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환장 통수 선협전-176화 (176/4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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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니까 뭘 하라고요? >

“너는 입이 무겁구나. 내가 너를 억지로 데리고 왔음에도 궁금한 것을 묻지 않으니.”

화신기 수사는 문진을 데리고 몇 번의 공간 이동을 했다.

그 이동 중에 두 번은 전송진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이동용 법부를 쓴 것이었다.

문진은 그 이동용 법부가 추적을 피하기 위한 것임을 짐작했다.

화신기 수사의 움직임이 무척 조심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폐월(廢月)이라 한다.”

어딘지 모를 지하 동부의 작은 석실에 도착한 후, 잠시 문진을 지켜보던 화신기 수사가 그렇게 다시 말문을 열었다.

문진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이곳이 어딘지 궁금하지 않으냐?”

“알려주실 때가 되면 알려주시겠지요. 이렇게 조심스럽게 이동한 것을 보면 이곳의 정체가 간단치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알려줄 때까지는 묻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신중하구나. 나쁘지 않다.”

폐월 수사는 문진의 태도에 좋은 점수를 준 모양이었다.

문진은 그를 자세히 살폈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평범하기도 하고 또 묘하게 기억에 남지 않기도 했다.

문진은 폐월이 일종의 은폐 술법을 펼쳐 모습을 감추고 있을 거라 짐작했다.

문진의 경지가 낮으니 폐월을 인식하는데 왜곡이 일어나는 것이다.

“나는 진관국에 속해 있지만 진관국에서 나를 아는 이는 몇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인계 전체를 따지더라도 내 존재를 아는 이는 쉰 명을 넘지 않고.”

폐월은 자신이 매우 비밀스러운 존재임을 그렇게 설명했다.

“이제 너도 나와 같이 세상에 아는 사람이 몇 없는 존재가 될 것이다.”

“네?”

“위문진은 이미 고계 수사의 제자로 들어가 수련을 하고 있다고 알려졌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네가 다시 세상에 나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잊혀지는 것이지.”

“제가 세상에 없는 존재가 된다는 말입니까?”

문진은 예상치 못한 폐월의 말에 깜짝 놀라 평정심을 잃은 듯이 따지듯 되물었다.

“그렇다. 앞으로 너는 나와 함께 일을 할 것이니 당연히 그렇게 될 수밖에.”

문진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화신기 수사가 자신을 쓰겠다는데 어떻게 거부할 수 있을까.

이미 답을 정해 놓고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상황이다.

“우리 인계는 오래도록 멸계와 싸우고 있다. 너도 알겠지만 이 멸계를 완전히 섬멸하고 우리가 승리하게 되면 우리들의 세상은 영계의 한 부분으로 승격된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멸계와의 싸움은 그 시작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오래 전부터 이어지고 있다. 사실상 지지부진하지.”

“······.”

“하지만 이는 우리 인계 수사들의 저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사실상 인계 수사들이 전력을 다한다면 멸계를 몰아내는 것은 분명 가능한 일이다.”

“그렇습니까?”

“그래, 분명 그러하다. 그런데 몇몇 보신주의자들이 그런 전면전을 피하고 오히려 현 상태를 유지하려 애쓰고 있다.”

“네? 어찌 그런 일이 있단 말입니까? 일부러 현 상태를 유지하다니요?”

“너는 이곳에 천겁이 없음을 아느냐? 대천겁도 없고.”

폐월이 문진을 보며 물었다.

그리고 그 질문을 받는 순간 문진은 ‘보신주의자’에 대해서 깨닫게 되었다.

“영체기와 화신기에 도달한 수사들 중에 이런 상태가 유지되면 영생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군요?”

“허어! 영민하구나.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이 매우 높은 위치에 있겠군요. 경지로든 신분으로든.”

“그래, 그 또한 옳다. 그래서 지금껏 멸계와 우리가 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지.”

“으음. 생각지 못했던 일입니다. 수도자로서 더 높은 곳을 향한 향상심을 잃다니, 정말 믿기지 않는 일입니다.”

문진은 고작 화신기에 만족하며 영생을 꿈꾸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더 높은 경지를 바라는 것은 모든 수사들의 본능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인계에서 영생이라니.

“영계로 가 봐야 다시 하찮은 저계 수가가 될 뿐이니 차라리 이곳에서 왕 노릇을 하겠다는 거지. 아마도 너무 오래도록 멸계와 싸우다보니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들을 가지게 된 모양이야.”

“세속의 욕망에 물들었다는 말씀이군요. 하긴 수사들의 꿈인 불로영생을 이곳에서 이루고 아울러서 왕 노릇까지 할 수 있다면 그도 나쁘진 않겠지요. 그래봐야 허상 속에서 사는 것일 뿐이겠지만 말입니다.”

“하하하. 세속의 욕망? 허상 속의 삶? 옳다 옳아.”

