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 다툼에서 물러나 상황을 보니 빼박캔트
건우를 중심으로 아공간이 현실로 구현되며 화(火), 수(水), 목(木), 금(金), 토(土), 풍(風), 빙(氷), 뇌(雷)의 기운을 품은 상징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공간을 완전히 구현하면 이곳 평토성이 무너지게 될 것이다.
당연히 엄청난 인명 피해가 생길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아공간을 완전히 구현하지 못하고 여덟 속성의 기운만 불러낸 건우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사방 수십 리의 공간이 건우의 지배 하에 들어왔다.
“네가 어찌 이리 강한 의념을 쓸 수 있단 말이냐? 고작 화신기 후기에 불과하거늘!”
자신의 의념이 짓눌리는 것을 느낀 손진이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세상에 기이한 공법과 수련 비기가 어디 한 둘이겠습니까. 대단치 않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화신기를 넘은 수사를 상대로 우위에 선 것이 기꺼운 표정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하는 건우였다.
“놀랍군. 놀라워. 입령기에 든 것도 아닌데 벌써 이토록 강력한 의념을! 권능에 필적할 만 하구나.”
손진은 엄지를 내밀며 연신 감탄의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손 수사께서 쓰시는 것이 권능인 모양인데,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어디 한 번 부딪혀 보십시다. 손 수사의 권능과 제 능력, 어느 것이 더 나은지.”
“으음. 그래! 좋다!”
결국 건우의 입에서 도발적인 말이 나오고 손진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듯이 의념을 끌어 올렸다.
그리고 먼저 공세를 시작한 것은 의외로 손진이었다.
그는 팔을 넓게 휘저으며 의념을 강화하고 그 힘으로 천지 영기를 장악했다.
그리고 그가 장악한 천지 영기는 녹색의 나뭇잎으로 변하여 흩날리기 시작했다.
“으음.”
건우는 그 나뭇잎 하나하나가 짙은 살기를 품고 있음을 알았다.
그것들 자체는 그저 생기가 넘치는 나뭇잎에 불과했지만 그것들이 교묘하게 진법을 구성하며 건우를 옭아매려 하고 있었다.
‘유한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음험하다. 저기에 휘말리며 영체까지 소멸을 면치 못할 것이다.’
조용히 소용돌이치기 시작하는 나뭇잎들.
건우는 소용돌이가 커지기 전에 싹을 잘라야 함을 느꼈다.
차장!
건우는 성해룡주를 왼손에 들고 오른 손에 삼백육십성광검을 소환해 들었다.
손진과 같은 수사를 상대로 겸양이니 배려니 하는 것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공격이 매서울 것입니다. 익히기만 하고 지금껏 한 번도 펼치지 않았던 검공입니다. 조심하시길.”
건우는 그렇게 말하며 검선의 백팔 검공법을 펼쳐냈다.
한 번에 백팔 개의 검이 허공에 모습을 드러내며 손진을 향해 쏟아졌다.
“아앗!”
그런 중에 건우는 여섯 개의 검을 빼내어 평토성주를 향해 날려 보냈다.
평토성주는 건우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깜짝 놀라며 동색의 패를 내밀었다.
그러자 패가 크게 부풀어 오르며 거대한 성문을 만들어냈다.
그 성문에는 평토성(平土城)이란 양각 글자가 세로로 새겨져 있었다.
아마도 평토성을 지키기 위한 방어 술법의 하나인 모양이었다.
“허어어업!”
평토성주가 그렇게 건우의 공격을 막아낼 때, 손진은 백두 개의 검을 받아 내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미 그의 의념 영역은 건우의 아공간 때문에 영역이 크게 줄어든 상황이었다.
당연히 건우가 있는 곳까지 의념이 직접 닿지 않으니 제대로 된 공격을 하지 못하고 나뭇잎 진법의 운용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렇군. 확실히 경지가 높아질수록 의념의 크기와 강력함이 우선이야. 손진 저 자가 입령기를 엿보고 강력한 의념을 지녔지만 아공간에서 펼치는 내 의념에는 이기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유리한 싸움을 할 수 있는 것이지. 앞으로도 의념을 더욱 강하게 하는 것이 무척 중요하겠다.’
건우는 손진과의 싸움에서 문득 그와 같은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
결국 아공간을 넓히고, 진염결처럼 의념을 강화하는 공법을 익힐 필요가 있다는 말이었다.
‘일단은 저 손진 수사부터 마무리를 해야겠다.’
건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평토성주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를 통해서 손진 수사에게 빈 틈을 만들어 보려는 생각이었다.
잠시 건우의 시선을 받은 평토성주는 짧은 순간 의념이 짓눌리며 차단되어 성문을 유지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어? 으아아악!”
평토성주는 갑자기 의념이 제약되며 성문이 사라지자 당황했다.
하지만 그가 대책을 마련하기 전에 그의 몸에 건우의 성광검 여섯 자루가 빼곡하게 틀어 박혔다.
푸욱, 푹푹! 푸푸푹!
[으아앗! 구, 국사 어른!]
그러자 평토성주는 곧바로 몸에서 영체를 뽑아내어 손진의 등 뒤로 숨어들었다.
