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 본능이 시켜서 한 짓이다
번뜩!
문진의 모습이 허공에서 사라지더니 무너진 흙더미 한 구석에 나타났다.
그리고 문진이 흙무더기를 파헤치자 그 안에서 영체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향일(香一) 어르신!”
그는 이전에 영체만 남아서도 끝까지 경지를 희생하며 쌍두단미영원을 가두는 진법에 못을 날렸던 그 수사였다.
문진은 그 사실을 몰랐지만 토벌대에서부터 함께 했기에 그를 알아볼 수는 있었다.
= 당장! 쌍두단미영원의 몸에서 영찬을 회수해 숨어야 한다.
“네?”
= 어서 나를 쌍두단미영원의 사체로!
영체만 희미하게 남은 향일 수사가 급하게 문진을 재촉했다.
문진은 상황은 몰라도 다급함은 느꼈기에 곧바로 영기를 움직여 향일 수사의 영체를 감싸고 쌍두단미영원의 사체로 향했다.
= 후우, 잘 들어라.
영체가 깜빡 거릴 정도로 심각한 상태의 향일 수사가 문진을 보며 말했다.
“네, 어르신.”
문진은 공손히 대답했다.
= 이 쌍두단미영원의 몸에서 영찬이 만들어지고 있다. 하지만 언제 멸계의 존재들이 이곳에 들이닥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 전에 인계 수사들이 올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 그런 도박을 하기 보다는 네가 영찬을 보관하고 있는 것이 옳을 것이다.
“네? 제가요?”
= 그렇다. 그러하니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하거라.
어리숙한 모습을 보이는 문진에게 향일이 다그치듯 말했다.
문진은 곧바로 고개를 숙여 복종의 뜻을 보였다.
향일 수사가 영체를 움직여 쌍두단미영원의 은빛 머리로 다가가 손을 올리고 영기를 밀어 넣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웅! 샤라라라라라라!
그러자 쌍두단미영원의 은빛 머리가 가루가 되어 흩어지며 그 안에서 칠색 영롱한 옥석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 향일 수사는 허공에 손을 저어 어디선가 공간낭 하나를 불러왔다.
그리고 그 안에서 옥함 하나를 꺼내 쌍두단미영원의 영찬을 넣고 문진에게 날려 보냈다.
미끄러지듯 날아오는 옥함을 받아든 문진은 멀뚱히 향일 수사를 바라봤다.
= 그것을 무슨 일이 있어도 능토대 어르신께 드려야 한다. 알겠느냐!
“네, 넵. 알겠습니다. 목숨을 걸고 반드시 그렇게 하겠습니다.”
문진이 즉시 대답했다.
= 그래, 그래야지. 크으으으.
만족스러운 듯이 웃으며 말하던 향일 수사가 갑자기 신음을 터트리며 영체의 빛이 깜빡 거렸다.
문진은 그것이 영체가 소멸하기 전의 모습임을 직감했다.
= 그럼 이제 이것을 처리해야겠군.
향일 수사는 비틀비틀 날아가 쌍두단미영원의 검은색 머리로 향했다.
그리고 마지막 힘을 짜서 검은 머리에 영기를 쏟아 부으려 했다.
하지만 향일 수사의 마지막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약간의 영기를 밀어 넣은 직후, 영체 자체가 곧바로 소멸해버린 것이다.
문진은 그 모습에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어르신! 향일 어르신!”
하지만 이미 영체까지 소멸한 향일 수사가 대답을 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그런데 기현상은 그 직후에 일어났다.
향일 수사가 영기를 밀어 넣었던 검은 머리가 급격하게 쪼그라들더니 그 안에서 검은 빛의 옥석 하나가 나타난 것이다.
극멸기를 품은 영찬이었다.
문진은 그 옥석에 가득한 극멸기의 기운을 느끼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것은 문진이 어찌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문진은 급히 자리를 피하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또 다른 이변이 일어났다.
머리가 사라지고 몸통만 남은 쌍두단미영원이 다시 한 번 수축하며 가루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수백 장에 이르는 거체가 급격하게 쪼그라들고, 또 가루가 되더니 결국 하나의 흑은색의 옥석을 만들어 냈다.
문진은 그 흑은색을 보자마자 자신이 챙겨 넣었던 구슬을 떠올렸다.
