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 또 다른 인계, 대천세계의 인계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음, 아공간이 돌아왔다.”
수미산 밑에 가부좌를 하고 명상에 잠겨 있던 건우가 눈을 번쩍 떴다.
영계 비승로의 폭발로 아공간에 갇혀 7년의 시간이 흘렀다.
물론 그 시간이 그에게 크게 괴로울 것은 없었다.
화신기 건우의 아공간은 지름만 수만 킬로미터에 이른다.
거기에 곳곳에 속성별로 자연 환경이 다채롭게 펼쳐진다.
사실상 아공간에서만 머문다 하더라도 넓이 때문에 답답함을 느낄 일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조예령에게 얻은 칠채선호접의 날개가루로 유잠공의 수련에 몰두하다보니 7년의 시간이 어찌 흘렀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갑작스런 사고로 아공간에 갇히게 된 그는 조급함을 버리고 칠채선호접(七彩仙蝴蝶)의 날개가루로 유잠공의 경지를 끌어 올리는데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드디어 유잠공의 수준이 화신기 초기 수준에 이를 정도가 되었다.
애초에 건우의 수준이 이미 화신기 후기에 닿아 있었으니 공법과 수련 자원이 준비된 상황에서 유잠공의 경지를 끌어 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마침 잘 되었군. 유잠공이 화신기에 이른 때에 아공간까지 열렸으니, 흐름이 좋아 보여.”
- 그럼 어서 아공간을 열어 보세요. 어찌된 일인지 저에게 주신 아공간에 대한 권한이 모두 초기화 된 거 같아요. 그래서 밖을 살필 수가 없었어요.
루야가 뾰루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공간이 전혀 다른 환경을 거치느라 그렇게 된 것이겠지. 내가 그런 것은 아니다.”
- 네네.
“어쨌거나 어디 한 번 확인을 해 보자꾸나. 전해지는 느낌으로는 이곳이 영계는 아닌 것이 분명하지만.”
- 영계가 아니라고요? 그걸 어떻게 알아요?
루야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밖에서 느껴지는 천지 영기의 양으로 판단한 거지.”
- 그래요?
“음. 뭐, 그래도 전에 있던 곳에 비하면 천지 영기의 밀도가 많이 높기는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영계에 비할 정도는 아니지.”
- 영계의 천지 영기가 어떤지 그걸 건우님이 어떻게 알아요?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잖아요.
루야는 건우가 천지 영기의 양만으로 영계와 인계를 구별할 수 있다는 것에 의문을 보였다.
“어떻게 알기는. 내가 영계에서만 쓸 수 있는 비장의 공법을 익히고 있음을 모르는 거냐?”
- 아, 그 백팔개의 검을 사용하는 검공법 말이군요?
“그래, 그건 영계가 아니면 감당하기 어렵지. 그런데 밖에서 느껴지는 천지영기의 양을 보니 많이 부족하다. 그러니 영계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지.”
- 유독 천지영기의 양이 부족한 곳도 있고, 경우에 따라선 넘치는 곳도 있잖아요. 그러니 바깥이 확실히 영계가 아니라고 확신하긴 어렵죠.
“그 말 또한 옳다. 그러니 밖으로 나가서 확인을 해 볼 밖에.”
건우는 그렇게 말을 하고는 아공간 입구를 투명하게 만들어 넓게 열었다.
- 뭘까요? 이곳은 무슨 종말 세상이라도 되는 걸까요?
밖으로 보이는 광경에 루야가 먼저 보인 반응은 이것이었다.
그 말처럼 아공간 밖으로 보이는 모습은 폐허라고 불러야 할 모습이었다.
무너진 성터, 곳곳에 나뒹구는 해골들, 거기에 탁하고 역겨운 기운을 풍기는 기괴한 생명체들.
“저것들을 어째서 느끼지 못한 걸까?”
건우는 처음 보는 기괴한 기운의 생명체를 보며 그런 의문을 느꼈다.
인간의 형상을 했지만 인간이 아니고, 짐승의 형상을 했지만 또한 짐승이 아닌 기괴한 것들이 있었다.