폐월이 허벅지를 손으로 치며 즐거워했다.

그러다가 문득 정색을 하며 문진을 노려봤다.

“지금 인계와 멸계 사이의 상황을 간단히 이야기 한 것은 내가 속한 조직이 멸계를 끝장내기 위해 암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굳이 암약이란 표현을 쓰실 필요가 있습니까? 인계 모두가 멸계와 싸우기 위해 힘을 모으는 상황인데 말입니다. 적어도 겉으로는요.”

“그래, 그럼에도 암약이란 말을 써야 하는 것은 우리 조직이 하는 일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저를 데리고 오신 것은 바로 그 일에 동참시키기 위해서입니까?”

문진은 이제 확답을 받겠다는 듯이 폐월을 똑 바로 보며 물었다.

“그렇다. 나는 너를 멸계 영역에 보내고자 한다.”

“멸계 영역이라니······.”

문진은 문득 반문을 하려다가 뭔가 깨달은 눈빛으로 폐월을 보았다.

그리고 잠시의 침묵 후에 그를 보며 물었다.

“제가 익힌 공법이 마침 상황에 딱 들어맞는 공법이군요. 나타결공법을 이용하면 극멸기를 쓸 수 있으니 멸계 수사로 위장하기 좋겠습니다.”

“그래, 바로 그러하다. 그래서 내가 너를 발견하지마자 이리로 데리고 온 것이다. 네가 익힌 그 공법에 대해서는 아는 이가 아무도 없는 상황이라 더욱 좋았지.”

“저를 멸계 영역에 보내어 밀정으로 쓰시려는 겁니까?”

문진은 인계에서 암약하고 있는 멸계 수사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폐월은 문진을 그런 식으로 쓰려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인계에 있는 놈들 대부분은 변절자들이다. 멸계의 꾐에 빠져서 멸계 공법을 익히고 극멸기를 숨겨 키우는 놈들이지. 결국 어느 순간 극멸기를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면 정체를 드러내고 멸계로 도주한다. 그 전까지는 밀정 노릇을 하다가.”

“그렇습니까?”

“그게 아니면 간혹 인계 수사를 죽이고 변장하여 잠입하는 경우도 있으나 그건 그리 많지 않다. 완벽한 변신이 쉬운 일이 아니니까.”

“그렇군요. 그런데 저는 어찌 멸계에 들여보내실 생각이십니까? 방법이 있습니까?”

문진은 문득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멸계는 신분 확인이 까다롭지 않다. 그저 극멸기를 사용할 수 있으면 의심을 받을 이유가 없지.”

“그렇습니까?”

“당연하다 극멸기를 쓴다는 것은 곧 멸계의 존재임을 증명하는 것이니까.”

“그렇지만 이쪽에서 멸계로 넘어가는 멸계 수사들도 있지 않습니까. 그들 역시 극멸기를 사용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몸 안에 있는 영기의 잔재를 완전히 씻어 내진 못하지. 어떻게든 티가 나게 되어 있다. 그러니 차별도 받게 되고, 의심도 받게 된다.”

“음, 그렇군요. 그래도 그런 식으로 멸계 영역에 잠입한 수사들이 없지는 않겠지요?”

“당연하다. 내가 속한 조직이 바로 그런 이들을 선별하고 교육해서 멸계 영역으로 들여보내고 그를 관리하는 일을 한다.”

문진은 폐월의 말에 지구의 첩보기관들을 떠올렸다.

폐월은 그런 첩보 기관에 속한 이라고 보면 될 거 같았다.

“하지만 지금껏 잠입시킨 수사들은 대부분 제대로 성과를 내지 못했다. 아쉽게도 일찌감치 죽거나 혹은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지.”

“그건 어째서 그렇습니까? 그만큼 차별이 크기 때문입니까?”

“차별도 차별이지만 사고 방식의 문제다.”

“사고 방식이요?”

“멸계 놈들은 서로 무한 경쟁을 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서로 믿고 의지하거나 혹은 돕는 일이 거의 없지. 있다면 오로지 힘으로 제압하여 밑에 두고 부리는 방식을 쓸 뿐이다.”

“그래요?”

문득 문진의 눈빛 깊은 곳에서 밝은 빛이 감돌았다.

들어보니 건우가 활동했던 다도해역 세상의 상황이나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인계에서 넘어간 멸계 수사들에겐 자주 인계 수사를 상대하는 일이 맡겨진다. 제대로 된 멸계 수사라면 부담이 없는 일이겠지만 밀정으로 들어간 경우는 그게 쉽지 않지. 한두 번도 아니고 계속 동료를 죽어야 하는 상황이 되면······.”

“심마를 견디지 못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겠군요.”

부동심.

마음의 안정은 수사에게 무척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동료를 죽이는 일을 빈번하게 벌여야 한다면?

당연히 언제든 파경이 생길 수밖에 없다.

