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양파 껍질을 까 보자, 어디까지 까지나
촤롸롸롸롸롸롸롹!
위위선생이 숨은 검은 연기, 그 뭉클거리는 흑연(黑煙)속에서 수십 개의 쇠사슬이 튀어나와 행려를 향해 꿈틀거리며 날아갔다.
행려는 급하게 얼음기둥 여섯 개를 세워 쇠사슬을 막아냈지만 쇠사슬은 그 기둥을 휘감고 거칠게 조였다.
행려가 그 힘을 견디기 위해서 얼음기둥에 영기를 주입할 때, 흑연 속에서 또 다른 쇠사슬들이 쏘아져 나왔다.
행려는 이번에도 어쩔 수 없이 다시 얼음기둥 세 개를 더 만들어 냈다.
그리고 이번에도 쇠사슬들은 그 얼음기둥을 휘감고 거칠게 조이며 요동을 쳤다.
그 서슬에 얼음기둥에 작은 실금들이 생기기 시작하자 행려가 다급해졌다.
행려는 두꺼운 면사 안에서 입술을 깨물더니 양 팔을 펼쳐 소매 안에서 새하얀 천을 길게 쏘아 냈다.
그것은 행려의 몸을 붕대처럼 휘감고 있던 천으로 혹한의 냉기를 품은 그녀의 본명법보였다.
그 백색의 천이 행려의 아홉 얼음기둥을 좌우에서 하나씩 엮어 중앙의 얼음기둥에서 만나 매듭을 지었다.
쩌저저저저적!
그 순간 이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강력한 냉기가 만들어지며 흑연에서 나온 쇠사슬들을 꽁꽁 얼렸다.
빠직 빠지지직! 뚜두둑! 뚜둑!
그러자 쇠사슬이 냉기를 견디지 못하고 여기저기서 터지며 끊겨 나갔다.
“제법이구나! 하지만 부족하다!”
그 때, 흑연 속에서 위위선생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위위선생의 목소리는 이전과 달리 거칠고 탁했으며 사기(邪氣)가 넘쳐흘렀다.
“받아라!”
파지지지 파지지지직! 파지직!
흑연에서 검은 뇌전의 뱀들이 기어 나와 쇠사슬을 타고 빠르게 얼음기둥을 향해 내달렸다.
그리고 얼음기둥에 닿은 그 검은 뇌전의 뱀들은 냉기를 씹어 먹으며 좌우로 갈라져 백색의 천을 타고 행려의 소매로 밀려갔다.
“감히!”
하지만 행려도 그 꼴을 그냥 두고 보지는 않았다.
행려의 좌우 소매에서 얼음의 꽃이 피어났다.
소매가 활짝 벌어지며 꽃잎이 되고 그 안에서 꽃술처럼 행려의 손이 요사스럽게 움직이며 수인을 맺었다.
그렇게 손이 움직일수록 냉기는 강해지고 행려의 손은 투명하게 변해갔다.
거침없이 밀려들던 검은 뇌전의 뱀들도 그 투명한 냉기는 두려웠는지 주춤거리며 멈췄다.
하지만 여전히 뒤쪽에서 밀려오는 뱀들은 많았고, 그 수가 쌓일수록 검은 뇌전의 힘은 강해질 것이다.
이제는 행려 앞에서 냉기와 흑뇌전의 대치가 이루어졌다.
* * *
“언제까지 나를 잡아둘 수 있을 것 같습니까?”
태솔진이 탑탑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는 탑탑이 만든 황금빛 막 안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크음. 상황이 예상과 전혀 다르군. 첫 공격에서 위위선생을 마무리하지 못한 것이 문제였나? 아니면 두 번째로 들어온 길 수사에게 거의 피해를 입히지 못한 것이 문제였나.”
탑탑은 십육층 보탑(寶塔)에 주입하는 영기의 양을 더욱 배가시키며 중얼거렸다.
위위 선생을 한 방에 끝장냈으면 3:2로 싸우고 있었을 것이고, 길우몽에게 큰 타격을 줬으면 흑마원이 빠르게 승세를 잡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하나도 계획대로 되지 못했다.
물론 탑탑은 어차피 자신들이 승자가 되는데 문제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믿음의 근거는 다름 아닌 흑마원에게 있었다.
