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 수미선문의 선인과 아이컨택?
[수미선문(須彌禪門)]
오색영롱한 빛이 감돌고 현묘한 문양이 수시로 형을 바꾸는 웅장한 비석에는 그 네 글자가 돋을새김으로 드러나 있었다.
언제나 수미세계로 들어가는 과정이면 한 번씩 거쳐 가는 곳.
이곳에 오면 건우는 자신이 매번 여기에 온 것을 떠올리지만 커다란 종소리와 함께 수미세계로 쫓겨 가며 그것을 잊었다.
이번에도 건우는 수미선문의 비석 앞에서 그 비석을 감싸는 빛과 문양의 현묘함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 수미선문 비석에 담겨 있는 현묘한 이치는 화신기 후기에 이른 지금도 감히 살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항상 그랬던 것처럼 어떻게든 작은 실마리 하나라도 잡아 보려 그 현묘함의 끝자락을 찾는 건우였다.
그런데 그런 건우의 시선에 이전과는 다른 모습이 들어왔다.
비석 밑에 누군가 서 있었던 것이다.
고풍스러운 학창의를 입고 머리를 틀어 올려 가늘고 긴 사슴뿔 비녀를 가로로 지른 그는 백발 백염이 인상적인 노인이었다.
노인의 얼굴에는 홍조가 돌아 무척 혈색이 좋아 보였다.
건우는 수비선문의 비석을 한 눈이 담을 정도로 멀고 높은 허공에 있었는데, 그 비석의 제일 아랫부분에 있는 노인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까마득한 거리를 무시하고 건우의 시선과 그 노인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아! 아아아아!”
순간 건우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려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 그는 그 순간 몰아의 상태로 빠져들고 말았다.
완전한 몰아(沒我)!
자신을 잊어버리는 것은 곧 자신이 아닌 모든 것도 잊는 다는 것.
진정한 몰아는 그 사실조치 잊어버리는 것일진대.
= 오오옴 갈(喝)!
순간 건우의 머릿속에 노인의 호통이 번개처럼 내리쳤다.
그리고 건우는 다시 아공간의 수미산겨자씨 밑에서 퍼뜩 정신을 차렸다.
“으음!”
- 건우님, 괜찮으세요?
그가 깨어나자 루야가 호들갑을 떨었다.
머리와 몸의 크기가 같은 이등신 몸매의 루야 얼굴에 눈물이 가득했다.
“무슨 일이야?”
건우가 당황하며 물었다.
그의 감각에 아공간이 크게 훼손되어 있었다.
- 흐흑, 몰라요. 갑자기 건우님의 몸에서 생기가 빠져 나가면서 아공간이 무너지기 시작했어요.
“뭐라고?”
- 제가 버틴다고 버텼는데도 절반 정도가 사라졌어요.
루야가 말하지 않아도 아공간이 곧 의념공간이라 건우 역시 그 사실을 즉시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곧 안심하며 표정이 풀렸다.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다.
건우가 의식에 큰 타격을 입는 바람에 의념 공간이 크게 뒤흔들렸지만 시간만 지나면 다시 회복할 수 있었다.
“괜찮아.”
- 괜찮기는 뭐가 괜찮아요. 건우님은 방금 죽다가 살아났다고요.
“으음. 그건 그렇지. 자칫 나 자신을 잃을 뻔 했으니까.”
몰아의 상태가 항상 긍정적인 것은 아니란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된 건우였다.
몰아(沒我)에 이르더라도 자신을 잃지 말아야했다.
‘몰아이면서 자신을 잃지 않는다? 이게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몰아의 위험을 알았지만 또 동시에 진정한 몰아가 그만큼 어렵고 위험하다는 사실도 알게 된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건우의 머릿속에는 비석 아래의 노인이 전한 지식이 한 가득 들어 있었다.
“그래도 상황 파악을 하게 되었으니 이 정도 피해는 감수할만 하다.”
건우는 다시 표정을 담담하게 바꾸고 말했다.
- 상황 파악이요?
루야가 궁금한 듯이 물었다.
“수미세계에 대한 이야기다.”
- 말씀해 주실 거죠?
“그래, 그러니까······.”
건우는 몰아의 순간 노인이 전한 내용을 루야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 * *
수미세계.
그곳은 사실 대천세계의 영계 중에 하나였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인계가 있고, 그 인계 위에 삼천육백 영계가 있으며 그 영계 위에 하나의 선계가 있다.
그런데 인계나 영계는 그 주민들이 성장하면 어느 순간 상계로 편입되는 시험을 치르게 된다.
해당 계(界)의 전반적인 수준이 높아지고 천지 영기의 농도가 한계를 넘으면 멸계가 등장한다.
멸계는 대천세계의 거대한 흐름이 만들어낸 장벽이며 시험과제라 볼 수 있다.
수사 개인이 상계로 비승을 할 때에도 천겁과 그보다 더한 시험이 닥치는데, 계 하나가 승격을 하는 데야 오죽할까.
“그런데 수미세계가 바로 그 상황이 된 것이지.”