그래서일까, 문진은 곧바로 공간낭에서 비어 있는 봉인 목함을 꺼내 그 흑은색의 옥석을 수습해서 공간낭에 다시 넣어 버렸다.
그것은 생각이전에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우우우우우우우!
그 때, 저 멀리서 장소성이 들리더니 빠르게 문진을 향해 날아들었다.
번쩍!
황토색 둔광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름 아닌 능토대였다.
문진은 급히 허리를 숙였다.
“네가 여긴 어쩐 일이냐!”
능토대가 사라진 쌍두단미영원의 모습에 깜짝 놀라며 문진에게 물었다.
문진은 급히 향일이 주었던 옥함을 능토대에게 내밀었다.
칠채의 영찬이 들어 있는 바로 그 옥함이었다.
“향일 수사께서 영체를 희생하시며 이것을 만들어 저에게 맡기셨습니다.”
“으음?”
능토대는 문진이 내미는 옥함에 무엇이 들어 있을지 짐작하며 손을 뻗어 옥함을 빨아들여갔다.
그리고 옥함을 열어 그 안에 있는 쌍두단미영원의 칠채 영찬을 확인했다.
“오오오. 이것이면!”
그리고 얼굴에 화색이 돌며 크게 기뻐했다.
그러다가 검은색 머리에서 나온 검은 옥석, 즉 극멸기를 품은 영찬을 보며 이마를 찌푸렸다.
“저것은 어찌 된 것이냐?”
능토대가 문진에게 물었다.
“향일 수사께서 어떻게든 저것의 생성을 막으려 하셨으나 힘이 부족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소멸하고 말았습니다.”
문진은 본 대로 능토대에게 알렸다.
“끄으응. 아쉬운 일이구나. 아쉬워.”
능토대는 이번에 희생된 다섯 영체기 수사들을 떠올리며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어차피 멸계와의 싸움에서 죽고 죽이는 일은 흔하니 이미 죽은 이를 빨리 잊는 습관이 들어 있었다.
능토대는 검은색 영찬에 수십 개의 법부를 날려 붙이고, 그것을 다시 옥함에 넣은 후, 금제 법부를 거듭 붙였다.
그리고 문진을 돌아보았다.
“어린 네가 고생이 많았다.”
“······. 제가 한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네가 쌍두단미영원의 흔적을 가지고 왔다고 들었다.”
양청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것이 이런 일로 번지게 될 것은 문진이 어떻게 알았겠는가.
“아닙니다. 그저 동기에게 불행한 사고가 있었을 뿐, 그것을 제 공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거기에 네가 나를 이곳으로 불렀고, 다시 영찬까지 수습하여 내게 바쳤다. 그 공을 작다고 할 수는 없을 터. 돌아가는 대로 마땅히 포상을 해 줄 것이니라.”
“가, 감사합니다.”
문진은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능토대는 그런 문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으나, 문진을 의심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문진은 능토대의 시선에 속이 바짝 타올랐지만 태연한 척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럼에도 능토대는 문진이 긴장하고 있음을 알았지만 연신기 주제에 화신기를 앞에 두었으니 당연한 일이라 여겼다.
“자, 그럼 돌아가도록 하자. 아, 그 전에.”
능토대는 문득 사방으로 소매를 휘저어 다섯 영체기 수사의 공간낭과 법부, 법기, 법보를 회수했다.
그 중에는 요괴 수사의 베틀 북 비행 법기도 있었다.
당연히 조금 전에 향일 수사가 불러냈던 공간낭 역시 능토대의 손에 들어갔다.
능토대는 그렇게 다섯 영체기 수사의 공간낭을 모두 회수한 수, 그 수사들의 죽음까지 확인했다.
이번 일로 다섯 영체기 수사가 결국 영체조자 남기지 못하고 모두 소멸해 버린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로고.”
능토대는 다시 한 번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영기를 뿜어 문진을 휘감고는 품에서 전송부를 꺼내 의념을 불어 넣었다.
그 직후 능토대와 문진의 모습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마계 수사와 공허체들이 그곳에 나타났다가 빈 손으로 되돌아갔다.
* * *
능토대와 함께 돌아온 토벌대 본진은 난장판이었다.