아공간 안에 있을 때에는 전혀 감지하지 못한 기운이었다.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한 후에야 드디어 그것들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건우는 다시 아공간 입구를 닫고 그 이유를 고민했다.
그러다가 무릎을 탁 쳤다.
“맞아. 무지 때문이군. 그것들이 품은 기운은 내가 알지 못한 것이었어. 결이 완전히 다른 것이라 아공간 안에서는 알아차리지 못한 거지.”
- 인식의 문제였군요. 눈으로 뭔가 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그것에 대해서 인식할 수 있었죠. 그리고 그 이후에야 그것을 살필 수 있었고요.
“맞아. 그러니까 지금 저 밖에 있는 것은 아주 이질적인 것들이란 말이지. 이곳 세상에는 저런 특이한 기운을 품은 것들이 살아가는 모양이군.”
- 그래서 이제 어쩌실 거예요?
“어쩌긴 일단 간을 봐야지.”
건우는 무턱대고 밖으로 나설 생각은 없었다.
아직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기운을 품은 존재들이 즐비한 곳에 경솔히 나서다니,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괴뢰를 쓰실 생각이군요?
건우가 손바닥을 저어서 아공간 입구로 갖가지 괴뢰들을 불러 모으는 것을 보고 루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밖에 있는 것들의 수준을 파악해 봐야지.”
기운을 확인했지만 그 강약이나 등급을 알기는 어려웠다.
이질적인 기운은 혹시라도 아주 미약한 양으로 엄청난 위력을 보일 수도 있다.
그러니 괴뢰를 통해서 간을 보겠다는 것이다.
건우는 우선 축기기 수준의 인간형 괴뢰 열 기를 밖으로 내보냈다.
축기기 수준의 괴뢰는 아공간 안에서 갖가지 허드렛일을 하도록 만들어진 것들로 전투 능력은 그리 뛰어난 편이 되지 못한다.
괴뢰이기에 완전히 파괴될 때까지 명령을 수행한다는 장점이 있을 뿐이다.
지리리리리리 지리리리리!
갑자기 괴뢰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폐허를 방황하던 기괴한 생명체들이 반응을 보였다.
그것들은 겉보기엔 인간이나 동물들의 아류로 보였다.
하지만 몸을 빼앗아 변형시킨 것은 아니었다.
그저 외형만 비슷하게 흉내 낸 듯, 팔다리와 눈 코 입의 위치나 숫자가 비슷했다.
하지만 그것들은, 보는 순간 이질감을 느끼게 만드는 뭔가가 있었다.
절대로 함께 할 수 없는, 상극의 존재.
건우는 괴뢰들과 그것들이 싸우기 시작하는 순간 그것을 깨달았다.
“저것들은 병(病)이다. 추악하고 더러운 질병(疾病). 세상을 말살하려는 재앙. 존재 자체를 말살해야 할 것들, 바늘 한 점의 자리도 내어줘서는 안 될 것들!”
건우가 격렬하게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곁에서 지켜보던 루야도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 도대체 저건 무엇일까요? 보는 것만으로 혐오스럽네요.
그런 느낌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해졌다.
아공간 밖에서는 축기기의 괴뢰 열 기가 그 기괴한 생명체들을 휩쓸고 있었다.
“약하군. 연신기 초기 정도야.”
건우가 괴물들의 수준을 파악했다.
그리고 한 쪽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폐허가 된 성터의 중앙, 그곳에 조금 더 강한 기운이 느껴졌다.
건우는 그곳으로 괴뢰들을 보냈다.
그리고 훌쩍 아공간 밖으로 나서서 몸을 감추고 괴뢰들을 뒤따랐다.
기괴한 것들의 수준을 보니 위험할 일은 없을 듯 했다.
그것들이 품은 기운의 양으로 등급을 나누자면 가장 강력한 놈도 고작해야 축기기 초기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가벼운 손짓으로도 그런 것들은 얼마든 날려 버릴 수 있는 건우였다.
* * *
건우는 부유도를 불러내어 폐허가 된 소성의 상공에 떠 있었다.
소성의 폐허에서 우두머리 노릇을 하고 있던 기괴 생명체는 건우의 괴뢰에 의해서 조각조각 찢어진 후에 불태워졌다.