- 그러니까 영계에 편입될 상황이 되었다고요?
“아니, 수미세계는 이미 영계라 했잖아. 선계에 편입될 상황이 된 거지.”
- 와, 대단하네요.
“그런데 그 상황을 지켜보던 노야는 수미세계가 절대로 선계로 오를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
- 왜요?
“선계 진입을 막으려는 멸계의 힘이 너무 강했거든. 여러 상황이 꼬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당시 수미세계의 힘이 약하기도 했고, 멸계의 힘이 이례적으로 강하기도 했지.”
- 그럴 수도 있어요?
“한동안 멸계의 힘이 쓰일 곳이 없이 쌓이기만 했기 때문이다. 오래도록 선계로 오르는 시험이 없었다더군.”
- 그러니까 시험이 없으니까 멸계의 힘도 계속 쌓이기만 했다고요?
“그래 그런 중에 하필이면 수미세계가 선계에 오를 자격을 얻게 된 것이지. 당연히 절대 성공하지 못할 그런 상황이었지.”
- 그래서 그 노야(老爺)란 사람이 수미세계를 겨자씨에 넣어서 그 분 세상으로 튕겼다고요?
“그래, 그렇게라도 대천세계의 법칙을 벗어나려 했던 거지. 덕분에 노야는 반서(反?)를 당해 지금은 어찌 되었는지 알 수도 없고.”
- 어찌 되었는지 모른다고요? 그런데 그 노야가 건우님께 이런 사실을 알려 줬다면서요?
“미리 준비 해 둔 거지. 어쨌거나 노야의 전언에 따르면 내가 이런 세상에 온 것도 다 준비된 것이라 하더군.”
- 이런 세상이요?
“영계로 편입되는 시험을 치르는 곳.”
- 아, 그래요?
“그래야만 내가 영계로 갈 수가 있다더군. 내 아공간에 영계인 수미세계가 들었으니 그 상태로는 아무리 애를 써도 영계 비승을 할 수 없다는 거지.”
- 그래서 건우님이 십이비선의 유산으로 만든 통로를 들어가지도 못했던 거군요?
“그렇지. 대신에 이곳처럼 인계 전체가 영계로 올라가는 상황이면 수미세계를 아공간에 가지고 있더라도 영계로 묻어갈 수 있다는 거지.”
- 그래서 기회가 생겼을 때, 건우님을 이곳으로 보낸 거고요?
“꼭 여기여야 하는 건 아니었지. 그냥 그런 시험을 치르는 인계로 넘기는 거지. 원래는 그 분이 알까기를 했을 때에 이쪽으로 떨어졌으면 편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래서는 수도계에 적응을 못한 내가 버티지 못할 거라고 본 거지.”
- 그러네요. 그 때처럼 어리버리 했으면 이번에 멸계수사로 몰려서 추혼술을 당하고 폐인이 되었겠죠.
“아무튼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이제 이쪽 인계가 영계로 오르도록 힘을 써야겠지.”
- 하지만 건우님은 이쪽 세상에선 공적인데요? 그게 아니어도 신분을 만들기가 쉽지 않고요.
루야는 애초에 건우가 고민하고 있던 상황을 다시 되새김질 했다.
수미세계에 대한 비밀을 알았든 어쨌든, 당장 건우의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하하, 그에 대해서도 돌파구를 얻어왔다.”
그런데 의외로 건우의 표정은 밝았다.
노야가 건우에게 도움이 될 공법 하나를 전해 줬기 때문이다.
- 돌파구라라고요?
“그래. 원래 나는 아공간에 머물면서 의념 수련을 할 생각이었다.”
- 그랬죠.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건우님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면 그 때, 밖으로 나가실 계획까진 세웠죠. 그래도 신분 획득에 대한 것 뾰족한 수가 없었지만요.
“그런데 노야가 나에게 새로운 수련 공법 하나를 전해 주었다.”
- 수련 공법이요?
“유혼결(幼魂結)이라 하는 공법이다.”
- 그게 뭔데요?
“혼을 나누어 새로 수련을 하는 공법이다. 인계에서 한 번, 영계에서 한 번, 선계에서 한 번을 수련할 수 있는 특이한 공법이지.”
- 혼을 나눈다고요?
“그렇다. 어린 혼을 만들어서 새로운 육체를 얻고, 그 육체로 수련을 한 후에, 본체와 같은 경지가 되면 두 혼을 합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곧바로 의념이 곱으로 늘어나게 된다.”
- 의념이 두 배가 된다고요?
“단순 두 배와는 다르지. 너는 내가 다른 수사들에 비해서 훨씬 강력한 의념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느냐?”
- 그건 알죠.
“그런 것이다.”
- 그런데 혹시 새로운 몸을 얻어 수련을 하다가 죽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 동안의 노력이 헛것이 되고 아울러서 혼의 일부를 잃게 되니 본체도 수련상의 타격을 좀 받게 되겠지. 하지만 본체에게 크게 문제는 없을 것이다.”
- 그럼 실패하면 다시 시도할 수는 있어요?
