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이런 놈 꼭 있다. 다 모였는데 늦는 놈
‘이상하군.’
진법을 살피던 건우는 뭔가 이해가 되지 않는 듯이 몇 번이나 의념을 집중하며 확인을 반복했다.
하지만 그가 알아낸 진법의 내용은 바뀌지 않았다.
‘낙생역 전체를 진법에 넣어 보호한다? 이게 내가 제대로 본 것이 맞는 건가?’
기이한 일이었다.
학겸이 만들고 있는 진법은 낙생역을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었다.
물론 중앙이 가장 강력한 보호를 받고 외곽으로 갈수록 그 보호력이 약해지는 양상이기는 하지만 분명 보호진이었다.
‘이걸 펼치고 이 안쪽에서 비승진법을 만든다면 외부의 간섭을 피할 수 있겠군.’
건우는 한참 후, 이 괴이한 진법의 필요성을 알아차렸다.
열두 명의 유산주가 모두 모인 후에, 영계 비승을 위한 진법을 만들고 발동시키는데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지만 누구나 짐작하듯이 그 과정에 방해를 받게 될 것은 분명했다.
학겸이 유산주들을 낙생역으로 불러 모았지만 유산주 이외에도 많은 화신기 수사들이 낙생역으로 몰려올 것이다.
학겸은 그것을 걱정해서 진법을 만들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이렇게 되면 굳이 학겸의 일을 방해할 이유가 있나?’
건우는 잠시 생각을 해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낙생역의 수사가 수 만 명은 될 것이다.
그리고 학겸의 진법에 그 대부분의 수사들이 희생될 것이다.
하지만 학겸의 진법은 이후로 오랜 세월 낙생역을 혼돈역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줄 것이다.
과거 십이비선의 밀역과 비슷하게 독립된 공간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우리들이 영계 비승을 한 후에도 진법은 남아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낙생역의 수도계 전력이 약해진 것을 복구할 시간을 충분히 벌 수 있다.’
나쁘지 않다.
비록 수많은 저계 수사들을 희생시키는 계획이지만 수도계에서 그런 일이 어디 한 두 번인가.
건우 자신이 직접 나서서 일을 벌이는 것이라면 그 반서(反?)를 걱정해야 하겠지만 그도 아니니 그저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열매만 취하면 될 일이다.
‘내가 낙생역 수사들을 대표해서 그들을 구해 줄 의무 따위는 없지. 게다가 수사들 개개인에겐 불행이지만 낙생역 전체를 두고보면 도리어 나은 결과가 될 수도 있어.’
학겸의 진법이 제대로 만들어지면 충분히 낙생역에 도움이 될 것이다.
건우는 훌쩍 몸을 날려 바닥에 내려섰다.
학겸의 계획을 알아냈지만 건우에게 불리할 것은 없었다.
그러니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럼 어디 보자, 이 진법의 중심이 저 쪽이니, 결국 저기에 십이비선의 유산을 사용한 진법을 만들겠군.’
건우는 위치를 가늠해 보고는 그곳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학겸도 그런 중요한 곳에 대한 방비를 허술하게 하지는 않았다.
건우가 다가가자 급격한 영기의 변화가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바닥과 허공에 보이지 않던 진법선이 모습을 드러냈다.
건우는 급히 아공간을 열고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휘익!
“으음. 누군가 들어왔는데!”
간발의 차이를 두고 커다란 머리의 학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는 허공을 향해 영기를 뿜어내어 감춰두었던 진법을 활성화시켰다.
우우우우우웅! 후우우웅!
그러자 그 진법에서 영기의 폭풍이 일어나 황토 대지를 휩쓸고 지나갔다.
학겸은 진법의 선에 손을 올리고 눈을 감은 상태로 영기의 폭풍을 살폈다.
뭐가 되었건 영기의 움직임이 정상적이지 않은 곳을 찾는 것이다.
하지만 폭풍이 모두 가라앉을 때까지 학겸은 이상을 찾지 못했다.
“어떤 수사인지 모르지만 재주가 용하군. 그 사이에 몸을 감췄어. 이런 재주라면 역시 해(亥) 수사 인가?”
학겸이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허공을 보며 말했다.
“해 수사, 이곳에 계신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계실 것이라 생각하오이다.”
그는 마치 건우가 자신의 이야기를 반드시 듣고 있을 거라고 확신하는 듯 했다.
“이미 이곳을 살폈다면 아시겠지만 이 학겸은 다른 생각이 없소이다. 나는 그저 우리 열두 유산주들이 안전하게 영계 비승을 할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오이다.”
학겸은 그렇게 말을 하고는 잠시 반응을 기다렸다.
하지만 황토 대지는 묵묵할 뿐, 아무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하니 해(亥) 수사도 걱정하지 마시고 때가 되면 회합에 참가해 주셨으면 하오이다. 아, 혹시 몰라 여기에 옥간 하나를 두고 가겠소이다. 이 옥간에는 우리 열두 유산주가 펼쳐야 할 진법 내용이 있으니 보시길 바라오이다. 물론 다른 수작은 부리지 않았으니 걱정할 것은 없으오이다.”