“이것들이 사용하는 기운을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영기와는 극성이다. 영기의 천적이며 또한 영기가 이 기운의 천적이다.”
둘의 관계는 명확했다.
양립 불가.
서로에게 지극한 피해를 입히고 또한 피해를 입는다.
“문제는 이런 기운이 천지 영기와 어우러져 있다는 것이 문젠데, 그나마 천지 영기가 이 기운에 맞서 그런대로 잘 버티고 있다는 것을 다행이라고 할까?”
이것이 건우가 소성의 기괴 생명체를 정리하고 상황을 파악한 결과였다.
이 세상에는 천지 영기와 상극 관계인 정체모를 기운이 있었다.
그리고 그 기운을 쓰는 것이 기괴 생명체였고, 그것들은 영기에 대해서 매우 적대적이었다.
“영기를 품은 존재들 역시 마찬가지로 그것들을 용납할 수 없으니 입장은 같다고 봐야 하나? 그런데 도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한 세계의 천지 영기 자체가 변화를 겪고 있었다.
그것은 일부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 전체에 걸친 문제로 보였다.
화신기 후기이며 의념이 다른 수사들에 비해서 수십 배는 강력한 건우가 확인할 수 있는 최대 거리까지 살폈다.
그 결과 천지 영기와 기괴한 기운의 대치는 어디든 공평하게 퍼져 있었다.
천지 영기가 세상에 퍼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지만 이건 위험하다. 자칫, 이 기괴한 기운이 천지 영기를 완전히 집어삼키는 날에는 세상 자체가 끝장이 날 것이다.”
그가 보기에 이쪽 세상은 멸망에 한 발이 빠진 상태로 보였다.
“그나마 천지 영기가 기괴한 기운에 저항하느라 자체적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 희망적이긴 한데······.”
건우는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부양도의 고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빠르게 상승하는 부양도를 따라서 그의 시야가 급격하게 넓어졌다.
화신기 수사인 그는 아득히 먼 곳까지 구름과 안개를 뚫고 세상을 살필 수 있었다.
그런 그의 눈에 온통 폐허가 된 범인들의 세상이 펼쳐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는 뭔가 특별한 것을 발견한 듯 눈빛을 반짝였다.
동시에 부양도의 7층 누각에서 칠채의 둔광이 아름답게 터져 나오며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런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부양도에서 백 여 리 떨어진 작은 산의 기슭이었다.
“수사의 동부로군.”
그곳에 형태만 남은 동부 하나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급히 이동해 온 것이다.
부양도는 그렇게 짧은 거리를 빠르게 이동하는 데는 적합하지 않은 비행 법보였다.
“흐음. 영기를 품은 것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건우가 동부 안으로 걸음을 옮기며 인상을 찌푸렸다.
기괴한 것들이 휩쓸고 간 세상에는 천지 영기 이외의 영기는 남아 있지 않았다.
딸깍!
“옥간?”
그러다가 동부의 전실로 들어서던 그의 발에 나뒹굴던 옥간 하나가 걸렸다.
손을 뻗어 옥간을 빨아들인 그는 의념을 집중해서 옥간의 내용을 살피고자 했다.
하지만 옥간엔 한 올의 영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당연히 옥간에 저장된 정보도 사라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건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동부를 뒤져 그럭저럭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들을 모아 아공간으로 쓸어 넣었다.
그리고 다시 부양도로 돌아와 아공간을 열었다.
- 이거요!
아공간으로 들어가자마자 루야가 건우를 반기며 옥간 하나를 내밀었다.
“그게 뭐? 영기가 소실되어 정보도 남지 않았던데.”
건우가 동부의 물건들을 모은 것은 이 세상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영기가 사라지더라도 문자나 그림 따위로 남긴 기록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물론 수사들은 문자와 그림 위에 영기를 덧씌워 엄청난 내용을 담지만, 문자나 그림만으로도 일부의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간혹 영기를 느끼지 못하는 범인이 수사들의 글과 그림을 보고 기연을 얻기도 하는 것이 아닌가.