흑마원이 익히고 있는 흑성성패력 공법은 무척 두려운 바가 있었다.
지금만 보더라도 그 대단한 길우몽이 수세를 면치 못하고 있지 않은가.
“태솔진, 네가 마수의 화신기 수련 공법을 가지고 있느냐? 있다면 당장 내어 놓거라. 그러면 네 영체나마 무사히 빠져 나가게 해 주겠다.”
탑탑이 갑자기 태솔진을 보며 새로운 제안을 했다.
“마수 공법 따위! 나는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조금만 기다리거라. 내가 여기서 나가는 순간 네 놈을 뜯어 죽일 것이니.”
“쯧, 없다고? 그럼 위위선생이 가지고 있는 건가? 하긴, 익힌 공법을 봐도 위위선생이 제일 가깝기는 하지.”
탑탑은 태솔진의 대답을 그대로 믿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의 시선이 흑연에 숨은 위위선생에게로 향했다.
그러느라 탑탑의 집중력이 살짝 떨어졌다.
“크하하하하. 멍청한 탑탑! 나에게 틈을 보이다니! 이제는 끝이다!”
그 때, 태솔진이 크게 웃더니 두 손바닥을 겹쳐 땅바닥을 향해 내밀었다.
그러자 땅바닥에 붉은 색의 진법 문양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진법 문양은 탑탑이 만든 황금색 막 바깥으로까지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이, 이게 무슨?”
탑탑은 자신이 만든 격리막 밖으로 태솔진의 술법이 흘러나오는 모습에 깜짝 놀랐다.
자신의 보탑이 만든 막은 상대를 해치지는 못해도 철저하게 격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아울러서 술자인 자신을 보호하는 힘도 있어서 이런 싸움에서 실력자 하나를 묶어 두는 데에는 그만한 것이 없었다.
흑마원은 이 여의주 공간에서 제일 위험한 것이 태솔진일 수도 있다고 했다.
그래서 길우몽이 아닌 태솔진을 묶어두고 있었던 것인데, 보탑의 결계를 뚫어내다니!
“그냥 두면 안 된다!”
그 때, 길우몽과 싸우던 흑마원이 태솔진의 붉은 술법진을 보고 깜짝 놀라서 달려왔다.
길우몽은 자신의 공격에도 피해를 감수하고 태솔진을 향해 내달리는 흑마원에게 슬쩍 밀려나 틈을 내 주었다.
사실 건우는 지금까지 돌아가는 상황을 느긋하게 지켜보는 중이었다.
흑마원의 공법이 특이하고 위험해 보이긴 하지만 정말 생사의 경계까지 몰린다면 자신은 언제든 몸을 피할 수 있었다.
그래서 여의주 공간 안으로 들어온 후로 다른 다섯 수사의 행동을 하나하나 살피며 변수를 알아보는 중이었다.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곧 죽을 거 같았던 위위선생이 멀쩡하게 일어나 행려와 팽팽하게 맞서고 있고, 태솔진은 또 뭔가 모를 술법을 이용해서 흑마원까지 놀라게 만들었다.
‘점점 흥미로워지는데?’
장장 70년이나 함께 했던 이들이지만 이곳에 들어온 후에야 드러나는 면들이 제법 많았다.
자신도 고작 길우몽의 나오금강체술과 압각수 법보, 금속 봉 정도만 드러냈을 뿐이다.
자신이 그보다 강력한 수법들을 숨겨 놓은 것이 한 둘이 아닌데, 다른 수사들이라고 다를까.
그 하나하나를 알아가는 맛이 깨를 볶는 것 같다.
* * *
“크와와왕!”
흑마원이 크게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그의 가슴에 있던 하얀 원숭이 얼굴도 덩달아 입을 크게 벌리고 포효를 터트렸다.
“으으으윽!”
순간 탑탑의 막 안에 있던 태솔진이 신음소리와 함께 크게 비틀거렸다.
그리고 그 때문인지 태솔진이 만들던 붉은 술법진의 크기도 확 줄어들었다.
“내 그럴 줄 알았지. 네 놈, 꿈(夢)이로구나!”
흑마원이 그렇게 외치며 태솔진이 갇혀 있는 황금색 막에 뭔가를 던졌다.