손진은 평토성주의 다급한 부름에 급히 품에서 호리병 하나를 꺼내서 그 영체를 수습했다.
서걱! 츠릿! 푸욱!
“크으음! 허허허, 이런 실수가······. 내가 다른 곳에 신경을 쓸 때가 아니었는데······.”
하지만 그렇게 한 눈을 판 대가는 참혹했다.
손진의 왼 팔이 날아가고, 허벅지에 깊은 검상을 입었으며 한 자루의 성광검이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게다가 아직도 건우의 검들이 허공을 날아다니며 손진의 나뭇잎들을 잘라내는 중이었다.
“아쉽습니다. 조금만 더 틈이 있었으면 이참에 끝장을 낼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건우가 손진의 나뭇잎 진법이 다시 견고해 지는 것을 보며 아쉬워했다.
“허어, 진정 이렇게 상처를 입은 것이 얼마만의 일인지 모르겠군.”
손진이 어렵게 옆구리에 박힌 검을 의념으로 밀어내며 말했다.
건우는 밀려나오는 검에 의념을 집중했지만 검이 있는 영역은 손진의 의념에 장악된 곳이라 오래 버틸 수가 없었다.
휘리릭!
건우는 미련을 두지 않고 검을 회수했다.
손진도 건우가 검을 가지고 가는 것은 막지 못했다.
그보다는 건우의 검에 입은 상처를 돌보는 것이 더 급했던 것이다.
짧은 순간 건우는 검을 회수하고, 손진은 부상을 다독였다.
손진의 잘려나간 팔이 칡덩굴 자라듯이 자라나 엉키며 제 형태를 찾아갔다.
다만 잘려나간 소매 밖으로 드러난 팔은 이전과 달리 나무 껍질의 그것처럼 거칠고 투박한 면이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군. 유잠이라 했던가? 나는 그대가 이토록 뛰어난 수사일 줄은 생각지 못했네.”
손진은 잠시 쉬어가자는 듯이 그렇게 말을 꺼냈다.
“저 역시 인계에서 화신기를 넘어선 수사를 만나게 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끝까지 연극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진실로 다른 계에서 온 것인지 모르겠군. 하지만 이제 곧 그것을 확인할 수 있겠지.”
그 말이 끝나자 손진의 기세가 갑자기 크게 증폭되기 시작했다.
건우는 손진이 뭔가 비장의 수단을 쓰고 있음을 알았다.
“손 수사, 진정 끝을 보자는 말씀입니까?!”
건우가 화를 내며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성해룡결공법을 극성으로 끌어 올리며 아공간을 완전한 형태로 구현해 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평토성 위로 건우의 아공간이 겹치기 시작했다.
“이대로 공법을 완성하면 평토성의 모든 것이 폐허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공법이 완성된 후의 제 힘은 지금보다 몇 배는 강력해 집니다.”
건우가 마지막으로 손진을 향해 경고했다.
이대로 둘이 싸우면서 평토성의 생명들을 모두 죽게 할 것인지를 묻는 것이었다.
사실 그것은 건우도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멸계수사 놈이 그런 것을 걱정하는 것이냐?”
“아직도 내가 멸계수산지 뭔지로 보이시오? 그렇다면 그 옹이 구멍을 파 내라고 하고 싶소.”
“뭐라?”
“그래서 어쩌시려오? 끝까지 가겠다면 나도 피하진 않겠소. 나 역시 숨겨 놓은 수가 제법 있으니 손 수사에게 절대 실망을 주지는 않을 것이오. 대신에 손 수사 역시 각오는 해야 할 겝니다. 내가 손 수사를 잡게 되면 어떻게든 추혼술을 펼쳐 볼 생각이니.”
“끄으응!”
손진은 자신이 건우에게 추혼술을 쓰겠다 했던 것이 있어 그 말을 되돌려 받고는 속만 끓였다.
“시간이 없소. 결정하시오. 이대로 끝을 보겠소?”
건우가 점차 실체를 만들어가는 아공간의 숲과 계곡, 산과 들판, 나무와 풀들을 가리키며 손진에게 물었다.
“그럼 이대로 물러나겠다는 것이냐?”
“어쩌겠소? 주인이 객을 반기지 않으니 물러날 수밖에.”
“그럼 이후엔 어찌할 것이냐?”
“이후? 어떻게든 영계로 올라갈 방법을 찾으며 수련이나 해야 하지 않겠소?”
“허어, 정녕 모르는 것이냐? 멸계의 침입을 받은 상황에선 영계 비승이 불가능하다. 방법은 오직 멸계의 공세를 이겨내고, 이 세상 전체가 영계로 편입되는 것 뿐이다.”
“으음. 정말 방법이 없다면 다른 인계를 찾아 떠나······.”
“그 또한 불가하다. 지금 이 세상은 특별한 힘에 묶여 있는 상태니.”
“그건 또 무슨 말이오.”
“쯧, 내가 네 스승도 아니고 일일이 가르침을 줄 필요가 있느냐? 아무튼 이제 그만 그 공법을 멈추어라. 우리의 다툼은 이쯤에서 끝을 내도록 하자꾸나.”