학겸은 그렇게 말을 하고는 들고 있던 금색 표지의 커다란 책을 펼쳐 한 쪽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러자 그 손에 영롱한 황금색 옥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학겸은 그 옥간을 앞으로 내밀어 허공에 걸어 놓았다.
“그럼 조만간 얼굴을 마주하기를 기대하겠소이다.”
옥간을 걸어 놓은 학겸은 그 말을 끝으로 허공으로 녹아들 듯 사라졌다.
건우는 아공간 안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 미끼네요. 저걸 가지고 오면 건우 님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저 수사가 알게 되잖아요.
“그렇다고 안 물 수도 없지. 어차피 내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학겸이 안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고.”
- 그런가요?
“어쩌면 학겸 놈은 지금 밖에서 열심히 진법을 바꾸고 있을지도 모르지. 안에 있는 나를 잡기 위해서.”
- 그럼 어떻게 해요? 위험하지 않을까요?
“혜선의 유진을 이었다니 진법 능력이 탁월하겠지. 그리고 그 진법을 제대로 쓴다면 아공간도 위험할 수 있겠고.”
건우도 마냥 안심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아공간이 완전한 것이 아니란 사실은 건우 자신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외부에서 벌어지는 일에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아공간이니, 진법에 따라서는 아공간도 드러날 가능성이 있었다.
- 그럼 어떻게 해요?
루야가 걱정스런 듯이 물었다.
“걱정하지 마라. 학겸의 진법이 강하다고 하지만, 우리가 밖에서 구현한 아공간의 힘이 더 강할 거다. 나는 학겸의 진법이 우리를 이길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건우는 경계는 했지만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그 누가 되었건 성해룡주를 이용해서 불러낸 아공간 영역에서 자신과 루야를 이길 수는 없었다.
적어도 화신기 수준에서 그게 가능할 거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일단 저건 챙겨야지.”
건우가 아공간 밖으로 손을 내밀어 학겸이 허공에 걸어 놓은 옥간을 아공간 안으로 끌어왔다.
그리고 그 때, 자신의 거처에서 진법의 축들을 확인하던 학겸은 자신이 진법 공간에 두고 온 옥간과의 연계가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역시 그곳에 있었군. 그리고 나는 그것을 파악해 내지 못했고.”
학겸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떠돌았다.
자신이 펼친 진법 안에 침입자가 있는데 그를 찾아내지 못하다니, 치욕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두려운 자. 고작 저계 수사에 불과했던 자가 유산을 얻어 지금까지 간직하며 결국 화신기에 이르렀단 말이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자다.”
학겸은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건우라는 수사가 가진 보물이 정말 궁금했다.
어떤 보물이기에 검선의 유산을 그토록 완벽하게 숨길 수 있었을까.
지금처럼 자신이 펼친 진법 안에서도 종적을 감출 수 있는 것도 분명 그 보물의 힘이 분명할 텐데, 그것이 어떤 것일지 도무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어쩌면 처음 계획대로 그에 대해선 무조건 논외로 두는 것이 옳을지도 모르겠군. 그저 함께 비승할 때까지 문제가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최선일 수도 있겠어.”
학겸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시 진법의 축들을 확인했다.
그리고 결국 유잠이란 수사를 넣었던 축에서 괴뢰를 발견했다.
“유잠이 건우 수사의 변신이었을까? 아니면 술(戌) 수사? 괴뢰를 보아하니 술 수사였을 수도 있겠고.”
술(戌) 수사는 괴뢰선의 유산을 이은 수사를 말한다.
학겸은 유잠으로 변장한 이가 건우이거나 혹은 괴뢰선의 유산을 수습한 술(戌) 수사라 의심했다.
하지만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 당장은 괴뢰 대신에 넣을 새로운 영체기 수사를 찾는 일을 하는 것이 더 나아보였다.
학겸은 그렇게 쌍선의 도움을 받아 진법을 조금씩 완성해 나갔다.
* * *
- 벌써 다섯 명의 수사들이 이곳에 왔다 갔네요.
루야가 아공간 밖으로 내다보며 말했다.
건우는 여전히 학겸이 만드는 진법 안에 머무는 중이었다.
비승진법을 만들 공간에는 학겸이 숨겨 놓은 진법이 있어서 쉽게 들어가지 못했다.
그래서 그 경계에서 머물며 상황을 보는 중인데, 벌써 건우 이외에도 다섯 명의 화신기 수사가 진법을 확인하고 갔다.
건우의 생각대로 학겸은 유산주들에게 자신의 진법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다.
소문을 조금만 모아보면 결국 쌍선과 학겸이 뭔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그렇게 되면 그 꼬리를 물고 진법까지 찾아오는 것이다.
“조금 전 그 수사와 학겸의 대화를 들어보니 유산들 대부분이 낙생역에 들어온 모양이던데?”
- 그러게요. 오(午) 수사라고 했던가요? 비선(飛仙)의 유산을 이었다고 했죠?