그것은 흑마원이 여의주 막을 뚫을 때에 사용했던 그 은색의 원뿔이었다.
체구가 커진 흑마원에겐 깨알처럼 작은 것이지만 그것이 태솔진을 가둔 막을 뚫고 태솔진에게 맞는 순간 극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스홧!
“이 노옴!”
태솔진이 분노의 고함소리를 질렀다.
그 은색 원뿔이 태솔진에게 닿는 순간 은색의 부적이 태솔진의 이마에 붙었다.
그리고 그 순간 태솔진의 모습이 변했다.
“요, 용?”
“용이라고?!”
건우와 위위선생이 모두 놀라 소리를 질렀다.
그도 그럴 것이 태솔진의 머리가 용의 그것처럼 변했기 때문이다.
주둥이가 튀어 나오고 부리부리한 눈에 귀 뒤로 사슴뿔이 달렸다.
코의 좌우로는 긴 수염이 나 있고 턱 밑에는 햐얀 수염이 났다. 그것은 영락없이 용의 모습이었다.
“알고 있었단 말이냐?”
용의 모습으로 변한 태솔진이 흑마원을 노려보며 물었다.
“의심만 했을 뿐이지. 하지만 네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그 술법을 보는 순간 확신했다. 그것은 용해천에서 용의 기운을 끌어 쓰는 술법이 아니더냐.”
흑마원이 대답했다.
“네가 진 장로를 죽였느냐?”
다시 태솔진이 물었다.
“크하하하. 내가 무슨 능력이 있어 영체기 완경의 수사를 죽인단 말이냐? 그 당시 나는 고작해야 성단기의 완경에 불과했거늘.”
“그렇다면?!”
“그 놈은 내가 발견했을 때, 이미 죽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마냥 기다렸을 뿐이다. 그 놈이 완전히 죽을 때까지.”
“하아, 결국 그렇게 되었던 거군.”
“그렇지. 그런데 그 멍청한 놈이 내가 있는 것을 모르고 마지막 순간에 스스로를 희생해서 여의주를 열 수 있는 열쇠를 만든 것이다. 나는 그것을 공짜로 얻었을 뿐이지.”
“그래, 어떻게 네 놈의 손에 진 장로의 뿔이 있는지 궁금했는데 그렇게 된 거였군. 진 장로가 스스로를 희생해서 여의주 안으로 들어갈 방법을 만든 거였어.”
“멍청한 놈이었지.”
흑마원이 태솔진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비웃었다.
그런데 그 순간 용의 머리를 한 태솔진 역시 흑마원에게 마주 비웃음을 날렸다.
“멍청하기는 네가 멍청했겠지. 네 덕분에 내가 이곳 여의주 공간에 들어올 수 있었으니까.”
“뭐? 뭐라?”
“네가 아니었다면 어찌 진 장로의 뿔이 세상에 나왔겠느냐. 어쩌면 진장로는 네 놈이 있는 것을 알고, 네게 모든 것을 넘겨줬을 것이다.”
“그럴 리가 없다!”
“영체기 완경이 죽을 때가 되었다고 성단기 따위가 숨어 있을 것을 몰랐을 거 같으냐? 어차피 죽을 거라면 세상에 여의주로 들어가는 열쇠를 내어 놓자고 마음을 먹었던 거겠지. 어차피 용해천에서 벌어지는 일이야 우리들 중에 누군가는 알게 될 테니까.”
태솔진은 그렇게 말을 하고는 이전보다 더 짙은 웃음을 지었다.
건우는 그 모습에 위화감을 느끼며 언제든 물러날 준비를 하고 긴장했다.
“크하하하. 그래봐야 뭘 할 수 있다는 말이냐? 그 뿔로 만든 봉인을 네가 풀 수 있겠느냐? 네 말대로 내가 그 진장로라는 놈에게 속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부적은 진장로라는 놈도 모르는 것이지. 그 놈은 자신의 뿔로 그런 부적을 만들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흑마원은 태솔진의 말에 놀란 듯 했지만 곧 평상심을 되찾았다.
그만큼 그는 태솔진을 제압한 부적의 힘을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이 틀리지 않은 듯, 태솔진의 발밑에 있는 붉은 술법진은 한 걸음 넓이에서 멈춘 상태로 더 커지지 못하고 있었다.