이야기 도중 손진은 갑작스럽게 휴전을 제의했다.
하지만 건우는 쉽게 의심을 버리지 않았고, 아공간 구현을 멈추지도 않았다.
“펼치고 거두기가 그리 간단한 공법이 아닙니다. 그러니 손 수사께서 물러나시지요. 그리하면 저는 공법을 거두고 평토성을 떠나겠습니다.”
“끄응. 네가 평토성에 해코지를 할 일은 없겠지?”
“나를 뭘로 보는 겁니까? 그럴 일은 없습니다.”
“좋다. 그럼 그리하자. 그리고 될 수 있으면 우리 제윤국은 벗어나도록 하거라. 이후로 너는 우리 제윤국의 공적이 될 것이니.”
“제윤국만이 아니겠지요. 듣자니 일곱 대륙이 모두 연결되어 있는 듯 하던데, 한 나라의 공적이 되었으면 다른 곳들이라고 다르겠습니까?”
“옳다. 너에 대한 모든 정보가 오래지 않아서 일곱 대륙 전체에 퍼지게 될 것이다. 멸계수사일 가능성이 있는 위험한 인물로 분류가 되겠지.”
“쯧. 그냥 죽은 듯이 숨어 살라는 말 같습니다?”
“······.”
손진은 대꾸를 하지 않고 물끄러미 건우를 바라보다가 훌쩍 녹색 둔광을 남기고 모습을 감췄다.
건우는 손진이 의식의 범위 밖으로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아공간 구현을 멈췄다.
그리고 성해룡주와 성광검을 아공간에 넣고, 부양도를 불러냈다.
평토성 주민들은 갑자기 나타난 부양도의 모습에 놀랐지만 곧바로 부양도의 모습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이쪽 세상에 처음 와서 작은 성의 공허체를 정리하고 부양도를 불러냈을 때, 그곳의 위치를 부양도에 각인시켜 뒀었다.
그래서 지금 부양도에 있는 전송진을 사용해서 그곳 소성의 폐허로 단번에 이동해 버린 것이다.
전송의 흔적을 추적하면 부양도가 이동한 곳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걸릴 테니, 그 사이에 건우는 다른 곳으로 이동할 생각이었다.
* * *
“기가막히네.”
- 그러게요. 이쪽 세상은 수도계 연락망이 아주 잘 되어 있네요.
“가는 곳마다 유잠에 대한 이야기가 퍼져 있어. 게다가 유잠공, 성해룡결공법, 성광검은 물론이고 아공간의 특정한 영기 파동까지 등록을 해 뒀다는군.”
- 그럼 아공간을 쓸 때마다 들키는 건가요?
“아공간을 쓸 때마다 들키진 않겠지만 그것을 쓰다 들키면 어떤 위장을 하고 있더라도 정체가 들통나긴 하겠지.”
- 그러네요. 그럼 이제 어떻게 해요? 계속 길우몽의 모습으로 활동을 하실 건가요?
“그것도 어렵지. 가는 곳마다 신분 확인을 해야 할 일이 많은데, 그걸 할 수가 없잖아. 검문에 걸리기만 하면 그대로 멸계수산지 뭔지가 될 판이라고.”
건우는 그렇게 말을 하고는 한숨을 쉬었다.
평토성을 떠나서 소성의 폐허로 넘어온 후, 건우는 곧바로 부양도를 최대 속도로 움직여 멸계의 영역을 벗어났다.
그리고 그 후로도 부양도의 은폐 능력을 최대로 높인 후, 몇 개의 왕국을 지나쳤다.
물론 그 사이에 부양도에 대한 추적이 있었겠지만 여러 나라를 거친 후, 부양도를 출도령패로 돌려 보내고 길우몽의 모습을 취했다.
그 후로는 성단기 중기의 수사 행세를 하며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며 정보를 모았다.
성단기 수사는 이리저리 떠돌기에 적당하면서 그리 경지가 높지 않아 이목이 쏠리지도 않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돌아다니며 이쪽 세상을 알아갈수록 신분을 밝힐 수 없는 상황이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차라리 수사 하나를 잡아다가 추혼술을 펼쳐 정보를 알아내고 그 수사로 변신을 할까 하는 고민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식의 위장도 선뜻 내키진 않아서 망설이는 중이었다.
생목숨을 취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저어함이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 그래서 어쩌시게요?
“그냥 시간을 좀 보내야겠다. 아공간에서 의념 수련을 하며 시간을 보내다보면 나에 대한 이야기도 수그러들겠지. 아공간에 숨어 있으면 들킬 일도 없고.”
결국 건우는 가장 간단한 방법을 쓰기로 했다.
시간이 약이다.
그런데.
“어? 이건?”
건우가 갑자기 가부좌를 하고 앉았던 고개를 들어 머리 위의 수미산을 바라봤다.
- 왜 그러세요?
“수미산, 의식 연결이 다시 가능해졌다!”
건우가 고함을 질렀다.
화신기 이후로 의식 연결이 되지 않았던 수미산이 반응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