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환장 통수 선협전-177화 (177/499)

(176)

< 나는 멸계 수사 길우몽이다 >

멸계는 인계, 영계, 선계로 대표되는 대천세계에 속한 또 다른 특별한 계였다.

멸계는 이를테면 수도계 수사들의 역천지행(逆天之行)에 대한 천지법칙의 반작용으로 탄생한 곳이었다.

그 멸계는 수도계의 역천행도를 막고 벌하기 위해 존재하는 곳이라 할 수 있었다.

때문에 천지영기의 극성이라 할 수 있는 극멸기란 기운을 사용하여 수도계를 멸하려 한다.

물론 그렇다고 멸계가 항상 수도계를 마음대로 유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천지의 법칙에 따라서 침공이 허락 될 때에 멸계의 세력이 인계 혹은 영계로 침입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때는 항상 인계나 영계가 상위 계로 올라설 정도로 성장을 했을 때다.

“어쨌건 극멸기를 쓴다는 것만 빼고 생각하면 멸계 역시 수사들의 세상과 다를 것이 별로 없지.”

문진이 중얼거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그가 있는 곳은 멸계 영역의 깊은 곳이지만 정확히 어딘지는 알 수 없다.

교육을 마치고 문진은 무작위 전송진을 탔다.

멸계 영역으로 보내긴 하지만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는 전송진이었다.

다만 그 전송 수법이 멸계에서 이쪽 세상으로 넘어오는 것과 같은 형태를 취하게 만들어진 전송진이었다.

“이제부터 나는 길우몽, 멸계에서 떠돌아다니던 성단기 수사다. 마침 내가 활동하던 조루아 지역에서 인계 공략을 하는 중이라 틈을 봐서 공략지로 넘어왔다.”

당연히 이것은 문진이 앞으로 활동할 신분으로 꾸며낸 내용이었다.

이름을 길우몽으로 쓰기로 한 것은 익숙한 이름이라 그런 것일 뿐 특별한 의미는 없었다.

“어차피 멸계도 수많은 멸계 수사들이 활동하는 곳이다. 나같은 성단기 멸계 수사 따위의 신분확인은 불가능하지. 어느 구석에서 나타났다 사라지는 멸계 수사가 얼마나 있는지 어찌 알 것인가.”

문진은 그렇게 말을 하고 손을 뻗어 허공을 더듬었다.

그렇게 한참을 더듬자 문진의 손에 익숙한 패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귀팔면호령(魔鬼八面呼令)이었다.

의외로 멸계 역시 마귀들과의 교류가 많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멸계 수사들 중에 마귀와 계약을 하거나 혹은 거래를 하는 이들이 제법 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후, 문진은 멸계 영역에 잠입하여 활동할 때에 마귀팔면호령을 수신호부로 사용하겠다고 결심했었다.

더구나 멸계 영역이니 아공간을 잠시 사용한다고 인계의 추적에 걸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만약 감시망에 걸린다고 하더라도 멸계 영역에 있는데 인계에서 무얼 어떻게 할 것인가.

“든든하네.”

문진, 아니 길우몽은 소매에 넣어 놓은 마귀팔면호령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이전 거래를 통해서 화신기 급의 공격도 충분히 막을 수 있을 정도로 보강을 했던 영패였다.

이것이면 적어도 화신기의 공격 여덟 번은 막을 수 있으리라.

거기다가 문진의 특기인 법기 연결을 잘만 이용하면 영체기까지는 마귀팔면호령(魔鬼八面呼令)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어찌어찌 감당할 수 있을 것이고.

“쯧, 그래도 손에 쥔 것이 너무 없군. 정말로 산수가 된 느낌이야.”

길우몽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허공으로 몸을 띄워 주변을 살폈다.

이곳은 멸계의 영역.

이곳에선 언제 어떤 공격을 받을지 모른다.

특히 멸계 수사들은 경지가 낮거나 비슷하거나 높거나 할 것 없이 위험하다.

서로를 노리는 것이 당연하고, 상대를 죽여 진극멸기를 취하는 일이 흔히 벌어진다.

물론 고계 수사가 저계 수사를 죽여봐야 얻을 수 있는 진극멸기의 양은 그리 많지 않아 비효율적이지만 그런 것을 따지지 않는 미친 놈들도 많다.

“진극멸기. 그런 것이 있는 줄은 몰랐지.”

진극멸기는 멸계를 지탱하는 핵심이다.