능토대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멸계의 대대적인 공세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공세는 토벌대에서 능토대를 지원하지 못하게 막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미 특수 진법을 익힌 영체기 수사들이 나가 있었으니 의미가 없는 짓이었다.
어쨌건 큰 싸움이 있었고 피해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번 싸움은 멸계의 판정패였다.
수비하는 입장인 토벌대 본진을 억지로 공격하느라 멸계 쪽의 피해가 훨씬 컷던 것이다.
“조만간 네가 세운 공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기다리고 있거라.”
능토대는 문진을 토벌대 진영 한 곳에 떨구고 모습을 감추며 그렇게 말했다.
문진은 그렇게 사라진 능토대가 있던 자리를 향해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하지만 그가 허리를 폈을 때에 그의 얼굴은 표정이 사라져 있었다.
‘어서 빨리 경지를 올려야지 이건 뭐 하루살이 인생도 아니고.’
영체기와 화신기 사이에서 무력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문진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리고 서둘러 몸을 움직여 상동강 수련원 동기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수좌!”
“무사히 돌아왔구나!”
“멸계의 공격이 극심한데 모습이 보이지 않아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지 않았나 걱정했다.”
“어서 와라.”
문진이 나타나자 동기들이 모두 반색을 하며 크게 반겼다.
사실 수좌가 새로 정해지지 않으면 단체 활동 자체가 어렵다.
연신기 수사들은 어떻게든 무리를 짓고 수좌를 배정받아야 활동을 하고 인정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있던 수좌가 사라지고 새로 임명도 되지 않으니 상동강 수련원 출신들은 불안했던 것이다.
“나는 괜찮다. 너희는 이번 공격에 탈이 없었던 모양이구나.”
문진은 동기들의 숫자가 줄지 않은 것을 보며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야 배치 자체가 되지 않았지. 수좌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잖아.”
“그건 그렇지.”
“그래서 수좌는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다닌 건데?”
“그러게, 궁금하네? 갑자기 영체기 어르신들에게 불려가지 않았어?”
별좌와 행좌들 모두가 문진의 일을 궁금해 했다.
문진은 별반 숨길 일도 아니다 싶어서 그간 있었던 일을 차근차근 이야기해 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며칠 후!
토벌대 전체를 뒤흔드는 역대급 공헌 점수 획득자가 나타났다.
“미쳤어! 연신기 주제에 성단기 공허체를 막아서서 다른 이들의 도주를 도왔다고?”
“쌍두단미영원의 종적을 찾는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했다고?”
“쌍두단미영원, 그 화신기 괴수의 영찬을 획득해서 그것을 능토대 어르신께 드렸다고?”
“그 뿐만이 아니잖아. 영체기 어르신들이 쌍두단미영원을 붙잡아 두는 동안에 이곳으로 돌아와 능토대 어르신을 모시고 간 공도 있다고!”
“도대체 이건 뭐 하는 놈이야? 고작 연신기 주제에 이런 공을?”
“그나저나 이 공헌점수면 못할 것이 없는 거 아냐? 연신기라면 축기기를 지나서 성단기까지는 수련 자원이 부족할 일이 없을 거 같은데?”
“그러네? 우와 부럽다. 게다가 특별 혜택으로 장서고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게 해 준다는데?”
“뭐야, 그럼 무슨 공법이든 마음대로 익히란 소리잖아? 그것도 공헌점수 소비 없이!”
“정말 부럽군. 이러면 오래지 않아서 새로운 성단기 수사가 탄생하는 거 아냐? 수련 자원만 빵빵하게 지원되면 몇 백 년이면 되는 일이잖아!”
“그러게, 정말 부럽다.”
위문진이란 연신기 수사에 대한 이야기는 토벌대 전체를 뒤흔들었다.
그리고 위문진은 그렇게 받은 공헌 점수 중에서 일부를 헐어 상동강 수련원 동기들에게 베풀었다.
그것만으로 과거 양청이 말했던 동기 전체의 축기기 도전이 가능했다.
당연히 동기들 모두는 문진에게 고마워했고 그렇게 동기들 사이의 우애가 돈독해졌다.
그 후 문진은 별좌들에게 상동강 소성 수련원생의 관리를 맡기고 축기기 승경에 도전하는 수련에 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