“그건 융통성이 좀 있더구나. 영혼 융합은 각 계별로 한 번씩만 가능하지만 분혼을 성장시키는 것은 여러 번 시도해 볼 수 있다.”
- 대신에 영혼의 패해가 누적되겠죠?
“잘 아는구나. 어쨌건 이 유혼결이란 것은 지금의 내 상황에서는 딱 맞는 공법이다. 완벽하게 새로운 신분을 얻을 수도 있고, 의념의 수련도 함께 할 수 있으니 말이다.”
- 그건 그러네요.
“자, 그럼 분혼이 차지할 새로운 몸을 찾아봐야겠구나. 될 수 있으면 수련 자질이 뛰어난 재목이면 좋겠는데······.”
* * *
진관국(津寬國)은 강이 많고 평야가 발달한 나라로 대륙의 서쪽에 있어 동쪽의 멸계 영역과 거리가 멀었다.
때문에 멸계와의 전쟁에서 직접적인 피해가 적은 나라로 평화로운 분위기가 성했다.
그런 진관국의 주요 대성들 중에 한 곳인 삼합하(三合河) 대성(大城)은 세 개의 강이 하나로 만나 흐르는 곳으로 물류 이동의 중심이었다.
세 개로 합쳐지는 강은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북강(北江), 북동 태준산맥에서 흘러오는 엄강(嚴江), 동쪽에서 흘러오는 동강(東江)이 있었다.
지금 그 동강의 상류에 있는 상동강(上東江) 소성의 노전현 위씨 가문이 슬픔에 잠겨 있었다.
위씨 가문은 이곳 노전현의 지방 유지로 많은 전답을 가지고 소작을 부리는 집안이었다.
그런데 그런 위씨 가문의 첫째 아들인 위문진이 여러 해를 시름시름 앓다가 끝내 숨을 거둔 것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크게 될 인재라 소문이 자자했던 위문진은 열두 살이 되면서부터 몸이 급격하게 약해졌다.
그리고 내리 3년을 자리보전만 하다가 결국 숨이 끊어진 것이다.
위문진의 아비인 위씨 가문의 가주는 여러 방면으로 명의를 불러 아들의 병을 고치려 했으니 원인도 파악하지 못한 상태로 결국 큰 아들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아이고, 문진아! 문진아! 내 아들 문진아, 너를 잃고 내가 어찌 살꼬, 내가 어찌 살아! 흐흐흐흑!”
어미의 구슬픈 곡이 하얀 포를 덮어쓴 위문진의 앞에서 쉬지 않고 이어졌다.
서른을 조금 넘긴 어미는 첫 아들을 끔찍하게 아꼈는데 결국 그 보람을 찾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그 어미 곁에 열 살 어림의 아이들 셋이 상복을 입고 나란히 앉아 있었다.
하지만 어린 아이들이라 형과 오라비의 죽음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듯, 그저 어미의 슬픈 곡에 마음이 동하여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커어엄.”
그 뒤로 멀찍이 떨어져 입구 벽에 등을 기댄 위씨 가문의 가주가 크게 헛기침을 했다.
그 역시 슬프기는 매한가지였지만 이왕 죽은 아들은 죽은 것이고, 이제는 다른 것을 생각해야 할 때라고 마음을 다독이는 중이었다.
둘째를 후계로 세워야 할 것이고, 그에 대한 가르침을 더욱 호되게 해야 할 것이다.
만약을 위해 미리 준비를 해 오기는 했지만 이제는 정식으로 진행해야 할 일이었다.
“아까운 것, 아까운 것. 어찌 이리 허망하게 갈 수가 있다더냐.”
누구보다 총명했던 아들이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살려보려 애를 썼던 것인데, 허망하기가 허망하기가 이럴 수는 없다 싶은 가주였다.
그런데 그 때였다.
“둘째 오빠, 저기 봐, 큰 오빠 손가락이 움직여!”
어미 곁에서 어쩔 줄을 모르고 눈만 붉히고 있던 셋째가 죽은 오빠를 가리켰다.
그 순간 곡을 하던 어미가 번쩍 고개를 들고 죽은 아들의 손을 바라봤다.
꼼지락! 꼼지락!
“아아악!”
순간 어미가 기겁을 하며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곧바로 아들의 주검으로 달려가 얼굴을 덮은 천을 걷어냈다.
“아아아, 아아아. 문진아, 문진아, 애미다, 애미가 어겨 있다. 여기 있어!”
그리고 아들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애타게 아들을 불렀다.
스르륵!
그 간절한 부름이 통했을까, 위문진의 눈이 천천히 떠지며 흐릿한 눈에 초점이 잡혀갔다.
그리고 그렇게 되살아난 위문진이 처음으로 본 것은 눈물범벅이 된 제 어미의 얼굴이었다.
“우와와왁! 문진아!”
동시에 뒤쪽 출입문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위씨 가문주가 큰 고함소리와 함께 아들에게 달려왔다.
그렇게 노전현 위씨 가문의 장남이 죽은 이후 한 시간 만에 되살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