멸계는 하나의 거대한 세상으로 되어 있는데, 그 넓이는 수도계의 개념으로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넓다.

그런데 그런 멸계도 중심으로 갈수록 더욱 짙은 극멸기가 퍼져 있는데, 그 중심에 있는 것을 진극멸기라 한다.

이 진극멸기는 이를테면 수도계 선계의 선기(仙氣)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멸계 수사들이 그 진극멸기를 얻으면 그만큼 경지 상승을 이룰 수 있지. 이건 수도계와는 많이 달라. 그저 진극멸기의 양만 채우면 곧바로 경지가 올라가다니.”

얻기는 어렵지만 얻을 수만 있다면 더없이 좋은 보물이 진극멸기다.

그런데 이렇게 침략 전쟁이 벌어지면 그 진극멸기가 전쟁 수행 보상으로 지급이 된다.

무슨 원리인지는 모르지만 공적에 따라서 진극멸기가 멸계 수사의 앞에 응결되는 것이다.

“천지 법칙이 멸계에 간섭한 결과겠지. 그것까지는 아직 내가 생각할 문제는 아니고. 자, 그럼 일단.”

길우몽은 멀지 않은 곳에 작은 협곡을 발견하고 그리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그곳에 작은 동부를 만들고 금제 몇 개를 설치하고 들어 앉았다.

길우몽이 설치한 금제는 극멸기를 이용한 것이지만 수도계의 금제와 크게 다르진 않았다.

그저 영기 대신에 극멸기를 쓴다는 것이 다르고, 극멸기를 쓰기 때문에 영기와는 전혀 다른 운용법을 배워야 했을 뿐이다.

철컥! 철컥! 철컥! 끼리리릭!

준비를 마친 길우몽이 평평하게 만든 동부의 바닥에 두꺼운 금속 판들을 꺼내 끼워 맞추기 시작했다.

원형의 판을 열여덟 조각으로 나눈 것인데, 그 모양이 일률적이라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금속판들은 서로 맞닿을 때마다 결속되는 소리를 내며 맞물렸는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열여덟 조각의 판을 맞춘 후에 드러난 것은 화살의 과녁처럼 동심원이 생긴 모습이었다.

길우몽은 그 동심원을 각각 오른쪽 왼쪽으로 순서대로 돌렸다.

“이건 뭐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었는지.”

길우몽을 투덜거리며 완성된 금속판에 자신의 피를 한 방울 떨어뜨렸다.

우우우우웅!

그러자 금속판으로 극멸기가 모여들며 검은 안개를 생성했다.

- 잘 도착한 모양이군.

이어서 안개 속에서 폐월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안개가 뭉쳐 폐월의 얼굴을 만들어냈다.

“그럭저럭 별 일 없이 잘 도착했습니다.”

- 다행이군. 그럼 이제부터 활동을 시작하겠군.

“서둘 생각은 없습니다. 어차피 수백, 혹은 수천 년의 세월이 필요한 일인데 하루를 서둘러 무얼 하겠습니까.”

- 그런가?

“일단 제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을 하고, 주위에 자리를 잡은 멸계 수사가 있는지도 알아봐야지요. 그리고 만만한 놈이 있으면 몇 놈을 잡아먹고 인계와의 전투 지역으로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 멸계 수사부터 잡겠다고?

“가진 것이 너무 없으니 그렇지요. 주머니가 든든해야 뭘 해도 기가 죽지 않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 무얼 하건 그거야 네가 알아서 할 일이겠지. 하지만 네 진정한 모습만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야 이를 말이겠습니까. 제 목적은 절대 잊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 새로 만든 전신 법기가 제대로 작동하는 것을 확인했으니 이제 그만 끊도록 하자. 앞으로는 정말 네가 필요한 것이 있을 때에만 연락을 하도록 해라. 다만 10년에 한 번은 정기적으로 연락을 해야 하고.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어르신.”

길우몽은 그렇게 인사를 하고는 전신 법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쩌저저저저적!

그러자 바닥에 깔려 있던 법기가 열여덟 개의 금속판으로 변해서 길우몽의 손에 쌓였다.

“그나마 해체가 편한 것을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길우몽은 그것들을 공간낭에 넣었다.

그러면서 다시 이맛살이 찌푸려지는 길우몽.