“조인족이 비선의 유산을 이었으니 제대로 주인을 만난 셈이지.”
조금 전에 진법 중앙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수사가 있었다.
그 조인족 수사는 한 번에 진법을 뚫고 중심까지 뚫고 들어왔다.
학겸이 급히 나타나 수습하지 않았다면 진법 중앙이 난장판이 되었을 것이다.
그 조인족 수사는 호루(昊鏤)라 했는데 대체적으로 갈매기를 떠올리게 하는 외모였다.
등에 돋은 세 쌍의 날개는 그 마음대로 숨기고 펼칠 수 있는 모양인데 그것도 갈매기의 날개를 닮은 것이었다.
학겸은 그와 잠시 실랑이를 벌였지만 호루는 학겸이 만들고 있는 진법을 파악하고는 협조적인 태도를 취했다.
호루 역시 목적은 영계 비승이니 학겸의 준비가 그의 목적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대화에서 지금 낙생역에 열한 개의 유산이 모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학겸의 말로는 지금까지 도착하지 않은 이는 오직 금선의 유산을 이은 신(申) 수사뿐이라고 했다.
이제 그만 도착하면 열두 유산주가 모두 모이게 된다는 것이다.
건우는 아공간 안에서 그와 같은 이야기를 모두 전해 들었다.
어쩌면 학겸이 그리 자세히 이야기를 한 것은 건우가 듣고 있을 가능성을 생각한 것인지도 모른다.
간혹 학겸이 진법 안에 모습을 드러내면 그런 식으로 외부의 정보를 알려주곤 했기에 건우도 대충 학겸의 의도를 짐작하고 있었다.
“이제 하나가 남았다는 말이지.”
- 빨리 다 모였으면 좋겠네요. 지금 낙생역은 그야말로 전쟁터라구요.
“그래봐야 고래 싸움에 새우들 등이 터지는 꼴일 뿐이야. 굳이 고래들이 새우를 찾아서 죽이는 것은 아니지.”
- 전에 쌍선 이야기 못 들었어요? 낙생역 수사들의 피해가 커서 자칫하면 학겸의 진법을 완성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고 했잖아요.
“설마 학겸이 그 정도도 예상하지 못했을까. 다 알아서 하겠지.”
- 네에? 건우 님은 진법이 걱정인 거예요? 저는 낙생역과 그곳의 수사들을 걱정하는 건데요?
“수도계 수사는 걱정하는 게 아니다. 대도의 길에 오를 때부터 그만한 각오는 했었어야지. 역천지로를 택했으면 그 때부터 모든 책임은 자신이 져야 하는 거다. 희생될 수사들의 수가 많아진다고 거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이유는 없다.”
- 와! 건우 님, 완전 수사 마인드! 대천세계에 완벽하게 적응하셨네요?
“그래도 내가 나서서 혈사를 벌이지는 않는다. 내 나름의 선은 지키고 있다는 말이다.”
- 그거야 그게 건우 님 수련에 도움이 되니까 그런 거겠죠.
“아니라곤 못하겠다만, 그래도 아직은 내가 정도를 걷고 있는 건 맞지 않느냐.”
- 하아, 수도계의 정도가 건우 님 수준이란 것이 절망적이네요.
“쯧.”
건우는 살짝 양심이 찔린 듯이 대꾸를 하지 않고 혀를 차고 말았다.
그리고 그 때, 학겸은 쌍선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 * *
“신(申) 수사가 문제이오이다.”
“금선의 유산이 한 곳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낙생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듯 한데, 꽤 오래도록 움직임이 없습니다.”
“아마도 문제가 생긴 것이 분명하오이다.”
“문제라면?”
“유산주가 죽기라도 했다는 겁니까?”
“그럴 가능성도 있고, 아니라고 해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인 것은 분명하오이다. 유산이 추적당할 것을 분명히 알고 있을 텐데, 저리 오래도록 움직임이 없다면······.”
“그럼 어찌 합니까?”
“열두 유산 중에 하나라도 없으면 우리들의 노력이 헛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쌍선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여러 잔가지를 다 처내면 두 가지 선택이 남으오이다.”
“둘?”
“그게 뭡니까?”
“이대로 금선의 유산을 기다리는 것이오이다. 어쨌건 우리 유산주가 나서지 않아도 금선의 유산을 노리는 이들이 움직일 것이오이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든 결국 금선의 유산이 이곳으로 올 것은 분명하오이다.”
“그야 그렇지만 시간이 문제가 아닙니까. 벌써 낙생역에 들어온 것이 3백 년에 가깝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러다가 유산주들이 천겁이라도 맞이하게 되면······.”
쌍선이 걱정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천겁이 얼마 남지 않은 적화존의 표정은 무겁기 짝이 없었다.
“우리들이 직접 움직여 금선의 유산을 찾고, 그것을 가지고 와서 새로운 주인을 정해주는 방법도 있긴 하오이다.”
“으음. 우리가.”
“금선의 유산을 취해서 주인을 정해준다?”
쌍선이 학겸의 말을 듣고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