화업동 안으로 들어갈 기회를 엿보던 중이었다.
그런데 화신기들이 억지로 끌고 들어간다고 하니 일단 들어가는 문제는 해결된 셈이다.
“자네는 느긋하구먼. 뭔가 믿을 것이 있는 겐가?”
매방이 애달픈 눈빛으로 길우몽을 쳐다봤다.
“있기는 뭐가 있겠나. 그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운이 좋기를 바라는 거지. 지금껏 살면서 제법 운이 좋았다 할 수 있으니 이번에도 그렇기를 바라는 것일 뿐이네.”
길우몽은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그렇게 말을 하고는 다시 눈을 감고 나타결공법을 운용했다.
그동안 길우몽은 나타결공법의 공능 중에서도 특히 강체술에 큰 진전을 보았다.
이곳 화염지대의 금제가 강체술에는 효과가 조금 덜한 것을 틈타, 그 금제를 뚫는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과정에서 그의 강체술이 한 단계 더 성장했다.
이제 금제가 없다면 어지간한 영체기들은 감히 길우몽의 몸에 흠집 하나 내기 어려울 것이다.
그만큼 길우몽의 강체술 효과가 신장된 것이다.
“음, 어르신들이 부르는군.”
“그렇군.”
그 때, 화신기 중에 하나가 열넷 남은 영체기를 모두 소집하는 의념을 보내왔다.
길우몽과 매방은 지체하지 않고 염화업동의 입구로 날아갔다.
“열넷이라.”
영체기들이 모이자 도관중이 표정없는 얼굴로 그들을 훑어 보며 중얼거렸다.
그러던 중에 그의 시선이 길우몽에게서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별다른 말은 없이 다시 시선을 돌리는 도관중이었다.
“너희도 들어서 알겠지만 이곳은 염화업동의 입구다. 이곳 염사 혼돈역의 화산에는 염화업동의 입구가 이곳 말고도 여러 곳이 있다.”
도관중은 이미 모두가 아는 이야기를 무슨 이유인지 다시 언급하고 있었다.
“그 동안 우리 갈곡은 이곳까지 많은 희생을 내며 길을 뚫었다. 그리고 짐작하겠지만 반대쪽에서는 흑선풍께서도 함께 화산으로 향하셨지.”
결국 도관중의 갈곡이 미끼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다.
“우리들은 이미 목적을 달성했다. 그래서 나는 관대하게 너희에게도 보상을 나누려 한다.”
그런데 도관중이 보상을 나누겠다는 엉뚱한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이 염화업동 안에서는 수시로 공간 균열이 일어나 엉뚱한 곳으로 이동되곤 한다. 이것은 이미 우리들이 염화업동에 펼쳐진 결계와 금제를 일부 파악하여 확인한 것이다.”
그 또한 이곳에 있는 이들이라면 모두가 아는 이야기였다.
“그러니 우리가 너희를 데리고 들어가 너희를 제물로 삼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다. 그저 모두가 각자의 능력으로 염화업동의 금제를 뚫고 목적지로 향하면 그만이다. 그러니 엉뚱한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길우몽은 속으로 히죽 웃었다.
도관중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에겐 더 없이 좋은 일이다.
하지만 또 그 말을 완전히 믿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아마도 경지가 낮은 수사들을 밀어 넣어 그들에게 닥칠 부담을 조금이라도 줄여 보려는 의도가 분명할 것이다.
‘뭐, 어차피 들어갈 곳이었으니 좋게 생각하자. 대신에 항상 경계는 해야겠지.’
“하지만 한 가지는 알아둬라. 이곳 염화업동은 한 번 들어가면 쉽게 나오기 어려운 곳이다. 괜히 들어갔다가 금방 되돌아 나오겠다는 생각은 하지 말라는 소리다.”
도관중은 그렇게 경고를 하고 영체기 멸계 수사들을 향해 염화업동 안으로 들어가도록 손짓했다.
멈칫 거리는 영체기들에겐 곧바로 다른 화신기 수사들의 압력이 쏟아졌기에 피할 길이 없었다.
“들어가세.”
길우몽은 매방의 소매를 끌고 성큼성큼 염화업동으로 걸어들어갔다.
입구를 지나는 순간 몸을 휘감는 온갖 금제와 결계의 힘이 느껴졌다.
그리고 동시에 몸을 붕 띄우는 느낌과 함께 원치 않는 공간 이동이 일어났다.
“허어, 그것 참.”