“이 공간낭도 너무 저급이야. 서둘러 바꿔야겠어. 어디 보자. 주위에 마땅한 놈들이 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길우몽은 손을 저어 전신 법기가 있던 바닥을 훼손하고 다시 동부 밖으로 나가 동부를 무너뜨렸다.

이후 길우몽은 허공으로 떠올라  천천히 이동하며 주변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   *   *

“뭐 하는 짓이냐?”

“글쎄, 뭐겠어?”

“노옴, 내가 만만해 보였더냐! 고작 성단기 중기 주제에 나를 넘봐!”

녹색 피부에 비늘이 돋은 멸계 수사가 길우몽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어쩌라고? 지금 네 상황을 봐, 여기서 네가 뭘 더 할 수 있지?”

하지만 길우몽은 한껏 여유가 넘치는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눈앞에 있는 성단기 후기의 수사는 그가 펼친 금제진에 갇혀 있는 상태기 때문이다.

그 금제진은 길우몽이 하급 법기를 여러 개 이용해서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과거 삼결방 법기와 구결방 법기, 이십칠결방 법기를 만들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이제는 여러 가지 다른 종류의 법기를 결합할 수 있게 되었다.

“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뭐든 말만 해라. 그럼 내가······.”

“굳이?”

“뭐? 뭐라?”

“굳이 그럴 이유가 없잖아. 너를 죽이고 취하면 될 일인데, 왜 후환을 남겨?”

“이 노옴!”

“그냥 죽어!”

길우몽은 녹색 피부의 멸계 수사가 제대로 분노를 터트릴 기회를 주지 않았다.

길우몽이 손가락을 튕기자 수십 개의 법기가 일제히 극멸기를 토해 내며 녹색 피부 멸계 수사를 짓눌렀다.

“크으으윽!”

“그냥 편하게 가라니까.”

길우몽은 나타결공법을 끌어 올려 머리 위에 극멸기를 뭉쳤다.

그리고 그 극멸기에서 커다란 창을 만들어 녹색 피부 멸계 수사를 공격했다.

치잉! 푸화확!

“커억!”

마치 핀에 박힌 곤충 표본처럼 금제진에 잡혀버린 녹색 피부 멸계 수사는 길우몽의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

그의 가슴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리고 그로부터 녹색의 독혈이 흘러나왔다.

“어차피 먹고 먹히는 거잖아. 우리 멸계 수사들 사이가 다 그런 거지 안 그래?”

“끄으으윽!”

“미련 남기지 말고 그냥 가. 네 공간낭은 잘 써 줄 테니까.”

“주, 죽일······.”

녹색 피부 멸계 수사는 끝까지 원독에 찬 눈으로 길우몽을 노려봤지만 그리 오래 버티진 못했다.

길우몽은 숨이 끊어진 멸계 수사를 한동안 유심히 살폈다.

극멸기를 이용해서 죽은 몸을 살피고 소생이나 부활의 수를 숨긴 것이 없는지 확인했다.

의외로 멸계 수사들은 남모르는 회생의 한 수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워낙 자주 죽고 죽이는 일이 벌어지다보니 그런 것인 모양인데, 때로 고계 수사는 그런 사실을 알고도 넘어가 주곤 한다고 했다.

물론 좋은 뜻은 아니고 어차피 커 봐야 다시 잡아먹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을 때의 일이다.

“어디보자, 공간낭의 내용물은 좀 부실하지만 수련 동부가 꽤나 괜찮으니 한동안 여기 머물러 볼까? 그 동안 얻은 것들을 정리하고 앞으로 쓸 법부와 법기를 조금 더 만들 시간도 필요하니까.”

사실 길우몽은 벌써 십여 명의 멸계 수사를 잡고 그 재물을 취한 상태였다.

모두 성단기 수준의 멸계 수사들로 기습과 함정을 이용해서 상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 덕분에 길우몽의 얄팍했던 공간낭이 제법 두툼해졌다.

치지지지지지직!

그 때였다.

죽은 녹색 피부 멸계 수사가 있던 자리에서 묘하게 전파 노이즈를 닮은 소리가 나며 뭔가가 나타났다.

순간 길우몽이 바짝 긴장하며 그 지점을 바라봤다.

챠르륵! 찌잉!

그리고 다음 순간 그곳에 검은 물방울 같은 것이 생겨나더니 순식간에 하나의 덩어리로 응결되었다.

“진(眞) 극멸기(極滅氣)!”

길우몽이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 나는 멸계 수사 길우몽이다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