‘뭐, 나야 그런 것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을 정도로 단련이 되기는 했지만.’

문진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내키지 않은 듯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대의를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매번 멸계 영역으로 잠입하는 이들에게 마음을 굳건히 먹으라 이르는데도······.”

뒷말은 듣지 않아도 상황을 알 수 있을 거 같았다.

문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게 거는 기대가 크다. 너는 멸계 영역으로 들어가 언젠가 큰 영향력을 가진 존재로 커야 한다. 그래서 어떻게든 멸계를 한 번에 고꾸라뜨릴 한 수를 만들어야 한다. 그를 위해서 너는 멸계 영역에서 활동하며 화신기를 넘어 입령기의 벽을 넘볼 정도가 되어야 한다.”

“그토록 오래 멸계에 잠입해 있으란 말씀입니까?”

“네가 돌아오는 것은 멸계가 완전히 무너지고 우리 인계가 영계의 한 부분으로 올라서는 때다. 그 때까지는 오로지 우리 조직과 비밀스런 소통만 할 뿐, 다른 교류는 완전히 단절해야 할 것이다.”

“멸계 영역으로 잠입해서 스스로의 노력으로 거물이 되어야 한다는 거군요. 그리고 그 위치를 이용해서 이 세상에 들어온 멸계 세력을 거꾸러뜨릴 회심의 수를 만들어 내라는 것이고요.”

“물론 그것을 위해서 우리도 네게 많은 지원을 할 것이다.”

“지원이라고요?”

“네가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든 인계 수사의 움직임을 네게 알릴 것이다. 그러면 너는 그 인계 수사를 처리하고 공간낭을 취하면 되겠지.”

“으으음. 동료를 죽이고 전리품 형식으로 조직에서 보내는 지원을 받으란 겁니까?”

“그렇게 해서 네 입지도 높이고 의심도 피하고, 조직의 지원도 받으니 일석 삼조가 아니냐.”

“동료를 죽이는 것에 대한 부담이 클 것입니다.”

“괜찮다. 너는 고작해야 이제 나이가 이백 정도에 불과하다. 어린만큼 적응도 쉬울 것이다.”

폐월은 별 문제가 아니라는 듯이 가볍게 대답했다.

물론 문진의 정신은 고작 200년 경험에 국한 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문진의 경험은 이쪽 세상의 인계 분위기를 도리어 거북해 할 정도로 경쟁과 대립에 익숙했다.

상대를 밟고 올라서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분위기라면 차라리 멸계 영역이 문진에겐 더 익숙할 거 같았다.

그리고 그 때문에 멸계 영역에 대해서 들었을 때 내심 폐월 모르게 회심의 미소를 짓기도 했다.

“좋습니다. 어차피 저에게 선택의 자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폐월 어르신의 뜻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당연히 그리해야지. 그리고······.”

폐월은 뭔가 하기 어려운 말이 있는 듯, 슬쩍 문진의 눈치를 살폈다.

“금제가 있겠지요?”

문진도 능히 짐작했다는 듯이 폐월을 보며 물었다.

“커어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네가 우리 조직을 알게 된 이상, 그것을 입에 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는 나도 받은 금제이고 지금의 경지에서도 풀어내지 못한 금제이다.”

“어르신도 풀지 못한 금제라고요?”

“금제가 간단한만큼 단단하기 때문이다.”

“간단한 금제라면 어떤 것입니까?”

“이곳에서 보고 들은 것을 어디에서도 발성하지 못하게 하는 금제니라.”

“고작 그것입니까?”

“더 강한 금제를 걸었다가는 멸계의 고위 존재에게 금방 들통이 날 것이다. 그러니 가장 기본적이고 간단한 금제만 거는 것이다.”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간단하다고 얕보아선 안 될 것이다. 이 금제는 영계에서 전해진 것이라 절대 만만한 것이 아니니.”

별 것 아니라는 듯이 받아들이는 문진에게 폐월이 경각심을 일깨우겠다는 듯이 경고했다.

문진은 폐월의 말에 표정을 고치며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네가 동의했으니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교육을 시작하자. 멸계 본계에 대한 기본 지식부터 시작해서 그들의 주요 공법이나 고위 존재에 대한 것들도 배워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울러서 극멸기를 쓸 수 있는 멸계 공법과 술법, 진법 등등도 새로 익혀야 한다. 극멸기를 처음 쓰는 네게 쉽지 않은 일이 될 것이다.”

“뼈를 깎는 노력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문진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어쨌거나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어차피 자신도 영계에 들고 수미세계와 다시 연결되기 위해서는 인계의 승리가 필요했다.

마침 본성에 맞게 날뛸 수 있는 멸계 영역으로 갈 수 있다면 나쁘지 않았다.

‘까짓, 멸계 영역을 접수 해 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이거 은근 기대가 되네?’

문진은 흥분으로 살짝 붉어진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 그러니까 뭘 하라고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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