길우몽은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거기에는 매방의 소맷자락 조각만 남아 있었다.
생명체는 상하게 하지 않았지만 둘을 떼어 놓은 셈이다.
모든 입장자들을 이런 식으로 홀로 떼어 놓는 것인지, 매방과 길우몽 둘이 운이 없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시작은 별로 달갑지 않았다.
‘막다른 동굴, 나아갈 길은 오직 한 방향. 게다가 벽과 천정, 바닥은 모두 강력한 금제로 강화되어 쉽게 뚫거나 무너뜨리기 어렵다.’
길우몽은 곧바로 주변을 파악해냈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한 마리의 괴수가 어슬렁거리며 움직이는 것도 알아차렸다.
‘영체기 수준의 육족망구(六足芒龜)다!’
길우몽은 곧바로 그 괴수의 정체를 파악했다.
여섯 개의 발이 달린 거북으로 등껍질에 침이 가득 돋아 있는 괴수였다.
그런데 이곳 화염지대의 육족망구는 그 침이 모두 강력한 화염 속성을 담고 있는데다가 침을 통해 기운을 흡수하여 몸을 회복하는 특성까지 있었다.
‘잡기 까다로운 놈인데? 특히 나처럼 맞붙어 싸우는 경우엔 때릴 곳이 마땅치 않지.’
단단하기 이를 데 없는 거북 계열의 괴수인데다가 몸에 가시와 침이 가득하여 때릴 곳도 별로 없다.
게다가 입과 꼬리, 여섯 다리는 제각각 껍질 속을 자유롭게 드나드는데 거북답지 않게 두 뒷발로 몸을 세워 네 개의 발을 팔처럼 쓰기도 한다.
‘그래서 배 부분도 약점이라 할 수가 없지. 그곳 또한 갑각이 단단하고 두껍다. 다만 배 쪽에는 가시나 침이 없다는 것이 그나마 낫다고 할까.’
어차피 막다른 곳, 길우몽은 나타결공법을 극성으로 끌어 올리며 육족망구를 향해 다가갔다.
하지만 지금은 홀로 있는 상황, 굳이 강체술만을 고집할 이유가 없었다.
나타결공법의 극멸기를 극성으로 끌어올리자 길우몽의 머리 위에 하나의 검은 덩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덩어리는 이전과 달리 이목구비가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붉은 눈동자가 성큼성큼 다가오는 육족망구를 가소롭다는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차아앗!”
길우몽이 손가락으로 수인을 짚고 육족망구를 가리키자 그 극멸기의 검은 머리가 입을 벌리고 검은 광선을 쏘아냈다.
쿠과과과광!
키에에에에!
육족망구는 곧바로 머리와 다리를 껍질 안으로 숨기고 방어 자세를 취했지만 극멸기의 광선은 그런 육족망구의 등껍질에 깊은 흠집을 만들어 내며 위력을 과시했다.
키르르륵 키르르르.
꾸물텅 꾸물텅! 스르르륵!
하지만 육족망구도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겠다는 듯이 몸에 난 침과 가시들로 화염의 기운을 흡수하여 등껍질의 상처를 회복했다.
“그래봐야 의미 없는 짓이다. 네가 나를 잡지 못하는 이상, 이 싸움의 승자는 내가 될 뿐이지.”
길우몽은 그런 육족망구를 비웃으며 다시 수인을 짚어 극멸기의 광선을 쏘아냈다.
육족망구는 어떻게든 길우몽에게 붙으려 했지만 그 때마다 길우몽은 이리저리 거리를 벌리고, 때로는 육족망구를 뛰어 넘어 위치를 바꾸었다.
결국 육족망구가 최후의 필살기로 몸에 난 가시와 침을 폭발하듯 쏘는 극단의 한 수를 썼지만 그조차 길우몽에게 큰 피해를 주지는 못했다.
“쯧, 내 강체술의 방어력을 네 공격이 뚫지 못하는구나. 제법 따끔하다만, 그게 끝이지.”
길우몽은 몸에 박힌 침과 가시를 뽑아내며 육족망구를 비웃었고, 이어서 곧바로 민둥산이가 된 육족망구에게 달려들어 직접 그것을 때려잡았다.
그런데 길우몽이 육종망구를 잡고 그 단(丹)과 등껍질을 챙겨 수습하고 있을 때, 갑작스런 공간 유동과 함께 누군가 이동되어 왔다.
길우몽이 급히 경계 태세를 갖추고 이동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 화산의 염화업동(炎火嶪洞)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