- 저를 어떻게 보시는 거예요? 제가 정보 집합체였다는 사실을 잊으셨어요?
“그래서, 영기가 사라진 옥간에서 뭔가를 찾았다는 거야?”
- 호호호. 물론이죠. 이 루야에게 그런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에요. 영기가 사라졌다면 원래 영기가 있었던 자리가 비었다는 말이잖아요. 그래서 그걸 바탕으로 이리저리 끼워 맞추면?
루야가 옥간을 내밀며 영기를 밀어 넣었다.
그러자 옥간에 영기가 머물며 본연의 모습을 드러냈다.
건우가 그 옥간을 받아 의념을 집중해서 내용을 확인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건우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갔다.
* * *
“여기도 여러 인계들 중에 한 곳이다.”
- 그래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곳 인계가 다른 세상의 침공을 받았다는군.”
- 그래서 멸망한 건가요?
“아니 그건 아닌 모양이야. 동부의 주인이 고작 성단기 수준의 수사라 아는 것이 별로 없긴 하지만 오래도록 멸계(滅界)와 싸우고 있다는군.”
- 멸계요?
“이쪽 세상을 침공한 곳을 그리 부르는 모양이야. 그리고 그들의 기운을 극멸기(極滅氣)라 부르고.
- 극멸기(極滅氣)가 무슨 뜻이죠?
“모든 것을 무로 돌리는 기운이지. 공허와 허무. 그리고 그것이 가득한 세상이 멸계인 것이고.”
- 말이 되요? 공허와 허무가 가득하다는 자체가 앞뒤가 안 맞는 거잖아요.
“아무튼 그렇다는군. 자세한 것은 나중에 더 알아봐야지. 고작 성단기 수준이 뭘 얼마나 알겠어?”
- 하긴 그러네요.
“어쨌거나 이쪽 세상에도 수도계가 있고, 그들이 힘을 모아서 멸계와 싸우고 있다니 우선 그들을 찾는 것이 먼저겠지.”
- 그래서 어디로 가야 하는데요?
“동부의 주인이 다급하게 동부를 떠난 모양인데, 일단 대성(大城)을 찾아 가는 것이 좋겠어.”
- 대성이요?
“여긴 우리가 있던 곳과는 달리, 몇 개의 대륙이 있고, 그 대륙들마다 수도계 국가가 몇 개씩 있는 모양이야. 그리고 그 국가들은 다시 커다란 대성으로 나뉘어져 통치되는 거고.”
- 수도계가 그런 식으로 통합되어 있다고요?
“맞아. 대성의 성주나 혹은 국왕은 화신기 수준이고, 그 밑으로 영체기 정도 되면 대성 성주를 보좌하거나 혹은 일정 지역을 맡아 관리하는 식이야. 당연히 성단기, 축기기, 연신기 등도 그 아래에 속해 있고.”
- 수사들이 그런 식으로 조직화 되어 있다니 놀랍네요.
“물론 그런 중에도 산수들은 존재하는 모양이야. 어디에 속하지 못하고 떠도는 이들로, 거의 용병 취급을 받는 모양이군.”
- 그러네요. 그럼 건우님은 어떻게 하시려고요?
“일단 상황 파악이 우선이지. 영체기 중기의 산수로 떠돌아 볼까?”
- 그것도 좋겠네요.
“그래도 일단은 멸계에게 밀려버린 곳은 벗어나고 볼 일이지. 이쪽 세상의 수도계를 찾는 것이 우선이니까.”
- 당연하죠. 어울려도 수도계 수사들과 어울려야죠. 이쪽에선 뭐 얻어먹을 것도 없다고요. 극멸긴지 뭔지가 영기를 몽땅 없애 버리니까요.
“하필이면 이런 곳에 오다니, 운이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건우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부양도로 나가 비행을 시작했다.
높은 고도에서 빠르게 한쪽 방향으로 나아가는 부양도에서 건우는 극멸기가 아닌 영기를 품은 존재를 찾기 위해 의념을 넓게 펼쳤다.
그렇게 몇 달의 시간이 흘렀을 때, 건우는 극멸기와 영기의 강렬한 충돌을 느끼며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