“너는 이곳에 어딘지 잊은 모양이구나. 어차피 시간이 문제일 뿐이다. 이 진법이 완성되는 순간, 이 몸의 본체가 깨어날 것이다. 그리되면 네가 무사할 수 있을 거 같으냐?”
태솔진이 흑마원을 보며 살기 짙은 눈빛으로 협박을 했다.
“그래, 할 수 있으면 해 보거라. 하지만 그 전에 내가 먼저 이 여의주 공간의 기운을 뽑아내면 그만이다. 의념 공간이 말라버린 후에도 용이 용일 수 있는지 두고 보겠다.”
흑마원은 그렇게 태솔진을 비웃고는 돌아서서 탑탑을 보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붙들어 놔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걱정하지 마시오. 내가 맡은 일은 반드시 해 낼 것이니.”
탑탑은 결의에 찬 눈빛으로 흑마원에게 답했다.
그렇게 탑탑에게 주의를 준 흑마원이 멀찍이 서 있는 길우몽을 보았다.
“길 수사. 꽤나 여유가 있으십니다. 이런 순간에도 공격을 하지 않고 지켜보고 계시다니요?”
흑마원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길우몽을 보며 물었다.
사실 길우몽이 계속 덤볐다면 지금처럼 전투가 멈추고 소강상태가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궁금한 것이 있소. 흑 수사.”
길우몽이 말했다.
“뭡니까? 시간이 넉넉하지는 않지만 말 몇 마디 나눌 여유가 없는 것은 아니니 들어나 봅시다.”
흑마원이 말했다.
“이 원정의 진정한 목적이 뭐였소?”
길우몽이 물었다.
“그야 용의 기운을 얻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흑마원이 대답했다.
“그럼 마수의 공법이라는 것은 또 뭐요?”
“킁킁. 그것 또한 원정의 목적이 분명하지요.”
“마수의 공법을 거래에 올린 수사에게 이번 원정에 대한 정보를 흘리도록 만든 것입니까?”
“바로 그렇습니다. 그러니 길 수사와 태 수사, 위위선생 셋 중에 하나는 반드시 그 공법을 가지고 있겠지요.”
흑마원은 그렇게 말을 하며 흑연으로 가려진 위위선생을 노려봤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 공법입니까? 소문이 자자해서 나도 거래에 올라온 일부 내용을 살펴봤지만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닌 듯 했는데 말입니다.”
건우는 이해가 되지 않아서 그렇게 물었다.
“그 하나로는 그리 가치가 높지 않습니다. 그런데 실상 그것은 제가 익히고 있는 흑성성패력 공법의 일부이지요. 그것을 제가 얻으면 흑성성패력 공법을 보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가슴에 있는 그 원숭이 상의 힘이 훨씬 강해진다는 소리겠구려?”
“맞습니다. 간단히 그냥 강해지는 정도가 아니라 화신기 너머로 몇 단계의 성장이 가능하고, 이후에 영계를 넘어 선계도 노려볼 수 있는 공법이라 했지요.”
“영, 영계를 넘어 선계까지?”
“듣자니 흑성성패력 공법을 완성하면 법칙의 힘도 장악할 수 있다지요. 그러니 이 흑 모가 눈이 돌아가지 않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고작 인계에서 떠도는 수련 공법이 그토록 대단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믿기 어려운 말입니다.”
길우몽이 고개를 저었다.
“물론 여러 조각 중에 하나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 하나를 얻는다고 완성될 공법은 아니겠지요.”
“그렇다면 뭐, 이해할 법은 합니다만, 그래서 그 공법에 이곳에 있는 용의 기운까지 한꺼번에 노린 것이 원정의 진정한 목적인 것이구려? 나와 태 수사, 위위선생은 제물로 불러들인 것이고?”
“솔직히 마수 공법을 가진 이가 누군지만 알 수 있었다면 그 하나만 불렀을 텐데, 만은사가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닌지라 최소한으로 잡았는데도 셋 이하론 줄일 수가 없었지요.”
“됐습니다. 그런대로 다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 태 수사는 뭡니까? 아까 들으니 꿈이라 부르던데.”
건우가 부적을 이마에 붙이고 있는 태솔진을 가리켰다.